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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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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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그런 날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참 엄벙덤벙 살았구나, 하고 회한에 젖을 때가.

험한 길보다는 쉽고 편한 길만 찾아다니고,

대가리 터지도록 맞서 싸우기보다는

이리저리 눈치나 보면서 빠져나갈 궁리만 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제게 한순간이라도 치열하게 살았던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선뜻 예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네요.

김성동이 그랬나요, 회색은 슬픈 법이라고.

승(僧)도 아니고 속(俗)도 될 수 없는 자신의 어정쩡한 처지를

승복의 빛깔에 빗대어 그렇게 표현했었지요.

그 즈음의 제가 그랬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만은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물고기 같이 울었다>는 시구가 죽비처럼 가슴을 때렸습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일상에서 벗어나 뭔가 변화를 꾀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동남아 여행이었습니다.

제가 하노이에 머무는 동안 묵었던 호텔은 시가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롱비엔에서 버스를 타고 40분 이상은 가야 하는 곳이었죠.

딱히 그곳을 선택한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마음이 끌려서 무작정 내렸을 뿐입니다.

푸옹동호텔, 굳이 번역하자면 동양호텔쯤 되겠지요.

그곳에서 만난 사람이 팜티홍입니다.

30여 개가 넘는 객실을 매일 쓸고 닦는 것이 그녀의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호텔 청소부인 셈이지요.

격일제로 두 사람이 24시간씩 번갈아 가며 일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외출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서다가 복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습니다.

문소리가 나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보았습니다.

“왜 그러고 계세요?”

눈빛으로 제가 물었습니다.

올해 마흔일곱이라는 그녀는 청소일이 힘에 부치는 눈치였습니다.

왜소한 몸피에 살집이라곤 없는 그녀는 실제 나이보다 10년은 늙어 보였습니다.

그녀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발을 가리켰습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삐끗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손은 소나무 껍질처럼 거칠고 투박했습니다.

손가락 마디마다에는 류마티스 관절염의 흔적이 선명했습니다.

다리에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군데군데 나 있었습니다.

저는 방으로 돌아가 구급약이 담긴 봉지를 들고 나왔습니다.

계단 모서리에 긁힌 상처가 제법 깊었습니다.

마데카솔을 바르고 대일밴드를 붙여주다가 뒤축이 낡아 너덜거리는 그녀의 샌들에 시선이 가 닿았습니다.

“팜티홍은 신발 사이즈가 어떻게 돼요?”

그녀는 대답 대신 부끄럽다는 듯 몸을 모로 움츠렸습니다.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들어서니 그녀가 투명한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그 안에는 반미가 들어 있었습니다.

자신의 저녁거리를 사면서 제 것까지 챙긴 것이겠지요.

저녁을 먹고 오는 길이라고, 배가 불러서 더 먹을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녀는 한사코 제 손에 비닐봉지를 쥐어주었습니다.

결국 그 반미는 다음날 휴지통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호텔 휴지통에는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시내까지 들고 나가서 처리했습니다.

딴에는 고맙다는 표현을 한 것일 텐데….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답례를 하고 싶었습니다.

뭘 해주면 좋을까, 한동안 고민하다가 배낭 속에 처박아둔 빨래 꾸러미를 들고 그녀의 방을 찾았습니다.

제 방 맞은편에 위치한 그곳은 청소도구들을 보관하는 창고 비슷한 공간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바닥에 매트리스 하나 달랑 깔고 잠을 잔다고 했습니다.

“이거 세탁 좀 해줘요. 프런트에는 얘기하지 말고. 대신 그 비용을 팜티홍한테 주면 되잖아요.”

마치 무성영화를 찍듯이 손짓 발짓에 표정 연기까지 곁들이며 한참을 설명하자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음날, 누군가 꼭두새벽부터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빼꼼 문을 열고 내다보니 팜티홍이었습니다.

손에는 어젯밤에 맡긴 세탁물이 들려 있었습니다.

채 마르지 않은 옷가지들을 다림질해서 가지고 왔음이 분명했습니다.

후임자가 출근하기 전까지 모든 일을 끝마쳐야 뒤탈이 없을 테니까요.

저는 지갑에서 10만동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양을 하더니 괜찮다고, 이건 당신의 수고비니 받으라고 하자

그녀는 못이기는 척 지폐를 받아들었습니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감사하다며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제 심사가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 며칠 뒤였습니다.

비엔티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전날 요금 정산을 하기 위해 프런트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내가 예상했던 금액보다 7만동이 더 청구되었습니다.

이게 뭐냐고 따졌더니 세탁비라는 것이었습니다.

난 세탁 맡긴 적 없다, 누구한테 맡겼는지 근거를 대라,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따졌습니다.

프런트 직원과 서로 짧은 영어로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아차, 싶었습니다.

룸에 붙어 있던 세탁서비스 요금표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거기 적혀 있던 금액과 팜티홍에게 맡겼던 옷의 숫자를 헤아려보니 계산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뭐야,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쳐도 되는 거야?’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걸 애써 참으며 나머지 7만동을 지불하고 호텔을 나왔습니다.

‘팜티홍이 호텔 측에 보고한 걸까. 아니야, 그 순박한 사람이 그랬을 리 없어. 그럼 프런트에서 어떻게 알았지? 직원들끼리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걸까. 사회주의 국가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 감시카메라가 호텔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르고….’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향하는 동안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하루 종일 그런 생각들로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어쩌면 나중을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어. 발각되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질까 봐. 그렇다면 절대 용서 못해. 시내에서 1불이면 세탁할 수 있는 걸 일부러 자기한테 맡긴 거잖아. 부수입 챙기라고….’

점심을 해결한 후 서점에 들러 한․베사전과 베․한사전을 샀습니다.

호텔로 돌아가면 그녀를 불러 사전을 펼쳐놓고 따질 생각이었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 짚어가면서 명확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오후 내내 카페에 죽치고 앉아 나름대로 작전을 세웠습니다.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지우길 반복하며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소나기로 바뀌어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스콜이었습니다.

거센 빗줄기가 세차게 유리창을 두드렸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자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창 너머 펼쳐지는 거리의 풍경들 또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슬슬 호텔로 돌아가야지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한 줄기 섬광 같은 것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차갑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제 머리를 관통한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자각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이지, 하는.

어쩌면 팜티홍에게 느꼈던 배신감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탁물을 맡긴 것도 저였고, 개인적으로 세탁비를 챙기라고 한 것도 저였습니다.

영어라곤 원, 투 쓰리도 모르는 그녀에게 제 의사가 제대로 전달됐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보디랭귀지의 특성상 일정부분만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 사실들을 외면한 채 혼자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요리저리 분석하고, 비분강개하면서 속을 끓인 건 다름 아닌 저였습니다.

누가 그러라고 윽박지른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카페를 나와 항자 거리로 향했습니다.

낡아서 너덜거리는 그녀의 샌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입니다.

마침 눈에 들어오는 노란색 샌들이 있기에 점원이 부르는 대로 값을 치렀습니다.

호텔로 돌아와 그녀를 찾았지만 자리에 없었습니다.

문 안쪽 손잡이에 샌들이 담긴 봉투를 걸어놓고 방으로 돌아와 배낭을 꾸렸습니다.

다음날, 공항으로 가기 위해 방을 나서는데 맞은편 방에서 그녀가 저를 손짓으로 불렀습니다.

그녀는 십자수로 꽃을 수놓은 손수건과 메모지 한 장을 제게 내밀었습니다.

입구까지 배웅을 해주겠다는 그녀를 만류하고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았습니다.

택시 안에서 그녀가 건넨 메모지를 펼쳤습니다.

베트남어로 적힌 짧은 편지였습니다.

배낭에서 전날 구입한 베․한사전을 꺼내 들고 단어를 하나씩 찾아보니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신발이 너무 예뻐요. 잘 신을게요. 팜티홍.>

9 Comments
타이생각 2014.07.20 00:22  
정이 넘치는 외국에서의 경험 이었군요.
kairtech 2014.07.21 02:00  
여행중에 역지사지라고
어려운때를보낸기억에 어렵고 딱한상황에처한 현지인을보게되면
그냥 지나치고 항상후회하게되곤해서 작은 도움을주곤합니다
특히 어린소녀티나는 엄마가 아기와같이 도움을청할때
저는 과분할만큼의 도움을 줍니다
군생활3년동안 제처가 큰놈데리고 고생한기억이나서
홈런포 2014.07.25 11:14  
우리가보는 그 사람들에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맴과 많이 틀릴수도있다는 생각이듬니다,,그들에 모습에서우린 또 어떠케보일런지??  우린역시 정(情)이 많은 민족,,
에말이오 2014.08.10 00:30  
잔잔하게 잘 읽었습니다.
참새하루 2014.08.29 18:58  
한편의 아름다운 단편 소설을 읽듯이
한참 빠져들었습니다

슬프고도 아련한 영화같은
누구나 한번쯤은 겪어볼수도 있었지만
외면했을지도 모를 ...
참으로 오랜만에 읽어보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짤짤님의 아이디에서 주는 이미지와
아름다운 필력이 도저히 매치가 안되네요^^
meiyu 2014.10.08 10:43  
그렇죠. 참새하루님.
아이디랑 글이랑 전혀 매치가 안되요.
그건 참새하루님도 저에겐 마찬가지랍니다.
아이디가 이상하면 글을 쳐다보지도 않게 되는 건 제가 좀 별난걸까요?

제 아이디는 중국어를 영어로 쓴 건데요,
mei美yu玉 라는 뜻입니다.
읽을 땐' 메이위' 라고 읽어요.
옥의 색깔과 질감을 좋아해서요.

짤짤님 글 읽으면 그 세대의 정서가 느껴지면서 그냥 마음이
쓸쓸해지네요.
좋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고은솔 2014.09.10 20:13  
마음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세탇비 따지지 않길 정말 잘 하셨구요
신발 사주신것  팜티홍 그녀애게도
 평생 잊을수 없는 마음 따뜻한 한국인으로 기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레쓰고고 2014.11.13 00:46  
와 정말 따뜻해지는 글이네요.. 정말 참으신거 잘하신거 같아요.
멋쟁이오빠 2015.03.18 12:56  
님은 불법으로 친절을 베풀었고
팜티홍은 합법으로 님을 도와 주었군요.
불법친절이과연 그녀에게 도움이 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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