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로 가는 길-34 델리 꾸뜹미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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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의 인도로 가는 길-34 델리 꾸뜹미나르

Lucky 2 4549



이번 여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막내도 중 2가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일정은 3주간 뭄바이 - 아우랑가바드 - 카주라호 - 바라나시 - 자이푸르 - 아그라 - 푸쉬가르 - 델리입니다.



2005년 8월 6일(토요일)

인도에 최초로 세워진 이슬람교 사원의 상징 ‘꾸뜹미나르’



새벽에 추워서 잠이 깨었다. 종민이가 TV와 에어콘 모두 켜놓고 잠이 들었다. 아마 나갔다 들어와 내가 자는 것을 보고 혼자 TV를 보다가 잠이 든 것 같다. 자기만 슬리핑백을 덮고 있다. 나도 슬리핑백을 펴서 덮고 에어콘을 끄고 다시 잠들었다. 그러다 빗소리에 다시 잠이 깨었다. 비는 쉽게 개일 것 같지 않게 왔다. 8시에 나와 에베레스트에 가서 아침을 먹고 점심으로 빵4개를 사 가지고 ‘쉼터’로 갔다. 붙임성 있는 청년이 맞아준다. ‘홍군’이라고 불리는 20대 초반의 청년의 정체는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종업원 같았다. 자기가 비행기에서 어제 그 학생을 데려왔다고 한다. 비가 오면 오히려 덥지 않아서 유적 구경하기는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출발하기로 했다. ‘쉼터’사장에게 ‘꾸뜹미나르(Kutab Minar Comples)’까지 오토릭샤요금이 얼마정도 될까? 물어보았더니 ‘한 100Rs는 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거리에 내려와 릭샤왈라와 흥정을 했더니 70Rs에 가게 되었다. 이튿날, 빠하르간지를 걷고 있다가 한국인 커플을 만났다. 20대 중후반쯤 된 커플이었는데 학생들 같지는 않았다. 종민이와 떠들면서 가는것을 보고 ‘꾸뜹미나르를 가려고 하는데 100Rs 정도에 릭샤를 타면 될까요?’하며 말을 걸어왔다. 어제 우리가 흥정한 것도 있고, 또 ‘골든카페’ 근처였기 때문에 ‘우리 골든카페 사장에게 부탁해 보자’고 같이 갔다. 카페를 이용하지 않고서도 ‘릭샤를 잡아 달라!’고 부탁했더니 ‘한 50Rs정도면 될꺼야!’하며, 릭샤를 잡으러 나간다. 우리가 자리를 떠서 그들이 얼마에 갔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보다 싼 가격에 간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꾸뜹미나르 유적군(Kutab Minar Comples)’은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입장료는 역시 250Rs를 받는다. 유적을 입장하지 않아도 ‘별 볼 것이 없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폐허(廢墟)다. 다만 높이 솟은 ‘꾸뜹 미나르(Kutab Minar 꾸뜹의 탑)’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72m 높이에 중간에 베란다를 두어 5층 형식으로 된 ‘꾸뜹미나르(Kutab Minar)’는 모든 것을 압도하고, 여행자의 발길을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가게 만든다.


‘찬드라 굽타’에 의해 세워진 통일왕조 ‘굽타제국’이 사라지고 한동안 인도는 강력한 통치자가 없이 열강의 시대가 계속된다. 그러는 사이에 중동지역에서 부터 이슬람 세력이 진출하기 시작하여 11세기쯤 와서는 꽤 많은 이슬람 세력이 인도로 들어오게 된다. 이때 터어키 궁정의 노예였던 ‘꾸뜹 웃 딘 에이백(Qutab Ud Din Aibak ?~1210)’이 터어키의 도움을 받아 델리를 중심으로 한 인도 중부를 정복하고 본격적인 이슬람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에이백(Aibak)의 왕국은 그가 죽고 나서 ‘에이백(Aibak)의 사위 일투트미시(Iltutmish)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빼앗기게 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터어키의 후광(後光)을 입어야 했기에 계속해서 왕조(王朝)가 교체되며 ’델리‘지역을 중심으로 15세기까지 이슬람세력을 전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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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게 솟은 ‘꾸뜹미나르’ 아래 왼쪽 건물은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 그리고 오른쪽 건물은 ‘일투트미시’의 묘당(墓堂)이다.




유네스코에 ‘꾸뜹 기념물군(Kutb Group of Monuments)’으로 등록된 이 유적은 크게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Quwwat ul Islam Mosque)’와 ‘에이백(Aibak)’의 궁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유적이 힌두교(Hindu 敎)의 제국에 이슬람왕국(Islam 王國) 건설을 기념하여 세운 거대한 ‘꾸뜹 미나르(Kutab Minar 꾸뜹의 탑)’인 것이다. 이슬람 모스크(Islam Mosque)의 부속 건물로 매일 시간을 맞춰 이슬람(Islam)의 경전인 코란을 읽어 주는 곳으로, 탑의 높이와 화려함은 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들어가면 육각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긴 회랑(回廊)을 만나게 된다. 이 회랑의 끝에 커다란 돔(Dom) 천정을 가진 교회(Mosque)가 있다. 회랑은 그 모스크를 넘어서도 얼마간 계속된다. 이것이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Quwwat ul Islam Mosque)’로 인도에 최초로 세워진 이슬람사원이다. 그리고 이 모스크(Mosque)의 뒤쪽으로 ‘꾸뜹미나르(Kutab Minar)’가 서 있다.


이 회랑(回廊)의 기둥은 6각형으로 인도에서 많이 보아온 4각형이나 원형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천정을 얹기 위한 지붕은 아치형이나 터널식 천정(Vault)이 아니고, 사각형이 돌아가며 좁아지는 우물형 천정이다.


회랑의 중심부에 위치한 모스크는 붉은 사암(砂巖)과 흰색 대리석을 깍고 조각하여 아름답게 꾸몄는데 크기는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수 없어도 장중한 멋이 있는 건물이다. 그 왼쪽 마당에는 작은 모스크 같은 건물이 있는데 비록 낡고 퇴락했어도, 그 모습이나 위치는 심상치 않다. 안에는 단정하면서 균형 잡힌 관(棺)이 안치되어있다. 이는 이 왕국의 첫 주인인 ‘꾸뜹 웃 딘 에이백(Qutab Ud Din Aibak’의 사위로 뒤를 이어 왕좌를 차지한 사위 ‘일투트미시(Iltutmish)’의 무덤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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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막지하게 튼튼하게 만든 건물의 흔적, 도대체 어떤 힘이 이토록 폐허로 만들었을까?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Quwwat ul Islam Mosque)’의 나머지 부분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회랑과 기둥들만 겨우 남아있는데 그 범위가 꽤 넓다. 부서진 사원 벽의 단면을 보면‘ 보통 사람의 머리정도 크기의 돌을 접착력이 있는 흙과 함께 일정한 규칙 없이 쌓았는데, 그 벽의 두께가 70-80cm정도 된다. 이정도 두께의 단단한 벽을 쌓았다면, 이 건물의 높이도 꽤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 이 건물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되었을까? 외부세력의 침입에 의한 방화라면 이렇게 까지 파괴될 수는 없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원인은 아마도 천재지변인 ’지진(地震)‘이 아니었을까 한다.


인간이 경험해 보지 못했을 엄청난 위력의 지진이, 이렇게 두꺼운 벽의 건물을 무너뜨렸다면 어떤 이유에서 ‘꾸뜹미나르(Kutab Minar)’는 온전하게 서 있을까? ‘높이 72m, 기단부 직경 14.3m, 최 상부 직경 2.5m 5층’이것이 ‘꾸뜹미나르(Kutab Minar)’의 신상명세서다. 처음에는 4층으로 지어졌는데 1326년 다음 왕조의 '페로즈 샤(Ferow Shah)'의해 5층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그 뒤 수리와 개조가 있었지만 탑은 완전한 자태로 있었고, 1982년 까지는 5층 베란다까지 계단을 통해 올라 갈 수 있었다고 한다. 분홍색 사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원형의 기둥과, 사각형의 기둥을 만들고 이것을 묶어세운 듯한 이 탑은 디자인에 있어서도 월등하여 14.3m의 직경을 날렵하게 보이도록 만들뿐 아니라, 탄탄하고 강인한 느낌을 주게 만들었다. 또 중간중간에 붉은색의 돌은 이 탑의 결속력을 뜻하는 듯하고, 중간의 네 개의 베란다는 탑의 높이로 인해 흔들리는 듯한 착시현상을 완화시켜 준다.


1192년에 짓기 시작하여 6년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아래쪽의 1, 2, 3층은 붉은 사암으로 되어 있고 4, 5층은 대리석과 사암으로 되어 있다. 과거에는 내부의 계단을 통해 5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부의 계단이 매우 좁고 가파르게 되어있어 실족(失足)하여 다치는 사고가 자주 일어나 폐쇠했다고 한다.


‘쿠와트 알 이슬람 모스크(Quwwat ul Islam Mosque)’는 인도 최초의 이슬람 모스크인데 그 폐허를 답사하던 중 이상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힌두교의 신상(神像)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은 파손된 채로 유적 의 한 귀퉁이에서 뒹굴고 있기도 하고, 또는 중요한 기둥의 일부로 남아 있기도 했다. 돌아와 조사해 보니 ‘에이백(Aibak)’이 모스크를 지을 때 많은 힌두교 사원을 파괴하여 그 재료를 재활용하여 모스크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모스크를 지을 석재(石材)가 부족하여 그렇게 했다’기 보다 힌두교를 탄압하고 파괴하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모스크가 있는 이 지역도 원래 힌두교 사원이 있던 장소였을 것 같다.


새로운 승리자는 과거를 말살(抹殺)하기위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일이 세계적으로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하다못해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잘 알려진 풍기의 소수서원(紹修書院)도 풍기군수 주세붕이 그 자리에 있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을 폐사(廢寺)시키고 안향(安珦)을 모시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건립한 것이 아닌가?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숙수사(宿水寺)’는 안향(安珦)이 어렸을 적 숙식(宿食)을하며 공부하던 곳으로, 이때 베풀었던 은혜가 원한(怨恨)으로 돌아오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곳곳에는 사찰에 사용되었던 석재들이 하잘것없는 부속재로 전락하여 뒹굴고 있다.


왕궁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건물들도 철저하게 파괴되어 가장 영화(榮華)스러웠던 시절의 모습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단지 남아있는 기둥들에 화려한 장식(裝飾)과 문양(紋樣)이 조금 있어 아름다웠던 모습의 일부라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기둥들은 사원(寺院)으로 사용된 지역과의 구분을 명확하게 해 주고 있는데, 사원(寺院)지역의 기둥은 단순하고 힘 있는 사각기둥이거나, 육각기둥인데 비하여, 왕궁 쪽의 기둥은 원형(圓形)내지는 다각형 기둥에 아름다운 문양(紋樣)이 들어있다.


왕궁 쪽의 중심은 큰 문을 들어서 긴 회랑(回廊)으로 둘러싸인 광장에 서 있는 ‘무쇠기둥(Iron Pillar)’이다. 박석(薄石)이 깔린 광장의 중심에 서 있는 높이 7m 쇠기둥으로 한 아름 정도의 굵기다. 무게는 약 6톤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 기둥을 끼고 양팔을 뒤로 젖혀 손가락을 깍지 낄 수 있으면 행운이 온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행운을 시험해 보는 곳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철책으로 둘러싸여 단지 눈으로만 볼 수 있다.


이 기둥에는 6줄의 글이 산스크리트어로 새겨져있는데, 그 글에 의하면 4세기 굽타왕조의 ‘찬드라 굽타 2세(375~413년 통치)’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부근에 쇠기둥과 같은 4세기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비쉬누 사원의 바깥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기존에 있던 사원을 파괴하고 왕궁을 지으면서 쇠기둥만 남겨 놓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 15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녹 하나 슬지 않는 것은 신기하기만 하다. 이 쇠기둥이 녹슬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순도 100%에 가까운 순수한 철(鐵)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순도가 높은 순수한 철을 제조할 수 있었던 당시 인도의 야금(冶金)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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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들어준다는 철기둥, 오랜 세월을 지냈어도 녹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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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건물들, 광장으로 들어가는 문의 기둥 일부와 벽체들이 과거의 웅장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무쇠기둥(Iron Pillar)도 기념할 만한 것이지만, 이 쇠기둥이 있는 광장으로 들어가는 문(門)도 대단한 유적이다. 처음에는 세 개의 문이 있는 형식으로 지어진 것 같은데, 지금은 파괴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그러나 그 일부만 보아도 이 문의 위용(偉容)을 짐작할 수 있다. 세 개의 문 중 중앙의 문은 그 높이가 20m에 이를 뿐만 아니라, 기둥의 전면(前面)을 가득 채운 문양(紋樣)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있으며, 이슬람문자의 코란을 무늬로 만들어 조각하였다. 이것은 힌두교나 불교등이 조각상을 신(神)으로 섬기는데 비하여 이슬람교는 어떠한 우상(偶像)도 만들고 있지 않으므로 나타난 현상이다.


왕궁터에서 문쪽으로 나오다 보면 이상한 유적이 눈에 뜨인다. 모두 파괴되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없는 이것은 ‘알라이 미나르(Alai Minar)’라는 것으로 ‘알라 웃 딘 칼지’왕이 ‘꾸뜹 미나르(Kutab Minar)’ 보다 더 높은 탑을 세우겠다는 계획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현재 있는 부분 까지만 쌓고 죽었다. 그 후 아무도 이 탑을 완성시키려 하지 않아 아직까지 미완성의 탑으로 남아있는데, 아래 지름이 27m로 완공되었다면 우람한 승리의 탑이 되었을 것이다.


꾸뜹 기념물군(Kutb Group of Monuments)은 구비치는 구릉(丘陵)을 잘 활용하여 만들어진 사원과 왕궁으로, 비록 폐허가 되었지만 한때의 영화(榮華)를 짐작 할 수 있는 곳이다. 잔디가 잘 관리되어있고 짐승들의 출입을 통제해 깨끗하게 보존되어있다. 날씨만 좋다면 하루를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장소였다. 비가오지 않는다면 간단한 음식을 마련해 가서 편안하게 쉬었을 것을, 우리는 준비해간 빵과 음료수만 먹고 일어섰다.




* 다음은 유네스코 등록 유적인 후마윤 묘
2 Comments
Lucky 2005.11.15 10:53  
  소원의 기둥이 녹슬지 않는 것을 가지고 우주인의 작품이라는 등 여러가지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궁에가면 천막을 치기위해 설치한 쇠고리가 있습니다. 이것도 노천에서 수백년을 견디었어도 녹슬지 않고 잘 있습니다. 우리의  쇠 만드는 기술도 우수했던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스컬리 2007.08.28 17:53  
  예전에 제가 갔을땐 쇠기둥을 그냥 만지게 해놓았었는데요..이젠..보호가 돼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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