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로 가는 길-14 아잔타 유적 감상과 부사발
이번 여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막내도 중 2가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일정은 3주간 뭄바이 - 아우랑가바드 - 카주라호 - 바라나시 - 자이푸르 - 아그라 - 푸쉬가르 - 델리입니다.
아잔타 유적 감상과 부사발
아잔타 석굴은 8세기에 들어 불교가 쇠퇴하면서 그만 정글에 묻힌 채 1천년 이상 방치되어 있었다. 1819년 이곳 데칸고원 일대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던 ‘존 스미스’라는 영국군 기병대 장교가 총에 맞은 호랑이를 쫓아 내려왔다가 암벽 사이에서 동굴을 발견하였다. ‘존 스미스’의 발견으로 아잔타 석굴은 ‘긴 역사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그는 벽화의 한 곳에 자신이 이 동굴을 발견한 날자와 자기의 이름을 새겨놓아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사실 ‘존 스미스’가 발견해 주지 않았으면 ‘아잔타 석굴’은 그대로 미궁(迷宮)속에 빠져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랑이를 쫓아왔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동물들의 피신처로 사용되고 있었을 것이며, 부근의 사람들도 ‘아잔타 석굴’의 존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존 스미스’의 발견은 그의 보고서에 의해 ‘아잔타 석굴’의 존재가 서양세계(西洋世界)에 알려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쩌면 세계 고고유적의 발견의 정통적인 수순에 따라 이미 ‘도굴(盜掘)’이 이루어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잔타의 벽화의 파손정도로 추측해 보면 ‘존 스미스’의 발견이후에 파괴된 정도로는 심(甚)하다할 정도이며, 또 많이 지웠겠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낙서(落書)들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아잔타의 그림들은 ‘프레스코 기법(fresco painting)’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이 기법은 회벽을 바르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물에 안료가루를 개어서 그 벽에 그리는 방법으로, 물감이 마르면서 회반죽과 함께 굳어 벽의 일부처럼 된다고 한다. 이 습식 프레스코 기법은 내구성이 좋아 우리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사용된 기법이라고 한다.
1번 굴 최고의 볼거리라는 ‘지연화보살화(持蓮花菩薩畵)’ 금당벽화와의 관계는 직접 판단하시길.
1번굴 계단을 올라가 입장권 검사를 하고나면 첫 번째로 만나는 굴이다. 6세기 경 조성된 굴이라고 하는데, 이 굴의 압권은 `보디사트바 파드마파니'라 불리는 보살그림으로 오른손에 한 송이 연꽃을 들고 있다고 해서 ‘지연화보살화(持蓮花菩薩畵)’로 불린다. 이 벽화는 온갖 가이드북이나 인터넷 사이트에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그린 일본 법륭사의 금당벽화를 쏙 빼닮았다.’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 말의 진위(眞僞)와 출처가 의심스럽다. 법륭사 금당벽화는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라는 이름의 그림으로 한 벽면을 차지하는 그림이 네 장, 그 위에 조금 작은 그림 8장이 한꺼번에 어우러진 것을 금당벽화(金堂壁畵)라고 말한다.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에는 각각의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협시보살들이 그려져 있는데 등장인물은 약200명에 가깝다. 이 ‘지연화보살화(持蓮花菩薩畵)’이 아름답고 인자한 모습의 보살 그림인 것은 틀림없지만 금당벽화와 ‘붕어빵 같다’등의 표현은 잘못인 것 같다. 이 외에 ‘검은공주’라고 불리는 여성상은 풍만하고 기품이 있으면서도 여성들의 곡선미 와 하복부의 표현이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풍긴다.
검은공주, 이 여인의 모습은 인도의 종족인 ‘아리안족’이라기 보다 아프리카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불교의 세력이 지음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범위를 넘고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볼 수 있다.
4번굴 무척 넓은 굴로 대표적인 집회의 장소였던 것 같다. 싯다르다 태자의 시절의 궁중생활이며 당시의 상가(商街), 악기, 동물 등을 묘사한 벽화가 있는데, 남아있는 그림이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이 굴의 특징은 석가팔상도(八相圖)가 있는 것이라고 하는데, 동굴의 특징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성이 필요할 것 같다. 훼손도 심하고, 너무 어두워 도저히 감사하기가 어려웠다.
처음부터 검은 색 위주로 그려진 것 같은 벽화, 역시 불교가 세계적인 종교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10번굴 차이티야(Caitya 塔廟窟))굴 즉 예배를 드리기 위해 불당으로 만들어진 석굴이다. 기원전 2세기경부터 1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전기석굴(前期石窟)은 이른바 무불상(無佛像)시대에 조성돼 본당에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대신 중앙에 거대한 돔을 연화대(蓮花臺)위에 두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많은 벽화가 회손(悔損)되었으며, 조금이라도 지켜보려고 유리 상자를 씌워놓고 있는데, 상태는 돌이키기 힘들 정도다. 이 굴이 영국인 ‘존 스미스’에 의해 아잔타에서 처음 발견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존 스미스’의 발견을 알리는 낙서(落書)가 있다. 그를 따라 다른 사람들의 낙서도 있다.
12번굴 비하라(Vihara 僧院窟)굴이다 안에는 바위를 쪼아 만든 콧구멍만한 방들이 10여개 있다. 어느 곳은 한 사람분의 침상이 있는가 하면, 어느 곳은 두 사람분의 침상이 마려되어 있다. 또 침상의 바닥을 그런대로 다듬고 베게까지 마련한 굴이 있는가 하면, 전혀 다듬지 않고, 바위를 떼어낸 그대로 고행(苦行)의 수련을 계속한 곳도 있다.
16번굴 ‘빈사(瀕死)의 공주’가 있는 석굴이다. 누가 번역을 했는지 ‘빈사(瀕死)의 공주’라는 이름이 무척 낮설었다. ‘싯다르다’의 이복동생 ‘난다’가 형을 따라 출가수행을 하겠다고 하자 실의(失意)에 빠져 슬퍼하는 아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역시 어두운 조명과 훼손이 많이 된 관계로 감상하기가 어려웠다. 또 어느 부분에 이 그림이 있는지 설명이나 안내판이 없어 순전히 굴 안에 상주하는 현지인들에게 약간의 팁을 주면서 보는 수밖에 없다.
17번굴 아잔타 석굴 벽화 중에서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석굴이라고 한다. ‘카필라성’으로 돌아온 부처를 맞이하는 부인 ‘야소다라’ 왕비와 아들 ‘라후라’ 왕자의 애처러운 표정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굴의 벽화상태가 말 만큼 좋지 않았고, 부분부분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 표정을 읽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조명상태가 벽화를 감상하기에는 너무 불충분했다. 연 꽃잎에 의해 둘러싸인 8개의 불상이 일렬로 있다.
돌아온 것은 남편이며 아버지인 싯달다가 아니라 ‘석가모니’였다.
26번굴 아잔타 최대의 열반상이 조각되어 있다. 아니 가이드북에는 인도 최대라고 한다. 입구에서 왼쪽 벽에 있는데 길이가 7m라고 한다. 오른손을 팔베게하고 평온하게 누운 열반상 아래에는 슬픔에 젖어있는 제자들이 있고, 발치 끝에는 동생 ‘난다’가 슬픔에 잠겨있는 모습이다.
다른 벽화들과는 차별되게 화려한 석가 삼존도
2005년 7월 23일(토) 부사발
샤워를 하고 종민이를 깨워 짐을 챙기고 9시에 체크아웃을 했다. 부사발로 가는 직행버스를 물어보니 9시 30분 있다고 한다, 릭샤를 불러 달라고 하여 버스 스탠드로 갔다. 인도인들이 노점음식점에서 무엇인가 사 먹기도 하고, 짜이를 마시기도 하면서 말을 붙인다. 예정보다 10분 빨리 버스가 도착하여 길가에 정차하였다.
11시쯤 되어 한눈에 보아 이렇게 ‘무질서한 곳이 있을까?’싶은 동네에 닿았다. 여기가 부사발이다. 버스터미널이 있고, 그 옆에 부사발 역이 있다. 버스터미널과 역 사이에는 무수한 거지 - 이제는 거지라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마도 홈 리스 & 웍 리스가 어울릴 것 같다. - 들이 자리 잡고 있다. 부사발역에서 기차 시간은 밤 10시 30분, 그때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난감했다. 일단 클락룸에 배낭을 보관시키고 시내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골목 시장 한 곳을 보니 ‘○○호텔’ ‘에어콘 레스토랑’이란 글귀가 보였다. 이 도시에 에어콘이 있는 곳이 있다니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망설일 것 없이 들어가 레스토랑을 찾으니 로비 한쪽을 가리킨다. ‘아니 에어콘이 있는 곳이 어디냐?’ 하니 ‘에어콘은 7시 이후에 어쩌고 저쩌고… ’변명을 한다. 선풍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으려니 의자와 탁자 사이가 얼마나 좁은지, 또 의자 등받이가 직각에 가깝게 되어 있어 매우 불편하다. 일단 음식을 주문하고 물수건을 꺼내 얼굴을 딱으니 누런 똥먼지가 덕지덕지 묻어 나온다.
일하는 사람을 불러 ‘이 도시에 가장 좋은 영화관을 알려 달라.’고 하니, 모두 인도영화를 한다고 한다. 극장의 이름을 써 받아 가지고 오토릭샤을 탔는데 5분도 안걸려서 도착한다. 아마 걸어도 5분 밖에 안걸릴 가까운 거리였다. 극장은 아래층과 2층 따로 표를 팔았는데 아마 2층이 고급인것 같았다. 천장에 선풍기가 달려 있는데, 한 꼬마 녀석이 안에 있다가 사람이 앉으면 그 위에 달린 선풍기를 켜 주었다. 달구어진 지붕에서부터 더운 바람이 쫙쫙 밀려오는데, 정신이 아찔하며 머리가 띵~ 하다. 약 세 시간가량 영화를 보며 졸다가 시간을 보냈다. 여자 배우들이 정말 깨끗하고 예뻗다. 당연히 배경 또한 인도의 현실과는 거리가 먼 그런 곳 같았다. 많은 인도의 젊은이들이 아래층에서 웃고 떠들면서 영화를 즐기고 있는데 그들은 영화 속의 배경과 자신들이 처하고 있는 현실과의 괴리(乖離)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하는지 궁금했다.
오늘의 일정을 돌이켜 보면 부사발에서 쓸데없이 허비한 시간이 너무 많았다. 부사발 이나 잘가온은 기차역으로만 존재하는 곳으로 볼만한 구경거리는 아무것도 없다. 따라서 이곳에서 대기하는 시간은 짧을수록 좋을 것 같다. 따라서 일정을 다시 짜 본다면 아우랑가바드에서 6시에 떠나는 버스를 타고 아잔타 T-point에 내려서 바로 아잔타로 가서 석굴을 관람한 다음, 파르다푸르로 나와서 잘가온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기차는 버스가 많이 없고, 또 잘가온에서 다시 버스를 타야하는 ‘부사발’ 출발의 기차보다는 ‘잘가온’출발의 기차가 더 좋을 것 같다. 물론 기차시간이나 기차의 좌석관계가 문제이겠지만. 이렇게 하면 하루에 아잔타를 구경하고 잘가온이나 부사발까지 올 수 있어서 시간이 절약되고 무엇보다도 지루하게 보내야하는 시간이 없어진다. 물론 몸이 피곤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체력을 잘 안배해서 극복해야겠지만.
한 벽을 다 차지하고 있는 벽화, 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카필라성으로 돌아온 싯달다를 환영하는 그림이라고 한다.
* 다음은 카주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