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물난리로 이재민이 100만을 넘는 춤폰주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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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물난리로 이재민이 100만을 넘는 춤폰주를 추억하며...

네버스탑맘 2 772

 

1.

  앞날을 모르기에 강행했던 일들이 있다.

코따오는 방콕의 훨남퐁 중앙역에서 9시간 달리고도 다시 페리를 타고 세 시간 넘게 가야만 도착하는 섬이다. 낯선 나라의 기차에서 보내는 9란 숫자의 의미는 혹독하다. 침대열차를 구하지 못해 9시간 동안 불편한 의자에서 이리 저리 뒤척이는 것만도 신경이 바싹 쓰이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초등학생 아들아이를 대동하고 움직이는 여정이라니...마른 침이 저절로 넘어간다.

  기차엔 서양 배낭 객이 여기저기 뭉텅 뭉텅 모여 있다. 절반 쯤 마신 생수통을 하나씩 갖고 있고 다들 반바지, 민소매 차림이다. 문신이 새겨진 팔뚝이 보인다. 그들 손엔 문고판 가벼운 책들이 들려있다.

 

  배낭여행 족의 특권은 아무 곳에 앉거나 심지어 누울 수 있다는 점이다. 여자라도 무방하다. 며칠 씩 감지 않은 듯 질끈 동여맨 윤기 잃은 금발, 엄지와 둘째 발가락 사이에 줄을 맨 쪼리, 태양에 그을린 피부사이에 낱낱이 일어서 있는 솜털, 현지에서 산 스카프, 그리고 누구도 가둘 수 없는 자유가 일렁거린다.

 ​그걸 버팀목 삼아, 자고 싶으면 자고, 맥주를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또 포커를 치고 싶으면 치면 된다. 뭐라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청춘이기에 아니 청춘의 마음만 지니고 있으면 배낭여행의 무대에 누구든 오를 수 있다. 초등학교 5학년도. 그리고 그 엄마도.

 

 우린 애초 중국을 경유해 방콕에 들어 온 뒤, 비엔티엔으로 해서 방비엥, 루앙프라방, 치앙마이를 거쳐 다시 방콕으로 완주한 뒤, 북경에 가서 일주일을 보내려했다. 우리의 계획에 은 없었다. ‘은 접근하기 어렵고, 경비도 녹록치 않고, 무엇보다 두려웠다. 단단한 대지에서 벗어난 섬에서 자칫 고립된다면, 모든 일정이 어긋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루앙프라방에서 치앙마이까지 육로로 이박삼일에 걸쳐 들어가려던 호기가 여행의 중반을 달리면서 꺾이고 말아 국내선으로 한 시간 만에 당도했고, 치앙라이로 올라가려던 일정도 줄이는 바람에 방콕에서 귀국비행기를 타기까지 무려 일주일이란 말미가 주어졌다.

 

 우린 결국 섬을 택했다. 스쿠버 다이빙의 메카라 불리우는 따오 섬! 급작스런 선택이라 침대칸이 있을 리 없어서 불편한 의자에 누울 때만 해도 9시간만 타고 가면 오전 7시 첫배를 타고 순조로이 섬에 도착할 거라 예상했다.

 

 서양 젊은이들의 부어라 마셔라 소음을 참으며 나는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정리하는 한 편 혼곤히 잠이 든 아이에게 담요를 덮어주면서 초초히 시간을 보냈다.

아무도 어디에서 내리란 소리를 하지 않아, 다른 배낭여행객의 움직임만 주시하다가 하마터면 코사무이로 가는 일행을 따라갈 뻔하기도 했다.

 ​꽁지에 불붙은 듯 짐을 내리고 아이를 깨워 춤폰역에 발을 디뎠다. 뜨거운 태국이라도 아침은 아침만의 선선한 공기가 있다. 봉지 밥과 꼬치구이를 파는 좌판, 때가 꼬질꼬질한 어린아이들의 시선, 커다란 배낭을 맨 색목인들, 그 속에서 뭐 하나라도 더 팔려고 졸린 눈을 비비는 현지의 상인들.

 ​여행 중에는 뜨거운 물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커다란 복이다. 최후의 비상식량 컵라면으로 식욕을 돋울 수 있기 때문이다. 눈비비고 손님을 맞이하는 상인은 뜨거운 물도 그냥 내줄 수는 없다. 당연히 돈을 받는다. 다만 그 물이 과연 어떤 물일까? 생수를 끓여서 주진 않겠지만 깨끗한 물이길 바랄 뿐이다. 지금은 라면을 먹을 계제가 아니다.

 초긴장상태로 아이와 역사를 나가니 여행사직원이 우리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옷에다 척척 스티커를 붙인다. 기차와 페리를 조인트한 티켓을 사면 그렇게 식별을 한 뒤, 승차를 시킨다고 했다 롬프레야 버스는 바로 공장에서 나왔지! 하는 포스로 빛을 번쩍이고 있다. 이 버스노선이 황금노선임을 알 수 있는 표정이다.

  ​자국에 테러가 일어나도 관광산업에 해가 갈까 다들 벌벌 떤다. 그나마 이 노선도 태국황실이 다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살면서도 얼굴에 그늘이 없다. 순박, 다정하다.

 

 버스가 정차해 있는 주차장엔 정돈되지 않은 마른 풀들이 여기저기 돋아있고 아침부터 내리꽂듯 쏟아지는 태양빛에 수줍게 콘크리트 건물들이 듬성듬성 세워져 있다. 동남아의 풍경은 어딜 가도 그렇게 비슷비슷하다.

 

  기차는 연착을 거듭하더니, 급기야 아침 7시 배를 놓치게 만들었다. 다음 페리는 1시다. 한국이라면 화가 나서 펄펄 뛸 일이지만, 이 곳 사람들은 아무도 불평하는 사람 없이 해변에 자리를 펴고 심지어 수영을 하기도 한다.

 

  바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정 같은 맑은 물을 상상한 나로서는 패트 병이 둥둥 떠다니는 이 해변에 발을 담글 엄두가 나지 않아 망연하게 바다만 바라보는데 여행객들은 다양한 태도로 자신에게 주어진 6시간을 누린다. 항구의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가 아침을 먹는 사람, 해변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 어느 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뛰어든 사람, 그 모든 풍경을 사진기에 담느라 분주한 사람..그리고 그걸 관조하고 있는 나!

  ​우린 춤폰역에서 먹지 못한 컵라면을 먹을 요량으로 볶음밥을 하나 시켜서 허기를 달랬다. 아이는 라면냄새에 눈을 반짝인다. 두세 젓가락 먹고 나니 순식간에 라면은 동이 났다. 국물마저 아껴먹고 통을 비운 뒤, 해변에 내려 왔다.

  먼저 자리를 잡은 외국 남자가 나를 위해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러면서 통성명을 하고 이것 저것 묻게 되었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40대 남자로 태국 현지 여인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딸아이를 두었다고 했다. 그동안은 사업차 코 따오에 다녔는데 이번엔 모처럼 가족과 여행을 간다며, 숙소는 정했는지 묻는다.

  ​방콕에서 수차례 호텔을 찾아봤지만 모든 호텔은 풀리북이었다고 하니, 자신이 묵는 곳에 연락을 해본다고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지만 초성수기라, 거기도 방이 없단 대답만 돌아왔다. 순간 초조함이 엄습했다. 그러다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디 우리 두 사람 뉘일 곳이 없으랴 싶어.

  그는 우리보고 무엇을 먹었냐고 묻는다. 대답도 듣기 전에 아무리 배고파도 배타기 전에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왕 이리 된 거 어쩔 수 없다며이번엔 그쪽에서 나보고 어디서 왔냐며 형식적으로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후엔다이, 삼소옹이라며 엄지손을 치켜든다.

 삼성은 알아듣겠지만 후엔다이는 뭐냐고 고개를 갸웃하자, 당신 한국사람 맞냐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알고 보니 현대였다. 파리라면 에펠탑을 묻고, 런던이라면 대영박물관을 말 할 텐데, ‘삼성, 현대라니... ‘한글혹은 김홍도에 더 깊은 관심을 쏟는 외국인을 만날 날은 없을까? ‘갤럭시싼타페보다 그것을 만든 창조적 정신!! 그것이 한국의 진가를 발휘하는 지점이란 것을 알아주는 외국인을 만나고 싶다.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숙소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배를 기다리는 6시간은 고무줄을 늘이는 일처럼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여행 중엔 이렇게 속수무책의 시간과 마주할 때가 있다. 가난한 장기여행자에게 가진 건 시간뿐이라지만 어그러지고 흩어지는 시간 앞에서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을 때, 몸까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질 때, 여행을 송두리째 되돌리고 싶어진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른 곳을 가는 건데. 아까 그냥 그 배낭여행객을 따라 코사무이로 갈 걸... 되돌릴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안달을 낸다.

  ​그런 나와 달리 아이는 해변의 돌을 줍더니 물수제비를 뜬다. 돌은 몇 번 튕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물속에 가라앉았지만 아이는 지치지도 않는지 끝없이 도전한다. 저런 아이의 뒷모습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랑했던 시인이 생각난다.

 

.........., .........., , ...........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 크고 純精(순정)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 .........., , 튜르릉, . (해에게서 소년에게-최남선)

 

아이는 특유의 낙천성으로 어려운 상황을 반전시킨다. 힘이 들어 주저앉고 싶을 순간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낙서를 하고, 휴대폰 게임을 하고, 길고양이를 쓰다듬고, 동네 개와 뒹군다. 그리고 지금은 돌을 던진다. 난 어떠한가? 그 아이 곁에서 다음 일정을 짜고, 가계부를 쓰고, 시계를 보며 분주히 차편을 알아본다. 아이는 무심하게 공중에 떠있는 듯 가볍고 난 치열하게 바닥에 가라앉아 발버둥치는 듯 무겁다.

 

 ‘지금처럼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이 6시간만이라도 이 아이처럼 되어보자!’싶어 배낭에서 침낭을 꺼내 해변에 펼쳐놓고 스카프로 얼굴까지 덮은 다음 내게 주어진 이 황홀한 시간을 맘 놓고 누렸다. 늘 부유하던 나의 시간을 잠시 지상에 붙들어 매면서. 본디 색이 없는 무한한 창공에 본래 형태가 없는 흰 구름이 어우러져 있다. 숨이 몰아쉬어진다. 이대로 몇 시간이고 잠을 청해도 족하겠단 마음이 들었다.

 

  여행은 어쩌면 머뭄과 떠남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낯선 풍광 앞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끼려 안전한 집밖을 나서면서도 여행지의 호텔을 간절히 원한다. 새벽녘 공항버스를 기다리면서, 지루한 수속, 기나긴 보딩 행렬을 견딜 수 있는 건, 거기 여행지에서 머물 수 있는 숙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짐을 풀고서야 비로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떠났으면서 머물길 원하는 리듬은 나그네의 몸에 유동하며 끊임없이 그를 추동한다.

  농부는 농번기와 농한기로 나눠 일과 쉼을 반복하고 직장인은 주중과 주말, 학생은 50분 수업과 10분 휴식으로, 미셀 투르니에는 심장의 박동과 박동사이로 낱낱이 나눠 쉼을 누렸다면 난 심장박동대신 호흡으로 그 쉼을 경계 짓고 싶다. 들숨과 날숨 사이의 미세한 쉼..그것을 알아차릴 때, 매순간 일하고 매순간 쉴 수 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솜사탕을 문 듯 달콤해지는 찰라, 저 너머 아스라이 수평선에 페리가 슬슬 올라온다.

2 Comments
타이거지 2017.01.13 07:17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훨남퐁에서 연착을 떡 먹듯이 하는 기차를 타고 춤폰에 내려
롬프라야에 몸을 실었던 분들은 "내가 지금 따오가나??"^^
후엔다이,삼소옹에서..대장금으로..박지성에서 빅뱅으로..
사랑이란..알고싶어지는것..조금씩..조금씩...
두유 노 킹세종..음..훈민정음..앤.페인터 홍도 킴?
질문하는 외국인을 만나 울고?싶은날을 고대할께요.
요즘도 백과사전 베개에 책을 덮고 주무시나봐요...
혼자하는 장기여행이 또 주어진다면..네버스탑님 글이..내 외로움을 달래줄
벗이 될겁니다...
돌이킬수없어요 2017.01.14 10:45  
글을 참 잘쓰시네요^^
9시간..기차라... 전 못 탈것 같아요..언제를  추억 하신건지?  궁금해요~
그래도 글을 잘쓰셔서 다음편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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