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녀가 웃었다
*이 글은 제가 투어하마란 곳에 올렸던 글인데, 보다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태사랑의 회원님들과도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 약간의 손질을 해서 이곳에 다시 올립니다.
우리는 인종을 분류할 때 흔히 황인종(yellow), 백인종(white), 흑인종(black)으로 3분하지만, 이것은
절대적인 분류는 아니다. 인종차별주의적인 관점에서는 인종을 그냥 백인종과 유색인종(color)으로
2분하기도 하고,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황백흑인종 외에 회색인종(gray)를 추가하여 4분하기도 한
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회색인종을 본 적이 있는가? 오래전 이야기지만, 세계 여행에 관한 서적을 읽다가, 난 이 회색인종의 사진을 보고서는 소스라치게 놀란 기억이 있다. 그냥 책 속에서 사진으로만 본 것인데도, 핏기 없는 잿빛 얼굴과 피부는 마치 죽은지 오래되서 뼈마저도 백골로 변해버린 송장이 다시 살아나서 눈앞에 나타난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섬뜩해서, 난 사진을 자세히 볼 생각도 못하고 그냥 그 다음 페이지로 책장을 넘겨버려야만했다. 잿빛 피부가 우리에게 그토록 공포감을 주는 지는 그전에는 미처 몰랐었다. 그런데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그녀는 그 소름끼치는 잿빛 분칠로 얼굴에 떡칠을 한 채 내 앞에 나타났다.
작년(2010년) 11월 방콕. 난 이 거대도시를 직접 내 발로 밟아가면서 구석구석 여행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약 보름정도의 여정으로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매일 강행군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지상철(BTS)을 타기 위해서 역 쪽으로 걷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오래전 나에게 그토록 소름이 끼칠 정도의 섬뜩함을 안겨 주었던 그 잿빛 인간이 바로 내앞에 나타나서 난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였다. 그녀는 얼굴에 잿빛 화장으로 떡칠을 한 채 아침 일찍부터 세븐일레븐 앞 길바닥에 그렇게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놀란 가슴을 추스리고 다시 보니, 젊은 여자였다. 얼굴에 뭔가 잿빛 분칠을 잔뜩 해서 처음에는 소름이 끼쳤지만, 자세히 보니 피부는 햇빛에 그을려 검지만 이목구비는 그런대로 또렸한 여자였다. 행색이 남루해서 처음에는 거지인가 하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지나가는 어느 누구에게도 구걸하지 않은 걸로 봐서 걸인은 아닌게 분명했다. 촛점 잃은 눈동자로 그 어느 곳도 주시하지 않고, 그냥 허공만 바라보면서 그녀는 아침부터 그곳에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녀 앞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치면서 아 미친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얼굴에 잔뜩 회색분칠을 한 이유도 이해가 갈듯 싶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좀 더 예뻐보이고자 하는 여자의 타고난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남국의 여자들은 흰 피부를 미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좀 더 희고, 좀 더 예쁘게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가 회색분칠로 얼굴에 떡칠을 한 심리는, 우리나라의 미친 여자들이 꽃으로 머리를 단장하는 심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아무튼, 어떤 사연으로 저 젊디 젊은 여자가 저렇게 실성을 해서 이른 아침부터 큰 길가에 앉아서 허공만 바라보고 있는지 참 안됐구나 하고 잠시 생각했을 뿐, 그녀는 금방 잊혀졌다. 오며가며 보게되는 이국의 풍물을 즐기는 재미에 그녀 생각이 자리할 틈은 없었다.
그날도 정말 빡세게 돌아다녔다. 먼거리를 이동할 때 불가피하게 지상철과 지하철 등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걸어다녔다. 그렇게 힘든 하루 일정을 마치고, 난 저녁을 먹기 위해서 BigC에 들렀다. BigC 1층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후, 호텔로 돌아가서 먹을 야식거리와 음료를 좀 샀다. 마침 베이커리에서 도우넛 세일을 해서 2개씩 포장된 묶음 2개도 샀다. 그리고 오늘도 무사하고 즐겁게 하루 일정을 마친 것에 감사해하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호텔로 향했다. 시간은 어느덧 밤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세븐일레븐 앞에 도달했을 때, 난 망치로 머리를 한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침에 내가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세븐일레븐 큰 길가 앞에 마치 망부석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있었다. 하루해도 저물어서 주변이 이미 깜깜해서 그런지 아침보다도 더 힘이 빠져보이는 모습으로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있었다.
나는 걷고 있던 관성의 힘으로 그녀 앞을 지나쳐서 호텔쪽으로 그냥 걸어갔다. 그런데 머리속이 점점 복잡해지고, 가슴속은 먹먹해지고, 발걸음은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지면서 나의 걸음걸이는 점점 느려져갔다. 아니, 이 시간까지 하루종일 저렇게 저기에 앉아있었던 것인가? 도중에 무엇인가 좀 먹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필경 하루종일 물 한모금 먹지 못하고,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난 나도 모르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발걸음을 되돌려 방금 지나쳐왔던 그녀쪽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녀 앞에 서서, 난 아까 BigC에서 샀던 도우넛 한 봉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허공만을 힘없이 바라보며 앉아있던 그녀가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나와 도우넛 봉지를 번갈아가며 의아한 듯 쳐다본다. 내가 손으로 먹으라는 몸짓을 해보이자, 그녀는 앙상한 손을 내밀어 도우넛 봉지를 받아든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주위에 뭔가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서 주위를 돌아봤더니, 어느새 지나가던 태국인들 십여명이 우리들의 이런 모습을 흥미로운듯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난 뭔가 부끄러운 일을 하다 들킨 사람 모양, 얼굴이 화끈거려서 얼른 빵봉지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빠른 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호텔로 돌아가는 걸음은 한결 가벼워져있었다. 아, 기왕이면 내가 갖고 있던 생수도 한병 줄걸 왜 그 생각을 못했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시 돌아가서 물도 주고 올까? 이렇게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해서 그냥 호텔로 돌아갔다. 그 여자 그런 기름진 음식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을 텐데 물도 없이 마시다가 혹시 탈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별 쓸데 없는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런걸 기우라고 하는거다라고 자위하면서 난 호텔로 돌아와 그날을 마무리했다.
그 다음날 아침 그 세븐일레븐 앞을 지나가다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를 보니, 그녀가 보이지를 않았다. 어, 이거 진짜로 어제밤 내가 준 음식 때문에 탈이 난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슬며시 들었다. 설마, 아니겠지. 약간 걱정스런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난 또 그날도 방콕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느라 그녀 생각은 금방 잊혀졌다.
그 다음다음날 아침 BigC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지상철을 타러 세븐일레븐 쪽으로 걷고 있던 중, 그녀가 멀리서 내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행색을 보니 그녀는 세븐일레븐 앞길로 출근 중이었다. 등에는 뭔가 작은 배낭을 맨 남루한 옷차림으로 얼굴에는 역시 잔뜩 회색분칠을 했지만, 그래도 엊그제보다는 다소 생기가 도는 힘찬 걸음걸이로 그녀는 걷고 있었다.
드디어 그녀도 나를 봤다. 그녀의 얼굴 근육이 회색분칠 틈 사이에서 심하게 요동치는 모습이 내 눈에 포착되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게 틀림없었다. 우리들 사이가 가까와지자, 그녀는 '히히힝'하고, 마치 말울음 소리 비슷한 괴성을 질렀다. 무표정했던 그녀가 드디어 웃은 것이다. 그녀도 나를 기억하고, 그녀 나름대로 반가운 마음이 그렇게 이상한 웃음소리로 표출된 것이다. 나도 이제 그녀의 잿빛 얼굴이 더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준 음식을 먹고 탈나지 않고 그렇게 다시 출근하는 모습을 보니 반갑고 고마운 마음마저 들었다. 나도 가벼운 미소로 그녀의 인사에 대해 화답하면서, 우리는 서로를 지나쳐 각자 갈길을 갔다.
그녀를 지나치면서 잠시 이런 상상도 해보았다. 오늘 저녁때에는 지난 번보다도 더 맛있는 음식을 사줄까? 이번에는 반드시 생수도 함께 줘야지. 마음 속으로는 그러고 싶었다. 단 몇번 만이라도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그녀에게 그날 또 음식을 준다면, 그녀는 어쩌면 매일같이 나를 그 자리에서 기다릴지 모른다. 비단 그 음식이 탐나서가 아닐 것이다. 아무도 관심가져 주지 않았을 자신에게 그래도 작은 호의라도 보여준 그 이방인의 호의가 기다려지는 것은, 그녀가 설령 미친 여자이더라도 그녀가 인간인 이상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나 난 이제 곧 방콕을 떠나 귀국해야 하는 입장이 아닌가? 내가 보인 한두번의 호의로 인해, 그녀가 다시 오지 않을 사람을 며칠이라도 기다리게 만들고, 또 결국에는 그녀가 내가 다시 오지 않을 사람이란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 그녀가 느낄 배신감이나 실망감을 어떻게 할것인가? 그녀를 미치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어쩌면 그녀를 두번 미치게 만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난 잠시 여행중인 이방인에 불과하다. 그냥 그녀에게 한번의 호의를 보인 것만으로 만족하자. 그녀를 돌봐줄 책임과 의무는 그녀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쉬고 생활하는 태국인들에게 맡기자. 이게 바로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