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던 스무 날의 기억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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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던 스무 날의 기억 - 프롤로그

호크아이 1 3153

프롤로그 –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괴롭다.

새벽 4시, 슬슬 눈도 무거워 지고 힘에 부친다. 침대에 누워 조금만 쉬고 싶다. 하지만 등을 대면 안 된다. 절대 다시 못 일어난다. 내일 오전 중에 넘기기로 한 번역본은 이제 절반 밖에 끝내지 못했다. 잠이 들면 끝장이다. 오늘 아침에도 들었던 PM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납품 시간 꼭 좀 맞춰 주세요, 안 그러면 저희가 너무 힘들어요!”

되도 않는 설정들로 가득 찬 ‘페이크’ 리얼리티 쇼를 번역하며 “미친 xx, 거 참 말 많네”라고 투덜거린다. 리얼리티 없는 리얼리티 쇼, 가장 번역하기 짜증나는 장르의 프로그램이다. 어찌어찌 간신히 마감 시간에 맞춰 번역본을 보내곤 침대에 쓰러진다. 한참 전에 떠오른 태양은 이미 중천에 걸려 있다. 아파트 뒷길, 도로 공사 현장의 굴착기는 열심히 흙을 퍼내고 있고 그 소리는 내 귓속을 후벼 판다. 새벽녘에 그렇게 쏟아지던 잠은 육체에 엄청난 피로만 남겨 놓은 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오늘도 쉬이 잠이 들 것 같지는 않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일어나 웹 브라우저를 열고 주소창에 타이핑을 시작한다.

www.thailove.net

9월의 어느 날 정오, 밤을 새고도 잠에 들지 못하는 나는 그렇게 남국으로의 ‘페이크’ 여행을 떠난다. 무수한 사진들을 보고 여행기들을 읽으며 나의 영혼은 먼지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내 육체를 이탈해 인도차이나 반도로 날아간다.

영혼은 빠져나가고 덩그라니 남은 나의 육체. 한창 때는 지났지만 아직은 쓸만해야 할 나의 육체는 벌써부터 여기저기 삐걱거리고 있다. 대외적인 공식 체중으로 고정돼 있는 90kg의 몸무게 또한 이제는 세 자리 숫자를 향해 다가가고 있다. 분명 타이핑과 자막 스파팅 작업이 그 이유일 일명 펀치병이라고 불리는 손목의 통증도 좀처럼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상이 된 밤샘, 동이 터올 무렵마다 가슴도 심히 쿵쾅대는 것이, 엔진도 영 부실해진 게 분명하다. 중고차라면 아무도 찾는 이가 없어 폐차 처리가 될 지도 모를 그런 상황인 것이다.

쉬고 싶다.

늘 그랬다 지난 1년간 쉬고 싶지 않았던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잠만 자며 쉬기도 했지만 그건 휴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하루를 날려 버린 공허함에 마음은 더 무거웠고 육체에 낀 녹 또한 그 더께만 더해졌다.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데다 효율도 그리 좋지 못한 경제 활동을 하는 처지라 장기 여행은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매일 여행기만 읽으며 대리만족을 누려 보려 하지만 절대 만족스러울 리 없다.

그러던 어느 날, 태사랑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어야 정상일 나는 불현듯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마일리지 항공권을 예약한다. 1년을 주저하던 일을 너무도 갑작스럽게 결정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갑작스런 결정이 아니란 걸 난 잘 알고 있다. 떠나지 않고는 이제 하루도 살 수 없는 지점까지 떠밀려 온 것이다.

그렇게 현실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시간인 3주의 여행을 결정한다. 그것이 단순히 힘든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만성적인 밤샘 작업과 운동 부족,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그래서 건강한 생활인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한 전환점으로서의 여행이 되기를 소망하며 10월의 어느 일요일 저녁, 씨엠립으로 향하는 저녁 비행기에 오른다.

비행기는 생각보다 한산하다. 앙코르 유적지를 찾는 한국인들이 많다고 들은 것 같은데 요즘은 비수기인지 좌석은 3분의 1도 차지 않은 것 같다. 가운데에 복도를 두고 양 옆으로 세 자리씩 배치된 좌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자 차지한 채 길게 누워서 잠을 잔다.

씨엠립에 도착, 예상대로 자그마한 공항이다. 계단을 이용해 활주로, 아니 비행기 주차장(?)에 직접 내려선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예사롭지 않다.

‘드디어 왔구나’

모두들 기내에서 비자 신청서를 작성했는지 신청 데스크로 직행한다. 난 비행기에서 신청서를 받은 기억이 없는데, 언제들 나눠줬는지 모르겠다. 혼자 신청서를 작성해 비자를 받고 제일 늦게 입국 심사대 앞에 선다. 어느 나라든 출입국 관리 공무원들은 고압적이고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미국 같은 입국이 까다로운 나라라면 여행자들은 괜히 그들 앞에서 위축되기 마련이다. 캄보디아의 공무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자정이 다 돼가는 시간까지 일하고 있는 그들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겠지. 하지만 오랫동안 오고 싶었던 여행의 첫 출발대 앞에 선 내 마음을 상하게 할 만큼은 아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한국의 전철역 매점 크기나 될까 싶은 조그마한 면세점을 통과해 입국장에 들어서니 저 앞에 A4지를 들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미리 게스트 하우스에 부탁한 공항 픽업 뚝뚝 기사가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 제일 늦게 나왔기 때문에 오래 기다렸을 그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통성명을 하며 어깨를 두드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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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길을 달리는 뚝뚝 기사의 늠름한(?) 뒷 모습>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해 픽업 비용 5달러를 지불하니 한국어가 유창한 게스트 하우스의 매니저 아가씨가 투어는 안 할 거냐고 묻는다. 픽업을 나온 뚝뚝을 이틀간 이용하면 픽업 비용은 무료란다. 자전거로 돌아보려 한다고 말하자 그녀가 기사에게 크메르어로 상황을 설명한다. 뚝뚝 기사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하고 사라진다.

12시가 넘은 시간 게스트 하우스는 조용하다. 시설은 좀 낡았지만 넓은 정원이 있어 만족스럽다. 대충 짐을 풀고는 게스트 하우스 식당에서 맥주를 한 캔 사 정원에 앉아 마신다. 꽁꽁 얼어 있는 맥주를 조금씩 녹여 마시는 기분도 그리 나쁘지 않다. 방으로 들어가 삐거덕 거리는 천정의 실링 팬을 바라보며 눕는다. 이 시간에 침대에 누워 본 게 얼마 만인가. 내일이면 자전거를 타고 앙코르로 달려 갈 수 있다. 행복감에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며 끼릭끼릭 소리를 내는 선풍기 날개를 쳐다보고 있다가 최면처럼 스르르 잠에 빠져 든다.

1 Comments
참치세상 2008.11.12 12:39  
글 재미 나네요~
번역 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글 솜씨가 풍부 하신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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