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cky의 인도로 가는 길-20 사라나트 고적공원과 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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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cky의 인도로 가는 길-20 사라나트 고적공원과 뿌자

Ducky 0 2851


이번 여름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막내도 중 2가 되었습니다. 기행문을 올립니다. 그러나 여행정보보다 관심사와 감상을 많이 적은 개인적인 기행문입니다. 여행의 목적과 관심사가 나와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가 직접 체험하고 확인한 것만 썼습니다. 일정은 3주간 뭄바이 - 아우랑가바드 - 카주라호 - 바라나시 - 자이푸르 - 아그라 - 푸쉬가르 - 델리입니다.




2005년 7월 27일(수요일)
사르나트 고적공원의 모습과 갠지스강의 뿌자의식


사르나트 고적공원의 정문은 고고학박물관 쪽에 있다. 부처님 초전도지에서 밖으로 나와 담을 끼고 100미터 남짓 걸어가면 된다. 입장료는 2달러 루피화로는 100Rs를 받는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다르마라지카 스투파(Dharmarajika Stupa)’가 있다고 하는데, 그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오른쪽으로 작은 철창으로 둘러싸인 보호각이 있는데 그 속에 ‘아쇼카석주(Ashok Pillar)’의 부러진 뿌리 부분이 남아있다. 아쇼카 왕이 석가모니가 처음 설법하신 장소를 기념하여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와 함께 세운 석주(石柱)로 윗부분에 올려져 있던 네 마리의 사자가 등을 맞대고 있는 모양의 조각은 다행히 파손되지 않고 ‘고고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현재 인도를 상징하는 국가문장(國家紋章)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도의 동전에 조각된 문양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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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채 남아있는 아쇼카왕의 석주, 이 위에 있었던 네 마리의 사자상은 파손되지 않고 발굴되어 고고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인도를 상징하는 문장으로 쓰이고 있다



불교를 중흥시킨 임금으로 칭송되는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은 부처님의 초전도지 - 이것을 불교적으로는 초전법륜(初轉法輪;처음 법륜을 굴림. 즉 처음으로 설법함)이라고 한다. - 인 이곳에 커다란 가람(伽藍 -이것도 인도어 saghrma에서 왔다고 한다)을 세워 많은 스님들이 거처하며 수행하도록 하였는데 한창때는 8구획으로 나누어진 정사(精舍)에 1500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정전은 200여척의 높이에 황금불상을 안치했었다고 한다. 또 아쇼카왕은 100여척(약 30m) 되는 탑을 세우고, 그 앞에 70여척(약 21m)되는 높은 석주위에 사자상을 모신 기념석주를 세웠는데 그 돌이 매우 신기하여 옥색의 윤기를 머금고 있으며 여러 모양을 비춰낸다고 하였다. - 당나라 현장(玄裝, 602~664년) 스님의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에서 -

과연 뿌러지고 남은 것일지언정 아쇼카왕의 석주는 매끈하고 단단한 모습이나 은은하게 배어나오는 색채(色彩)가 심상(尋常)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부러진 둥근 석주가 세 개, 장방형의 석주가 한개 이렇게 있으니 이것을 어떻게 배열하고 모아서 그 위에 사자상을 올려 놓았는지 알려 줄 수 있는 도판(圖版)없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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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왕 시대의 전탑으로 추정되는 기단부에 남아있는 연꽃무늬



초기의 법당은 ‘아쇼카왕의 석주’가 있는 쪽을 전면으로 지어진 것 같았다. 그 뒤쪽으로 대웅전(大雄殿)이었음직한 흔적과 불상을 모셨음직한 장소가 붉은 벽돌의 기초위에 아직 남아 있다. 뒤쪽으로 20m정도 떨어진 오른쪽으로 전탑(塼塔)의 기단부(基壇部)와 2층 정도가 남아있는데, 시멘트로 만든 보호각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유적인 것 같았다. 전면의 간판에는 이것을 굽타(Gupta) 양식의 Mulgandha Kuti 라고 하며 높이 61미터 사방 18.28미터의 거대한 건축물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아마도 이 탑은 이 건축물의 중심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전탑의 주변을 돌아가며 장식한 것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 사찰의 ‘꽃창살 장식’의 원형을 보는 것 같다. 신앙적으로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 인도에서는 처음 보는 ‘금박치성(金箔致誠) - 태국에서 유행하는 것으로 얇은 금박(金箔)을 치성드리고자 하는 신물(神物)의 특정한 부위에 붙이면서 소원을 비는 행위 - 행하여 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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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법당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있는 부도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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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잘 나가던 몸이었는데 이제는 폐허의 한귀퉁이에 한가로이 남아있는 석재, 새겨진 문양이 특이하다.



그 외 부분부분 남아있는 건물의 기초부분과 크고 작은 석재들, 부도탑과 그 잔해들을 살펴 보다보면 여기에도 힌두교의 조각들이 혼재(混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르나트 공원에서 가장 상징적인 것은 커다란 모습으로 우뚝하게 서 있어 주변의 모든 유적들을 압도하고 있는 ‘디멕 스투파(Dhamekh stupa)’일 것이다. 석가모니가 설법을 행한 초전법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지만, 정확한 시기나 용도를 알 수 없는 신앙의 대상이다. 삼분의 일 정도는 석재를 가공하여 아름다운 문양을 넣어 육중하면서도 날렵하게 쌓고, 나머지는 붉은 색의 벽돌을 둥글게 쌓아 올렸는데 그 높이는 30m 이상이 되는 것 같았다. 하단에는 기하학적인 무늬와 자연적인 연꽃무늬를 균형 있게 디자인했는데 그 속에는 연꽃을 채취하는 사람의 모습인 듯, 또는 연꽃 속에서 놀고 있는 물새의 모습인 듯한 자연스러운 조각들이 들어있다. 이것을 마우리아 양식의 조각이라고 하며, 이것으로 보아 ‘아쇼카 왕’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의 침입에서도 어떻게 온전하게 견딜 수 있었을까? 전후 사정을 모르고 짐작만 해 보면, 이 스투파도 파괴된 것을 복원한 듯하다. 또 그 복원 과정에서 시간을 가지고 성의 있게 복원하지 못해, 문양이 어긋나고 뒤바뀌고 한 것이 있는 것 같아 가슴 아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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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법당지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위용의 ‘디멕스투파’



대당서역기에는 ‘다시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탑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아약교진여(阿若喬陳如, Kauinya) 등 다섯 비구가 석가보살의 고행 포기에 충격을 받고 자기들끼리 독립하여 나와 습정[習定;선정(禪定)을 익힘]하였던 곳이라고 하였다[이상 󰡐대당서역기 (大唐西域記)󰡑 권7]’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 추정되는 곳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치우칸디 스투파(Chaukhandi Stupa)’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곳을 답사해 보지 않아 비교해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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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멕 스투바에 조각되어있는 문양, 당시의 힌두교와는 달리 사실적인 문양들이다.



사르나트 공원을 나와 오토릭샤를 타고 ‘녹야원’을 갔다. 한 1Km정도 떨어졌다고 하는데 인도의 한낮에 이정도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마치 ‘사망(死亡)에 이르는 길’ 같았다. 마을길을 꼬불꼬불 들어간 곳에 ‘녹야원’이 있었다. 물론 가는 길 중간에 작은 안내판이 서 있어 찾아 가기는 쉬웠다. 절에 도착하니 일하는 처사(處士)가 나와 ‘스님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대웅전은 2층에 모셔져 있고, 1층은 요사로 되어 있다. 부처님께 향을 올리고 내려오니 아침에 ‘바바 G H'에서 만난 ‘친따라’로 오신 분이 혼자 있었다. 아침에 ‘녹야원’을 방문할 것이란 소리를 들었지만 ‘친따라’ 팀은 아직 사르나트공원 근처에 있는데, 이분만 혼자 오셨다. 스님은 피곤하여 쉬러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주방을 뒤져 커피를 타 마시고 샤워를 하고 쉬다가 3시쯤 녹야원을 나왔다. 돌아오는데 스님이 나와 인사를 했다. 영취산문의 사람으로 법명을 ‘청허’라고 하는 40대의 건장한 체구의 비구인데 ‘일 년의 반은 인도에 있고, 반은 한국에 들어가 있는다’고 했다. 아마 스님이 없을 때 절을 맏고 있는 사람이 ‘미얀마 스님’인 모양인데 인터넷에는 이 사람에 대하여 매우 나쁘게 글이 올라와 있다. 법정스님의 글에 의하면 이곳을 답사한 뒤 한국 절이 없음이 가슴 아퍼 한국에 돌아가 녹야원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녹야원이 세워진지 몇 년 되지 않는데, 통합 종단적으로 운영되는 절이 이렇게 시무할 스님조차 구할 수 없단 말인가? 다른 나라 중이 와서 맡아 볼 정도라면 차라리 폐쇄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기 싫으면 한국 스님이 일 년 열두 달 지키고 있던지, 이곳에 와 있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힘들이 않고 수행하는 방법이 어디 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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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멕 스투파의 연꽃 문양,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디멕스투파의 건축 연대를 아쇼카왕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바라나시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뿌자’시간에 맞춰 배를 타러 나갔다. 강가에 매어 놓고 오는 대로 사람을 부르는 배를 한 사람에 50R에 흥정하여 탔다. 갠지스강 물이 많이 늘어서 사공들이 힘들어 했지만 그런대로 상류쪽으로 조금 올라가서 다시 강을 떠내려 오는 코스였다. 저녁의 넘어가는 햇살과 시원한 강바람이 인도의 열기를 식혀 배를 탈 만하게 만들었다. 배에서 내려 다시 가트에 올라갔을 때 사방은 깜깜하게 완전한 어둠이 깔렸고, 가트에서는 ‘뿌자’라는 인도인의 의식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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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 다샤스와메트 가트



갠지스강의 배에서 보니 화장은 아래쪽과 위쪽 두 군데서 실시되고 있는 것이 가트에 불빛이 보였다. 이 두개의 가트는 특별히 ‘버닝가트’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뿌자’의식은 ‘다샤슈와메드 가트’라는 소위 메인가트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메인가트도 바로 붙어서 두 군데가 있다. 우리가 배를 탄 곳의 하류쪽으로 조금 터 큰 가트가 있어 그곳에서 벌이고 있는 ‘뿌자’의식에 좀더 많은 제관(祭官)(?)들이 있고, 우리가 배를 탄 쪽은 5명의 제관들이 향로같은 불화로를 들고 의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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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자의식이 진행되는 가트의 밤풍경



‘뿌자’라는 의식은 우리나라로 치면 무당(巫堂)의 주관하에 벌어지는 일종의 ‘용왕제’ 또는 ‘수신제(水神祭)’같은 행사다. 단지 우리나라는 그것을 ‘미신(迷信)’이라는 명목으로 못하게 막고 있어 일부 무당에 의해 은밀히 진행되거나 또는 정월 보름 같은 때 어느 지정된 곳에서 불교계나 무교(巫敎)에서 행하고 있다. 바라나시에서는 매일 저녁 시행되고 있으며, 그날의 ‘뿌자’를 주문한 사람과 그 가족은 뿌자를 올리는 곳 가운데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서 그 의식을 보고 있다.

우리가 본 것은 다섯 명의 제관(祭官)이 의복을 차려입고, 각각 제물을 차린 상을 앞에 두고, 불이 지펴진 향로 같은 것을 어떤 절차에 의해 흔들거나 돌리거나 하는 것이었다. 또 때로는 불을 끈 뒤 연기가 오르는 향로를 가지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 한다. 한 번의 행위가 끝나면 보조하는 사람이 상위에 작은 물건을 가져다 놓고 다시 같은 의식을 행한다. 내 생각으로 상위에 올려놓는 것은 신상(神像)인 것 같은데, 그 신에게 소원을 비는 행위를 하는 것 같다. 뿌자가 진행되는 동안 물가에는 다른 사람들이 띄운 작은 촛불의 배가 그득하게 떠다니는데, 작은 아이들이 이것을 들고 다니며 3Rs에 팔고 있다. 나뭇잎을 기계로 찍어 작은 그릇을 만들고 그 안에 촛불을 켜 놓은 것인데 거의 대부분은 물에 띄우면 출렁이는 물살에 밀려 넘어지거나 가라앉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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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든 제관들에 의해 거행되고 있는 뿌자의식




‘뿌자’는 약 한 시간가량 진행된다.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고, 그 사이로 잡상인들과 앞서 말한 ‘촛불 배’ 파는 아이들이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옷을 잡아 다니고 하여 혼잡했다. 우리에게도 이것에 뒤지지 않는 멋있는 종교의식이 있는데, 미신(迷信)이니, 자연보호니 하는 궁색(窮塞)한 변명(辨明)으로 금지(禁止)하고 있는 것에 다시 한 번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라나시는 정전(停電)이 잘 되는 도시다. 인도의 전기사정은 이미 듣고 왔지만 여태 까지는 그렇게 심각하게 정전의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우랑가바드나 아잔타에서는 경험할 시간조차 없었다고 할 수 있고, 카주라호에서도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바라나시는 정말 정전의 불편함을 많이 느낀 도시다.

한밤중 정전이 되면 모든 것이 깜깜한 암흑 속으로 들어간다. 손전등을 준비하지 않으면 이 암흑을 헤쳐 나갈 방법이 없다. 물론 조금 큰 가게 같은 곳에서는 각자의 발전기를 돌려 최소한의 전구를 켠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다시 전기가 들어올 때 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다. 한낮의 정전은 사람을 거의 미치게 만든다. 한창 달아오른 한낮의 열기를,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낳은 선풍기 바람 아래서 숨기고 있을 때, 떡하니 정전이 되면 바람 한 점 들어올 데 없는 바라나시는 용광로로 변하고 만다.



* 다음은 바라나시와 성스러운 갠지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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