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들어버린 캄보디아 4
킬링필드에서 뚜얼슬랭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않았습니다..
시내로 접어들고 나서 사거리 몇개를 지나더니 골목길처럼 보이는 길로 들어서고
어느 건물앞에서 다왔다고 내리라더군요..
원래가 학교건물이라 그런건지 건물자체의 첫인상은 그냥 산뜻했습니다...
입구에서 내리자마자 장애인들이 달라붙으면서 한국말로 구걸을 합니다..
캄보디아 어딜 가나 한국인을 금방 알아차리는 그 눈썰미는 참 대단하더군요...
완전무시하고 입장권을 끊은 다음 관람을 차분히 시작했습니다...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 느낀 특징적인 것중의 하나는
웨스턴들은 가이드를 참 많이 활용합니다...
한국사람들처럼 거기에 들어가는 돈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방문하는 곳의 정보를 충분히 얻고 나오겠다는 것이
기본 자세로 깔려있죠...
그런 모습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는데....
저는 여행기간내내 한번도 가이드를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돈문제가 이유라서가 아니라.....
워낙에나 혼자서 돌아보는게 습관이 되어 있어서
옆에 누가 달라붙어 얘기하는 것을 아주 귀찮아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제 일행들도 각자 혼자 관람하는 식으로 되어 버렸죠...
여기서도 입구에서 캄보디아인 몇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가이드를 원하면 따라 붙는데
이날 일정 내내 가는곳마다 만나게된 독일애는 여기서도 가이드를 부탁합니다...
킬링필드에서 인사삼아 건넨 독어 몇마디에 절 친근하게 느꼈는지
의도적으로 저랑 동선을 맞추는 모습이 좀 보였는데
그덕택에 저도 귀동냥으로 가이드의 설명을 조금 듣게 되었습니다...
총 4개동으로 이루어진 뚜얼슬랭은 보통 관람순서가 왼쪽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왼쪽의 건물은 고문기구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고...
방의 벽면에는 고문당시의 사진이 붙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방안 녹슨 침대위에 얽혀있는 핏자국과 먼지들.....
처음 돌아볼때는 그저 담담하기만 합니다...
같은 방구조가 연속적으로 반복되고 있고....
시각적 효과를 그렇게 고려하지 않아서 눈에 확 띄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뒤따라오는 가이드의 설명을 띄엄띄엄 듣다보니....
뭐 십만이 들어와서 여섯명이 살아나갔다는 둥....
여기를 따로 관리하던 특수정보기관이 있었다는 둥...
이런 얘기들이 들려옵니다...
내심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보기관이라면 그나름대로의 전문성을 갖추고 국가안보를 위하여 움직이는 기관인데...
이런 학살을 자행하는 기구에 정보기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학살부대(Genocide army)라는 명칭이 더 어울립니다....
첫번째 고문실이 위치한 건물을 대충 구경하고 옆건물로 이동하니
여기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들이 방마다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중 유난히 가슴에 와닿았던 것은 아이를 안고있는 어머니의 사진인데....
바로 다른 벽면에 그 여인이 처형기구에 머리를 댄 사진이 보입니다..
왜 이 여인의 사진만 유난히 크게 전시했을까 궁금했는데...
크메르루즈이전 정권의 외교장관의 부인이라더군요....
갓난 아이 또한 이 건물안에서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방을 하나하나 지나치면서 희생자들의 사진을 눈여겨 바라보았습니다...
그 수많은 사진들을 보면서 참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모든 사진이 죽기 직전에 찍은 사진들이라는데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던 것은....
바로 슬픔이었습니다....
어린시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소의 눈망울에서 볼 수 있던 그 슬픔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거부할 수도 없는 죽음을 바라보는 슬픔....
그렇다고 죽음을 무서워 하는 것도 아닌.....
그 슬픔이 저에게 전이가 되어 오면서 도저히 견딜수 없게 만듭니다...
결국 두번째 건물 중간에 밖으로 뛰쳐 나오고 말았습니다....
'ㄷ'자 형태로 배치된 건물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나무 밑으로 가서
아무것도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있었죠....
안경을 벗고 5분여를 눈감고 있으니 마음이 진정이 됩니다....
감정이 정리되어 조용히 눈을 뜨고는 좌우를 둘러보니.....
네........-_-;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입니다...
처음에 앉을땐 분명히 저 혼자였는데....
어느새 웨스턴 아가씨 두 명이 저랑 비슷한 포즈로 옆에 앉아있네요...
두명 다 눈이 빨간 것을 보니
거울을 안봐도 제눈도 똑같이 빨개져 있을거라고 짐작이 됩니다...
나무밑에 앉아서 일행들이 건물사이를 하나하나 이동하는 모습과
각 층을 하나씩 오르락내리락 하고 각 방을 번갈아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모습을
아무것도 안하고 우두커니 바라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각 방 사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잘 못느끼겠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제 눈엔 모든 사람의 표정이 똑같은게 잘 보입니다....
희생자들의 사진속의 표정과 별반 차이 없을 정도로 다들 굳어 있습니다....
킬링필드에 이어서 이곳 뚜얼슬랭에서도 그 의문은 계속 됩니다..
왜 그랬을까?
이데올로기때문이다 폴포트때문이다 고 답내리는 건 너무 쉽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거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대학살때 그것에 대해 폭로하는 내부 고발자가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
그건 당시 독일사회 모두가 집단의식 내에서는 그 일을 용인했다는 증거입니다..
유태인과 집시들을 같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 생각들을 은연중에 공유했다는 것이죠...
이것이 현재까지 독일인들이 학살에 관계되고 안되고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뉘우치고 있는 이유입니다..
역사속에서 그들의 집단내에서 안고 있는 어떤 문제때문에
이런 대량학살이 가능해졌는지 그게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뚜얼슬랭내에서는 그것과 관련해서 어떠한 것도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학살의 증거만을 보여줄 뿐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선 알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파고 들기엔 시간과 능력이 없어서는 아닐겁니다...
몇년뒤에 벌어진 우리나라의 5.18만하더라도
희생자수에서도 비교도 안되고 정권차원에서 그토록 방해를 놨지만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서 모든 숨겨진 것들이 수면위로 떠올랐으니까요...
(학살의 주역들이 아직도 당당히 활동하고 있는 점은 캄보디아와 우리가 다른 점이네요...)
어쩌면 이 일은 단순히 민족내에서 슬픈 사건으로 여겨지면서
역사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18이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민주화라는 흐름의
하나의 동인으로 작용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죠...
내나라 내민족의 일이 아니니까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서도....
이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들 내부적으로 철저한 조사와 반성이 이뤄져야 할거로 생각되어 집니다...
30여분을 나무밑에 이런저런 상념을 떠올리며 앉아 있으려니
일행들이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밖으로 나가면서 일행중 한사람이 물어봅니다...
그 웨스턴 아가씨들하고 뭐했냐고.....
아무 얘기도 안했는데 라고 하니까 안믿습니다.....-_-;
30분동안 남녀들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멍하니 아무 얘기없이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거 참 믿기 어려울겁니다..
그런 면에서 뚜얼슬랭 여기는 참 대단한 곳입니다...
문밖으로 나오니 아까의 장애인들이 또 달라붙습니다....
대꾸해줄 기력도 없어서 고개를 쳐들고 열심히 롯만을 찾았습니다...
10여미터 밖에서 손흔드는 롯을 발견하고 그리로 가는데...
이 아저씨들 정말 끈질기게 따라붙습니다....-_-;
차안으로 무조건 들어간 다음 거칠게 차문을 닫아버리니
롯이 걱정되는듯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괜찮냐고 묻습니다...
머리 한번 쓸어올리고는 빨리 밥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점심때까지 시간상으로는 좀 남았지만 어서 이자리를 뜨고 싶은 심정뿐이었습니다..
시내로 접어들고 나서 사거리 몇개를 지나더니 골목길처럼 보이는 길로 들어서고
어느 건물앞에서 다왔다고 내리라더군요..
원래가 학교건물이라 그런건지 건물자체의 첫인상은 그냥 산뜻했습니다...
입구에서 내리자마자 장애인들이 달라붙으면서 한국말로 구걸을 합니다..
캄보디아 어딜 가나 한국인을 금방 알아차리는 그 눈썰미는 참 대단하더군요...
완전무시하고 입장권을 끊은 다음 관람을 차분히 시작했습니다...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 느낀 특징적인 것중의 하나는
웨스턴들은 가이드를 참 많이 활용합니다...
한국사람들처럼 거기에 들어가는 돈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방문하는 곳의 정보를 충분히 얻고 나오겠다는 것이
기본 자세로 깔려있죠...
그런 모습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는데....
저는 여행기간내내 한번도 가이드를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돈문제가 이유라서가 아니라.....
워낙에나 혼자서 돌아보는게 습관이 되어 있어서
옆에 누가 달라붙어 얘기하는 것을 아주 귀찮아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제 일행들도 각자 혼자 관람하는 식으로 되어 버렸죠...
여기서도 입구에서 캄보디아인 몇명이 대기하고 있다가 가이드를 원하면 따라 붙는데
이날 일정 내내 가는곳마다 만나게된 독일애는 여기서도 가이드를 부탁합니다...
킬링필드에서 인사삼아 건넨 독어 몇마디에 절 친근하게 느꼈는지
의도적으로 저랑 동선을 맞추는 모습이 좀 보였는데
그덕택에 저도 귀동냥으로 가이드의 설명을 조금 듣게 되었습니다...
총 4개동으로 이루어진 뚜얼슬랭은 보통 관람순서가 왼쪽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왼쪽의 건물은 고문기구들이 그대로 남겨져 있고...
방의 벽면에는 고문당시의 사진이 붙어 있는 곳도 있습니다...
방안 녹슨 침대위에 얽혀있는 핏자국과 먼지들.....
처음 돌아볼때는 그저 담담하기만 합니다...
같은 방구조가 연속적으로 반복되고 있고....
시각적 효과를 그렇게 고려하지 않아서 눈에 확 띄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뒤따라오는 가이드의 설명을 띄엄띄엄 듣다보니....
뭐 십만이 들어와서 여섯명이 살아나갔다는 둥....
여기를 따로 관리하던 특수정보기관이 있었다는 둥...
이런 얘기들이 들려옵니다...
내심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보기관이라면 그나름대로의 전문성을 갖추고 국가안보를 위하여 움직이는 기관인데...
이런 학살을 자행하는 기구에 정보기관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건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학살부대(Genocide army)라는 명칭이 더 어울립니다....
첫번째 고문실이 위치한 건물을 대충 구경하고 옆건물로 이동하니
여기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사진들이 방마다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중 유난히 가슴에 와닿았던 것은 아이를 안고있는 어머니의 사진인데....
바로 다른 벽면에 그 여인이 처형기구에 머리를 댄 사진이 보입니다..
왜 이 여인의 사진만 유난히 크게 전시했을까 궁금했는데...
크메르루즈이전 정권의 외교장관의 부인이라더군요....
갓난 아이 또한 이 건물안에서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방을 하나하나 지나치면서 희생자들의 사진을 눈여겨 바라보았습니다...
그 수많은 사진들을 보면서 참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모든 사진이 죽기 직전에 찍은 사진들이라는데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던 것은....
바로 슬픔이었습니다....
어린시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를 한번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소의 눈망울에서 볼 수 있던 그 슬픔입니다....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거부할 수도 없는 죽음을 바라보는 슬픔....
그렇다고 죽음을 무서워 하는 것도 아닌.....
그 슬픔이 저에게 전이가 되어 오면서 도저히 견딜수 없게 만듭니다...
결국 두번째 건물 중간에 밖으로 뛰쳐 나오고 말았습니다....
'ㄷ'자 형태로 배치된 건물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나무 밑으로 가서
아무것도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있었죠....
안경을 벗고 5분여를 눈감고 있으니 마음이 진정이 됩니다....
감정이 정리되어 조용히 눈을 뜨고는 좌우를 둘러보니.....
네........-_-;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입니다...
처음에 앉을땐 분명히 저 혼자였는데....
어느새 웨스턴 아가씨 두 명이 저랑 비슷한 포즈로 옆에 앉아있네요...
두명 다 눈이 빨간 것을 보니
거울을 안봐도 제눈도 똑같이 빨개져 있을거라고 짐작이 됩니다...
나무밑에 앉아서 일행들이 건물사이를 하나하나 이동하는 모습과
각 층을 하나씩 오르락내리락 하고 각 방을 번갈아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모습을
아무것도 안하고 우두커니 바라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각 방 사이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잘 못느끼겠지만...
밖에서 바라보는 제 눈엔 모든 사람의 표정이 똑같은게 잘 보입니다....
희생자들의 사진속의 표정과 별반 차이 없을 정도로 다들 굳어 있습니다....
킬링필드에 이어서 이곳 뚜얼슬랭에서도 그 의문은 계속 됩니다..
왜 그랬을까?
이데올로기때문이다 폴포트때문이다 고 답내리는 건 너무 쉽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거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아우슈비츠의 대학살때 그것에 대해 폭로하는 내부 고발자가 단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
그건 당시 독일사회 모두가 집단의식 내에서는 그 일을 용인했다는 증거입니다..
유태인과 집시들을 같은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는 생각들을 은연중에 공유했다는 것이죠...
이것이 현재까지 독일인들이 학살에 관계되고 안되고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기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뉘우치고 있는 이유입니다..
역사속에서 그들의 집단내에서 안고 있는 어떤 문제때문에
이런 대량학살이 가능해졌는지 그게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하지만 뚜얼슬랭내에서는 그것과 관련해서 어떠한 것도 찾아볼수 없었습니다...
학살의 증거만을 보여줄 뿐 왜 일어났는가에 대해선 알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거기까지 파고 들기엔 시간과 능력이 없어서는 아닐겁니다...
몇년뒤에 벌어진 우리나라의 5.18만하더라도
희생자수에서도 비교도 안되고 정권차원에서 그토록 방해를 놨지만
불과 20년도 되지 않아서 모든 숨겨진 것들이 수면위로 떠올랐으니까요...
(학살의 주역들이 아직도 당당히 활동하고 있는 점은 캄보디아와 우리가 다른 점이네요...)
어쩌면 이 일은 단순히 민족내에서 슬픈 사건으로 여겨지면서
역사속에 묻혀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5.18이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민주화라는 흐름의
하나의 동인으로 작용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죠...
내나라 내민족의 일이 아니니까 관여할 바가 아니지만서도....
이 슬픔을 딛고 일어서서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들 내부적으로 철저한 조사와 반성이 이뤄져야 할거로 생각되어 집니다...
30여분을 나무밑에 이런저런 상념을 떠올리며 앉아 있으려니
일행들이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밖으로 나가면서 일행중 한사람이 물어봅니다...
그 웨스턴 아가씨들하고 뭐했냐고.....
아무 얘기도 안했는데 라고 하니까 안믿습니다.....-_-;
30분동안 남녀들이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멍하니 아무 얘기없이 한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거 참 믿기 어려울겁니다..
그런 면에서 뚜얼슬랭 여기는 참 대단한 곳입니다...
문밖으로 나오니 아까의 장애인들이 또 달라붙습니다....
대꾸해줄 기력도 없어서 고개를 쳐들고 열심히 롯만을 찾았습니다...
10여미터 밖에서 손흔드는 롯을 발견하고 그리로 가는데...
이 아저씨들 정말 끈질기게 따라붙습니다....-_-;
차안으로 무조건 들어간 다음 거칠게 차문을 닫아버리니
롯이 걱정되는듯이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괜찮냐고 묻습니다...
머리 한번 쓸어올리고는 빨리 밥먹으러 가자고 했습니다...
점심때까지 시간상으로는 좀 남았지만 어서 이자리를 뜨고 싶은 심정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