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 솜
1시에 이곳 따 솜에 도착했다.
여기에 따 솜은 앙코르 제국의 많은 왕 중에 최전성기를 이루었던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위해
제일 먼저 지어 봉헌한 사원이란다.
그 후에 다시 거대한 프레아 칸을 지어 바쳤다.
이곳은 서쪽으로 들어 갔다.
원래 출입문은 동쪽이나 아래 사진처럼 동쪽은 폐쇄되고 도로에서 바로 들어가는 서쪽이 주 출입문이다.
그냥 동서로만 연결되어 문도 두개밖에 없다.
도로에서 보면 사원이 위치한 지대가 낮다.
앙코르 톰 남문 입구나 바이욘에서 본 4면상이 입구 탑문 위에 있다.
이것만 보이면 무조건 자야바르만 7세가 지었다고 알 수 있다.
탑문의 4면상은 자야바르만 7세의 등록상표로 이미 앙코르 제국 특허청에 등록되어 있는 모양이다.
사원의 규모가 작아 잠시 휴식한다는 기분으로 돌아본다.
고푸라 탑문을 통과한다.
자야바르만 7세는 참파왕국의 침공으로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지방에서 민병을 일으켜 톤레삽에서
대규모의 수전을 대승으로 이끌고 앙코르 제국의 왕으로 추대를 받아 왕위에 등극한다.
그가 재임했던 시절은 앙코르 왓을 건설한 수리야바르만 2세와 함께 황금기를 구가했다.
이곳을 침공한 참파군대를 수전에서 물리치고 오히려 역습하여 그들의 왕궁이 있던 비자야(지금의 베트남
빈딘지역)까지 쳐들어 가서 참파의 왕까지도 사로 잡는다.
그 후 라오스, 태국, 베트남 중남부에서 인도네시아 발리지역의 자바왕국까지 식민지로 삼을 정도의
큰 나라를 이룩했단다.
안에는 규모가 작은 아담한 사원이 있다.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한다.
지방의 호족들을 제압하고 사원건설, 병원등을 비롯한 복지시설...
그리고 그는 호국불교를 내세워 국교를 불교로 바꾼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불교신자였다는 것과 더불어 지금까지 뿌리깊게 내린 힌두교를 바탕으로
한 기존 계급질서를 타파하기 위한 것도 이유중에 하나였지 않나 생각된다.
탑문에 있는 압사라...
이럴때는 헷갈린다.
데바타스 인지 압사라인지...
깊게 조각을 하여 서 있는 발의 자세가 앞으로 편하게 섰다.
어쨋던 아주 멋진 조각이 벽 안에서 佳人을 맞이한다.
그런데 佳人을 보고 하는 말 "고객님~ 저희 업소를 찾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답답한 그곳에 있지 말고 나와서 함께 산책하자고 했다.
벽감 부조로 깊이가 있어 더 멋지다는 생각이다.
그런 강력한 국가였던 자야바르만 7세 시절에 너무 많은 공사로 인하여 사암을 비롯한 석재가 모자라는
지경에도 이르렀고 주변 국가나 지방에서 조공을 받기 위한 도로건설등으로 후대에 국가 재정의 어려움을
주었으며 이런 도로가 오히려 주변국가들의 침공의 고속도로가 되고 만다.
사실 역사상 큰 나라가 멸망하는데는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의 문제가 원인이 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저 편에 중앙에 위치한 성소로 들어가는 고푸라 문이 보인다.
이 문을 통과하면 중앙 성소탑이 보인다.
이 사원은 다른곳 처럼 높이 만들지 않고 평지에 단촐하게 건축했다.
신을 위한 사원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헌정하기 때문에 낮게 지었나 보다.
그래야 신들이 신경질 부리지 않으니까....
자야바르만 7세는 왕위에 등극하자 마자 처음으로 아버지를 위해 이 따솜을 건설하였단다.
효심이 지극해서인지 자신의 왕위 등극에 잡음을 잠재우려고 했는지....
마치 기념우표 발행하듯 ....
그는 그의 아버지가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부모를 위한 집념을 보였나 보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메세지가 아니겠는가?
자기 자신이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데 민초들도 아버지 모시듯 왕을 섬겨달라고.....
탑문 양쪽으로 압사라가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에 걸어가고 있는 외국인 빼고~~
건너편에서 흘러 들어오는 한 줄기 빛줄기 빼고는 캄캄한 중앙 성소다.
중앙성소를 통과하여 뒤를 돌아보자.
비록 많이 허물어졌으나 아직도 아름다운 부조가 기둥에 남아있다.
이제 둘러 보자.
자야바르만 7세 초기에 지은 건물이라 앙코르 톰이나 바이욘, 프레아 칸, 따프롬처럼 크지는 않다.
고푸라 문 위에 올라가야 할 부조가 땅 바닥에서 대기 중이다.
신 앞에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나 실은 왕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기 위한 세뇌 교육을 위한 것들이다.
자신을 신처럼 받들어 달라는 메세지가 아닐까?
계속 문만 통과한다.
중앙 성소탑에는 하늘이 보인다.
하늘을 향한 자야바르만 7세의 바램이 무엇이었을까?
자야바르만 7세는 참족에 의하여 점령된 국가를 지방의 민병을 조직하여 참족을 물리치고 빼앗긴 수도를
다시 회복한 탁월한 장군이었으며 전략가였다.
자야바르만 7세는 수많은 민초들을 전장의 방패막이로 만들고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그의 이미지가
무서운 전쟁 매니아로써 보다는 자애로운 민중의 어버이로서 국민들에게 보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자비로운 관세음보살로서 기억되기를 원했던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는 모든 사원에 부처의 얼굴로 도배를 하고 자신의 얼굴로 슬쩍 오버랩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따 솜을 관통하여 동쪽 탑문 쪽으로 나왔다.
원래 출입문이었던 이곳에도 4면상의 고푸라 문이 있다.
탑문 위로는 이미 커다란 나무가 자라고 있다.
만약 이 얼굴상이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이라면 그는 머리카락 하나만 남은 대머리였다.
이마 위에 한 올의 머리카락만 보인다.
생명력이 강한 풀포기는 80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머리를 지키고 있다.
자애로운 관세음보살...
자야바르만 7세가 국민에게 그리 비쳐지기를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동쪽 출입문 밖....
아~~ 이곳도 따 프롬에 버금가는 자연의 습격....
나무는 우리 인간들에게 자기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 다니란다.
과거의 문명과 자연의 조화...
인간의 힘이란 세월과 자연 앞에 초라한 존재일 뿐이다.
800년이 아니라 8년 후에도 누가 佳人의 존재를 인식이나 할까?
탑문 안에서 밖을 내다 본 모습으로 나무와 유적은 이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존재다.
인간과 자연....
결국 하나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이 지경이면 오히려 유적이 나무에 기생하며 유지되고 있는 모습이다.
저것의 용도는 무엇이며 원래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연꽃을 연상하는 좌대 위에 링가로 보이는 음양의 조화....
다산을 상징하고 우주 창조의 근원...
언제나 제자리를 찾아 과거의 위용을 자랑할까?
아버지를 위해 지은 사원으로 합장하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오른쪽 탑문 위에 뚫어진 저 자리가 원래의 제자리가 아닐까?
벽 위로는 프레아 칸처럼 무수한 부처님이 담장 위에 앉아 계신다.
부처님이 월담하려는 사람들을 막아주시려나?
이제 외부로 나와 한적한 길을 다시 걷는다.
여기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냥 맨땅에 세워놓은 아주 겸손한 곳이다.
신을 위한 장소가 아니고 아버지를 위해 만든 곳....
신전이 아니라 사당으로써....
큰 사진은 개인 블로그로 : http://blog.daum.net/nhk2375
글쓴이 : 佳人
사진도 : 佳人
오늘의 佳人 생각 : 세월이 흐르는게 아니고 우리가 잠시 들렸다 가는게지.....
칼파의 세월중 우리가 머무르다 가는 시간은 찰라일 뿐인데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생각과 번민속에 우리는 살아가야만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