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욘-앙코르 톰의 중심
바이욘- 신을 찾아 떠나는 즐거운 여행
앙코르왓을 만든 수리야 바르만 2세가 1150년 참파로 출정을 떠나면서 후계를 정하지 않고 사라지자 제국은 혼돈에 빠진답니다. 그 혼돈 끝에 1177년 참파가 톤레삽을 타고 야소다라푸라를 처 들어 와서 수도에 불을 지르고 왕궁을 점령해요. 그 위기가 캄푸차 데사의 불세출의 영웅인 자야바르만 7세를 만들어 낸답니다. 반테이 츠마 가 고향인 그는 주변의 호족을 모아서 참파를 물리치고 그가 스스로 왕이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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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즉위하면서 기존의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국교를 바꾼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추정한답니다.
첫째 이유는 참파의 공격을 받은 백성들을 위해 새로운 지배 이념이 필요 했어요. 이곳 캄푸차 데사는 시바신의, 비슈누신의 축복을 받아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는데 참파의 공격으로 그들의 수도인 야소다라푸라가 파괴되었지요. 그러니 백성들이 무언가 새로운 헤게모니가 필요 했지요. 그래서 시바신이 다스리는 힌두교에서 부처가 보살피는 나라로 바꾸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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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유는 기존 왕족의 반발이었어요. 그는 지방호족출신으로 정통 왕위계승자가 아니었지요 그는 참파를 물리치고 스스로 왕이 되었어요. 그렇지만 돌아온 기존의 왕족들은 반발을 해요. 왕족이 힌두승려였어요. 그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서 종교를 바꾸게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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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그는 완벽한 계획도시인 앙코르톰을 만들고 각 지방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따쁘롬, 쁘레아칸, 따솜 등 각 사원을 신축, 혹은 증축하였으며 102개의 병원을 만드는 등 수많은 사원을 만들어서 건축왕 이라는 호칭을 받기고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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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주변을 정복해 간답니다. 지금의 베트남의 절반, 미안마의 절반, 태국의 대부분, 라오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캄푸차 데사 의 역사상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던 시기가 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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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스스로 부처의 환생이라고 생각하고는 부다라자 사상으로 자신이 백성들에게 불교의 자비를 베풀어주는 부처라고 생각 한 것으로 추정해요. 그래서 그는 수많은 불교 사원을 만들었는데 그 입구에는 사면상을 만들었는데요. 최고의 절정으로 앙코르 톰의 정 중앙에 바이욘을 만들었답니다.
그래서 바이욘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문이 있고 그 사이로 25m폭의 도로가 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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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욘은 20만개가 넘는 각각 다른 크기의 돌을 접착제도 없이 쌓아서 만들었어요. 3층 구조이고 높이가 45m로 상당이 높아요. 1층 외부회랑의 길이만 160*145의 크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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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욘은 해자와 외벽이 없어요. 왜 그럴까요? 바로 앙코르톰의 성벽을 외벽으로 보고 앙코르톰의 해자를 바이욘의 해자로 해석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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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욘은 상당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자야바르만 7세 때 만든 사원이라고 하지만 수리야 바르만1세(1002-1050)때 만든 불교사원을 증축해서 만들었어요. 그리고 바이욘을 만들면서 설계를 최소 2차례 이상 변경하다 보니 구조가 상당이 복잡하고 내부의 높낮이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지요. 또한 자야 바르만8세(1243-1295)때 국교를 힌두교로 바꾸면서 바이욘 사원도 불상을 파괴하고 부조를 바꾸면서 구조가 많이 바뀌지요. 그래서 지금도 내부 회랑은 미로처럼 복잡해요.
자야바르만 7세가 남긴 수많은 유적 중에 핵심이 바이욘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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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욘에서 가장 유명한건 사면상이에요.
바이욘을 보고 있으면 중앙에 우뚝 솟은 탑이 있는데 그 탑은 신들이 사는 메루산을 상징하고 있어요. 그리고 중앙탑을 항해 있는 많은 탑을 볼 수 있어요. 바이욘의 탑의 숫자는 정확하게 알 수 없어요. 다만 앙코르톰의 문에 젓에 바다젓기를 하는 석상이 54개 여서 탑이 54개로 추정 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49개의 흔적만 확인 된답니다. 현재는 37개의 탑이 남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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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얼굴이 누구의 얼굴이냐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의 학설이 있어요.
첫째는 관세음보살의 얼굴이라고 봐요.
자야바르만 7세는 대승불교를 숭배 하면서 바이욘을 불교사원으로 만들었어요. 불교에서 가장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의 얼굴을 사방으로 새겨서 온 사방에 있는 백성들을 널리 보살피라고 한 것으로 봐요
두 번째는 자야바르만 7세의 얼굴로 봐요.
그는 바이욘 사원을 만들면서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동시에 역사에 남기고 싶었던 것으로 봐요
세 번째는 부처이자 동시에 자야바르만 7세라고 봐요.
그는 붓다라자. 즉 부처의 화신이라고 생각 했어요. 그래서 두 가지 얼굴이 섞여 있는 모습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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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보면 참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어요. 넓은 이마. 두터운 입술. 지긋이 감은 눈. 은은한 미소. 자세히 보면 같은 얼굴이 단 하나도 없어요.
참 단아한 미소를 가지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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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욘을 오면 꼭 봐야할 것이 있어요.
바로 일반사람들의 생활상을 부조해 놨답니다.
그의 고향인 반테이츠마 와 바이욘의 부조를 보면 군대의 행진. 신에 대한 경배, 그리고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부조해 놨어요.
그것 때문에라도 바이욘은 꼭 봐야할 아주 중요한 핵심 사원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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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와 당시 생활상을 보러 떠나 볼까요?
바이욘의 동문이에요.
사면상이 선명하게 보이시죠?
천년전 이곳을 만든 자야바르만 7세의 힘을 느낄수 있답니다.
툭툭이나 차량은 서문에 대기시켜놓으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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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저와 동남쪽 외부 회랑을 보러 가요
동문에서 왼쪽으로 꺽으면서 부조를 보면 되요
처음에는 군대의 행진이 나와요
자세히 보면 이 사람들은 수염이 있고 머리를 묶었어요. 이들을 중국인이라고 본답니다. 당시 중국의 송나라에서 원군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중국의 원군이 아닌가 봐요, 용병이라는 이야기도 있어요.
머리를 뒤로 넘기고 귀를 크게 표현 했어요. 캄푸차 데사의 군대랍니다. 몸에 감고 있는 밧줄은 부적의 의미라고 봐요
전투부대가 지나고 보급부대가 나오지요
이번에는 한 가족이 가고 있어요. 아내가 뒤를 따르고 남자가 작은아이는 무등을 태우고 큰아이는 걸려요. 양이나 염소종류를 몰고 가지요
불 붙이는 남자에요
발 세 개의 화덕에 불을 붙이고 있지요. 지금도 이런 화덕을 쓰고 있어요.
뒤에 수레가 있네요. 16폭의 수레를 지금도 쓴답니다.
자라를 건네는 여인 이라고 불러요
한가운데 사진을 보면 여인이 남자에게 자라를 건네고 있어요. 남자는 자라의 목을 잡고 있지요. 캄보디아는 자라를 쩌 먹기도 해요. 그렇지만 식용의 의미보다는 자라의 껍질이 단단하니 부적의 의미로 본답니다
새 사냥을 하고 있어요.
입으로 화살이이나 무기를 쏘고 있지요. 뒤에 조수가 새를 한 마리 잡았어요.
전쟁을 나갈 때 병사들이 소를 잡는 제를 지내는 것으로 추정 합니다
소의 고삐가 나무에 묶여 있어요
. 사람들이 소의 꼬리를 잡고 있고 창을 들고 춤을 추고 있어요. 힌두교에서는 소를 먹지 않습니다.
시바신의 탈꺼리는 흰 황소인 난디 에요. 언젠가는 시바신이 환생해서 난디를 타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니 그때 일할 난디가 어떤 소인지 모르니 흰 황소를 먹지 않고 일도 시키지 않는답니다.
지금 저 소는 다른 색의 소 일 것으로 추정 됩니다.
남쪽 제일 끝부분의 중국인 마을이랍니다.
아주 유명한 부조랍니다 아주 다양한 해석이 있어요.
그중 몇 가지를 이야기 할게요.
이곳을 서당이라고 한다. 그래서 해석해 보면...
1. 보호자다(뒤로 사람들이 더 있다)
2. 훈장이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3. 서당 안에 있는 등 이다
4. 서당에 낼 학비로 가금류(닭?오리?)를 가지고 왔다.
6. 제일 뒤에 학생들이 졸고 있다
5. 졸고 있다고 선생님에게 일러주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이곳을 한의원이라고도 한다.
1. 환자의 보호자들이다
2. 한의사다
3. 한약을 매달아 놨다
4. 약값으로 가금류를 가지고 왔다
6. 제일 뒤에 환자가 쓰러졌다
5. 쓰러진 걸 의사에게 알려주고 있다.
또 다른 학자는 이곳을 경매장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1. 경매에 물건을 낸 사람이다
2. 경매사다
3. 경매장의 등이다
4. 물건과 교환할 가금류를 가지고 왔다
5,7 경매사와 물건의 가격을 손가락으로 흥정하고 있다
6. 가격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해석이 가능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곳에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제 남쪽 외벽으로 이동해요
(동남쪽에서 남쪽으로 바로 이동할 수 없어요(13년11월)
이곳에서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면서 본답니다.
제일 밑에는 톤레삽에 노를 젓는 장면이 나온답니다.
중간에 보면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있어요.
그 앞에는 고관대작들이 앉아 있어요. 목걸이로 신분이 높음을 알 수 있죠.
제일 위에 큰 사람은 왕으로 추정 한답니다
짐승에게 놀라서 나무위로 도망간 사람의 모습이에요
송아지에게 젓을 먹이는 장면이에요
심부름을 잘해서 칭찬을 받고 있는 장면이에요
천장모양이나 머리 모양을 봤을 때 귀부인 집으로 추정 한답니다.
병원이라고 봐요
누워 있는 여인은 아이를 놓기 위한 장면으로 보죠.
산모 앞에 여인은 머리끈을 묶은 것으로 봐서 무당으로 본답니다
오른편을 보면 머리에 사슴모양의 장식을 한 사냥꾼이 활을 들고 있어요.
등에는 활통이 있어요. 그 뒤는 조수가 따라 다니지요
앞에 소 한 마리는 활에 맞아 쓰러져 있고 한 마리는 울부짖고 있어요.
투계 장면이랍니다.
오른쪽은 수염이 있고 머리를 묶은 중국인과 왼편의 크메르인 닭싸움을 하는 장면이에요. 당시에 투계가 성했음을 알 수 있어요.
투계장면 위를 보면 중국인들이 톤레삽에 가서 노는 장면이에요
그 위는 다시 크메르인이 투망을 던지고 있어요
멧돼지 싸움을 하는 장면입니다
크메르사람들의 전통무예를 연마하는 장면이랍니다.
전쟁장면이 나오니 훈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주위의 사람보다 크게 표현한 걸로 봐서 아주 중요한 부조인 것 같아요.
당시에 사원내부는 아무나 드나드는 곳이 아니라 고위승려 등 중요한 인사들만 나들었어요.
이곳 외부회랑은 일반 백성들이 자유롭게 드나들었던 것으로 추정 한답니다.
이곳은 1177년 참파의 침략으로 4년간 참파의 지배를 받았던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위대한 왕인 자야바르만 7세는 주변의 호족들을 모아서 참파를 물리첫어요.
이 부조에서 보이듯이 크메르인이 참파의 목뒤에 큰 창을 들고 있어요.
위대한 왕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음식을 하는 장면이랍니다.
중앙의 부분을 보면 동물을 삶아 먹으려고 해요.
이곳의 기록을 정리한 사람들은 프랑스의 학자들이에요. 프랑스는 개를 먹지 않아요. 그래서 이 부조의 동물은 돼지라고 해석을 하지요. 그런데 대가리의 크기와 꼬리의 길이 몸통을 볼 때 아무리 봐도 개 같아요.
크메르 사람들은 개를 삶아서 수육처럼 먹는답니다
사원을 만드는 장면이랍니다.
한쪽에서는 땅을 다지고 한쪽은 돌을 옮기는 장면을 부조했어요
신을 위해 춤을 추는 압사라 랍니다
뭔가 분위기가 다르죠? 자야바르만 7세의 압사라는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요. 좌우 대칭도 맞지 않아요. 눈도 반쯤 감은것 같이 표현했구요 눈썹도 크게 표현했지요. 앙코르왓보다 훨씬 거칠지만 편안하게 보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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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회랑의 중앙이에요
이곳에서 저쪽으로 가는 사람이 거의 없답니다.
신을 위해 경배 하는 장면과 군대의 행진 등이 주를 이룬답니다
북서쪽 코너에 서커스 장면이 있어요.
시간 여유가 있다면 한번 가보는 것도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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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남쪽에서 위로 올라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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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성소를 들어가 봐요
자야바르만 7세는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면서 따쁘롬을 만들고 반야바라밀다밀, 문수보살을 안치 했고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면서 쁘레아 칸을 만들고 로케스바라, 관세음보살을 안치 했어요.
그리고 그 자신을 위한 사원 바이욘을 짓고 중앙 성소에는 높이 3.6m의 부처상을 안치 했어요. 가장 자비로운 미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답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8세 때 불교사원에서 힌두교 사원으로 바뀌면서 불상이 파괴된답니다. 중앙성소를 만들 때 불상부터 먼저 만들고 뒤에 위에 탑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불상을 파괴하지 않고는 나갈수가 없었죠. 그래서 불상을 깨서 중앙성소 밑에 있는 우물에 버려 버렸어요.
그것을 1933년 당시 앙코르 템플 큐레이터인 조르쥬 트루베가 발견 한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복원했어요
비히어 쁘람삘 로벵에 안치된 바이욘의 부처상이랍니다.
승리의 문으로 가다 보면 왼편에 화장실이 하나 있고 오른편에 보면 작은 사원이 하나 있어요. 그곳에 있답니다. 나가상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한적하고 조용한 사원이니 한번 가 보세요
중앙성소에서 동북쪽 기둥의 한 모둥이에 있어요.
대부분의 부처상은 훼손되거나 힌두승려로 변형했지만 이곳은 원형이 그대로 살아 있어요. 수염이 없어요. 팔을 밑으로 합장을 했어요. 다리는 가부좌를 하고 있지요
크메르의 미소 라고 불리는 석상이에요.
중앙성소에서 북문의 오른쪽에 조그만 광장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 앞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죠.
앙코르 유적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진은 앙코르왓의 탑이 있는 정면 사진과 비로 이곳 크메르의 미소랍니다. 남아 있는 석상 중에 가장 자비로운 미소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져 있어요
이렇게 석상을 액자에 담은 것 같이 사진을 찍으면 참 이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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