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5편 자항기르 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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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 Lim의 파키스탄 여행기 5편 자항기르 톰

Lucky 1 2450

나는 50대 중반으로 같이 여행을 다니던 막내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부득이 혼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일정은 2007년 7월 15일 출발하여 파키스탄의 라호르 - 라왈핀디 - 탁실라 - 칠라스 - 훈자를 거쳐 카라코롬 하이웨이를 타고 7월 27일 중국으로 출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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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나의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2007년 7월 17일

 

라호르에서의 둘째날 - 무굴제국 황제무덤 자항기르 톰

 

 

아침에 일찍 잠이 깨었다. 어제 피곤하다고 일찍 잠들었던 것이 일찍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나라라는 긴장감이 일찍 일어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잠을 깨운 것은 시끄럽다 못해 요란한 새소리였다. ‘아침! 눈부신 햇빛과 함께 들려오는 새소리에 잠이 깬다.’ 정말 낭만적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 소리에 잠이 깬다는 것이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박집 어디에서 이렇게 요란하게 우는 새가 있던가? 분명 새장은 보지 못했으니 집에서 기르는 새는 아닌데 어딘가 열려져 있는 창문 앞에 새집이 있는지 무척 시끄럽다.

 

6시가 될 때까지 참다가 살금살금 일어나 조용히 세수를 하고 옷을 입었다. 한번 나가면 쉽게 돌아올 수 없으니 빠진 것이 없는 가 준비를 철저히 했다. 특히 밭데리와 메모리를 신경썼다. 사장을 깨워 민박집 문을 열어달라고 하여 밖으로 나왔다. 민박집은 한밤중이었지만 밖으로 나오니 아침은 틀림없이 찾아오고 있다. 부지런한 청소부들이 거리를 청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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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호르 디펜즈 G블록 앞의 거리. 라호르시의 다른 어느곳 보다 깨끗한 거리다.



파키스탄 라호르에는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가 있다. 낮에도 가끔 보는 경우도 있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마치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 할 때 같이 거리를 쓸어가고 있다. 청소부들은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는데 오늘 내가 보기에는 여자가 월등히 많았다. 아직 완전포장이 되지 않아서 흙모래가 그대로 있는 거리를, 물도 뿌리지 않아 그대로 흙먼지로 변하는 거리를 커다란 빗자루로 열심히 쓸고 있다. 그러나 거리의 쓰레기를 쓸어서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뽀얗게 날아올랐던 흙모래는 잠시 후 다시 내려앉고, 한곳으로 쓸려져 치워졌던 모래는 잠시 후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고, 자동차의 바퀴에 날리고 다시 어제 밤에 있었던 제자리로 돌아간다. 아마 내일 다시 쓸리겠지.

 

버스 정거장에서 한참을 기다려 5번 버스를 탔다. 어제 보다는 이른 시각이어서 그런지 다니는 차들도 많지 않았고, 버스 배차시간도 멀었던 것 갔다. 5번 버스 종점까지 갔다. 버스 종점은 라호르시내의 기차역이었다. 그 옆에 커다란 버스 터미널이 있고, 여러 가지 버스가 들락거린다. 그중 5번 버스는 ‘대우버스’라고 그들만 서는 장소가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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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호르 시내버스,




터미널 옆의 시장에서 밥 먹을 곳을 찾았다. 파키스탄을 다녀온 기행문에는 여기저기에 먹을 만한 식당들이 널려있는 것 같았고, 또 생각지도 않게 맛있는 음식을 잘 사먹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나는 행운이 없는 것인지 그런 식당이 눈에 띄지 않는다.

 

파키스타니 몇 명이 앉아있는 식당을 들어가 볶음밥에 닭다리 두 개를 얹어 먹었다. 맛은 고사하고 살기위해서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계산을 하는데 실수를 했다. 그렇게 주의한대로 먹기 전에 가격을 물어보았어야 하는데 나중에 얼마냐 하니까 60루피를 달라고 한다. 아니 음료수 값은 아직 계산하지 않았으니 닭다리 두 개에 60루피 인 것이다. 서울의 가격을 따진다면 비싸다고 할 수 없지만 파키스탄 현지사람들의 식사치고는 비싼 가격이다. 실수다 실수 파키스탄 상인들을 대하는 수업료를 치렀다. 금발머린지 금발 염색을 했는지, 무척 친절하게 안내하고 서비스하기에 잠시 방심한 것이다

 

또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말끔하게 차린 신사(gentleman)분을 찾아 ‘자항기르 톰’을 물어보았다. 그러나 처음 만난 몇몇 사람은 한결같이 고개를 갸웃하며 모르겠다고 하거나 아니면 엉뚱한 다른 곳을 구경하라고 한다. 이게 친절일까? 이렇게 하기를 몇 번 한 신사(紳士)분이 ‘자항기르 톰’을 가려고 한다니까 아주 반색을 하며 22번 버스를 타라고 알려준다. 그러더니 내가 가진 메모지에 우르드어로 메모를 해 준다. 이 사람의 행동은 외국인을 많이 안내해본 경험이 있는 것으로 길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현지 언어를 모르는 외국인이 현지인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될 수 있도록 자기들의 언어로 써 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메모의 내용을 추리해 보면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 ‘얘 자항기르 황제의 무덤을 간단다. 22번 버스 태워서 바띠에서 내려줘라. 그리고 자항기르 무덤이 있는 마을 가는 칭칭이를 태워줘라’ - 나는 몰라도 이 메모를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자항기르 톰’으로 안내했을 것이다.

 

사실 파키스탄에서 도움을 받거나 친절을 기대하려면 신분이 높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슬람교 전통은 나그네를 잘 대해주는 것이다. 그들의 초기 정착지가 사막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물과 식량이 떨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무슬림들은 모든 길 잃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없는 물도 나누어 마시고, 음식이 모자라도 나누어 먹으며 살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언제 반대의 입장이 될지 모르는 것이 사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행자를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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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시외버스, 라호르를 조금 벗어난 곳으로 가는 버스인데 진짜 파키스탄 버스라는 느낌이 팍- 든다.요란한 치장에 시커먼 매연을 유감없이 뿜어댄다. 사진에서도 버스뒤쪽의 뿌연 매연이 보일런지...




뭐 언젠가 읽은 글에서는 어느 종족인지 그 나라에서는 여행자가 오면 음식대접은 물론 그동안 여자를 품어보지 못했을 테니까 아내까지 양보하고 주인은 다른데 가서 자고 온다고 하는 말도 있다. 얼 - 쑤 얼마나 좋을까? 여자가 제일 선망하는 남편의 직업은 숙박업(宿泊業)이었을 거다. 이슬람교 윤리에 의해 그 여자는 매일 딴 남자와 잠자리를 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러한 여행자를 대접하는 전통도 이슬람의 윤리를 따지고 실천할 만한 사람들에게나 있는 것이지, 지금 당장의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지금 파키스탄의 형편은 그런 윤리를 널리 기대하기도 어렵다.

 

1947년 영국 식민지에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파키스탄 독립의 아버지 ‘진나’의 ‘무슬림은 무슬림의 국가를!’이란 강한 주장이 없었다면, ‘간디’의 달변에 인도(印度)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독립국가가 된 이후로 얼마나 어지러웠나?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인정해야 하고, 무슬림이 70%나 사는데도 인도로 방향을 틀은 ‘카슈미르’지역 때문에 홍역을 치러야 했고, 웬 뚱뗑이 같이 중국이 끼어들어서 카슈미르의 1/3이나 잘라가는 아픔을 겪었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서북변경주는 아직 주 정부의 완전한 통치 속에 들어오지 않았고, 훈자왕국이란 발티스탄 왕국이 파키스탄의 품에 들어온 지도 얼마 되지 않는다. 영국 식민시대에 부(富)를 쌓은 남부인들을 경계하고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수도를 카라치에서 새로운 계획도시 ‘이슬라마바드’로 옮겼는데 경제는 오히려 죽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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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독립의 아버지 ‘진나’ 간디와 같이 영국유학을 한 사람으로, 간디가 종교와 관계없는 인도를 원했다면 진나는 ‘무슬림’과 ‘흰두’의 갈등을 이해하는 독립을 원했다.




이것이 지금 파키스탄의 형편이다. 더구나 지난 9,11테러 이후에 미국의 아프간 공격이 계속되니 ‘탈레반’과 ‘오사마 빈 라덴’의 지하드가 죽겠다고 한다. 처음부터 국가단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이 단체에게는 국경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을 넘나들면서 제 좋을 대로 한다.

 

파키스탄에서 위험하지 않게 다니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을 구분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나 지식적(知識的)으로나 부유한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을 외국인인 우리가 구분하는 방법은 옷차림 밖에 없다. 어떤 옷을 입었던지 제대로 차려 입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옷이 깨끗해야 한다. 제대로 차려입은 옷이라도 땟국이 꼬질 하게 흐르면 그것은 가짜다. 팔소매와 칼라에 절은 때가 있으면 그것도 가짜다. 머리를 언제 감았는지 모르면 그것도 가짜다. 이렇지 않고 시계를 차고 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이라면 믿을만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길을 물어본다면 거의 영어사용이 가능하며 또 친절하다.

 

그러나 꼭 이런 공식이 항상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도 비록 지금은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지만 바른 맘과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무수히 많듯이 파키스타니들도 그렇다. 오늘 내가 경험한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22번 버스를 타고 차장에게 메모를 보여 주었다. 그러면서 ‘자항기르 톰’에 간다고 했더니 알겠다고 한다. 그러나 차장이 내릴 곳을 가르쳐 주기도 전에 앞에 앉아있던 파키스타니가 다음에 내려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도시의 외곽지역쯤 되는 곳이었다. 차비가 8루피였으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버스에 내려서 어느 곳으로 갈까 망설이고 있는데, 같이 내린 사람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자항기르 무덤은 이쪽으로 가야 돼 따라와.’ 하며 내 손을 잡고 길을 건넜다. 신호등이 없는 사거리에 제 멋대로 운전하는 파키스탄의 도로를 같이 건너 어느 가게 앞으로 가니 칭칭이 서 있다.

 

“자항기르 황제의 무덤은 여기서 칭칭을 타고 가야 돼.”

 

그 사람의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같이 칭칭을 탔다. 칭칭은 아스팔트 포장되어 있는 시골길을 한 10여분 달려간 것 같았다. 기찻길을 건너서 도로가 갈라지는 곳에서 나보고 내리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는 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키며

 

‘자항기르 황제의 무덤은 저쪽으로 가면 되, 바로 이것이 황제 무덤의 담이니까’

 

칭칭은 내가 가야할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갔다. 칭칭 요금은 그 사람이 내겠다고 나보고는 그냥 내리라고 한다. 바로 조금 전에 파키스타니들의 친절에 대해서 말했는데 바로 내가 그 친절한 파키스타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의 옷이 내가 지적한 대로 고급으로 화려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시골에 사는 사람치고는 옷의 구색을 갖추어 입고 있었던 것 같다.

 

칭칭에서 내려 높이 3미터 가량 되는 붉은색 담을 왼쪽으로 끼고 ‘자항기르 톰’의 정문을 찾아갔다. 칭칭을 내린 곳에서 약 500미터 정도 가야 될 것 같았다. 오른쪽으로는 공터가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쉽게 시장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장이 열리지는 않았고,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올 때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시장 건너 철길을 넘어 야트막하고도 퇴락한 이슬람 건축이 있다. 이것이 ‘자항기르’ 황제 부인의 무덤인 ‘누르자한 톰’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역시 돌아가는 길에 들러 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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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항기르 황제의 무덤 '자항기르 톰'에서




높은 담의 끝이며 마을의 시작이 되는 곳에 ‘자항기르 톰’의 정문이 있다.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9시 20분 이었다. 아침부터 일찍 서두른 덕에 꽤 이른 시간에 목적지에 올 수 있었다.

 

무굴제국의 4대 황제인 ‘자항기르’는 3대 ‘악바르’ 황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악바르’ 황제는 지금 인도(印度) 땅 아그라를 수도로 정하고 성곽을 정비하고 하였으나, 왜 그런지 아그라를 버리고 ‘파테푸르 씨크리’로 수도를 옮겼다. 바로 ‘자항기르’는 새로운 수도 ‘파테푸르 씨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뛰어난 두뇌를 가지고 있었는지 페르시아어와 터키어, 아라비아어, 힌디어를 통달했으며, 역사, 지리, 수학 등에 정통했다고 한다. ‘악바르’는 새로운 수도 ‘파테푸르 씨크리’에 정착하려고 무진장 애를 섰지만 절대적으로 식수가 부족하여 10여년 만에 다시 아그라로 돌아왔다. 그래서 ‘자항기르’는 아그라에서 왕좌를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 자신도 왜 그런지 아그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호르로 옮겨와 살게 되었으며 그의 무덤도 라호르 근처에 남게 된 것이다.

 

‘자항기르’는 앞서 말한바와 같이 명석한 두뇌로 국민들을 사랑하며 잘 다스렸다. 그러나 왜 그런지 결혼 후 점차 정치에서 손을 떼고 여자와 술 노래만 즐기기 시작했다. 결국 제국의 전권(全權)은 부인인 ‘누르자한(Noor I Jahan 또는 누르 마하이 Noor Mahai)’과 처가식구들의 손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누르자한은 자기 아버지‘이티마드 웃 다울라(Itmad ud Daulah)’가 죽자 갖은 사치를 다해 황제의 무덤에 버금가는 무덤을 아그라에 만들었으니 지금 인도 아그라에서 ‘베이비 타지마할’이라고 일컫는 ‘이티마드 웃 다울라(Itmad ud Daulah)’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훗날 5대 황제 ‘샤자한’에 의해 만들어진 타지마할의 모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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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그라에 있는 자항기르의 장인 ‘이티마드 웃 다울라 톰’. 자항기르의 부인인 ‘누르자한’의 힘에 의해 아름다운 묘원으로 꾸며졌다. 여기는 방문하지 않아 사진이 없어 인터넷에서 구했다.





‘자항기르’의 죽음이후에 황제의 권력은 바로 ‘샤자한’에게로 옮아갔다. 그렇다면 아버지 ‘자항기르’의 무덤을 만든 사람이 누구일까? 어느 곳에서는 권력자가 자기의 사후세계(死後世界)를 위해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자기의 무덤을 만든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진시황제의 능묘(陵墓)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며, 크메르제국의 앙코르왓도 그러한 예로 짐작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권력자 사후(死後)에 그의 후계자가 선왕의 무덤을 꾸미는 것도 보통의 일이다. 인도 아그라의 타지마할이 예로 들만한 것이다. 아내 ‘뭄바이 타지’가 죽자 황제 ‘샤자한’이 아내를 위해 꾸민 것이다. 물론 지금 ‘샤자한’이 같이 묻혀있으니 자기의 무덤을 만들었다고 말 할 수도 있으나. 처음 ‘샤자한’의 계획은 지금의 타지마할과 마주보는 곳에 같은 능묘(陵墓)를 꾸밀 생각이었다. 나는 이 ‘자항기르 톰’을 무굴제국 최고의 건축대왕 ‘사쟈한’의 건축이라고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200루피의 거금을 내고 허술한 문을 들어서니 - 아마 이곳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광객은 오직 나 하나밖에 없었고, 묘역(墓域)에서 만난 사람들은 도저히 입장료를 내고 들어올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 넓게 조성된 풀밭이 눈을 시원하게 했다. 군데군데 나무가 있는데 나무의 나이가 녹녹치 않다. 거대한 고목으로 성장한 나무들이었다. 밖에서 보아 담장(牆)으로 보였던 것은 순수한 담만이 아니라 작은 방(Room)을 가지고 있는 회랑(回廊)과 같은 건물이었다. 그러나 밖에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에서 보아도 무척 낡고 퇴락(頹落)하였다. 이곳을 깨끗하게 꾸미기에는 아직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200루피의 입장료 값은 하려고 정원사들이 여기저기에서 정원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도에 남아있는 같은 무굴제국 황제의 무덤에 비해서는 아직 초라한 모습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폭 5미터에 붉은 벽돌이 깔린 길이 곧게 뻗어있다. 무굴제국의 정원은 직선형이 많다. 하여튼 곧게 뻗은 길 끝에 또 하나의 문이 있고, 문의 양쪽으로는 회랑이 이어져 있다. 그러나 저 앞에 있는 문은 진짜가 아닌 가짜 문으로 문(門)의 형태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무굴제국 건축의 특징 중의 하나가 거의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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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항기르 묘역중 자항기르 톰 정문. 잘 정비된 정원과 붉은 사암의 완벽대징의 문이 아름답다.





그 길을 중간쯤 걸어간 곳에 좌우로 갈라지는 길이 나타난다. 즉 중간에 네 갈래의 나누어지는 접점이 있는 것이다. 이것 또한 대칭으로 왼쪽과 오른쪽의 모습이 같다. ‘자항기르 톰’에서도 오른쪽과 왼쪽에 문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쪽 문이 가짜 문이 아니라 모두 진짜 문이다. 왼쪽에 있는 문은 보수를 위해 비계(飛階)를 달아 놓았는데 오른쪽의 것 보다 조금 아주 조금 작은 것 같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을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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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프칸 톰의 정문, 자항기르 톰의 정문과 대칭되는 위치에 같은 모습으로 지어졌다. 다만 그 규모가 조금 작다. 그는 황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은 ‘악바리 사르이 AKBARI SARAI’라고 하며 ‘자항기르 톰’과 ‘아시프 칸(Asif Khan) 톰’의 사이에 있다.”

라고 쓰여 있다. 따라서 오른쪽의 문으로 들어가는 묘역은 ‘자항기르’의 묘역이 되고, 왼쪽 문으로 들어가는 곳은 ‘아시프 칸’의 묘역이 되는 것 같았다. 안내판에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아시프 칸(Asif Khan)이 누굴까? 인터넷에서 본 어느 글에는 ‘자항기르’의 둘째아들인가 라고 쓰여 있기도 한데 정확한 근거를 밝혀놓지 않았다. 단지 내가 짐작하기로는 이 묘역은 ‘샤자한’이 만들었고, 샤자한의 장인의 이름이 아시프 칸(Asif Khan)이다. 아시프 칸(Asif Khan)은 누르자한(Noor I Jahan)의 오빠로 ‘자항기르’의 처남이 된다. 사자한은 왕자시절 ‘꾸람(Khurram)’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공공연하게 아버지에게 대들고 왕권경쟁에 있는 형제들을 죽였다. 여기에는 자항기르의 처남들인 ‘아시프 칸(Asif Khan)’과 ‘모하밧트 칸(Mohavat Khan)’의 도움이 있었다. 이것이 ‘자항기르’로 하여금 정치에서 멀어지게 했고, ‘샤자한’은 그의 무덤을 아버지의 묘역안에 포함하여 만들게된 것이 아닌가 한다. -아주 소설을 쓴다.

 

물론 아시프의 스페링이 ‘Asif Khan’과 ‘Asaf Khan-인도에서 본 기록’으로 아주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어차피 발음을 표현한 영문자라면 아무런 걸림이 될 수 없다. 우르드어를 읽을 수 있다면 관에 쓰인 이름을 읽으면 한방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도 글자를 읽을 수 없는 탓에 이런 추측이 난무하게 되는 것이다. 아 학문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오른편 문을 선택하여 가니 입구에 펀자비를 입은 파키스타니 몇 명이 한가롭게 앉아 ‘뭐 볼게 있다고 이렇게 일찍 찾아오는 건가?’하며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파키스타니들의 특징 중의 한가지라고 생각되는 것이 사람을 쳐다보는 것이다. ‘멍하니 뚫어져라’라고 하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아주 아무 생각 없이 그러나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 눈길이 부담스럽도록 뚫어져라 쳐다본다. 어찌되었던 부담스런 시선이지만 아랑곳없이 문을 들어서면 역시 좌우로

회랑(回廊)같이 작은 방들이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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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한 정원의 분수대, 네 개의 미나르가 솟아있는 ‘자항기르 톰’





문 오른쪽으로 담에 바짝 붙어서 종합상사포장마차 정도의 크기로 매점이 있다. 당장 눈에 뜨이는 물건은 음료수밖에 없는데, 이제 막 문을 열기시작해서 테이블을 펼치고 있었다. 정원에는 키 높은 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나무의 대체적 모양이나 나무 꼭대기에 몇 장의 잎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야자나무 비슷하나, 결정적인 것은 열매가 열리는 장소가 틀리다. 내 눈길을 끈 것은 열매를 모두 봉투로 쌓아 놓은 것이다. 왜 그럴까? 귀한 것이라서 혹시 새라도 쪼을까 걱정이 돼서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문을 들어서면 늘 그렇듯이 또 하나의 커다란 정원이 나타난다. 이 정원도 꽤 넓은 데 역시 네모반듯하게 만들어져 있고 단정한 길이 반듯하게 정원을 가로세로 나누고 있다. 그리고 길과 함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수로를 따라 길이 나있다. 정원의 중앙에는 높이 약 1미터 정도의 단이 마련되어 있고, 단의 가운데는 분수대(噴水臺)가 꾸며져 있다. 부수대의 크기는 어림짐작으로 약 5×5미터 정도의 넓이는 될 듯하였다. 가운데 분수에서 물이 뿜어지고, 연못을 채우면 물은 출수구(出水口)를 통해 사방으로 흐르게 되어있다. 네 방향의 출수구도 마치 빨래판 같은 홈을 파 놓아 소리 지르지 않고 작을 폭포를 이루며 넘쳐흐른다. 그리고 물은 준비된 수로를 따라 정원을 조용히 흘러 풀과 나무를 적시고 공기를 식히고 정원을 빠져 나간다.

 

무굴제국의 장인(匠人)들은 물을 잘 다루었다. 어제 본 라호르포트에서도 그렇고, 오늘 ‘자항기르 톰’에서도 정원을 온통 가로세로 지나고 있는 수로는 조용히 제 방향으로 물을 흐르게 만든다. 그 미세한 기울기 조절은 고도의 측량기술에서 오는 것이다.

 

이 분수대에 올라가서 ‘자항기르 톰’을 보면 나지막하게 깔려 안정된 모양으로 서있는 톰이 한눈에 잘 들어온다. 이 모습이 아마 무굴제국 황제들의 전통적인 무덤형식인지 직사각형의 커다란 묘(墓)건물은 안정되게 단층으로 되어있고, 사방의 귀퉁이에는 약 20미터가 조금 넘을 듯한 미나르가 서있다. 미나르는 4층위에 종답을 얹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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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문양이 가득차 있고, 깨끗하게 관리되어있는 자항기르 톰의 내부





그러나 특징적인 것은 건물의 중앙에 돔(Dom)형의 지붕이 없다. 무굴제국의 묘(墓)라고 하면 세계문화유산이며 세계의 불가사의라고 일컫는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꼽는다. 타지마할의 가장 큰 아름다움은 풍만하게 둥근 대리석 지붕이다. 정말 달밤에 보면 돌로 만들어진 지붕이 가볍게 공중에 떠있다. 그러나 ‘자항기르 톰’에는 돔(Dom)형의 지붕이 없다. 인도 델리에 있는 ‘후마윤 톰’과 거의 비슷한 모양인 듯한데, 역시 ‘후마윤 톰’에 있는 지붕이 빠져있다. 지붕이 없다는 것은 안정되기는 해 보이지만 뭔가 허전하고 마치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든다.

 

콧수염을 기른 까무잡잡한 파키스타니 한명이 뛰어 나온다. 얼른 손을 잡아끌면서 가장 친절한 듯이

 

“여기에다가 신발을 벗어 둬라. 우리 친구가 잘 지켜준다.”

 

이 사람이 누구냐! 소위 가이드다. 이렇게 유적 앞에 하염없이 지키고 있다가 관광객이 오면 - 꼭 외국인이어야 한다. - 설명을 해 주는 사람이다. 인터넷의 많은 글을 통해 이미 이 사람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거의 한 목소리로 불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자신을 가이드라고 소개하고, 필요한가를 물은 다음에 안내를 하면 별 문제가 없으나, 그냥 은근슬쩍 어느 때인가 따라 붙어 조금 거들고 끝에 가서 정해지지도 않은 돈을 요구하기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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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선명한 색채를 뽐내고있는 자항기르 톰 내부 벽화. 어려운때 관리소홀로 더럽혀진 모습이 그대로 있다.





그러나 나는 인도여행에서

 

‘데리고 간 가이드가 없다면, 이 사람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유적을 확실하게 구경하자.’

 

고 주장한 바가 있다. 물론 사람들마다 다 여행의 방법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한가지일 수는 없으나 나는 이 사람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영어 실력은 형편없어서, 역시 형편없는 영어실력을 자랑하는 나와는 쌍벽을 이뤄 의사소통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너 뭐니?”

“나? 난 가이드”

“난 영어 못해 그래서 가이드 필요 없다.”

“그래? 난 가이드다!”

“응 나는 영어로 말도 못하고, 그래서 듣지도 못한다.”

“응 알아! 난 가이드야”

 

묘역(墓域)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방을 돌아가며 작은 방이 계속 되었다. 중앙에 묘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전실이 있으며 전실(前室)만큼은 잘 수리(受理)가 되어 있다. 복원(復元)이 아니라 깨어지고 부셔져 그 조각을 찾을 수 없는 것은 그대로 없어진 채로 있고, 오랜 세월동안 방치되어 꾀죄죄하게 때(오염(汚染))가 뭍은 부분은 그대로 수리하였다. 그래서 마치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소풍 와서 코딱지를 발라놓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지저분한 것도 있다.

 

 

 

1 Comments
Lucky 2011.01.29 10:54  
자항기르 톰 뒷 부분이 업데이트가 않되었습니다. 나머지 부분은 다음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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