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하마터면 [No show]가 되어 버릴 뻔한, 경황없는 첫날
이번 여행은 생각지도 않게 시작되어서 모든 것이 예상치도 못하게 흘러간 여행이었습니다.
그래서 프롤로그라고 부를 만한 기록은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일단, 비행기표가 정해진 것부터가 정말 갑작스러웠습니다.
이름만 걸어 놓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인 비행기표가 출발 당일인 월요일 오전 10시쯤 확정이 되었고
그 때부터 여행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비행기표값을 지불하고, 짐을 싸고, 아주 최소한의 계획만 세워서 수트케이스를 끌고 부랴부랴 집을 나온 것이
비행기 시간에서 약 3시간 전인 오후 2시 50분경이었습니다.
숙소 예약은 물론이고, 그 곳으로 가는 동선과 이동 수단까지 미리 다 시뮬레이션을 해 보고
짐도 몇 번씩 체크하면서 싸는 평소의 여행과는 정말 다른 것이었습니다.
가면서 제가 늘 가지고 다니는 여행 리스트를 체크해 보니, 그 경황에도 하나만 빼고 다 챙기긴 했더라고요.
인터넷폰을 두고 왔습니다.
그게 있었으면 이 곳에서 여러가지로 참 좋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후에 덧붙임: 아~~주 좋았을 터인데 말입니다)
출발할 때에는 우리 집 앞에서 서울역에 가는 버스를 타려다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분은 정말 친절하고 빠른 길로 가 주셨지만
급행 열차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기에 이것이 효용성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것이 다 무사히 진행되어서 비행기도 잘 타기는 했지만
방콕으로 가는 행복한 비행기 안에서 평소와는 달리 저는 내내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이런 식으로는 절대 여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떠나기 전 했던 단 하나의 숙소 예약이 바로 오늘 것이었는데
예약이 끝나면 늘 오는 컨펌 레터가, 비행기 뜨기 직전 게이트 바로 앞에서 메일을 확인해 보았는데도 오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저는 그 숙소의 이름과, 대강의 위치밖에 몰랐습니다.
방콕에 도착해서도 다른 때와 기분이 정말 달랐던 것이
이 넓은 방콕에 나 잘 곳 하나 확실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라는 처량함을 가득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짐은 언제나 그렇듯이 늦지 않게 나왔습니다.
짐을 찾아서 공항철도를 타고, 마까싼역에 내려서
[Miss! Miss! Don't walk!]이라고 애타게 저를 부르시는 택시 기사분을 무시하고 펫차부리역까지 열심히 걸어갔습니다.
비행기 도착 시간은 9시 50분이었지만, 펫차부리역에서 지하철을 탈 때에 이미 시간은 11시가 넘어 있었습니다.
후알람퐁역에 내리니, [아, 진짜 이제부터가 시작이다]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단 나침반으로 방위를 잡고,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길 하나를 택해서 똑바로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 노숙자 몇 분 정도밖에 없는 그 길은 어둡고 조용했습니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그 때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지나가던 태국분들은 웬 외국 여자가 큰 수트케이스를 끌고 거리를 걷는 것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시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 유감스럽게도 [칠리 호텔]을 아는 분은 없었습니다.
세븐일레븐에서 우유를 사면서 직원에게 물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다가 오늘은 제 역사상 처음으로 호텔에 [no show]를 기록할 수도 있겠구나, 늦기 전에 카오산에 택시라도 타고 갈까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제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시로코의 황금 지붕이었습니다.
꽃거지 허경환씨가
[특급 호텔의 펜트하우스에서 샤워 로브를 입고 창문을 내다보는 사람 아래에서~]
이런 유머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 유머가 생각나서 쓴웃음이 났습니다.
이 곳은 강변의 고급 호텔들이 저렇게 가까이 보이는 위치인데
저는 그야말로 생전 알지도 못하는, 찾아지기나 했으면 좋겠다고 여겨지는 숙소를 찾아 자정 넘어서까지 헤매고 있으니 말입니다.
애당초에 제가 이 숙소를 고른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째, 이 곳은 아고다상에서는 후알람퐁 역 근처에서 검색되는 가장 가까운 숙소였고
제 계획상 후알람퐁역에서 가까운 것은 정말 중요한 입지 조건이었습니다.
둘째, 밤 늦게 도착해서 다음 날 12시에 나갈 호텔에 그리 좋은 질을 바라는 것은
전체 여행 경비상 별로 현명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에, 저는 한 간판 앞에 발을 멈추었습니다.
[Chillis]의 모든 L과 I가 고추 모양으로 표시된, 불이 들어온 간판이었습니다.
그 간판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순간적으로 모든 감각과 생각이 무덤덤해질 정도로 컸습니다.
또 마침 그 때에, 멀리에서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제게로 성큼성큼 다가오셨습니다.
저는 아직도 이 분이 천사가 아닐까 합니다.
그 시간은 너무도 늦어서 밤거리에 누가 다닐 시간이 아니었고
제가 그 간판을 발견했다고는 했지만, 알고 보니 그 호텔은 골목 깊숙이에 있어서
쉽게 찾아지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분께서 제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저를 그 곳으로 손수 안내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또 그 곳을 지척에 두고 못 찾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아직도 생각합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그 호텔을 결국에 찾았을 때에는 무척 덥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했습니다.
더욱 더 감격스러웠던 것은, 꾸벅꾸벅 졸고 있던 직원이 저를 맞아 주고 나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여권만 복사하더니 저를 안내해 주었던 때였습니다.
거의 눈 앞에 기정 사실로 확정되는 것 같던 no show를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번 여행 때에 이 한 가지를 경험하기 위해 제가 이 곳에 있다 해도 좋았습니다.
방에 들어와서 깨끗하게 준비된 침대를 보고 울먹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전날부터 두세 시간밖에 못 자고, 또 비행기를 타고 온데다가 이 곳을 찾는다고 내내 헤매다 와서 피곤했는데도
이 날은 의외로 이 호텔에서 와이파이도 되고, 생각할 것도 많아서 그렇게 일찍 잠들지는 못 했습니다.
자면서도 좀 많이 잠에서 깨었습니다.
하여간 이 날은 숙소가 있고, 제가 이미 그 숙소를 위한 돈을 지불한 것이 증명되었다는 것,
그래서 [no show]가 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제가 예약한 칠리 호텔에 대한 간략한 코멘트]
후알람퐁역에 가서 표를 사시고, 그 날 또한 후알람퐁역에서 다른 곳으로 떠날 예정을 가지신 분에게 추천합니다.
태국에서 묵어 보았던 숙소 중 이렇게 세면대와 샤워기가 가까웠던 숙소는 처음이었으나
[후알람퐁]이라는 한 가지 입지로 충분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 곳을 잘 모르는 분이 찾아가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길은 나 있지 않지만, 어떤 여학교와 바로 담장을 맞대고 있습니다.
(낮에 찍은 칠리 호텔의 간판---이걸 찾으면 다 온 것이긴 한데, 이것만으로는 정말 찾기 힘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