(3) 시위 소강 상태의 방콕 기행 제 3일--태국어를 많이 한 날
이번의 기행문은 사실 이 날의 일 때문에 쓰기가 좀 내키지 않았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로 하면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어]와 같은 서두가 어울리는 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갔던, 제가 좋아하는 상점이 끝끝내 문을 안 열지를 않나,
(그것도 안에 점원이 있는데도, 개점 시간을 훨씬 넘겼는데도
게다가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던 저하고 눈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땡볕에 짐을 끌고 거의 1킬로를 걷지를 않나 등등
오전부터 제게 평소에는 별로 생기지 않는 종류의 일들이 많이 생겼던 날이었습니다.
단, 시위의 영향으로 딘써 거리에서 511번을 탈 수 있던 것은 좋았습니다.
버스가 진짜 많이 붐볐습니다.
짐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지라, 자리에 앉으신 분들께서 자리 밑에
짐을 놓을 수 있는 빈 공간을 내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열심히 태국어 작문 후) 이 버스, 수쿰빗으로 가나요?
안내양 아닌 안내어른: 아뇨, 펫차부리 쪽으로 갑니다.
(속으로 '오오, 내가 이거 알아들었다!' 하고 기뻐하고, 잠시 뒤에)
저: 그러면 라차테위로는 가나요?
안내어른: (사실 내가 그걸 권하고 싶었다는 듯한 기쁜 표정으로) 예!
이쯤 되면, 왜 저 사람은 매번 숙소 이동 때에 버스를 이용하나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아니, 원래부터 대중교통 이용 고수들이 모여 계신 태사랑에서는 그런 질문을 하실 분이 별로 없을까요?
태국에서는 택시비로 허무하게 쓰여지는 돈으로 훨씬 많은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여러 분들의 도움을 입어서 저는 별 일 없이 다음 숙소로 이동을 했습니다.
제가 택한 세 번째 숙소는, 이 근처에 능인선원이 있는 곳입니다.
사실 저도 전혀 몰랐었는데, BTS에서 내리자마자 이 한글 간판이 뙇 하고 저를 맞아 주어서 알았습니다.
이 날의 하일라이트는 이 날의 오후 네 시 경에 있었습니다.
숙소에서 한참 할 일을 하다가, 그 날 끊은 BTS 종일권을 본격적으로 이용해 볼 생각에
한들거리면서 길을 나서서 BTS 역 쪽으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해가 쨍쨍한 오후, 학교 앞길이긴 했지만 인적도 거의 없고 길에는 저 하나만 있는 듯했습니다.
너무나 조용하고 한가롭고 평화로워서, 딴 생각으로 정신이 팔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발이 돌부리에 걸렸고, 순간 저는 발이 너무 아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머릿속으로 '아, 발이 부러졌다!'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고요하던 거리의 어디에서부터인지 태국인들이 떼로 몰려와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태국인들: (모르는 태국말로 웅성웅성, 웅성웅성)
그 중의 한 분: 외국인이다! (그 때부터 영어로)
당신, 영어 하나요? 지금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올 터이니까 좀 기다려요.
여기 일단 앉아 봐요. 부러진 것 같나요? 그냥 삐었나요?
제가 바로 이 가게의 주인이니(저를 앉혀 준 댓돌 앞 커피샵 문을 가리키면서)
이 얼음 주머니를 대고 잠시 쉬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저를 부르셔요.
저: 정말 고맙습니다, 당신, 정말 친절하신 분이네요.
이 때에 정말 무척 당황하였지만,
대체 이 분들이 어디에서 다들 온 걸까, 그리고 이 친절하신 가게 주인은 또 어떻게 이렇게도 친절한 걸까 하고
매우 감사했습니다.
일단 놀람이 진정되고 나니, 이제는 병원에 한 번 가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BTS 역까지는 스스로 걸어갔고, 그 이후에는 BTS 직원들의 도움으로
(서로 다른 역에서 연락을 취하셔서 오토바이 택시를 불러 주시고 등등)
아직도 이름을 잘 모르는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번의 여행에서는 이 병원에서 있었던 일들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았습니다.
다쳐서 가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여기에서의 경험이 진짜 재미있었습니다.
이 병원에서는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온 저를 곧 휠체어에 태우더니
응급실--엑스레이실--약국과 카운터 순으로 데리고 다녔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예전 병원 시스템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제가 한-태 사전이 있는 폰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정말 재미있게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 : 저 =: 병원 간호사들 또는 의사들)
-안녕하셔요! 저,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요.
=일단 엑싸레를 찍어 볼게요. 보험 있나요?
-보험 있어요!
=그럼 증서를 가지고 오는 게 좋겠어요.
-(이건 태국어로 할 수가 없어서 영어로) 그게 여행자보험이라서, 일단 사건이 생기면 귀국 이후에 비용을 청구하는 거여요.
=오오, 그렇군요. 여기하고 시스템이 다르네요, 그럼 뭐........ 참, 당신 여권 있나요?
-여권 복사본하고 또 다른 신분증, 여기 있어요.
=(조금 후에 다시 오더니) 당신, 결혼했나요? 오, 정말? 그럼 미시즈? 남편 성은 뭐여요?
-(이런 걸 왜 이렇게 궁금해하나 하면서 다 가르쳐 드렸는데, 나중에 보니 병원 청구서에
제가 가르쳐 드린 대로 아주 정성껏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 이름, 어떻게 발음해요?
-(이러이러하다고 가르쳐 드림. 다들 한 번씩 발음해 보심)
=(자기들도 통성명을 하는데, 다 별명으로 가르쳐 주심.
그 중에 간호사 한 분이 개그맨 김경아씨 닮은 예쁜 분이었는데, 이름이 Lut이었어요)
-(문득 침대로 날아드는 모기를 보고) 아, 모기, 모기!
=(뭐가 웃기는지 다들 깔깔깔깔~~~ '모스키토!'라고 외치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한참 뒤에, 약간 이병헌씨 풍으로 생긴 키 큰 젊은 의사분이 오셨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어로만 말했어요.
=안녕하셔요! 당신 발목 엑스레이를 지금 막 판독했습니다. 지금 어디가 가장 아파요?
(꾹꾹 꾹꾹 여러 군데 눌러보시더니)
뼈가 부러진 데는 전혀 없습니다.
-(크게 안심하며) 그거 참 다행이네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발목이 많이 부을 수가 있나요?
=뼈 말고도 주변의 염증으로 여러 가지가 부을 수 있지요. 인대라든지.
-오, 그렇군요. 인대가 부을 수 있네요.
=(붕대를 단단히 감으면서) 약을 처방하고, 압박 붕대로 요래 요래 해 드릴 터이니,
씻을 때에는 잠시 풀어 놓았다가 다시 요래 요래 감으셔요.
-(붕대에 붙인 테이프를 가리키면서) 이건 제가 사야 하겠지요?
그랬더니 그 김경아씨 닮은 간호원이 태국어로 뭐라고 뭐라고 의사에게 이야기하시는데
[이거 하나 정도는 그냥 이 분 주죠?]라고 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더니 그 의사께서 테이프가 필요 없는 무슨 핀 같은 것으로 다시 붕대를 고정해 주셔서
그것은 귀국한 후에도 내내 잘 썼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간호사께서 하신 말씀은
'테이프 같은 소모품 말고 다른 걸로 고정하죠?'라는 말이었으려나요?)
병원 안에서 내내 제 휠체어를 끌어 주신 남자 간호사분께서
이렇게 모든 절차가 다 끝난 저를 병원 뜰에 데려다 주시더니
혹시 차로 데려다 줄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괜찮다고 말하고, 그냥 일어나서 (BGM: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BTS 쪽으로 스스로 걸어갔고, 그 후의 예정들을 별 일 없이 진행했습니다.
멀쩡히 미술관 구경도 잘 했고, 밥 먹으러도 잘 다녔고
이 날 들었던 비용은 보험으로 다 돌려받았습니다.
귀국해서 2주 정도는 좀 불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