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메이징 타일랜드의 그늘
어메이징 타일랜드의 그늘
태국은 자타가 공인하듯 관광대국의 반열에 올라 있다. 나는 가끔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빠따야는 퇴락해 있고 꼬삐삐는 아름답지만 독보적이지 않으며 치앙마이와 메홍손은 자연의 위대함을 마음으로 영접하기에는 평범할 뿐이다.
콰이강의 다리와 코끼리 트래킹, 뱀쇼와 알카자 쇼는 그저 자신이 놀이공원에 와 있는 느낌 이상을 주지 않는다. 이런 실망감은 국립박물관과 아유타야에 가서도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유물들은 섬세하거나 웅장하지 않고 심지어 국왕이 유럽을 방문했을 때의 소품들을 늘어놓은 전시관에서는 그 엉뚱함이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나마 볼만한 수코타이의 유적지는 기실은 크메르 문명의 일부였던 것이라 태국의 것이라 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앙코르 유적지와 비교하기는 더 더욱 곤란하다.
태국은 어떻게 관광대국이 되었을까?
태국은 흔히 3S의 나라로 불린다. 세 개의 S는 각각 바다(Sea)와 섹스(Sex) 그리고 태양(Sun)을 지칭한다. 바다와 태양에 대해서야 더 언급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문제는 섹스다.
2000년 태국관광청은 섹스로 고착된 태국 관광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어메이징 타일랜드(Amazing Thailand) 캠페인을 시작했다. 막대한 예산이 집행된 이 캠페인이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캠페인 기간 중 미국의 한 여행사가 어메이징 타일랜드 로고를 섹스 투어 상품에 사용해 태국관광청의 의욕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굳어진 3S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한국은 물론 유럽과 북미 그리고 중동과 아시아에서 태국으로 몰려드는 관광객의 적잖은 수는 섹스 관광에 나선 남성들이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 중 남자의 절반 이상은 전적으로 또는 관광을 겸해 값싸고 부담 없는 섹스를 즐기기 위해 태국을 찾는다.
방콕을 찾는 이 섹스동물들에게 모나리자는 더 이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신비한 미소가 아니라 거대한 유리 진열장 안의 계단에 줄지어 앉은 태국 여성들과 그들이 제공하는 전신 마사지 그리고 매춘 서비스일 뿐이다. 기괴한 섹스 쇼를 선사하는 빳뽕과 나나 플라자, 마사지 팔러 심지어 1-2천 바트에 몸을 파는 여자들을 만날 수 있는 바와 커피숍도 이들을 유혹하는 방콕의 명물이다.
태국이 이렇듯 세계적인 섹스 관광대국이 된 기원은 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가 패주한 인도차이나에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하고 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수십만 명의 미군이 남베트남에 쏟아져 들어왔다.
195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경제지원 등의 개입으로 강력한 친미정권이 세워진 태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든든한 군사적 배후기지 역할을 자임했다.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태국은 미국의 입장에서 다양하게 전쟁을 지원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방콕을 미군의 알엔알(R&R, Rest and Relaxation) 타운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알엔알은 참전 미군 병사에게 연차로 주어지는 일주일간의 공인된 휴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미군은 알엔알을 통해 병사들의 불만을 달래고 원기를 회복시킨 후 다시 전장에 투입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방콕에는 다양한 경제적 지원이 제공되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미국의 체이스 맨하탄 은행이 태국 정부에 제공한 4백만 달러 상당의 대여금은 대부분 방콕의 호텔과 바, 레스토랑을 건설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런 식으로 제공된 자금들은 모두 방콕을 미군의 거대한 알엔알 타운으로 조성하는 데에 직간접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1962년부터 1976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70만 명의 미군이 방콕을 찾았다. 미군은 방콕에 그치지 않고 방콕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중의 하나를 찾아 빠따야를 또 하나의 알엔알 타운으로 개발했다. 방콕과 빠따야 사이에는 도로가 건설되었고 한가로운 어촌이었던 빠따야 역시 홍등가와 다름없는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급속하게 변모했다.
한국도 이런 방콕의 역사와 무관할 수 없는 나라 중의 하나다. 알엔알은 이차대전 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미국이 해외파병이 잦아지면서 수립했던 군사 정책 중의 하나였다.
이차대전 종전 후 미군정이 수립된 일본과 남한은 그 첫 번째 희생양이었다. 유독 아시아에서만 미군의 알엔알은 주둔국의 여성들을 매춘으로 내몰았다.
유럽, 예컨대 패전국인 독일에도 미군이 주둔했지만 독일의 미군이 표방했던 알엔알은 건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아시아에서 미군의 알엔알은 노골적으로 주둔국의 여성들을 요구했다.
그 시절 미군들에게 유행했던 LBSM(Little Brown Sex Machine, 귀여운 황색 창녀)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인종비하적이며 비인간적인 용어였다. 수빅만에서 오끼나와 그리고 마닐라에서 경성에 이르기까지 미군은 알엔알이라는 이름으로 헐벗고 굶주린 점령지 여성들을 탐닉했고 점령지 정부는 암묵적으로 이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후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미군의 주둔은 남한전역에 미군의 알엔알 타운이 들어서게 했다. 이른바 기지촌이다. 미군의 캠프 주변에 형성된 알엔알 타운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양공주들을 탄생시켰고 결국 그네들의 인생을 위안부로 전락시켰다. 그것은 달러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 성범죄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군의 다음 전쟁에서 방콕은 미군의 거대한 알엔알 타운으로 전락했다. 2차 인도차이나 남베트남의 사이공이 아니라 태국의 방콕이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선택된 이유는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북위17도선을 경계로 벌어진 전면전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게릴라전으로 베트남 전 지역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었다. 따라서 사이공과 같은 후방 도시조차 안전한 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득이 미군은 방콕을 후방 알엔알 타운으로 선택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 후 방콕은 거대한 섹스 관광도시라는 평판을 얻었다. 십년에 걸친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봉사한 대가였다. 비슷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필리핀보다 태국이 부상(?)하게 된 이유는 방콕이라는 도시가 집중적으로 알엔알 타운으로 개발되었다는 점과 십년이라는 기간 그리고 한 해 70만 명이라는 막대한 미군을 감당하기 위해 조성된 효율적이고 거대한 인프라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지난 페르시아만 전쟁에서도 참전했던 미군의 알엔알 사이트로 방콕을 활용했다.
군사적 매춘(買春)은 민간인에게 행해지는 가장 참혹하고 비인간적인 전쟁범죄이다. 미군은 알엔알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에서 달러를 앞세워 이 같은 전쟁범죄를 태연하게 자행해 왔다. 방콕은 이런 미군의 전쟁범죄가 오랜 기간동안 광범위하고 집중적으로 행해진 최대의 피해지역이며 태국의 빈곤층 여성들은 이 범죄적 행각의 피해자이다.
태국의 반공주의 친미정권은 이 점에 관한한 미군과 공범자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태국의 친미 군부독재정권은 자국의 수도인 방콕을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제공했던 것은 물론 스스로 이 더러운 매춘산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달러를 챙겼다. 방콕의 매춘산업의 배후에 태국 군부의 실력자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나는 방콕에서 태국의 섹스산업이 비대하게 발전된 것에 대해 태국 여성들의 정조 관념이 희박하다거나 태국의 문화가 원래 그렇다거나 하는 편견에 젖은 설명을 수없이 들어왔다. 부끄러운 편견이다.
일례로 매춘여성을 가리켜 태국 사람들은 대개 '푸잉 마이디(나쁜 여자)' 혹은 '푸잉 하킨(음식을 구걸하는 여자)'으로 부른다. 어느 나라이건 대가를 주고 제공하는 섹스를 정당화하는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태국 역시 다르지 않다. 섹스 관광대국의 현실은 태국의 가슴 아픈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기지촌 양공주의 뼈저린 역사를 공감하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더욱 가슴 아플 다름이다.
오늘의 태국정부는 자국의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매춘산업이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자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메이징 타일랜드' 캠페인은 섹스 관광대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며 1999년에는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태국에서 매춘은 오래전부터 불법이다. 그러나 이 법은 공공연하게 몸을 파는 창녀촌만을 허용하고 있지 않을 뿐 유흥업소, 마사지 업소,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윤락행위를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묵인해 왔다.
태국 정부가 90년대 이후 자국의 매춘산업에 대해 조금씩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은 80년대 이후 태국이 이룬 경제발전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매춘이 태국의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십여 년에 걸쳐 고착된 매춘산업을 저지하기 위한 태국 정부의 노력은 결실을 기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매춘산업의 배후에는 마피아와 군부, 자본과 같은 강력한 기득권 세력이 버티고 있다. 이들은 태국에서뿐 아니라 일본이나 유럽 등지로 태국 여성들을 밀수출해 왔고 최근에 들어서는 아시아 빈국으로부터 여성들을 태국으로 수입하고 있다.
빳뽕. 사십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며 어메이징 타일랜드의 그늘이다.
유재현기자
태국은 자타가 공인하듯 관광대국의 반열에 올라 있다. 나는 가끔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빠따야는 퇴락해 있고 꼬삐삐는 아름답지만 독보적이지 않으며 치앙마이와 메홍손은 자연의 위대함을 마음으로 영접하기에는 평범할 뿐이다.
콰이강의 다리와 코끼리 트래킹, 뱀쇼와 알카자 쇼는 그저 자신이 놀이공원에 와 있는 느낌 이상을 주지 않는다. 이런 실망감은 국립박물관과 아유타야에 가서도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유물들은 섬세하거나 웅장하지 않고 심지어 국왕이 유럽을 방문했을 때의 소품들을 늘어놓은 전시관에서는 그 엉뚱함이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나마 볼만한 수코타이의 유적지는 기실은 크메르 문명의 일부였던 것이라 태국의 것이라 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앙코르 유적지와 비교하기는 더 더욱 곤란하다.
태국은 어떻게 관광대국이 되었을까?
태국은 흔히 3S의 나라로 불린다. 세 개의 S는 각각 바다(Sea)와 섹스(Sex) 그리고 태양(Sun)을 지칭한다. 바다와 태양에 대해서야 더 언급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문제는 섹스다.
2000년 태국관광청은 섹스로 고착된 태국 관광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어메이징 타일랜드(Amazing Thailand) 캠페인을 시작했다. 막대한 예산이 집행된 이 캠페인이 얼마나 성과를 거두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캠페인 기간 중 미국의 한 여행사가 어메이징 타일랜드 로고를 섹스 투어 상품에 사용해 태국관광청의 의욕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수십 년 동안 굳어진 3S의 이미지를 단숨에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한국은 물론 유럽과 북미 그리고 중동과 아시아에서 태국으로 몰려드는 관광객의 적잖은 수는 섹스 관광에 나선 남성들이다. 공식적인 통계는 없지만 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 중 남자의 절반 이상은 전적으로 또는 관광을 겸해 값싸고 부담 없는 섹스를 즐기기 위해 태국을 찾는다.
방콕을 찾는 이 섹스동물들에게 모나리자는 더 이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신비한 미소가 아니라 거대한 유리 진열장 안의 계단에 줄지어 앉은 태국 여성들과 그들이 제공하는 전신 마사지 그리고 매춘 서비스일 뿐이다. 기괴한 섹스 쇼를 선사하는 빳뽕과 나나 플라자, 마사지 팔러 심지어 1-2천 바트에 몸을 파는 여자들을 만날 수 있는 바와 커피숍도 이들을 유혹하는 방콕의 명물이다.
태국이 이렇듯 세계적인 섹스 관광대국이 된 기원은 2차 인도차이나 전쟁(베트남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가 패주한 인도차이나에 미국이 개입하기 시작하고 6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수십만 명의 미군이 남베트남에 쏟아져 들어왔다.
195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경제지원 등의 개입으로 강력한 친미정권이 세워진 태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의 든든한 군사적 배후기지 역할을 자임했다.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태국은 미국의 입장에서 다양하게 전쟁을 지원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방콕을 미군의 알엔알(R&R, Rest and Relaxation) 타운으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알엔알은 참전 미군 병사에게 연차로 주어지는 일주일간의 공인된 휴가를 지칭하는 것으로 미군은 알엔알을 통해 병사들의 불만을 달래고 원기를 회복시킨 후 다시 전장에 투입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방콕에는 다양한 경제적 지원이 제공되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미국의 체이스 맨하탄 은행이 태국 정부에 제공한 4백만 달러 상당의 대여금은 대부분 방콕의 호텔과 바, 레스토랑을 건설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런 식으로 제공된 자금들은 모두 방콕을 미군의 거대한 알엔알 타운으로 조성하는 데에 직간접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결과 1962년부터 1976년에 이르기까지 매년 70만 명의 미군이 방콕을 찾았다. 미군은 방콕에 그치지 않고 방콕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 중의 하나를 찾아 빠따야를 또 하나의 알엔알 타운으로 개발했다. 방콕과 빠따야 사이에는 도로가 건설되었고 한가로운 어촌이었던 빠따야 역시 홍등가와 다름없는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급속하게 변모했다.
한국도 이런 방콕의 역사와 무관할 수 없는 나라 중의 하나다. 알엔알은 이차대전 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미국이 해외파병이 잦아지면서 수립했던 군사 정책 중의 하나였다.
이차대전 종전 후 미군정이 수립된 일본과 남한은 그 첫 번째 희생양이었다. 유독 아시아에서만 미군의 알엔알은 주둔국의 여성들을 매춘으로 내몰았다.
유럽, 예컨대 패전국인 독일에도 미군이 주둔했지만 독일의 미군이 표방했던 알엔알은 건전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아시아에서 미군의 알엔알은 노골적으로 주둔국의 여성들을 요구했다.
그 시절 미군들에게 유행했던 LBSM(Little Brown Sex Machine, 귀여운 황색 창녀)은 이렇게 해서 탄생한 인종비하적이며 비인간적인 용어였다. 수빅만에서 오끼나와 그리고 마닐라에서 경성에 이르기까지 미군은 알엔알이라는 이름으로 헐벗고 굶주린 점령지 여성들을 탐닉했고 점령지 정부는 암묵적으로 이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후 상호방위조약의 체결과 미군의 주둔은 남한전역에 미군의 알엔알 타운이 들어서게 했다. 이른바 기지촌이다. 미군의 캠프 주변에 형성된 알엔알 타운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양공주들을 탄생시켰고 결국 그네들의 인생을 위안부로 전락시켰다. 그것은 달러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 성범죄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군의 다음 전쟁에서 방콕은 미군의 거대한 알엔알 타운으로 전락했다. 2차 인도차이나 남베트남의 사이공이 아니라 태국의 방콕이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선택된 이유는 베트남 전쟁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북위17도선을 경계로 벌어진 전면전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게릴라전으로 베트남 전 지역에서 수행될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었다. 따라서 사이공과 같은 후방 도시조차 안전한 지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부득이 미군은 방콕을 후방 알엔알 타운으로 선택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 후 방콕은 거대한 섹스 관광도시라는 평판을 얻었다. 십년에 걸친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봉사한 대가였다. 비슷한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 그리고 필리핀보다 태국이 부상(?)하게 된 이유는 방콕이라는 도시가 집중적으로 알엔알 타운으로 개발되었다는 점과 십년이라는 기간 그리고 한 해 70만 명이라는 막대한 미군을 감당하기 위해 조성된 효율적이고 거대한 인프라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은 지난 페르시아만 전쟁에서도 참전했던 미군의 알엔알 사이트로 방콕을 활용했다.
군사적 매춘(買春)은 민간인에게 행해지는 가장 참혹하고 비인간적인 전쟁범죄이다. 미군은 알엔알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에서 달러를 앞세워 이 같은 전쟁범죄를 태연하게 자행해 왔다. 방콕은 이런 미군의 전쟁범죄가 오랜 기간동안 광범위하고 집중적으로 행해진 최대의 피해지역이며 태국의 빈곤층 여성들은 이 범죄적 행각의 피해자이다.
태국의 반공주의 친미정권은 이 점에 관한한 미군과 공범자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태국의 친미 군부독재정권은 자국의 수도인 방콕을 미군의 알엔알 타운으로 제공했던 것은 물론 스스로 이 더러운 매춘산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달러를 챙겼다. 방콕의 매춘산업의 배후에 태국 군부의 실력자들이 버티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나는 방콕에서 태국의 섹스산업이 비대하게 발전된 것에 대해 태국 여성들의 정조 관념이 희박하다거나 태국의 문화가 원래 그렇다거나 하는 편견에 젖은 설명을 수없이 들어왔다. 부끄러운 편견이다.
일례로 매춘여성을 가리켜 태국 사람들은 대개 '푸잉 마이디(나쁜 여자)' 혹은 '푸잉 하킨(음식을 구걸하는 여자)'으로 부른다. 어느 나라이건 대가를 주고 제공하는 섹스를 정당화하는 문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태국 역시 다르지 않다. 섹스 관광대국의 현실은 태국의 가슴 아픈 역사적 산물일 뿐이다. 기지촌 양공주의 뼈저린 역사를 공감하고 있는 한국인으로서는 더욱 가슴 아플 다름이다.
오늘의 태국정부는 자국의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매춘산업이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자각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메이징 타일랜드' 캠페인은 섹스 관광대국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의 일환이며 1999년에는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기도 했다.
놀랍게도 태국에서 매춘은 오래전부터 불법이다. 그러나 이 법은 공공연하게 몸을 파는 창녀촌만을 허용하고 있지 않을 뿐 유흥업소, 마사지 업소, 카페, 레스토랑 등에서 윤락행위를 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묵인해 왔다.
태국 정부가 90년대 이후 자국의 매춘산업에 대해 조금씩 전향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은 80년대 이후 태국이 이룬 경제발전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바야흐로 매춘이 태국의 경제발전의 발목을 잡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십여 년에 걸쳐 고착된 매춘산업을 저지하기 위한 태국 정부의 노력은 결실을 기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무엇보다 매춘산업의 배후에는 마피아와 군부, 자본과 같은 강력한 기득권 세력이 버티고 있다. 이들은 태국에서뿐 아니라 일본이나 유럽 등지로 태국 여성들을 밀수출해 왔고 최근에 들어서는 아시아 빈국으로부터 여성들을 태국으로 수입하고 있다.
빳뽕. 사십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며 어메이징 타일랜드의 그늘이다.
유재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