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로 가는 길-19 바라나시와 사르나트
이번 여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막내도 중 2가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일정은 3주간 뭄바이 - 아우랑가바드 - 카주라호 - 바라나시 - 자이푸르 - 아그라 - 푸쉬가르 - 델리입니다.
2005년 7월 27일(수요일)
바라나시와 사르나트
기차는 조금 연착되어 바라나시에 6시경 도착했다. 십 여 명의 한국인이 뭉쳐 내려서 역 앞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오토릭샤 흥정을 했다. 우리와 수원대 다니는 김군은 ‘바바게스트하우스’로 가기로 하고, 다른 학생들은 ‘산티게스트하우스’로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고돌리아 사거리까지 릭샤를 타고 갔다. 가이드 북 같은 데는 ‘가트’까지는 오토릭샤가 들어갈 수 없으니 ‘사이클릭샤’를 타라고 하였지만, 처음 찾아가는 길이라 배낭을 메고 지도를 보면서 걸어갔다. 지도에는 골목길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그 골목길에 도착해 보니 도저히 ‘길’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배낭을 지고 가게되면 마주 오는 사람과 정상적으로 피해 갈 수 없을 정도의 좁은 골목에, 가끔 소가 한 마리 길을 막고 있다. 그 사이를 비집고 가는데 소가 파리라도 쫓을 양으로 그 더러운 꼬리라도 흔들면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 골목은 쓰레기와 짐승들의 똥으로 악취속에 잠겨있는데, 그 골목의 한쪽 끝에 바바게스트하우스가 있다.
바라나시 골목을 누비는 소님?들
인도에와서 여러 가지 열악(劣惡)한 환경을 만났지만 바라나시같이 끔찍한 곳은 없었다. 바바게스트하우스도 마찬가지 였다. 안주인 ‘쁘리띠-귀엽다는 뜻의 영어가 아니라 인도의 수많은 여신들 중의 이름이라고 한다.’는 ‘친따라’의 인도 가이드로 다니다가 인도가 좋아서 이곳 바바게스트의 둘째아들과 한 두달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한국사람이라서 많은 한국인이 편하게 이용하고 있고, 또 편하게 대해주었다. 우리도 바라나시 있는 동안 불결하고 지저분한 환경에 비해 마음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또 우리가 있을 때 ‘친따라’인도 팀이 먼저 와서 묵고 있었다.
아침으로 백반을 먹었는데 인도의 열악한 환경에 비해서는 진수성찬에 가까운 음식이었다. 반찬을 많이 주어서 한사람이 먹기에는 벅찰 정도였다. 특히 맛이 있건 없건 미역국이 나왔는데 인도에서 먹을 수 있었던 유일한 ‘국’이었다. 또 토마토를 얼려서 믹서에 갈아주는 토마토 쥬스도 즐겨먹는 메뉴가 되었다. 가장 고마운 것은 냉장고에 탱탱얼려 얼음이 든 물을 살 수 있었다.
바라나시 갠지스강가에 위용을 자랑하던 건물들의 영국 식민지시대 사진, 이 건물들이 지금은 폐허가 되어 음울한 바라나시를 만들고 있다.
현재 갠지스강가에 서있는 건물들의 모습, 많은 건물들이 폐허의 모습으로 있다.
고돌리아까지 걸어나가 오토릭샤를 타고 ‘사르나트’로 갔다. 약 12Km 정도 떨어졌다고 하는데 설산수행(雪山修行)끝에 보리수(菩提樹) 나무 아래서 득도(得道)하신 부처님이 5명의 도반(道伴)에게 처음으로 설법을 한 불교의 4대 성지(聖地)중의 하나다. - 4대 불교 성지 : 부처님이 태어 난 룸비니(Lumbini),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Bodhgaya), 처음으로 설법한 장소 사르나트 (Sarnath), 그리고 세상을 떠난 곳인 쿠쉬나가르(Kushinagar) - 부처님이 최초로 설법을 베풀었다는 보리수나무를 보고 - 이 나무는 그 당시의 나무의 증손자벌 쯤 되는 나무라고 한다. - 그 아래 만들어 놓은 석가모니와 다섯 제자의 조각상. 그리고 여러 나라에서 보낸 것인지 아니면 불문(佛門)에 길이 남을 훌륭한 스님들인지의 불상 등을 보았다. 보리수나무는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1m정도 높이의 단(壇)위에 작은 철책을 두르고 있는데 철책 주변으로는 오색 천을 둘러놓았는데 한국적 인상으로는 매우 낮설었다.
물라간다 꾸띠 비하르 부처님의 초전도지에 있는 사찰
보리수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 초전도지(初傳道地)를 기념하는 ‘절집’이 있는데 '물라간다 꾸띠 비하르(Mulagndha Kuti Vihar)'라는 사찰이다. 단아(端雅)한 기와집만 보아오던 눈(目)에 힌두교의 사원과 같은 모양의 절집을 보니 매우 낮 설었다. 안벽에는 석가모니의 탄생(誕生)에서 열반(涅槃)까지의 모습이 파스텔조의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일본인 ‘고우세츠 노시(Kousetsu Nosi)가 그렸다고 한다. 안에는 금색의 작은 불상이 모셔져 있다. 불상은 일반적인 형식의 단 위에 앉아 있는데 아래에는 다섯 명의 제자인 듯한 조각이 있다. 역사적 가치는 없는 현대적인 것이며 어느 틈에 알았는지 입구에는 일본 불교계에서 기증한 종(鐘)이 달려 있다.
물라간다 꾸띠 비하르의 내부 일본인 ‘고우세츠 노시(Kousetsu Nosi)’가 그린 벽화중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깨닳음을 얻는 장면의 그림, 많은 마귀들이 부처님을 명상에서부터 깨어나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금방 설산수행을 마치고 내려온 부처님 치고서는 건강미가 넘쳐 사실성이 사뭇 떨어진다. 부처님의 고행상(苦行像)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아주 특이한 사실중의 하나는 이 초전도지(初傳道地)는 11시30분 까지만 문을 연다는 것이다. 시간이 되니 사람들이 나가달라고 한다. - 사실 한낮만 문을 닫았다 다시 여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
왼쪽으로 가서 있는 사원은 자인교 사원이다. 언제 만들어져 유서(遺緖)가 깊은지는 알 수 없는데, 여기에 모셔진 자인교 신상은 검은색 돌로 만들어 졌다. 불교 힌두교 자인교의 불상들은 거의가 비슷하여 문외한(門外漢)인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구분하기가 어렵다. 또한 초기의 종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혼재(混在)되기 마련이고, 또한 힌두교의 포용력은 불교의 석가모니나, 자인교의 마하바라를 이미 힌두교로 개종시킨 마당에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지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불교와 자인교는 출발 시기도 같고, 수행의 방법 또한 비슷해 조각상에서도 많은 공동분모를 이루고 있다.
딱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인교 조각상의 특징을 몇 가지 들어보면 ①불교의 불상은 두 발바닥이 모두 보이는데 자인교는 그렇지 않다. ②불교에서는 수인(手印)여러 모양이고 상징하는 의미가 다양하지만 자인교에서는 두 손바닥을 겹쳐 내려놓은 한가지뿐이다. ③불상의 시선은 대(臺) 앞의 예배자(禮拜者)를 보고 있지만 자인교에서는 자기의 손바닥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내면세계에 침잠(沈潛)하는 모습이다. ④불상이나, 힌두상이나 자인상이나 모두가 3상형식(三像形式)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⑤ 불상에서는 최소한의 옷을 걸치고 있는데, 자인에서는 최소한의 옷도 입지 않고 있다. 하늘이 내려준 천연의 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다른 옷은 필요치 않다는 생각이다. ⑥불교에서는 머리털을 깍아 없애지만 자인에서는 나오는대로 뽑는다. ⑦자인교의 사두의 모습은 한손에 쓸이개(총채 같이 생긴 빗자루), 한손에는 탁발(托鉢)의 그릇을 들고 다닌다. 쓸이개로 길을 쓸고 앉을 자리를 쓸어 어떠한 생명도 죽이지 않고, 자기 소유(所有)를 최소한으로 하여 그릇 하나로 자신의 재물을 삼는다. 수저도 준비하지 않고 손으로 먹는다. . ⑧불교에서는 육식(肉食)을 금하지만, 자인에서는 육식을 금하는 것은 물론 땅 위에 있는 것만 먹고, 땅 속에 있는 것은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자 고구마 마늘 땅콩 등은 먹지 않는다. 결국 불교보다 더 지독한 수행을 하는 사람이 자인교인것 같다 그러나 자인교 사원에 가면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이 자인교 수행자의 사진인데, 사진으로 보는 그들의 모습은 매우 편안한 모습이었다.
고적공원의 버려진 석재에서 찾아낸 조각상
* 다음은 사르나트 고적공원과 갠지스강 뿌자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