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스무 날의 기억 - 씨엠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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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스무 날의 기억 - 씨엠립 2

호크아이 7 3170

앙코르를 여행하는 바이커를 위한 안내서 2.

10월 14일 화요일

‘오늘은 조금 더 좋은 자전거를 빌리자’

어제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봐둔 산악용 자전거가 있는 렌탈샵으로 간다. 기어도 있고 타이어도 두꺼운 소위 MTB 자전거이다. 물론 기어는 고장난 지 오래, 변속은 안 된다. 그래도 일단 어제 빌린 것보다는 훨씬 튼튼해 보인다. 2달러를 주고 그 자전거를 빌린다.

어제는 북문으로 나갔다가 체인이 빠지는 낭패를 당했으니 오늘은 반대 방향으로 돌아보기로 결정한다. 동쪽으로 나 있는 승리의 문을 통해 앙코르 톰을 빠져 나가 마주 보고 있는 톰마논과 차우 싸이 떼보다에 도착한다.

앙코르 사원 어느 곳에 가든 나를 가장 먼저 맞아 주는 이들은 물건을 파는 꼬마들이다. 우선 엽서나 팔찌 등을 권하다가 어디서 왔는지를 묻는다. 한국이라고 답해주면 그들은 마치 학원에서라도 배운 냥 똑같은 대답을 한다.

“Where are you from?”
“Korea”
“Capital, Seoul!”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캐피톨, 서울”이었다. 매번 같은 말을 들으니 나중엔 내가 먼저 “From Korea, capital Seoul”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루에 하나나 팔 수 있을까 싶은 물건들을 들고 관광객들에게 매달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이 들었지만 딱히 내가 어떻게 해야 옳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다. 늘상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애써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앙코르를 돌아보는 내내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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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마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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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 께우>

톰마논 이후 따 께우를 거쳐 따 프롬을 둘러 본다. 사원을 휘감고 있는 나무들과 무너진 잔해들로 인해 앙코르 왓 다음으로 유명한 유적인 만큼 다른 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관광객들이 있다.

입구를 통해 들어가자 마자 4살이나 됐을까 싶은 소녀가 바닥에 앉아 흙장난을 하고 있다. 커다란 눈망울이 너무 예쁜 아이였다. 관광객들은 연신 아이를 카메라에 담아 갔고 아이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바라보곤 했다. 옆에는 누군가 주고 간 사탕들이 놓여져 있었다.

카메라로 누군가를 찍는 행위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행위여야 한다. 인격을 대상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쁘고 귀엽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사진을 찍겠지만 아이와 아무런 인터렉션도 없이 셔터만 누르고 지나가는 행동은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루앙 프라방에서도 탁밧 행렬의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의 사진을 붙여 놓고 그런 행위를 하지 말라는 쓴 안내문을 본 적이 있다. 관광객의 카메라는 사진의 대상에 대한 존중과 예의를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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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 프롬>

입구를 통해 사원까지 걸어가는 길 한 켠에 지뢰 피해자들이 크메르 전통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시내 식당 거리를 비롯해 규모 있는 유적지엔 어디나 그들이 있었다. 마침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도착하자 그들은 아리랑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지뢰 피해자들이 연주하는 아리랑을 듣자니 반가움보다는 알 수 없는 슬픔이 더 크게 밀려온다.

따 프롬을 나와 주차장 앞 식당에서 이른 점심 식사를 한다. 관광지라 그런지 시내보다 값이 많이 비싸다. 도시락을 싸오는 편이 훨씬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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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손님을 모으는 식당의 소녀>

식사를 마치고 반띠아이 끄데이와 스라 쓰랑을 둘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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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띠아이 끄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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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라 쓰랑>

그 아이를 만난 건 스라 쓰랑에서였다. 자전거를 주차하고 있는데 언제나 그렇듯 물건을 든 아이가 다가왔다. 팔찌를 팔던 소녀에게 역시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스라 쓰랑으로 향해 걷자 졸졸 따라오던 아이는 팔찌 하나를 선물이라며 내 손에 쥐어준다. 그러면서 유적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자기 가게에서 음료수라도 하나 사달라고 부탁한다. 그 말에 난 무심코 “maybe”라고 답하고 말았다.

연못이라고 하기엔 엄청나게 넓은 호수 같은 스라 쓰랑을 보고 다시 자전거로 돌아오는 나에게 아이가 다시 달려 온다. 음료수를 사 마시라는 아이에게 나는 또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Sorry, I already have water.”
“Then why did you say maybe?”
“Sorry”
“Sorry doesn’t give me anything. Only make me cry!”

“미안하다는 말은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아요, 오직 슬프게 만들 뿐이죠”

그 말이 정말 비수처럼 내 마음에 꽂혔다. 아이들을 장사와 구걸에 내몬 것이 그들의 부모이건 관대한 관광객이건 전적으로 어른들의 잘못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과 유적을 곁에 두고 살면서도 그곳에서 자유롭게 뛰어 놀지 못하고 물건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앙코르에 관광객이 몰려드는 한 물건을 파는 앙코르 키드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슬프다는 아이를 뒤로하고 다시 페달을 밟는다.

‘슬프니? 나도 슬퍼’

그렇게 혼자 되뇌며 쁘레 룹을 향해 달린다. 앞서서도 말했지만 자전거를 타기엔 최적의 길이다. 앙코르의 매력은 유적지뿐 아니라 넓은 평야와 아름다운 하늘 같은 자연에서도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달리며 무거웠던 나의 마음은 조금 가벼워진다. 파랗디 파란 하늘과 넓은 평야를 내 힘으로 달리며 볼 수 있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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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라 쓰랑 옆에서 쉬고 있는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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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레 룹으로 향하는 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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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레 룹에서 바라 본 지평선과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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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유적까지의 거리를 알려 주던 친절한 이정표>

쁘레 룹에 이어 동 메본, 따솜을 보고 니악 뽀안을 향해 달리는 길에 뚝뚝을 타고 맞은 편에서 달려오던 운동선수 3인방을 만난다. 반가운 마음에 길에 서서 잠시 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숙소에서 만나 같이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숙소에 돌아가자마자 지쳐 쓰러져 버리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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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악 뽀안 입구의 오두막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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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악 뽀안>

3인방과 헤어진 뒤 니악 뽀안과 끄롤 꼬를 둘러 보고 반띠아이 쁘레 옆에 있는 화장실에서 휴식을 취한다. 별로 긴 거리는 아니지만 평소 자전거를 많이 타지 않았던 나에게는 꽤나 먼 거리를 달려 온 셈이다. 평지라 다리는 전혀 아프지 않지만 딱딱한 안장 때문에 엉덩이가 무척이나 아프다. 깨끗한 화장실에서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목을 찬 물로 씻어내고 벤치에 앉아 있으니 낙원이 따로 없다. 화장실을 관리하며 음료수를 판매하는 아가씨와 잠시 대화를 나눈다. 알고 보니 앳된 얼굴의 그녀는 아기 엄마였다. 그제서야 벤치 옆의 해먹에 조그만 아기가 잠들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온다. 그녀는 몇 명이나 찾아올까 싶은 화장실 앞에서 아기를 데리고 하루 온종일을 보내며 라디오를 친구 삼아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녀의 나긋한 노래 소리를 들으며 잠시 지친 체력을 회복한 나는 다시 쁘리아 칸을 향해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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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이 노래를 흥얼거리던 아기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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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리아 칸으로 가는 길에서 마주친 일하는 아주머니
- 앙코르는 유적이자 생계의 공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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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리아 칸 – 내가 가장 좋아했던 사원>

쁘리아 칸을 보고 나니 이미 시간은 4시를 훌쩍 넘었다. 해가 일찍 지기 때문에 너무 늦지 않게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다시 앙코르 톰을 거쳐 시엠립 시내를 향해 달린다. 시내에 도착해서 노점에서 과일 셰이크를 사 마신다. 대패로 얼음을 갈아 과일, 연유와 함께 믹서에 갈아내온 셰이크는 지금껏 내가 마셔 본 그 어느 음료보다 달고 시원했다. 자전거를 타며 쌓인 피로와 더위를 모두 날려 주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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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패로 얼음을 가는 아주머니>

힘든 몸을 이끌고 간신히 숙소에 도착하자 저녁을 먹으러 나갈 기운이 없다. 나를 기다렸을 3인방에겐 미안하지만 바로 침대에 쓰러져 쉬었다. 대신 조금 쉬었다가 식사를 마치고 온 3인방과 함께 정원에서 맥주를 마셨다. 짧은 휴가 여행을 온 군의관 친구와 부산에서 온 최군도 합세한다. 부산의 최군은 나중에 치앙마이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야기를 안주 삼아 마시는 맥주와 함께 그렇게 또 하루가 마무리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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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너스 - 가장 좋아했던 캄보디아 음식, 록락>

*앙코르를 여행하는 바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특별히 안내라고 할 정보는 없습니다. 소설 제목을 패러디 한 거니까요. 하지만 정말이지 자전거로 돌아 보실 것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앞서서도 말씀 드렸지만 제 체력, 아주 저질입니다. 그런 저도 앙코르 동부와 북부 유적을 모두 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체력 때문에 주저하시는 분이 있다면 참고하시라고 말씀 드리는 겁니다. 꽤나 힘들고 피곤했지만 그만큼 남는 것도 많은 하루였습니다. 20일간의 여행 중에 가장 소중한 하루였다고 말씀 드린다면 제가 느꼈던 감동이 조금이나마 전달이 될까요?

7 Comments
참치세상 2008.11.12 12:55  
글 너무 잘 읽었습니다, 점점 재미나네여~
서정기 2008.11.17 17:29  
팔찌를 선물로 주고, 돌아오는 길에 자기 집에서 음료수 사달라하고,
영어를 꽤 잘하고, 약간의 불어도 하는 그 아이가 갑자기 생각나네요.
지난 2월에 갔을 때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더니
제 마음에 드는 사진을 다음에 올 때 꼭 갖다달라고 하대요.
9월에 갔을 때 그 어머니에게 사진을 전해 주었습니다.

제 옆의 어린 애들도 챙기는 , 당당한 느낌의 아이였습니다.
말님 2008.11.23 14:24  
글 재주 있으시고 사진도 잘 찍으시네요  곧 (언제인지) 캄보디아 가면
이글이랑 사진이랑 기억이 날듯 하네요
최유경 2008.11.27 10:20  
잘 읽었습니다. 가슴에 와닿는 얘기들이 많았습니다.
얀버건 2008.11.28 20:25  
ㅋㅋ.. 스라스랑의 그 소녀를 만났군요~ 유창한 영어에 눈망울이 똘망똘망한..
영업 방식(?!)이 여타 다른 아이들하곤 확연히 달라 울 와이프랑 저도 결국은
콜라랑 파인애플 사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태순이 2008.12.28 04:09  
니악뽀안에 물이 차면 정말 멋질거라고
우기에 꼭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쉬나 멋지군요
Diane_kr 2009.05.13 14:10  
자전거여행을 고심했던 저에게 좋은정보를 주셨어요.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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