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7편 시르캅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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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17편 시르캅 유적

Lucky 0 2861

나는 50대 중반으로 같이 여행을 다니던 막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부득이 혼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정은 2007년 7월 15일 출발하여 파키스탄의 라호르 - 라왈핀디 - 탁실라 - 칠라스 - 훈자를 거쳐 카라코롬 하이웨이를 타고 7월 27일 중국으로 출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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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나의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7년 7월 21일

 

라왈핀디에서의 세째날 - 탁실라의 ‘시르캅(sirkap)’ 유적

 

 

 

‘잔디알’을 떠나 얼마 가지 않아 ‘시르캅(sirkap)’ 유적에 도착하였다. 시르캅은 지금까지 보았던 유적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 즉 시르캅은 도시유적이다. 이 지역 즉 탁실라 지역에 있던 최초의 도시는 ‘타크샤실라’ 바로 탁실라 - 그리스식 발음으로 음역되어 서양에 알려지게 된 명칭이 탁실라로 ‘깎아지를 바위의 도시’라는 뜻이다. - 라는 이름으로 힌두신화 ‘라마야냐’에서 라마의 동생 ‘바라타’에 의해 세워진 도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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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캅 유적 개념도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신화시대고, 다리우스 1세 -페르시아의 왕 - 의 비문에는 다리우스왕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으로 적혀있다. 그러나 BC 326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정복해왔을 때 당시의 지도자 ‘옴피스’는 순순히 알렉산더에게 도시를 넘겨주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정복한 땅에 이 도시가 매우 부유하고 번영하고 있는 도시로 기록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 탁실라가 초기에는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왕조의 지배를 받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1세기 이상의 기간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탁실라 지역 어딘가에 조로아스터교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잔디알’은 그 건축연도가 기원전 2세기로 추정되고 있는 이상 조로아스터교의 유적으로 당연히 분류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지 10년이 못 되어 탁실라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세운 마우리아 왕국에 합병되어 잠시 동안 마우리와 왕조의 통지를 받았으며 이때 마우리 왕조를 통해 불교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곧 박트리아 왕국의 지배권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 기간에 세워진 것이 시르캅이 되며 탁실라 지역에 세워지는 두 번째 도시가 되는 것이다.

 

계속 탁실라의 역사를 알아보면 박트리아왕국은 약 200여 년간 시르캅에서 번영을 구가하다가 BC 1세기 초에 중앙아시아에서 넘어온 사카족-스키타이족-에 탁실라지역을 빼앗기게 되고 사카족의 지배는 AD 1세기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 인도를 통일한 쿠샨왕조가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되고 쿠샨의 위대한 통치가 ‘카니슈카’가 탁실라지역에 세 번째 도시 ‘시르수흐’를 세웠다. 현재 ‘시르수흐’는 발굴이 계속되고 있어 도시규모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후 사산왕조가 탁실라 지역을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불교가 유입되어 불교예술의 한 장을 차지하는 ‘간다라 예술’이 꽃피게 된다. 중국인으로 최초로 인도를 순례한 법현스님이 이곳을 왔을 때는 불교성지로 수많은 사원이 융성하였던 곳으로 기록되고 있다.

 

 

도시유적 시르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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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캅의 ‘압시달(Apsidal) 템플(Temple)’ 유적.





‘시르캅’은 탁실라 지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지에 형성된 도시다. 동쪽으로는 대지가 조금씩 높아지고 서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남북으로 관통되는 긴 도로가 도시의 중심을 이루고 그 양옆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도시는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는 짧다. 안내판에 보면 이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주도로는 넓이가 6미터에 이르며 그 중심부의 길이는 500미터나 된다고 한다. 이 도로를 중심으로 동서로 각각의 역할에 맞는 귀족과 서민들의 집, 상점, 사원들이 질서정연하게 들어섰다고 한다. 이 도시를 에워싼 성곽은 평균 높이가 9미터에 이르며, 그 길이는 5.5킬로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면 이 도시가 정사각형으로 생겼다고 가정하면 한 변의 길이가 1.4킬로에 이르는 거대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박트리아는 알렉산더에 의해 시작된 도시이니, 마케도니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마케도니아는 곧 그리스의 폴리스였으니 박트리아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으며 세워진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의 다신교(多神敎)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시르캅에 남아있는 종교유적은 불교유적뿐 아니라 각종 종교유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모두 눈에 뜨인다.

 

‘시르캅’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압시달(Apsidal) 템플(Temple)’이다. 대략 AD1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사원으로 우선 시르캅 안내도에 가장 커다란 모습으로 눈에 뜨인다. 그러나 유적 자체는 돋우어진 황토무더기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으로, 커다란 터를 알차게 꾸몄을 어떠한 유적도 짐작할 수 없다. 안내판에는 자인교의 사원이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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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찍한 모양의 ‘원형 스투파(round stupa)’





‘압시달 템플’ 가까운 도로변에 작은 원형의 스투파가 있다. 이름도 ‘원형 스투파(round stupa)’로 AD 1세기에서 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쓰여 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름도 약간 다르게 원형 스투파(circular stupa)라고 쓰여 있으며, 이 탑에 형식과 그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인도에서부터 온 불교나 자인교의 원형적인 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유적이 불교유적인지 자인교 유적인지 그 성격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또한 건축시기를 BC 1세기경으로 적고 있다. 어떤 것이 옳은지 내가 판단할 수는 없어도 그 모양은 매우 특이하게 생겼다.

 

한마디로 초등학교 책에서 보았던 에스키모 어름집인 ‘이글루’를 매우 많이 닮은 형식으로 아마 초기 불교의 스투파가 이런 모양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된다. 인도에서도 보았고, 이제 시르캅 이후의 목적지로 잡고 있는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모양의 원형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스투파의 모양을 기초로 약간 변형을 주고 그 크기를 확장시키면 바로 ‘다르마라지카 스투파’가 나오게 된다.

 

또한 이 탑의 모양은 ‘시바링가’의 모습도 많이 닮고 있다. 아까와는 반대로 원형 스투파를 확대하면 이러한 모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시바링가가 스투파의 원형이라는 말이 힘을 얻어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탑을 봉발탑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마치 밥사발을 거꾸로 엎어놓은 것 같은 모습이라는 뜻이다.

 

조금 더 가면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기행문에 모두 등장하는 아주 유명한 유적이 나타난다. 전체적인 모습은 알아볼 수 없고 기단부분만 남아있는데, 이것을 기단이라고 해야 할지 1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즉 이것이 어떻게 생긴 탑의 형식인지 짐작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구태여 짝지어 보라고 하면 미륵사지 탑에다 비견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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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캅의 대표유적 ‘쌍두취탑(双頭鷲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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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두독수리탑Double-headed eagle stupa의 이름이 붙은 이유가 된 기단 석감의 두머리 독수리 문양





현재 남아있는 부분은 1층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전면에 6개의 계단이 남아있다. 1층의 상부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남아있는 것이 없는데, 단지 중앙에 원형의 기단흔적이 남아있어 없어진 부분은 원형으로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이 스투파유적은 1층에 두개의 머리를 가진 쌍두독수리 조각이 있어 ‘쌍두취탑(双頭鷲塔 Double-headed eagle stupa 쌍두독수리탑)’이라 불리고 있다. 1층에는 그리스의 영향인 듯 처마와 기둥 벽의 벽감(박공)등은 헬레니즘의 양식을 띠고 있다. 또한 벽감에 새겨진 무늬는 동양적이 아닌 무늬다.

 

1층을 전체적으로 꾸민 모습은 우리나라의 석탑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우주(隅柱)와 안상(眼象)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적인 기둥과 벽감으로 묘사된 것은 그리스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쌍두독수리조각의 유적에 대해서는 현장에 안내판이 서있지 않아 조금도 짐작할 수 없고 하여서 인터넷에서 퍼온 글을 인용하겠다

 

시르캅에서 가장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적은 태양의 사원이라 불리는 힌두교 유적지이다. 스투파의 기단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조각이 있어 쌍두취탑이라 불리는 이 탑은 방형의 기단부만 남아 있는데 불교와 그리스 예술이 혼합된 양식으로 조형, 처마, 기둥, 박공벽의 벽감 등은 헬레니즘 양식을 띠고 있다.

 

쌍두취탑의 형식은 서아시아의 바빌로니아나 히타이트에서 볼 수 있고, 그리스의 ´기하학 양식´시대에도 쓰이던 것이고 방형 기단은 특히 로마에서 발달했던 제단의 형태를 연상시키며, 그러한 서방의 영향 아래 샤카, 파르티아 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방형 기단은 이후 간다라 지역의 대부분 스투파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초기 전탑양식과도 일치한다. 또한 경주 불국사역 인근에 남아있는 방형분의 외벽에 새겨진 12간지상이나 낭산의 능지탑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방형 기단의 모서리는 코린트식의 기둥으로 장식하였는데 이는 우리 탑의 바깥기둥인 우주와 안 기둥인 탱주의 형태라 하여도 별로 틀릴 것이 없어 보인다. 우리 탑의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 사이에 만들어지는 공간에 팔부중이나 인왕상 혹은 십이간지상을 조각해 놓은 경우를 많이 보는데 이곳에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가 새겨져 있다. 좌, 우와 동, 서양을 넘나들며 세계를 경영하겠다는 의미로 러시아에도 이런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상을 볼 수 있으며 그 나라의 상징이다. 그러나 이곳 스투파의 기단에 이런 독수리를 새긴 이유가 신의 이름으로 인간들이 세상을 보는 혜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여 만들어졌기를 바래본다.

 

어느 사이트에서 퍼왔는지는 잊었는데 매우 전문가적인 혜안(慧眼)을 가진 글이라 내가 더 이상 나은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다. 다만 위 사람은 이것을 힌두교 유적으로 설명하였는데, 귀국하여 ‘페르시아 황금전’을 관람하였는데, 그 중에 이 유적의 1층에 새겨진 무늬와 흡사한 무늬를 발견하였다. 그것이 맞는다면 이 유적은 페르시아계통의 유적으로 ‘조로아스터교’의 유적으로 분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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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두독수리탑의 윗부분, 원형의 흔적으로 보아 방형(方形)의 기단위에 원형의 스투파를 올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도로를 계속 나가다 보면 ‘쌍두독수리탑’유적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 또다시 방형(方形)의 유적이 있다. 앞서본 ‘쌍두독수리탑’의 유적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는데 다면 규모가 조금 작다. 그러나 유적 전면에 계단이 있는 것에서부터, 1층상부에 원형의 기단흔적이 남아있는 것까지 아주 흡사하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이 유적은 1층 상부에 중앙의 원형 흔적을 둘러싸고 네 귀퉁이에 기둥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제 모습을 찾아 놓은 것인지, 아니면 잘못된 조립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기둥의 잔해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탑의 설명에는 BC1세기경에 만들어진 ‘자인교 스투파’로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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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두취탑(双頭鷲塔)’과 비슷한 모양이나 규모는 적은 다른 탑. 방형 기단위에 원형 스투파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가운데 사방에 원형의 기둥이 있었던 것 같이 구성해 놓았다. BC1세기의 유적.





‘시르캅’ 유적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주도로는 계속 이어져 있는데, 나타나는 유적은 줄어들고 풀이 우거져 있다. 게다가 엊저녁에 내린 비 때문에 도로의 곳곳은 물이 잠겨있어 물속에 풀을 헤치고 가야하는 길로 바뀌었다. 이 지역은 왕궁지역으로 시르캅의 가장 은밀한 구역이었거니와 왕궁건축이었기에 남아있는 유적이 크게 흥미를 끌지 못했는가 보다.

 

여기서부터 릭샤왈라가 앞으로 나서서 길을 안내한다. 처음에 구경할 곳을 말할 때 ‘쿠나라 스투파’를 보아야 겠다고 했을 때 자기가 길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쿠나라 스투파’가 시르캅 도시유적 근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주도로를 완전히 관통하여 시르캅 유적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돌아 동쪽 길을 타고 가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경운기 정도가 다닐 수 있는 - 사실은 작은 트럭이나 지프차 정도는 다닐 수 있는 - 도로가 나있다. 황폐한 시골길로 빗길에 씻긴 도로를 손질하지 않아 1960년대 내 고향 길을 연상하게 하는 길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불쑥 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는다. 정말 이 남자의 출현 한 가지만 가지고도 이야깃거리가 될 정도로 신비스런 출현이었다. 주변은 거의 노출(露出)되어 있는 장소여서 어디에서 나타나도 쉽게 알아볼 수가 있다. 도로의 왼쪽은 시르캅 유적의 왕궁지역으로 연결되어 있다. 오른쪽은 경작지인 밭인데 농작물의 키가 아직 작을 때라서 숨을 곳도 없다. 무엇보다도 기가 막힌 것은 내가 가는 이 길은,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유적으로 연결되어있지 않다.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이 길로 간다면 ‘쿠나라 스투파’와 한 30여분 걸어간다면 ‘다르마라지카’스투파로 연결될 수도 있는 길이라는 정도다. 그러니 하루에 이 길을 가는 관광객이 몇 명이나 될까? 아마 요즈음에는 제로라고 해도 될 것이다.

 

릭샤왈라와 눈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보아 동네 사람인가보다.

 

“어서 와라 반갑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

 

어서 오라니 그러면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가? 어디 짱박혀있었지?

 

“응 나는 한국사람, 중국사람 아니고, 한국 사람이다”

“한국인 반갑다. 여기 한국인 많이 온다. 나는 한국이 좋다.”

“고맙다. 나도 파키스탄이 좋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말문을 트기 시작하는 게 보통이 아닌 것 같다. 릭사왈라는 벌써 저만큼 앞서간다.

 

“나는 여기서 농사를 짓는다. 여기가 전부 시르캅 유적지이다. 특히 이 부근에는 묘지(墓地)가 있었다. 그래서 밭에서 농사짓다보면 아직 많은 유물이 나온다. 봐라 저것 저것도 모두 사람의 뼈다.”

“밭을 갈다보면 이런 것이 나오는데 정말 귀한 것이다. 봐라.”

 

이 사람도 역시 주머니에서 신문지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편다. 그곳에는 낡은 동전이 몇 개 있다. 얼핏 보아 무척 오래된 듯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것들이다.

 

“봐라 박트리아시대의 동전이다. 진짜 내가 찾은 것들이다. 구경해라.”

“미안하다. 나는 이런 유물에는 관심이 없는 그냥 관광객이다. 이런 귀한 것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 팔아라. 나는 이런 것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는다.”

 

나는 간곡하게 뿌리치고 릭샤왈라를 가리키며 빨리 쫓아가야 한다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이 사람을 아쉬운 듯 하지만 귀한 진품을 기념품값으로 팔수는 없으니까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진짜였다면, 정말 2000년 가까이 된 박트리아 시대의 동전이라면 나는 행운을 놓친 것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물건이 정말 진짜라면 이것을 가지고 국경을 통과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분명히 압수당할 것이고, 무사히 가지고 귀국한다면 그것은 값어치 없는 가짜였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관광지에서 아무리 진짜 좋은 유물이라고 유혹해도 절대로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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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서 걷고 있는 릭샤운전수. 오른쪽의 밭이 자기의 것이라고 자랑했다. 앞으로 보이는 언덕위에 쿠나라 스투파가 있다.





릭샤왈라는 그늘에 쉬고 있다가 내가 가까이 가니 다시 일어나 넓은 길을 벗어나 오른쪽으로 밭둑길을 간다. 그러며 그 사람의 말대로 여기가 모두 유적지로 차차 발굴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며 길가의 밭 한 뙤기를 가리키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것이 내 밭이다. 나는 여기에다 농사를 짓는다. 밀을 가꾼다. 밀은 짜파티를 만들어 먹는다.”

 

한 삼백평정도 될까 하는 넓이였는데 지금은 무엇을 심었는지 밭에 자라고 있는 작물이 너무 작아서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무조건 칭찬하며 부러워해 주었다. 처음에 ‘쿠나라스투파’이야기를 했을 때 릭샤왈라가 자신있어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밭 옆에 20미터 언덕을 올라가면 그곳에 쿠나라스투파가 있기 때문이다.

 

칭찬을 해주고 부러워하니 자기는 열심히 돈을 모아 택시를 사고 그리고 땅도 더 많이 살 것이라고 포부를 말해준다. 틀림없이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매우 즐거워한다. 그러며 너는 일 년에 얼마나 버느냐고 물어온다.

 

“응 나는 선생이니까 그래도 잘 번다 한… 5000달러 되는 것 같다.”

“그래 정말 잘 버는 구나, 나도 열심히 해서 네 나이 되었을 때는 그만큼 벌 꺼다.”

“그래 내가 보기에 너는 틀림없이 나보다 더 많이 벌 것 같다.”

 

내가 계산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들에게 내 실(實) 소득을 알려 주어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허탈감만 커질 것이니 그들의 소득에 맞춰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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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의 손길이 닫지 않아 폐허의 모습 그대로 있는 쿠나라 스투파.




 

*다음은 쿠나라 스투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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