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 여행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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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앙코르 유적지 여행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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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테라스 (Elephant Terrace)

▷건축시기 : 12세기 후반

▷건 축 왕 : 자야바르만 7세 (Jayavarman VII, 1181-1220)

▷종 교 : 불교 건축

▷아트스타일 : 바이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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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왕궁 출입구인 동문 앞. 바푸온 신전 진입구에서 왕궁 문 앞까지 이어지는 도로와 평행하여 문둥왕 테라스 접점까지.

명칭 300m가 넘는 긴 벽을 따라 무수한 무리의 실물 크기의 코끼리떼가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한 텃치로 새겨져 있어 '코끼리 테라스'라 불리운다.

tip : 앙코르톰 관광에 지칠대로 지쳤건만 코끼리 테라스 앞에 오면 그 장엄함과 섬세함에 감동받아 저절로 원기 충전된다. 개인적으로 감탄사를 발하며 길고 긴 테라스 곳곳을 들여다 보느라 다른 곳에 불성실했을 정도였다.

 

형태

끝없이 무리지어 행진하는 코끼리떼를 따라 마냥 쪼옥 뻗은 길다란 테라스는 왕궁의 주 출입구인 동문 바로 바깥에 위치하며 이곳 역시 왕궁에 부속된 로열 가든이었다. 동시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테라스 앞은, 길 건너 까마득한 저편 쁘라삿 수오르 쁘랏까지 넓은 평지가 펼쳐진다. "왕의 광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평소에는 정원으로 사용되지만 외국 사신을 영접하거나 국가의 공식행사, 군대사열, 전투에 출정하는 군대를 전송하거나 귀환한 군대를 환영하는 등 왕이 일반 군중과 접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당연히 테라스에는 그런 용도로 사용될 건물들도 있었다.

tip : 코끼리 테라스의 길이는 무려 300m나 되는데 앞쪽에 늪이 있으므로(건기에는 마르고 우기에는 물이 찬다) 벽 쪽으로 붙어 도는 게 현명하다. 만약 동문으로 나왔다면 먼저 문둥왕 테라스 쪽을 보고 내려오면 코끼리 테라스를 보고 차타는 곳으로 바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건물

동문 밖, 테라스 위에 2단의 건물 기단 흔적이 남은 곳이 있다. 이곳에는 12세기말에서 13세기 초 즈음 쟈야바르만 7세에 의해 왕궁을 확장하면서 정원을 내려다보는 정자 형식(날렵한 지붕은 황금 도장을 하고 크메르 양식의 목조 건물)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목조이었기 때문에 천년 세월동안 사라져 버렸고 기단과 그 기단을 장식하는 거위 등의 부조들만이 남아 옛 영광을 말해준다.

tip : 엄청난 규모의 테라스를 보며 갑자기 이집트 생각이 났다. 불가사의한 건축물을 남긴 이집트의 파라오(왕)들은 목조 내지 진흙 벽돌 건축물에 거주했다. 그 이유는 신들을 모신 신전을 대리석재로 짓기 때문에 신과 동급으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앙코르의 건축물도 그러하다. 신전은 단단한 라테라이트와 사암 등 석재로 지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지만 그런 위대한 건물을 짓던 왕의 거주지는 흔적이 없다. 지금은 사라진 건물들을 떠받혔을 기단(基段)이 지금 테라스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다.

 

계단

코끼리 테라스에는 중앙 계단 외에 남쪽과 북쪽 끝에, 그리고 그 사이에 쪽 계단이 있다. 중앙계단의 용도는 대단히 중요하다. 나가(뱀)의 낭창한 허리로 테를 두른 계단 위에는 늠름한 사자상이 서 있어 범상한 용도가 아님을 알 게 한다. 이 계단 위에 서면 현재의 풍광만으로도 어깨가 우쭐해진다. 도로 건너 저편 12개의 쁘라삿 수오르 쁘랏 건물을 에워싼 밀림까지 드넓은 평지를 뚫고 승리의 문까지 길이 쭈욱 뻗어 있다. 이곳은 예전에 왕이 국가 행사 시 민중들 앞이나 군대의 사열을 받을 때 서 있던 로열박스이다. 계단을 떠받히는 단에는 가루다(힌두신화에서 비쉬누 신이 타고 다니는 천상의 새이며 불교에선 문수보살의 현신으로 부처와 중생을 수호하는 신)와 용맹스런 사자가 새겨져 있다. 코끼리 테라스의 계단은 카메라 서포트를 받기 바쁘다. 테라스 벽의 코끼리들은 모두 양각 형태의 부조로 파져 마치 벽에 갇혀 있는 형태라면, 계단을 장식하는 코끼리들은 융기 형식으로 되어 있어 마치 벽에서 툭 튀어 나올 것 같은 형상을 취하여 보다 리얼하고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코끼리는 긴 코를 늘어뜨린 채 연꽃을 주어 모으는 포즈를 취한다.

 

말머리 조각

로열박스에서 북쪽으로, 왕궁 동문 위쪽으로 테라스 뒤편에 이중 성벽이 미로처럼 파져 있다. 큰 머리의 말(Horse with Five Head) 조각도 놓치지 말자. 금방이라도 돌진해 나올 듯한 역동적인 5개의 말머리가 균형감 있는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것이 당시 왕의 말을 형상화 한 것으로 해석하는데 말머리 위쪽으로 왕과 비가 사용하는 파라솔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코르 유적을 연구하는 프랑스 학자는 불교에서 자비로운 관세음보살(Avalokiteshvara)이 중생을 가여이 여겨 말(Balaha) 로 현신하는 내용을 들어 주장한다. 우리는 넥뽀안에서도 발라하의 자비를 엿볼 수 있다. 말 머리 주변에는 악마들이 압살라(천녀)와 인간을 위협하는 장면도 있다

 

        

 

문둥왕의 테라스 (Terrace of the Leper King)

▷건축시기 : 12세기 후반

▷건 축 왕 : 자야바르만 7세 Jayavarman VII (1182-1220)

▷종 교 : 불교 건축

▷아트스타일 : 바이욘

 

위치

왕궁의 주출입구인 동문 나와 정면, 테라스의 중앙계단(난상)에서 위쪽(왼편)에 위치. 코끼리 테라스와 연결된다.

명칭 「문둥이왕의 테라스」

대단히 독특하고 미스테리어스한 명칭에 관광객은 잠시 갸웃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테라스가 왜 문둥이일까?

명칭에 대한 수많은 억측과 가설이 있다.

1. 문둥왕의 상(像)이 인간 왕의 상이 아니라 불교에서 북쪽 방향의 수호신이자 힌두교에서 재물의 신인 쿠베라(Kubera)이며, 쿠베라가 문둥병자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지만 힌두 신화의 쿠베라는 비록 재물을 많이 취해 배가 불룩하고 쉬바의 아내를 엿보다가 한쪽 눈을 잃은 하급신이지만 문둥병자의 전설은 거의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2. 문둥왕 조각상의 피부가 매끄럽지 못하고 발진이 돋은 듯한 형상에서 유래된 이름.

3. 한걸음 근접하여, 크메르의 전설 중에 왕 앞에 무릎 꿇기를 거부하던 대신의 목을 밸 때 독기 어린 액체가 튀겨 왕의 몸에 닿아 문둥병에 걸렸다는 내용이 있다. 억측에 앞서, 보다 근접한 주장으로 바이욘 신전의 이층 갤러리에 새겨진 부조를 염두에 두자. 이층 갤러리(바이욘 지도 e-8)에는 뱀과 싸우던 용맹한 왕이 뱀의 맹독에 쐬여 문둥병에 걸리고 치료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이르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문둥왕은 바이욘을 건립힌 쟈야바르만 7세로 추정한다. 그래서 그런지 쟈야바르만 7세는 연이은 전쟁에 재원 출혈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도 그의 덕치(德治)에서 돋보이는 것이 병원 건설에 주력했다는 점이다. 그는 전국적으로 많은 병원을 지어 백성들을 치료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이 문둥병자이기 때문에 동병상련의 배려가 아니었나한단다.

 

형태

코끼리 테라스는 쫘악 뻗은 직선인데 반해 문둥왕의 테라스는 그만큼 크진 않지만 각진 기단에 내벽과 외벽의 이중벽의 형상을 취한다. 왕궁의 동쪽 고푸라 문 쪽의 성벽 아래로 들어가, 내외벽 사이 통로를 따라가면 그 차이를 자세히 볼 수 있다.

1. 내.외벽 원래 왕궁 밖 정원 테라스인 이곳은 왕궁의 겹 성벽 중 외부 성벽과 맞물려 있었으며 최초의 벽은 사암으로 쌓았고 그 폭도 1m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붕괴되어 같은 재질로 새로 쌓으면서 그 폭을 2m로 확장했다. 쟈야바르만 7세는 왕궁을 확장하면서 왕국의 위용에 걸맞은 장엄한 코끼리 테라스를 건설하였고 테라스의 선을 맞추기 위해 원래의 것을 놔두고 같은 선상에 테라스를 새로 건립하다보니 두 겹의 테라스가 형성되었다. 확장 신축된 테라스는 기단의 각면이 25m이며 높이는 6m, 아래쪽 기단은 강한 라테라이트(적암)를, 부조를 새기는 윗단은 부드러운 사암으로 건축했다. 윗단은 총 7단으로 쌓았는데 각 단마다 부조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2. 부조(Relief) 코끼리 테라스의 부조가 실물크기의 거대한 조각이라면 문둥왕 테라스의 부조는 아기자기한 멋이 있다. 7단의 벽돌을 쌓아 올린 벽에는 양각 기법의 섬세한 부조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는데 인체의 굴곡이 확연하고 악마나 인간, 압사라(천녀)들의 표정 또한 희노애락의 감정이 분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다. 어느 하나 동일한 것이 없는 부조 감상은 즐겁다. 대개 힌두 신화에 등장하는 나가(뱀), 가루다(독수리), 악마, 칼을 든 무시무시한 인상의 악마, 육감적인 여인, 압사라 등등을 볼 수 있다.

tip : 부조는 황혼이나 일출 등 붉은 여운이 남은 시간 내지 구름이 낀 날에 실루엣이 들어간 환상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낮에 찍는 바람에 그저 희멀건 모습만이... ㅠ.ㅠ

3. 문둥왕 조각상 : 테라스 북쪽 끝, 코끼리 테라스 쪽에서 뻗어온 이중 성벽과 테라스가 끝나는 지점에 길(지도에서 통로라 적힌)이 있고 그 건너편 언덕 위로 올라가면 이 테라스의 어원이 되는 문둥왕 상이 외롭게 앉아 있다. 원래는 벌거벗은 채 오른발을 세우고 오른팔(손상되었다)을 얹은 채 앉아 있는 자세인데 황색 가사를 입혀두었다. 이 상의 인물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힌두 신화의 재물의 신이자 불교에서 북쪽방향의 수호신 쿠베라(Kubera)라는 설, 그리고 조각상에 새겨진 고대문자(한참 후대인 14~15 세기경으로 보이는) 해석하면, "죽음의 신 야마", "야마의 심판"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야마(Yama)는 힌두교나 불교에서 공히 죽은 자의 영혼을 심판하여 극락과 지옥으로 보내는 권한을 가진 신으로 불교에선 염라(閻羅) 즉 염라대왕으로 지칭된다. 따라서 일부 학자는 문둥왕의 테라스 용도에 대한 추측을 제시한다.

크메르의 신전들은 대개 장제전(葬祭殿)을 겸하며 사람이 죽으면 화장 풍습을 한다는 점을 들어 왕이 승하하면 이곳 테라스에서 만인이 보는 가운데 화장을 하고 그 뼈를 이곳에 묻지 않았을까, 그래서 문둥왕의 테라스는 왕실 화장터 용도도 겸하지 않았을까 라고도 추정한다.

아무튼, 쟈야바르만 7세는 식민지 확장을 통해 멀리 쟈바(인도네시아)까지 정복했는데 고대 크메르의 조각상 스타일로는 보기 어려운 나체이기 때문에 학자들은 쟈바 예술이 유입된 것이 아닐까 라고도 추정한다.

tip : 현재 놓인 조각상은 모조품이고 진품은 프놈펜의 국립 박물관 야외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바푸온 (BAPHU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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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시기 : 11세기 중반인 1060년 완공

▷건 축 왕 : 우다야디트야바르만 2세 (Udayadityavarman II, 1001~1002년)

▷종 교 : 불교가 융합된 힌두교 건축

 

위 치

앙코르 톰 경내에 위치. 바이욘 북쪽 테라스를 통해 나와 공터를 가로질러 좌측으로 보이는 높은 산봉우리 모양의 사원.

 

면 적

앙코르톰 경내. 부지는 무려 425 m x 125 m

형 태

덩그러니 높다란 산 모양의 사원은 멀리서 보면 단조롭지만, 내부는 멋진 부조로 장식되어 있는 사원으로 유명하다. 물론... 우리는 지금 그것을 볼 수 없지만 (그러나......). 바푸온은 앙코르 지역에서 3번째로 건립된 유서깊은 사원으로 앙코르톰이 건설되기 이전부터 이미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다야디트바르만 2세에 의해 1060년에 완공된 바푸온은 힌두교의 쉬바신에게 바쳐진 웅장한 성소였으며 훗날 쟈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을 건설할 때 바푸온을 경내에 넣었다. 때문에 앙코르톰 내의 다른 건축물들과는 건축 양식이 현저하게 다르며 더 많이 훼손되었다. 물론 반듯하게 꿰맞춰진 조각을 보는 기쁨도 크겠지만, 꿰맞춰지는 과정에서 완성을 기대하는 기분도 나쁘진 않다. 무엇보다 바푸온을 향하는 전경이 아름다워 즐거운 마음으로 긴 다리를 건너간다.

 

감상

바푸온은 아직 복구중이여서 내부는 입장 금지이다. 오래전에 프랑스 발굴팀(EFEO)에 의해 복구공사를 하던 중 크메르 루즈 시절인 1972년 국내 사정에 의해 무기연기 되었다가 최근에 다시 대대적인 복구에 임하고 있다. 원래 2004년에 새롭게 단장한 모습으로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2004년에도 공사 진행 상태를 보니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가신 분들은 보실 수 있으려나..... 복구중이라도 다리 건너 사원 주변은 돌아볼 수 있다. 또 두 개의 연못을 낀 진입로는 산보 삼아 걷기에는 그만이다.

 

1. 사원 : 덩그러니 쭈삣하게 솟은 원형 사원은 힌두교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거주하는 히말라야에서도 가장 높은 메루산을 의미한다. 메루산은 힌두교의 쉬바 신이 거주하는 곳으로 바푸온은 메루산의 주인인 쉬바신에게 바쳐졌다. 또 메루산은 불교에선 우주 중심에 선 수미산(須彌山)으로 불리운다. 때문에 바푸온에는 힌두교와 불교가 혼재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바푸온 외곽 벽의 둘레는 425m x 125m에 달하며 모든 것은 메루산으로 향한다.

 

2. 다리 : 바이욘을 거쳐 바푸온에 들어섰지만 아직도 눈앞을 어리는 바이욘의 미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푸온 진입구의 다리에서 잠시 왼편을 바라보면, 나무들 사이로 틈틈이 거대한 바이욘이 좀전의 감동을 되살려준다.

다리를 포함한 진입로는 무려 200m나 되는데 다리 사이사이 다양한 동물들의 부조를 비롯하여 다리를 떠받히는 3열의 둥근 기둥들의 가지런한 배열 등을 감상하면서 걷는다.

연못이나 다리 주변의 그늘진 곳을 찾는다면 잠시 쉬어감 직하다. 바이욘이 조각조각 꿰맞춘 거대한 조각상이라면, 바푸온은 둥근 원형의 단순한 산 모양이라 성에 차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입로에 서서 주변 전경과 바푸온의 위용을 가슴 속에 새겨두자. 바이욘의 북쪽 전경과 바푸온 전경을 한 컷에 담기에 좋은 장소들을 포착하면서.

 

3. 원형탑과 기단 메루산은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이 거주하는 4개의 대륙 중앙에 위치한다. 원형탑(메루산)도 5단짜리 4각형 기단(基段) 위에 얹진 모습을 취한다. 각 방향으로 4군데의 현관이 나 있으며 각 방향으로 난 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며 내부는 맨 아랫단부터 3단까지는 단을 빙 둘러 복도로 이뤄진 갤러리로 꾸며져 있다.

 

4. 열반상과 부조 지도에 표시된 서편을 보면, 서쪽 2단 벽면에는 열반에 드시는 부처님의 모습(비스듬하게 누운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그 길이가 무려 40m에 이른다고 하며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정성을 다해 복구 중이다(몇 번을 갔지만 아직도 무너진 벽돌과 흙더미를 보수 하고 있어 열반상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마, 바푸온이 오픈되었을 때 관광객들이 필수적으로 찾을 장소가 될 것이다. 열반상이 있는 곳에서 계단(지도에 표시된)을 올라가 3단에는 바푸온이 자랑하는 부조들이 새겨져 있는데 특히, 힌두교인이 지켜야할 덕목을 얘기하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새긴 부조들이 있다고 한다.

 

참고 : 바푸온까지 걸어가 공사 중인 성소탑 우측으로 돌아 본 뒤 구멍 난 벽 틈으로 들어가면 바로 삐미아나까스와 만난다.

 




피미아나까스 (PHIMEANAC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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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10세기 후반~11세기 초

▷건 축 왕 : 라젠드라바르만 2세(Rajendravarman II, 944~968년)

▷종 교 : 힌두 건축

▷아트스타일 : 끌리앙

 

위치

왕궁 부지 내, 원래는 코끼리 테라스가 있는 곳에서 동쪽 문을 통해 들어오는 게 정상이지만 현재는 관광 루트 상 바푸온을 감상한 뒤 공터를 지나 북쪽으로 걸어가다 보이는 붉은색 탑 형태의 건축물.

 

명칭

피미아나까스는 대 앙코르 왕국의 수도 앙코르 톰 내에서도 왕과 왕비가 거주하는 궁전과 맞붙어 왕이 수시로 드나드는 실제적인 왕궁 부속 사원이다. 따라서 여느 사원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갖고 있으며 왕이 뱀 여인과 동침하는 비밀스런 궁전이여서 "하늘의 궁전(Aerial Palace)"라 불리며 왕궁의 스카이라인을 장식했을 것이다. 또 '황금탑'이란 이름도 갖고 있으며 원나라 세관원으로 톰에 거주했던 주달관(周達觀, Zhou Daguan)의 방문기에 의하면 3층의 성소 꼭대기는 황금으로 입혔다고 전해온다. 그런데 현지의 스님에게 몇 번이나 이 명칭을 읽어보라고 했는데 모두들 "삐미아나까"라고 한다. 역시 크메르 말은 어렵다.

형태

피미아나까스사원 건축의 시작은 라젠드라바르만 2세가 했으나, 대부분의 중요 시설물은 후대인 수르야바르만 1세(Suryavarman I)가 완성했다. 이곳은 왕궁 내 사원이라 왕궁을 에워싼 성벽 내에 위치한다. 그중 동쪽만 이중 성벽으로 이뤄져 있으며 주 출입문도 동쪽에 위치한다.

왕궁동쪽문은 고푸라 문으로 문 상인방(문틀 위)에는 칼라(Kala)의 귀면상(鬼面像)(힌두 설화에 의하면 항상 굶주린 칼라는 쉬바 신에게 먹이를 달라고 보챘는데 쉬바가 네 몸을 먹으라 하여 자신의 몸을 죄다 뜯어 먹고 머리만 남게 되었다. 후에 쉬바가 자신의 말을 잘들은 칼라의 머리를 사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아주었다. 얼굴이 아주 험상궃게 생겼다)이, 문틀에는 왕에 대한 충성맹세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잠깐, 뱀여인의 전설 부터!!

황금의 탑에는 머리가 9개 달린 뱀의 정령이 살고 있었다. 왕은 인간 여자와 동침을 하기 전에 반드시 이 뱀이 둔갑한 여인과 먼저 동침을 해야하며 만약 뱀 여인과 동침을 하지 않은 채 인간여인과 자게 되면 왕의 목숨을 잃게 된다는 전설이다. 여기서 딴지!!! 우스개 소리로 왕은 체력이 무척이나 좋았을 것. 무엇보다 피미아나까스의 계단은 아주 가파르다. 어둠 속에서 또는 비오는 날 이 계단을 오르내리려면 목숨을 걸어야하니 이런 날에는 혼자 자는게 낫지 않을까? 암튼 계단을 그렇게 오르내렸는데도 사고사를 당하지 않았다는 게 참 신기하다. *^_^*

 

1. 연못과 나가 난간 피미아나까스 북쪽(왕궁 쪽)에 두 개의 연못이 있었는데 동쪽 연못은 규모가 작고 왕비를 비롯한 왕실 여인들이 더위를 식히고 몸을 정갈히 하던 곳(Srah Srei)이며, 서쪽은 보다 큰 연못으로 남자들의 전용이었다. 뱀 여인과 동침하기 전 왕이 정갈히 몸을 씻었을 이 연못은 현재도 흔적이 남아 있으며 아름다운 장식의 난간과 보도가 피미아나까스와 직접 연결되어 있어 매일 밤 신전을 오르내리는 왕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난간에는 가루다를 비롯, 나가(뱀)와 나가 여인에게 둘러싸인 남자(왕)의 조각이 새겨져 피미아나까스의 전설을 대변한다.

 

2. 일층 붉은색 라테라이트와 사암으로 건립한 피미아나까스는, 1층(계단층) 2층(갤러리층) 3층(성소)의 구조를 취하는데 그 층을 나눔에 있어서도 섬세한 배려와 미적 감각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의 구조에 1층에서 2층까지는 지상에서부터 정점을 향해 뽀족하게 3단으로 공간을 나누고, 3단의 사방 각 면 한가운데에 성소로 향하는 계단을 두고 각 계단은 1단마다 두 개의 난간의, 총 6단으로 장식하고 각 2단층마다 양쪽에 사자상으로 장식했다. 늠름한 사자상도 일부만 남아 있다.

3. 이층과 삼층 2층은 사방을 둘러 사암으로 쌓은 좁은 복도(갤러리)가 난간과 벽의 구실을 하며 앙코르 톰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창문이 나 있고 복도의 사방 각 코너에는 파빌리옹을 두었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3층은 성소로서 계단으로 연결되며 성소의 바깥이 황금으로 덮여 있었으며 뱀 여인이 왕과 동침하던 신비의 장소이다.

성소에 오르려면 서쪽 계단을 이용한다. 가파른 계단을 쉽게 오르내리게 철제 손잡이를 마련해두었다. 맨처음 거의 40도(?) 각도의 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 다리가 후들후들... 하지만 앙코르 지역 내에는 이런 난간들이 많았다. 꿋꿋하게 계단만 보면서 단숨에 올라간다.

 




끌리앙 (Kleang)

▷건축시기 : 10세기 후반~11세기 초반

▷건축 왕 : 북쪽 끌리앙 - 신축 - 라젠드라바르만(Rajendravarman II, 944∼968년)

개축 - 자야바르만 5세(Jayavarman V, 968∼1001년)

남쪽 끌리앙 - 수르야바르만 1세(Suryavarman I, 1002∼1049년)

▷종교 : 힌두교 건축

▷아트스타일 : 끌리앙

 

위치 : 코끼리 테라스 맞은편

명칭 : 끌리앙이란 "창고"라는 뜻.

 

드넓은 앙코르 톰 경내의 건물들이 워낙 출중하고 볼거리가 많아 아마도 끌리앙 정도에는 다가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의 힘들게 발걸음을 잡는 두 개의 아름다운 테라스의 길이도 만만찮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고 이동을 해야 하므로 보통은 들르지 않는다. 그러나 끌리앙에 잠시 눈길을 돌리고 가자.

 

끌리앙은 위치적으로 코끼리 테라스의 남쪽 계단과 북쪽 계단을 마주보며 대칭하여 건립된 건물이다.

북쪽 끌리앙을 보면, 이름대로라면 이 건물은 창고여야 마땅하지만 창고라고 보기에는 건물이 지나치게 아름답고 품위 있다. 앙코르와트 사원 내 갤러리에서 우리는 크메르 왕에 대한 신하들과 외국 사신들의 충성맹세의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만큼 중요한 곳에 새겨지는 '왕에 대한 충성 맹세'의 장면이 바로 이 건물에도 정교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흔치 않은 이 부조가 새겨졌을 이유를 유추해 보건데 아마도 이 건물은 귀족이나 외국 대사들이 앙코르의 왕을 알현하기 위해 대기하던 곳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갖고 있다. 그러한 유추를 뒷받침하는 것이 연대적인 증축시점이다.

 

북쪽 끌리앙은 원래 라젠드라바르만 왕 (Rajendravarman II, 944∼968년) 시절 목조건물로 지어졌으나 그 아들 대인 쟈야바르만 5세 시절 충성 맹세 부조와 아름다운 인테리어로 정성을 잔뜩 들인 현재의 석조 건물로 개축되었다. 자야바르만 5세는 크메르 건축을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예술적 최고 경지에 이끈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란 역사적 지평을 짚어 볼 때 건물의 변신과 함께 용도도 변경하지 않았을까 한다.

 

연대적으로는 북쪽 끌리앙이 먼저 건립되었고 남쪽 끌리앙은 후대인 수르야바르만 1세 시절에 건립되었으나 건물 및 인테리어 모두 미완성인 상태로 이어온다.

 

기다란 직사각형 구조의 사암과 라테라이트 적암으로 건립된 두 건물 모두 밀림 속에 파묻힌 채 오랜 세월을 버티어 왔고 그 사이 거대한 보리수나무들이 거센 뿌리로 휘감아 누른 탓에 발굴에 무척이나 애를 먹었다고 한다. 현재도 쪼옥 곧은 거대한 열대 거목들이 뒤에 버티고 선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아무튼 부서지기 쉬운 사암인 탓에 파손 정도가 심하다.

 

끌리앙은 현재 보수 중이라 내부에는 들어 갈 수 없지만 황혼 무렵, 쁘라삿 수오르 쁘랏 쪽에 서서 구도를 잘 잡으면 황금빛을 받아 빛나는 폐허의 건물에 깔린 신비로움을 담을 수 있다.

 







쁘놈 바껭 (PHNOM BAK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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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9세기 말~10세기초

▷건축왕 : 야소바르만 1세 (Yasovarman I) 889년~910년

▷종교 : 힌두교

▷건축양식 : 바켕양식

 

위 치

"프놈"이란 산 또는 언덕 등 고지대를 의미. 앙코르와트(1.3km)와 앙코르톰(400m) 중간에 위치한 높이 67m의 바켕 산 위에 선 사원

 

개 요

크메르 왕국 초기, 야소바르만 1세가 외적의 침범에 대비한 강력한 수도를 원하여 롤루오스를 버리고 이곳 앙코르 지역의 바켕 산을 둘러 새수도 야소다라푸라(Yasodharapura)를 건설하여 천도한 이래, 수도의 중심에 솟은 바켕 산에 신전을 지어 쉬바 신에게 헌납했다. 이 신전은 앙코르 지역에 최초로 건설된 사원이란 점에서 의미롭다.

형 태

크메르 왕국의 3번째 수도였던 야소다라푸라는 사방이 각 4km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싼 위풍당당한 수도로서 그 면적이 앙코르 톰보다 훨씬 더 컸다고 한다. 그 중심에 우뚝 솟은 바켕 신전의 위용은 당시의 새 수도의 위엄을 엿보게 하지만 지금은 바켕 신전만이 남아 옛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신전은 힌두교의 쉬바 신에게 바쳐진 것으로 상층에 쉬바의 상징인 링가(男根)가 모셔져 있다. 신전은 초기 앙코르 양식이여서 바켕 산에서 나는 사암 바위를 잘라서(동북쪽과 남동쪽 코너에 돌을 자른 흔적이 남아 있다) 쌓은 단순한 석탑 구조의 사원이지만 기단과 최상단을 비롯 5단 구조의 층을 층층이 쌓아 메루산을 상징케 하는 바켕 양식의 기원이 된 사원인 만큼 장엄함이 물씬 풍긴다.

 

감 상

종일 유적지 감상에 지친 이들에게는 섬세한 부조는 없지만 무덤덤하게 쌓은 석탑들이 외려 부담감을 덜어주는 듯하다. 관광객이 꼭 들리는 곳인데 드넓은 평원과 밀림 속에 우뚝 솟은 산이어서 사방이 탁 트여 전경 감상에 그만이다. 무엇보다 고지대여서 일출과 일몰 감상에 최적이고 특히나 일몰시에는 다투어 올라와 왕국의 영광을 비추던 태양이 하루 일정을 끝내고 밀림 속으로 지는 모습을 감상하며 우리들 역시 지친 일정을 마무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1.계단

사진에서 보다시피 가파른 언덕길이 펼쳐진다. 예전에 있었던 돌계단은 드문드문 흔적만 있을 뿐, 미끄러지기도 하며 등산하는 기분은 아주 좋다. 산기슭을 올라 정상에 서면 넓은 하단이 펼쳐지고 또 다시 가파른 계단이 맞이한다. 1단에서 5단으로 오르는 계단은 보폭이 좁고 경사도가 70도나 되는 아주 가팔라 신계(神界)로 들어서는 짜릿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각 단에는 좌우로 한 쌍의 늠름한 사자상이 장식되어 있다.

2.신전

가까이서 보면 무덤덤한 바위의 축조처럼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항공사진) 곡선미가 배어나며 디자인은 하나하나 의미가 담기지 않은 게 없다. 산상 신전은 붉은 라테라이트로 쌓은 외벽에 멋스런 고프라 문을 갖고 있다. 맨 아래의 그라운드 층에서부터 5단의 테라스형 단과 성소가 있는 최상층으로 까지 7개 단을 점점 좁혀 솟구쳐 오른 형상은 힌두 신화의 메루산(Mount Meru, 우주의 중심인 산)을, 7단은 7개의 하늘을, 신전 자체는 하늘의 제왕인 인드라(Indra, 불교의 제석천)가 천상천하 최고의 왕궁을 메루산에 지었다는 힌두 신화에서 유래하여 그의 황금궁전을 비유한 것이다. 제1단은 가로세로 각 76m의 정사각형이며 최상층까지의 높이는 13m, 탑의 갯수는 총 109개로서 108개 크고작은 첨답들이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중앙성소탑을 호위하듯 서 있었다고 한다. 당시 크메르에서 이보다 더 크고 화려한 건축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탑들은 유실되었으나 그래도 정경은 장엄하다. 하단에 총 44개의 석탑이 휘두르는데 동쪽과 서쪽에는 12개씩의 탑들이, 남쪽과 북쪽에는 10개씩의 탑들이 있다. 1단에서 5단에는 총 12열의 60개의 작은 석탑이, 그리고 최상층에는 동서남북 총 4개의 석탑이 중앙성소탑을 호위하는 구조이다. 프놈 바켕의 성소는 마치 천문대와도 같으며 농업이 주업인 크메르에서 태음력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듯 특이하게 천문학이 도입되어 있다.

1단에서 5단까지의 각단에 12개씩의 탑 배열은 십이궁도(서양의 별자리로서 1세기에 그리스에서 인도에 유입, 동남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다)를 의미한다.

<12궁도>

양자리(백양궁, Aries), 황소자리(금우궁, Taurus ), 쌍둥이자리(쌍자궁, Gemini), 게자리(거해궁, Cancer), 사자자리(사자궁, Lion), 처녀자리(처녀궁, Virgo) 천칭자리(천칭궁, Libra ), 전갈자리(천갈궁, Scorpio), 사수자리(인마궁, Sagittarius) 염소자리(마갈궁, Capricorn), 물병자리(보병궁, Aquarius), 물고기자리(쌍어궁, Pisces)

한 방향에 4열 배열로 한 것은 달의 4번의 변화(초생달, 그뭄달, 보름달, 반달)을 의미하며 108개의 탑수는 그 4번의 변화에 27일을 곱한 것이며 각 사이드에서 보면 33개의 탑들만 보이게 배열한 것은 힌두 신화에 등장하는 33명의 신을 의미한 것이라고 한다. 결국 의미의 종결은 신이며 중앙성소의 문에도 33인의 신의 두상을 새기고, 성소에는 최고신인 쉬바의 상징(링가)를 모심으로서 신전은 완벽하게 의미를 형상화했다.

3.정경 감상

고대 사원에서 바라보는 밀림의 황혼은 신비롭다. 지도에도 표시해뒀지만 사방을 빙 돌면 지평선까지 맞닿인 전경 사이에 불쑥 불쑥 솟은 유적지들이 보인다. 정상에 오르면 먼저 해지기 전에 동편을 바라보자. 올라오는 계단 쪽이다. 지평선까지 맞닿은 밀림 사이로 왼편에는 복산(Phnom Bok), 해지는 서쪽을 향해 서면, 왼편에는 앙코르와트가 미니어쳐처럼 앉아 있고(망원경이 있으면 좋다) 그 옆에는 지는 해보다 더 높이 날아오르는 관광객들을 태운 열기구에 황혼에 맞춰 떠오른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드넓은 서바라이가 펼쳐진다. 밀림을 뚫고 스쳐지나가는 싱그런 바람을 들이키며 황혼을 기다리며 앉아 있는 동안, 힘들지만 매일 저녁 일몰과 함께 보람찬 하루를 마감케 해주는 것이 앙코르 관광의 매력임을 알게 한다. 사방에 어둠이 깔리면 내려가는 길은 아우성이다. 불빛은 지원되지 않으므로 밤눈 어둔 사람들, 그리고 산비탈 길이 장난이 아니므로 석양이 완전 지기 전에 자리를 뜨는 것이 현명하다.

 

tips:

1. 원래 프놈바켕 관광은 코끼를 타고 오르내렸다. 물론 지금도 그 코끼리가 운행된다. 편도 15달러.

2. 산비탈이 가파르고 돌이 많으므로 늦은 밤에는 프래쉬를 준비.

3. 복잡하다고 코끼리 길을 따라 걷지 말도록. 코끼리 응아를 누면 폭포가 형성되고 응가가 떨어지면 x범벅이 된다. 물론 이미 싼 응가에 신발도......

4. 앙코르와트나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정을 끝내고 온 관광객은 바켕 신전 앞에서부터 주저한다. "또 올라가 야하나!!!!" 그러나 올라가면 그만한 보상이 있다.

5. 힘든 산길을 올라오니 또 계단이!!! 신의 영역을 의미하는 보폭이 좁은 가파른 돌계단이 또다시 우리를 시 험한다.

6. 그러나 "산이 거기 있어 올라간다"는 말처럼 정상이 있으니까 숨을 고르며 올라갈 수 밖에..... 정상에 서면 지평선까지 뻗는 전경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저멀리 푸른 톤레삽 호수(지평선 부 분)가 밀림과 하늘과 어울려 삼위일체의 전경을 보여주고 숲을 통과해 풍겨오는 상큼한 바람은 전신을 리 프레쉬시켜준다.

7. 앙코르와트 사원 인근에선 열기구를 타고 황혼을 보려는 사람들이 일몰에 맞춰 대기하고 있다. 태양에 더 가까워 보이는 듯하여 언뜻 질투심이!!!!!! *^-^*

 

   

 

 

박세이 참끄롱 (BAKSEI CHAMK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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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10세기 중반(947년)

▷건축왕 : 하르샤바르만 1세(Harshavarman I,910~944)) 준공,

라젠드라바르만 II(Rajendravarman II, 944~968)완공

▷종교 : 힌두교

▷건축양식 : 바켕과 코케르 양식의 중간

 

위치 : 앙코르톰 남문 못 미쳐, 이곳에 내려 차는 남문으로 보내고 참끄롱을 감상. 걸어서 남문을 감상한 뒤 성문 안에서 차량운전사와 만나면 된다. 보통 10~15분 정도 할애하면 된다.

 

명칭 : 박세이 챰끄롱이란, "날개로 보호하는 새"라는 뜻으로, 앙코르의 왕이 적군에게 잡힐 위기일발의 순간에 하늘에서 큰 날개를 가진 새가 날아와 그 날개로 왕을 덮어 보호했다는 전설에 기인한 것이다. 단출하지만 정성을 들여 지은듯한 이 사원은 출입문에 새겨진 쉬바신 찬양문을 보건데 쉬바신에게 봉헌된 신전이며 그 용도는 아마도 국왕의 장례를 치르던 장례전이 아닌가 추정한다. 바켕 양식은 사암이나 바위 축조물이 주체인데 반해 이 사원은 앙코르 지역에서 최초로 사암과 라테라이트, 바위석재를 혼합하여 사용한 성전산형 신전으로 당시 건축물의 빼어난 미적 감각을 말해준다. 당시 앙코르왕국의 수도는 프놈 바켕이지만 코 케르에 수도를 둔 새 왕국이 건국되어 중앙왕국보다 막강한 세력을 떨치던 때이어서 두 왕국의 양식이 고루 혼합되어 있다.

 

감상 : 신전은 크지 않고 또 아주 심플해서 별로 설명할 게 없다. 벽돌을 쌓은 외벽으로 둘러져 있고 동쪽에 난 한 개의 고푸라문이 유일한 출입구였다. 붉은 라테라이트로 축조한 4단 위에 중앙성소 탑이 솟구친 전형적인 초기 성전산 형태의 신전이지만 수직, 수평의 수학적 비율이나 석재의 혼합 등 조화에 신경을 많이 쓴 빼어난 건축물이다. 붉은 라테라이트 석재를 사용한 4단은 정사각형의 구조로서 맨 아랫단은 한 변의 길이가 27m, 4개의 단이 점차 좁혀지면서 성소에 이르는 형태이며 전체 높이는 13m이다. 성소탑은 사암 기단에 벽돌로 쌓은 구조물로서 디자인도 간단하여 동쪽문만 열려있고 나머지는 문 형태만 갖춘 가짜문이다. 가짜문의 문틀은 마치 나무문틀을 댄 것처럼 사암을 세공하여 장식하는 정성을 보였으며 외곽에는 압사라들이 조각되어 있다. 동문은 많이 손상된 편이나 상인방(문틀위)에는 신들의 왕이자 번개의 신인 인드라(Indra)가 머리 셋이 달린 영물 코끼리 아이라바타(Airavata)를 타고 있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쁘레아 칸 (PREAH K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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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시기 : 1191년 완공

▷건축왕 : 자야바르만 7세 (1181~1220)

▷종교 : 불교

▷건축양식 : 바이욘

 

위치 : 동 바라이 위쪽.

명칭 : 크메르 어로 쁘레아는 "신성함" , 칸은 "칼", 즉 "신성한 칼"이란 뜻이다. 이 명칭은 전설과 비문에 의

해 전해 온다.

 

개요

자야바르만 7세 시절 챰족(중부 베트남 지역)의 대대적인 침공을 맞아 전쟁을 치르던 시기에 건립되었다. 혼돈기여서 정확한 준공 연대는 알 길이 없으나 신전에 새겨진 비문에 의하면 고 자야바르만 7세가 전쟁 중에 아버지를 위해 이 사원을 짓기 시작했고 챰족을 물리친 후에야 완공을 보았다고 한다. 현대에 발굴된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당시 샴어(태국어)로 나가라쟈아크리(Nagarajayakri)라 불리웠다고 하는데 크메르어로 번역하면 "쁘레아 칸의 도시"라는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크메르왕조의 시조인 자야바르만 2세가 왕조를 연 뒤 후계자인 왕자에게 국가의 위기를 지켜주는 신검을 물려주었고 자야바르만 7세가 챰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그 신검을 이 사원에 모셔왔다고 한다.

쁘레아 칸은 자야바르만 7세가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건설한 불교 사원으로, 어머니를 위해 지은 따 쁘롬과 기본 설계나 구조가 거의 동일하다. 단지, 따쁘롬이 여성적인 아기자기한 멋을 강조한 데 반해 쁘레아 칸은 남성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며, 전쟁 중에 건립한 탓에 의도적으로 용맹과 투지를 북돋우는 듯 석상의 거대함이 돋보인다. 쁘레아 칸의 원래 설립 목적은 불교 사원과 승려 학교 용도였으나 전쟁 중 그리고 파괴된 수도 앙코르톰의 복구 작업 시 왕은 이곳에 머물러 쁘레아칸은 왕궁을 대신한다. 덕분에 일반 사원과는 달리 왕궁의 위엄을 상징하는 각종 부속물이 추가되어 있어 볼만하다.

 

형태

총면적 56헥타르에 달하는 크기는 물론이고 장엄함과 신성함을 동시에 가진 쁘레아 칸의 특징은 수많은 문들이 사방으로 끝없이 이어지는데 중앙 성소로 갈수록 점점 그 문이 작아지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어 신비롭다. 특히나 승리를 기원하는 왕의 마음을 알게 하듯 벽감에 부처상을 수 없이 새겨 넣었다. 단순한 사원이 아니라 왕의 거처를 겸하는 곳이라 다양한 건물들이 함께 부속되어 있다는 점도 이채롭다. 4겹의 담으로 에워싸여 있는데 제2외벽부터가 사원이며 전체적으로는 사원의 중앙 부분은 불교이지만 힌두교 신들을 모시는 사당도 부속되어 있다.

 

감상

쁘레아칸은 중요한 사적이지만 붕괴 정도가 심해 WMF(세계문화유산기금)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복구에 들어갔고 관광객에게 열린 지는 몇 년 되지 않는다. 현재도 복구중이라 수비경찰의 감시 눈길이 번득인다. 쁘레아칸은 참으로 아름답고 위풍당당하다. 자연과 유적, 검게 빛바랜 돌에 어려 있는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라 개인적으로 내 취향에 따악 맞아 시간을 더 할애하고 싶었던 곳이다.

 

1. 벽

쁘레아칸은 4겹의 성벽으로 에워싸여 있다. 제1외벽은 해자를 형성하고 있는데 아마도 종교적 의미보다는 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는 거의 밀림화되어 버렸다. 당시 승려들이나 참배객들의 거처가 제1외벽 인근에 있었고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동쪽 탑문쪽 외벽에는 비쉬누 신이 타고 다니는 천상의 영물 독수리 가루다(독수리)와 물의 정령 나가(뱀)이 규칙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신성한 쁘레아 칸을 둘러싼 하늘과 물과 땅을 통틀어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의미한다. 중앙 사원을 에워싼 2 겹의 내벽에는 수많은 부처상이 벽감 형태로 새겨져 쁘레아칸의 신성함을 더해준다.

 

2. 탑문

탑문은 동서남북으로 나 있지만 주출입구는 동쪽 탑문과 남쪽 탑문이다. 세 개의 탑문을 가진 동쪽 탑문은 대출입구로서 왕의 행렬만 출입하며 사원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중앙문은 왕의 전용 출입구이고 일반 시민들은 서쪽 탑문을 사용했다. 관광객에게 오픈하면서부터 서쪽문을 주출입구로 사용한다. 길에서부터 서쪽 탑문까지 좀 걸어가면 석상들이 나열된 보도를 만난다. 이어 아래쪽에 불상이 새겨졌던(힌두교 시절 교체) 거대한 석등을 선두로 유해교반(우유바다 휘젖기) 다리가 해자를 형성한다. 이런 해자의 모습은 앙코르톰의 (남)성문과 흡사한데 이것은 쁘레아 칸이 왕궁으로 사용되면서 도입된 대표적인 왕궁 건축 양식이다. 바수키(뱀)의 긴 몸통을 잡고 1천년동안 영생의 약을 얻기 위해 열심히 휘젖는 신들(왼편)과 악마(오른편)의 행렬을 지나면 드디어 서쪽 탑문. 서쪽 탑문은 훼손의 정도가 아주 심했는데 WMF의 신기술 도입으로 완전히 꿰어 맞췄다. 신성함을 격리시키는 해자 역할을 하는 유해교반 다리는 자야바르만 7세의 새 도읍지 앙코르톰의 사방에 난 문에만 적용된 걸로 봐서 쁘레아 칸도 왕 자신이 거처로 사용했기에 적용한 게 아닌가 한다. 이러한 왕궁 표현은 탑문 앞의 뱀을 쥔 거상(巨像)들도 마찬가지.

 

3. <신전에서 헤매다...>

제목 붙혀놓고 스스로 만족해 한다. ㅎㅎ ^-^ 칸은 거대한 신전군이다. 아니, 신전 유적군이다. 혼자 남겨지면 갑자기 등 뒤가 써늘해 지는 기분도 든다. 꿈틀거리는 나무뿌리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날 삼켜 땅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만 같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구친 나무가 내 시야에 비치는 건 기껏해야 뿌리뿐이다. 꼭대기까지 보려면 한참을 뒷걸음질 쳐야하지만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남성미가 넘치는 칸은 길을 잃은 채 여기저기 헤매는 것이 매력적이다.....(시간 잘 챙기세요. 유적군 안에서 헤매다 보면 시간 놓치기 따악 입니다) 사실, 쁘레아칸은 원래 동쪽 탑문에서 부터 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어 아래의 설명은 동문을 기점으로 나열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서쪽탑문을 통해 들어간다. 지도에 화살표로 표시를 해뒀지만 "딱 이쯤에서 이 안으로 들어간다."는 아니고 또 취향대로, 또는 제대로 들어가든, 잘못 들어가든 상관 말고 적당히 유적을 헤매다 오시라. 일반적으로 현재의 유적에서 감상 순서는 유해교반 장식의 해자 건너 탑문 들어선 다음 건물군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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