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앙 응어이
(2007년 6월의 기록입니다.)
루앙 프라방 외곽 터미널로 갔다.
시골길로 버스타고 또 배도 타고 치앙라이로 가는 루트는
애초에 배제했다.
그 고생을 하며 갈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바로 태국으로 가자니 아쉽고.
그래서 므앙 응어이를 가보기로 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고 하니 불편은 하겠지만,
고립된 곳이 외국인에게 알려진 여행지가 된 이유는
분명 경치일 테니,
결정하긴 쉬웠다.
트럭 썽태우를 타고 선착장으로 간다.
썽태우를 따라
사람들을 가득 실은 트럭이 따라온다.
카메라를 드니까,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며 손을 흔들어 준다.
그대들
고단할텐데,
유쾌했다.
긴 나무배를 탔다.
건기의 메콩강 지류천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군데군데 얕아서 배 바닥이 쓸렸다.
므앙 응어이 선착장에 도착했다.
500m 가량의 직선 골목을 중심으로
마을이 들어서 있다.
길의 맨 끝까지 걸어갔고,
그 마지막에 있는 숙소로 들어갔다.
볕집으로 된 방갈로,
하루에 1.5달러 란다.
라오스는 방값 축복인가.
나중에 알았는데,
비수기라서 가격이 낮았다.
샤워하고 나오니,
숙소의 주인이 버팔로의 코를 뚫고 있다.
줄이 꿴 꼬챙이로 생살을 뚫는다.
질끈 감은 버팔로의 눈에서
고통을 느꼈다.
소리없이
거친 콧바람으로
고통을 감내하는 녀석.
식당은 마을 초입 선착장에 있다.
다시 500m를 걸어 선착장으로 갔다.
해가 지고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
동네 처자들이 목욕을 하고
엄마를 따라온 아이들이 물장구를 친다.
마을은 한없이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전기없는 식당에서
저녁을 마쳤다.
불이 없으니,
할 게 없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길에 나갔다.
맨발의 탁발승과
맨발의 주민들
루앙프라방과는 달랐다.
번잡하지 않았고
정갈하고 깔끔했으며
높고 낮음도 볼 수 없었고
여유롭게 신실했고,
감동받았다.
절까지
탁발승들을 따라갔다.
음식을 들고
절로 찾아오는 주민들이 있었다.
뒤늦은 탁발인가 했는데,
깨끗하게 만들어진
음식들이었다.
밥만 탁발하는 승려들이
먹을 반찬들이다.
아, 이렇게 영양적 균형을 갖추는 구나.
엄마 심부름 하면서 자연스레
문화가 이어져 가나 보다.
아마도
이렇게 평생을 이어왔겠지.
문명이 제한적으로 전달되는 이 곳,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살아가는 모습에
여기 잘 왔구나 싶었다.
내가 머무는 숙소는
버팔로 뿐만 아니라,
원숭이도 키웠고,
새도 잡아서 키웠다.
동물을 사랑하는 건지,
학대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다음 날,
하루 늦게 숙소에 온
일본계 미국인 레슬리와
하이킹을 갔다.
사실 난
암 곳도 갈 생각없이
방갈로 그물침대에 누워
산과 물만 바라볼 생각이었는데,
혼자 산길을 가기 뭐했는지
잘 갔다 오라고 인사하고
공용사워장에서 샤워하고 있는 나에게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해서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뒷산 하이킹이
므앙 응어이의
여행루트인가 보다.
생각보다 많은 외국여행객들이
같은 길로 하이킹을 가더라.
하이킹을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니
동네 꼬마들의
귀여운 모습이 정겨웠다.
다음 날도
아침 일찍,
예상치 않았던
므앙 응어이의 메인 이벤트,
탁발을 보러 나갔다.
승려도
주민도
평생을
아침마다
마주했을
경건한
마음들.
언제 이곳에
전기가 들어오고
내가 다시 올 지 모르겠으나,
사라지지 않고
없어지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랬으면 싶었다.
간 길을 되짚어
루앙프라방으로
되돌아 갔다.
어디 가는 지도 모른채 엄마에게 안겨
맞바람을 몸으로 받아내는
라오스의 미래와 함께.
Adios,
므앙 응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