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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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초

네버스탑맘 14 2093
산호초
따오섬에 딸린 낭유안은 지금껏 보아온 해변과 달랐다. 회색으로 변한 가지산호의 잔해가 물가에 가득하다. 식물을 닮았으나 엄연한 동물인 산호. 산호초는 지상의 열대우림과 같아 바닷속 물고기 중 30%가 이곳에 서식한다고 한다. 사슴의 뿔 같기도 하고 사자의 발톱 같기도 한 산호의 잔해는 바다속 보이지 않는 도도한 흐름을 몸으로 증거한다.
왕관가시 불가사리가 산호의 몸을 빨아들이면 이렇게 회색으로 변한다지만, 방금 전 물속에서 본 산호는 어떠했는가? 흰동가리돔, 두동가리돔, 능성어, 검정등무늬 나비고기들과 어우러진 오색빛깔 산호. 스노클링 장비를 입에 물고, 구명조끼로 무장한 뒤 바다속에 첨벙 빠졌을 때 총천연색 물고기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충격이었다. 귀가 멍멍해지면서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는 그 순간 내 몸은 둔하고 열등한 동물이 되었다. 도무지 지상의 자유로운 몸놀림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반면에 검정등무늬 나비고기떼는 빵조각을 향해 달려오면서 내 다리를 부드럽게 스쳐간다. 브레히트가 설파하는 서사극처럼, 여행 속에 파묻히기보다 시종일관 내 경험을 관조하며 객관화하려 했던 그동안의 여행 태도가 일시에 뒤집어진다. 바다와 내가 혼연일체가 되어 궁극에는 ‘나’라는 실체가 사라지는 경이로움을 맛보았다. 경계를 넘어 영역이 달라지는 세계에 몸을 들여놓는 일이 이토록 황홀하다니. 영감이 필요할 때면 바다로 달려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이나마 알듯하다. 그게 어디 바다뿐이겠는가? 어떤 이는 토굴이고, 또 어떤 이는 히말라야며 , 어떤 이는 교회와 성당, 그리고 절일 게다.
보트의 구성원들을 살펴보았다. 전직 CIA였다는 미국인 70대 부부, 태국여인과 결혼한 홀랜드 중년, 신혼여행을 온 중국인 부부, 틈만 나면 키스를 퍼붓는 이십대 연인. 그리고 12살 아들과 여행 온 나. 영어로 얘길 하다가도 자신의 파트너에겐 타이어, 중국어, 한국어로 속삭인다. 아무도 서두르는 사람 없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다. 가이드가 음식을 내오면 서로에게 가져다주며 옥빛바다를 감상해 마지않는다. 망망대해의 평화로운 공동체다.
스노쿨링 포인트를 몇 군데 지나고, 보트에서 내려 낭유안 섬으로 들어오면서,아이는 모래로 거북이를 만들고 나는 상념에 젖는다.
산호초가 생명을 지닌 이상 삶과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가 되면 부스스 부서져 나와 파도에 휩쓸려 깨어지고 쪼개져 모래가 된다.
내 여행의 기억도 그렇게 되길 소망해 본다. 온 몸의 세포를 열고, 미지의 세계를 받아들여 저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다가 때가 되면 부스스 솟아나 ‘삶의 의미’를 깨닫고 기꺼이 다시 모래가 되어 순환하고 싶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말처럼.
-평생동안 내가 간직했던 가장 큰 욕망들 가운데 하나는 여행이어서-미지의 나라들을 보고 만지며, 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구를 돌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고 굶주린 듯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천천히 오랫동안 시선을 던진 다음에 눈을 감고는 그 풍요함이 저마다 조용히, 아니면 태풍처럼 내 마음 속에서 침전하다가 마침내는 오랜 세월을 걸쳐서 고운 체로 걸러지게 하고 모든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본체를 짜내고 싶었다.-(문명의 배꼽 그리스에서 재인용)
14 Comments
고구마 2013.02.11 19:40  
요술왕자가 네버스탑맘님이 글을 참 잘쓰신다고하길래, 저도 오랜만에 여행기게시판에 와서 읽어봅니다.

지금은 아드님이 12살 어린이겠지만 , 아마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든든한 버팀목이 될테지요.
진심 부러워요.
그런데 우리나라학생들은 중학교들어가면 거의 경쟁체제로 돌입한다고하던데, 좀 더 크면 공부때문에 같이 여행을 못하게 되려나요.  그렇다면 지금이 정말 보석같은 시간이겠네요.

감사한 마음으로 글 읽고 있습니다.  아이에게 이런 세상을 보여줄수 있는 어머니, 정말 인생의 큰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네버스탑맘 2013.02.11 21:06  
이번글엔 댓글이 없어서 살짝 풀이 죽었는데, 기운을 북돋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한 열꼭지 더 쓰려고요. 컴퓨터 앞에 앉아. 계속 자유연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결혼을 일찍 해서 큰아이도 있어요. 고3이라 못데리고 왔지요. 그래도 작년까지 터키에 20일간 여행다니고 그랬답니다. 경쟁체제로 돌입하긴 하지만, 남다가는 길 말고,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하면 거기서도 뜻하지 않은 기쁨을 얻게 되어요. 한편으로 비우고, 한편으로 채우며 그렇게 동반성장하고 있어요.
seastar 2013.02.11 23:20  
글을보면 스노클링(snorkeling) 초보이신거 같은데 어려운 물고기 이름은 많이 아시네요^^
저도 한글의 우수성을 자랑스러워하고 기회될때마다 외국인들에게 알리지만(예를들면 작년 태국서 열린 세계 언어학자 회의에서 한글이 가장우수한 언어로 선정되었다든지), 열대어의 이름은 그냥 영어나 원어로 아시는게 자연스럽고 이해가 빠르지 않나 합니다.
근데 님은 4개국어가 가능하신가 보네요? 부럽습니다.
네버스탑맘 2013.02.11 23:25  
아니요. 전혀,아니랍니다. 영어만 아주 조금 의사소통이 되는 정도랍니다. 그리고, 물고기 이름은 니모를 찾아서의 흰동가리돔. 하나만 알고 있었는데,  아이의 웅진과학책을 보니 그 물고기들이 바로 그 물고기들였더랍니다.ㅎㅎ
seastar 2013.02.11 23:39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게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군요.
구명조끼 입으시면 잠수할일은 없겠지만 혹시 수중에서 귀에 압력을 느끼실때면 입은 다물고 코를 꼭쥐고 코로 바람을 세게 부십시오.
이퀄라이징(equalizing, 압력평형) 이라고 하는데 수압으로 인한 귓속 압력을 해소해 줍니다.
마스크는 쓰기전에 안쪽에 침(진할수록 좋습니다)을 뱉어 구석구석 잘 문지른후 물로 헹구어주면 미세한 물방울의 표면장력을 억제해 이슬이생겨 시야를 가리는걸 방지해 줍니다.
곧 잠수를 익히셔서 코앞에서 니모를 바라보시게 되길 바랍니다.
네버스탑맘 2013.02.12 00:01  
맞아요. 다들 그렇게 해서 들어가더라구요. 침을 왜 뱉지? 이랬는데.ㅎㅎ 귀에 물이 들어가서 고생도 했어요. 가이드가 튜브를 잡으라고 해서 아들과 저는 튜브를 잡고 가이드 이끄는 대로 갔답니다. 너무나 신기했어요. 다이빙 배우고 싶은 욕망이 일시에 솟더라구요.ㅎㅎ 좋은 정보 감사드려요!!
쿨소 2013.02.12 12:44  
잠시동안 책을 읽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술왕자님과 고구마님 말씀데로 글을 참 맛갈나게 잘쓰시네요..
저는 스노클하면서 힌둥가리 못본지 한참 되었네요..

작년에도 낭유안 들렀는데.. 역시나 힌둥가리는 못 봤습니다..
점차 백화되는 산호들을 보면서 이제 흰둥가리를 스노클로는 볼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아직은 볼수 있나보군요... 잘 읽고 갑니다..
네버스탑맘 2013.02.12 13:02  
낭유안에서는 아이만 스노클링을 하고, 저는 그냥 백사장에서 쉬고 있었어요. 물고기를 본 곳은 다른 곳이었어요. 상어를 볼 수 있다는 곳에서는 정말이지 손가락만한 물고기 몇마리 보고 끝이었는데, 가이드 덕에 두번째, 세번째 포인트에서는 정말 좋은 구경을 했지요.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오색물고기를 보고 열광했답니다. 사람을 전혀 두려워 않고 몸을 감싸더라구요. 졸고에 격려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albireo1019 2013.02.13 19:52  
잘 읽고 있습니다,,, 계속 올려주세요,,,장문으로,,,
네버스탑맘 2013.02.16 00:04  
^^장문으로..다들 지루해하실까봐..ㅎㅎ노력하겠습니다.
네버스탑맘 2013.02.16 20:57  
라오스여행기에 세편을 연달아 올렸어요. ㅎㅎ
제롬 2013.02.15 14:59  
나중에 엄마가 되면 여행도 포기해야한다는 우울한 상상을 하곤 했는데, 아이와 함께 여행다니시는 분들의 글을 읽으며 생각지 못한 또 다른 꿈을 꾸게 되네요. 저 너무 너무 잘 읽고 있어요.
계속 글 올려주실거죠?
네버스탑맘 2013.02.16 00:03  
라오스에 있을 때의 경험..지금 막 올렸어요!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수리 2013.02.16 15:10  
탑맘님은 작가신가요? 아니면 정말 글 잘 쓰시네요. 감칠맛납니다.
머리속으로 상상해봅니다.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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