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BTS웡위안야이역 근처에서 지내기. 묵은 곳, 먹은 것, 그리고 딱씬왕 이야기
그 동안 못 묵어 봤던 동네, 웡위안야이에 한번 가봤습니다.
BTS웡위안야이는 싸판딱씬 다음다음역입니다.
BTS웡위안야이역은 웡위안야이 로터리에서 1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BTS역 주변에 저렴한 숙소들이 생기고 그에 따라 여행자들이 조금씩 늘고 있는 지역입니다.
BTS웡위안야이역 주변 거리 풍경

BTS가 지나는 끄룽톤부리 도로는 꽤 넓고 차들이 쌩쌩 다니는 데다가 횡단보도도 잘 없습니다.
BTS웡위안야이역과 근처 육교를 통해 건널 수 있습니다.
BTS역 양쪽에 엘리베이터가 있으므로 이걸 이용하면 좀더 편합니다.
북쪽
https://maps.app.goo.gl/77nk7vHVyPWwrL8L9
남쪽
https://maps.app.goo.gl/4fuvqFs9HU6KF6hf7
클린 레지던스
Klean Residence
https://maps.app.goo.gl/L9Mf6KLJCgCuBvgx6
BTS역에서 엘리베니터에서 내려 도보 2분 거리 초역세권입니다.
가장 저렴한 방이 33,000원 정도합니다. 방은 약간 작지만 한두명이 지내기에는 큰 무리 없습니다.
주변에 식당도 많고 바로 앞에 큰 세븐일레븐도 있습니다. 저녁에는 세븐일레븐 앞에 먹거리 노점도 몇개 나옵니다.



클린레지던스 앞 거리 풍경
크루아 땀쌍
https://maps.app.goo.gl/8urHVw7r9eYwsK4aA
매우 깔끔하고 고급스런 분위기인데 비해 대부분의 단품식사가 65~100밧 선으로 저렴한편입니다.
음식은 정갈하게 나오고 맛도 괜찮습니다.
테이블 위의 QR코드로 주문 가능하며(영어로 변경 가능) 메뉴판보고 종업원에게 주문해도 됩니다.

카우랏 팟차 탈레 (해물 핑거루트 생후추 볶음 덮밥) 100밧

커무양 (항정살 구이) 79밧

리오 큰병은 85밧이에요.

투 브로 바
2bro Bar
https://maps.app.goo.gl/SPwzDyoaLHDLdQxE7
주택가 좁은 골목 안쪽에 자리한 바입니다.
목조주택을 개조해 만든 곳은 곳으로 분위기가 꽤 좋습니다. 라이브 음악 있습니다.
씽 큰병 150밧이고 감자튀김 같은 간단한 안주는 55밧입니다.







찟까몬
https://maps.app.goo.gl/sm755nYUfyt8kXMc7
웡위안야이 기차역 근처에 있는 소고기 국수집입니다. 이날만 그런건지 고기질이 좀 좋지 않았어요.
국수 70밧, 국 80밧입니다.

까파오 태 1993
Original Pad Kra Pao 1993
https://maps.app.goo.gl/Vw5pZfWoxLkbjsXz7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팟까파오 집입니다.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해물 등을 넣은 팟까파오가 있습니다. 가격은 59~89밧
맵기조절 가능하며 달걀후라이 추가는 10밧입니다.
까파오 외 똠얌, 카이찌여우 같은 다른 태국음식도 몇가지 있습니다.



BK
https://maps.app.goo.gl/zCVtqEGHZ1HVLFbK8
숙소근처 식당에서 먹은 카나무껍(튀긴삼겹살 중국케일 볶음) 덮밥 + 달걀후라이 55밧


BTS웡위안야이역에서 웡위안야이 가는 길은 MRT 공사로 혼잡합니다.

BTS 웡위안야이역 야경
'웡위안야이'는 '웡위안'=원형교차로,로터리, '야이'=크다의 뜻으로 '큰 로터리'란 말입니다.
웡위안야이는 톤부리왕조의 딱씬 왕 기념상을 중심으로 로터리가 조성 되어 있습니다.
딱씬은 아유타야 왕조가 버마군에게 멸망한 직후, 불과 몇 천 명의 병력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인물입니다. 전쟁을 거듭하며 태국 땅을 하나하나 되찾았고, 나라를 재통일하였으며 수도를 톤부리(지금 방콕 시내의 강 건너편)로 정했습니다.
딱씬은 새 왕조를 연 후에도 끊임없는 버마의 침략에 대응해야만 했습니다. 왕조 전환기의 약해진 중앙권력을 틈타 일어난 반란을 진압해야 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으며 일부 민중들은 약탈과 범죄를 일삼았습니다. 관리들의 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전쟁을 15년 가까이 쉬지 않고 치른 데다 나라 안팎으로 너무나 큰 정신적 피로와 압박감에 시달렸음은 자명합니다.
그러던 중 어떤 지방 파벌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당시 캄보디아와 전쟁 중이던 딱씬의 절친이자 오른팔이었던 짜끄리 장군은 급히 수도로 돌아와 쿠데타를 진압하지만 딱씬 왕을 폐위하고 처형합니다. 짜끄리는 스스로 왕이 되어 새 왕조를 엽니다.
그때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딱씬은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지만 말년에 미쳐버려 어쩔 수 없이 제거했다."
딱씬 왕은 스스로를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라고 했다고 합니다. 왕은 자신이 수행을 통해 특별한 경지에 올랐으며, 고승들조차 자신을 존경해야 하고 이를 거부한 승려들이 벌을 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외국 상인과 중국의 기록에는 딱씬 왕이 ‘미쳤다’는 말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강한 의지를 가진 군주, '종교에 집착했지만 판단력은 유지된 인물', '먹을 것 없는 백성들을 위해 왕실의 곳간을 열어준 인물'로 묘사됩니다.
짜끄리 왕조 초기의 왕실과 지배층에게 딱씬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아유타야 멸망 이후 혼란 속에서 개인적 카리스마로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새로 들어선 짜끄리 왕조의 왕조적 정통성을 위협할 소지가 있었기 때문에, 딱씬은 ‘구국의 영웅’이기보다는 ‘말년에 광기에 빠진 왕’으로 묘사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른바 ‘딱씬 광인설’은, 왕을 폐위하고 처형한 행위를 합리화하는 데 매우 효과적인 서사였습니다.
절대왕정이 유지되던 랏따나꼬씬 시대 동안, 딱씬은 의도적으로 역사의 주변부에 머물렀습니다. 그의 업적은 인정되더라도 제한적으로 언급되었고,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경계되었습니다. 이는 딱씬의 존재가 강조될수록, 현 왕조의 출발이 상대적으로 덜 정당해 보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32년 입헌혁명 이후 상황은 급변합니다. 절대군주제가 무너지고 군부가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하자, 딱씬은 오히려 이상적인 국가 영웅으로 재소환됩니다. 비 왕족 출신의 군사적 지도자, 혼란한 시대에 나라를 구한 인물이라는 그의 서사는, 민족주의와 애국심, 그리고 강력한 국가를 강조하고자 했던 군부 정권의 논리와 정확히 맞아 떨어졌습니다. 딱씬은 ‘미친 왕’이 아니라 ‘국가의 구원자’로 재정의되었고, 군부의 눈치를 본 왕실에서는 딱씬의 업적을 인정하고 '대왕(마하랏)'칭호를 추서하게 됩니다.
결국 딱씬 왕에 대한 평가는 '그가 누구'였는가보다, '그를 평가하는 자들이 누구'였는가를 더 잘 보여줍니다. 왕실은 왕조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그를 낮추었고, 군부는 민족주의적 동원을 위해 그를 높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딱씬 개인의 복잡한 인간적 면모와 통치의 명암은 단순화되거나 왜곡되었습니다. 딱씬은 단지 한 명의 군주가 아니라, 권력이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나 현재의 정치에 의해 다시 쓰인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예 중 하나입니다.
현재 태국 전역에는 그를 위한 수많은 사당이 있으며, 사람들은 '미친 왕이 아니라, 너무 많은 짐을 혼자 짊어졌던 비극적인 영웅'을 위해 향과 제물을 올리고 있습니다.
웡위안야이의 딱씬왕 기마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