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현대사를 관통하는 매살롱(Mae Salong) 히스토리 **추가본** 역사의 숨겨진 정반대의 얘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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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현대사를 관통하는 매살롱(Mae Salong) 히스토리 **추가본** 역사의 숨겨진 정반대의 얘기들

KIM 11 5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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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링크 마지막에 또다른 얘기들이 실려갑니다. 접하지 못한 얘기들..
숨겨졌던 얘기들..역사는 보는 이의 관점과 서술에 따라 360도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타이와 버마의 국경분쟁 혹은 <선과 악> <이데올로기> 일상적
대립과 갈등으로만 어렴픗이 보여지던... 모든 것을 백지에서 다시 이해
하고 해석해야 할런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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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기사들의 내용중...중요한 Key의 하나가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
다. 근래 타이 남부에서 불붙는 <이슬람 분리주의자의 테러리즘>으로
묘사되는 현 상황과...역사는 질긴 필연의 연계고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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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군은 입헌군주제와 군사독재를 부정하며 타이-라오스와 타이-말레
이시아 국경에서 무장 봉기해온 타이공산당(CPT) 박멸작전에 국민당
잔당을 동원했다. 타이군은 1970년대 ‘레드 메오’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국경 산악을 근거지로 저항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하고자 ‘공산주의
저격수’를 자임해온 국민당 잔당 400여명을 타이공산당의 마지막 산악
해방구였던 펫차분(Phetchabun)에 ‘의용대’란 이름으로 투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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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특별히 매살롱의 히스토리가 없는 듯 하여 올립니다. 관련 내용이 연결됩니다. 한 번쯤 보시고 여행하시면 상당히 매력적인 매살롱 그리고 북부를 느끼게 될런지 모릅니다.

http://blog.empas.com/great159/read.html?a=5549230

http://blog.empas.com/heechan01/read.html?a=5479979

http://news.empas.com/show.tsp/cp_hw/20041230n12176/?kw=

http://h21.hani.co.kr/section-021069000/2004/12/021069000200412230540003.html

http://www.drugtext.org/library/books/McCoy/book/62.htm

http://www.myanmar.gov.mm/Article/Article2001/Apr/April10.htm

http://www.myanmar-narcotic.net/eradication/15drug.htm

http://www.drugwar.com/neocolonialism.shtm

http://www.drugtext.org/library/books/McCoy/book/29.htm

복잡한 것 싫어하시고, 단순한 것 좋아하시는 분은 더이상 보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 이 기사들의 구석구석에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007 액션류 및 타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 등에 많이 등장하는 마약집단과 트라이앵글의 장면들.. 그리고 그것을 단죄하는 히어로 및 아메리카/타이 정부권력..하지만 마약세력의 실질적 스폰서와 오거나이저는 CIA를 비롯한 세계의 질서를 그들의 입맛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USA 군산복합체, THAI 고위 권력층이라는...

이 내용의 진위를 논외로 하고서라도, CIA와 세계의 마약 패권을 주무르는 카르텔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이러한 백사이드 스토리가 과연 과거만의 "음모론"적 <히스토리>인가....그것이 아니라면 현재까지 전세계 마약 시장을 실질적으로 통제,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 건재하다는 말인가....

복잡한 역사에 대한 정밀한 진위를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역사책과 가이드북에 실리지 않는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매살롱을 비롯한 타이 현대사와 인도차이나 (우리의 역사로까지)로의 이해에 대한 하나의 접근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이 내용들은 타이내에서 <마약> <소수민족> <이데올로기> <권력> <군주제> <군벌> <대 버마/라오/중국/대만/미국>이라는 코드의 해석에 대한 다양한 사실과 관점을 제공함으로써, 단순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이해와 해석의 유효 데이타가 되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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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내용은 부분 발췌분입니다. 원문기사의 정확한 이해와 접근을 위해서는
위의 사이트 링크로 들어가셔서 한국 현대사 및 세계사와 가늠해 가시며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반미주의자도 아니고, 반전주의자. 반타이정부자도 아니오니 청자의 확대
해석 및 부분적 해석은 제발 사양합니다. 전체적인 의미와 흐름으로 보아주
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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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CIA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 잔당들의 대버마 비밀전쟁에는 ‘마약의 정치경제학’이 숨어 있었다. 반공을 내건 국민당이 인민해방군에 쫓겨나면서 비록 ‘이념전쟁’에서는 패했지만, 버마 국경을 넘어온 국민당 잔당들은 CIA의 지원을 받으며 중국·라오스·버마·타이 국경지대를 끼고 벌어진 ‘마약 전쟁’에서는 승리할 수 있는 발판을 다졌다.

국민당 잔당들은 CIA가 지원한 무기와 병력으로 버마 국경지대 소수 산악민족들을 협박해 1950년 초부터 아편 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그리고 소수민족들이 생산한 아편에서 세금을 뜯어내고 운반을 대행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해나갔다. 국민당 잔당이 CIA 수송장비들을 이용해 몽삿에서 타이 북부 치앙마이를 거쳐 방콕까지 실어나른 마약은 다시 CIA 끄나풀이자 타이 정치를 주물렀던 실권자인 경찰 총수 파오 스리야논다 장군의 보호 아래 홍콩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로 팔려나갔다.


골든 트라이앵글에서의 마약사업

그 과정에서 CIA는 자신들이 앞세운 ‘사우스 이스트 아시아 서플라이스’(South East Asia Supplies Corporation)를 통해 파오 스리야논다 장군에게 대규모 무기를 제공해 해양경찰과 경찰항공대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대신 그이가 국민당 잔당의 ‘마약사업’을 돕도록 했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연간 60t에 지나지 않던 인도차이나의 전체 아편 생산량이 베트남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무려 1천톤을 넘었고,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는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마약 생산지가 되었다. 타이는 세계 최대 마약 중계시장으로 떠올랐고. 말하자면,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던 1950년대 ‘국제반공전선’과 ‘국제마약시장’은 CIA의 지원을 받으면서 함께 자라난 쌍둥이었던 셈이다.




△ 몽삿의 국민당 반공대학(왼쪽). 국민당 소속 여군. 국민당 잔당은 여성들을 정보원으로 중국 내부에 투입하기도 했다.



“우린 그런 거 손댄 적 없어, 절대로 없어!” 그러나 국민당 잔당과 관계 있는 누구를 붙들고 물어봐도 ‘마약’에 대한 이야기만은 도무지 들을 수가 없다. 남녀든 노소든 누구든 마약 ‘마’자만 나오면 손사래부터 친다.

“리원환 장군도 돤시원 장군도 모두 마약에 손대는 이들을 처벌할 정도로 엄격했는데, 무슨 그런 소릴!” 2004년 2월1일 완공한 도이 매살롱의 태북의민문사관(泰北義民文史館)이라는 국민당 기념관에서 안내자로 근무해온 자오셴짠씨는 마약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발끈했다.

물론, 아편 이권을 놓고 국민당 잔당이 둘로 갈라져 돤시원 장군이 이끄는 제5군 소속 1800여명은 도이 매살롱에, 그리고 리원환 장군이 이끄는 제3군 소속 1400여명은 탐 응옵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깊숙한 내막을 물어본들 대답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더욱이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으며 400여명에 이르는 제1독립부대 스파이를 거느리고 그 두 장군 사이를 중재했던 정보부대장 마쥔궈 장군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고.

아무튼 그렇게 둘로 쪼개졌던 국민당 잔당들은 샨주에서 새로운 마약 군벌로 떠오른 이른바 ‘마약왕’ 쿤사와 골든 트라이앵글 패권을 놓고 겨룬 1967년 ‘마약전쟁’ 기간 동안 다시 연합했다. 그 전쟁을 통해 쿤사의 협박은 수그러들었고, 국민당 잔당들은 여전히 골든 트라이앵글 지대를 낀 마약 생산과 거래의 90%를 독점해나갈 수 있었다.

‘반공구국전선’ 구호를 외쳤지만, 결국은 ‘마약패권전선’의 깃발 아래 국경 전선을 달렸던 국민당 잔당은 1950년대 내내 버마 정부군과 비밀전쟁을 벌였고, 이어 1960년대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에는 미국의 용병으로 대라오스 비밀전쟁(Secret War)에 참전했다. 그리고 다시 1970~80년대에는 타이 정부의 대공산당(CPT) 박멸작전에 비밀리에 투입되면서 냉전 기간을 통틀어 이 세상에서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가장 길고 지루한 ‘비밀반공전선’을 달린 끝에 도이 매살롱에 정착했다.


반공구국전선, 마약패권전선

그러나 ‘시간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평생을 전선에서 보낸 전사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든지, 이제 도이 매살롱에는 어제의 용사들이 한물가고 그 3세들이 빼곡이 메워가고 있다.
현재 버마와 국경을 이룬 타이 북부 도이 매살롱, 팡, 매홍손 지역 그리고 라오스와 국경을 이룬 파탕에는 국민당 잔당으로 평생 전쟁터를 오갔던 이들이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 국민당 잔당 출신 ‘반공용사’들과 그 후손 5만7천여명이 살고 있는 54개 마을을 타이 사람들은 흔히 국민당 약자를 따 ‘KMT 마을’이라 부른다.

제국주의의 유산, 아시아의 마약

돌이켜보면, 아시아의 마약은 식민주의자들이 전해준 ‘유산’이었다. 인디아를 점령한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디아의 아편을 중국에 팔아먹기 전까지만 해도 인디아와 중국은 7세기경 아랍 상인들이 전해준 양귀비를 편의작물로 재배하는 수준이었다.




△ 아시아 지역의 마약 생산은 식민주의 침략사와 정확히 괘를 같이해왔다.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 중독자들. (사진 / 정문태 기자)



이어 제2차 앵글로-차이니즈전쟁(Anglo-Chinese War·1856∼58)을 승리로 이끈 영국은 강압 무역협정을 통해 중국에서 양귀비 재배와 판매를 합법화했다. 그 결과, 1875년 윈난성의 경작 가능한 땅 가운데 3분의 1이 양귀비로 뒤덮였고, 런던의회가 아편 판매를 제한했던 1886년 한해 동안에만도 영국 상인들이 중국에 팔아먹은 아편은 6500t에 달했고, 또 1500만명에 이르는 중독자를 양산했다.

그 뒤 1906년 런던의회가 마약거래를 ‘부도덕’한 사업으로 규정하자, 비슷한 시기에 중국 정부도 마약폐기 운동을 벌였다. 그 여파로 중국 내 아편 생산이 줄어들자 버마산 아편이 윈난성을 거쳐 중국 시장으로 밀려들었고, 윈난성 정부는 밀수한 아편을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전매회사에 팔아넘기기도 하면서 동남아시아의 마약거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식민 당국들이 아편 수입에서 거두는 세금으로 목돈을 만졌던 탓에 시암(타이), 버마(영국 식민지), 라오스(프랑스 식민지) 접경지대 트라이앵글에서는 대규모 양귀비 재배가 이뤄지지는 않았다.

그랬던 것이, 1950년 초 국민당 잔당들이 넘어오면서부터 그 접경지대가 양귀비로 뒤덮이며 결국 ‘골든 트라이앵글’로 변해갔다.
이렇듯 아시아 지역의 마약 생산은 식민주의 침략사와 정확히 괘를 같이해왔다. 한반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연간 1천kg 안팎의 아편을 생산해왔던 한반도에서 갑자기 1930년대를 지나면서 그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1941년에는 무려 5만725kg에 이르렀다. 같은 기간, 경작지도 평균 300∼400ha에서 무려 8462ha로 늘어났다.

그 시절 한반도에서 생산한 대부분의 아편은 광저우와 만주로 수출됐다. 그 이유는 일본 식민주의자들이 한반도에서 아편 생산을 정책적으로 지원하며 전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식민주의자들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전비에 쪼들리자 라오스와 북베트남에서 아편 세금을 거두고자 양귀비 생산을 독려하며 인도차이나를 마약창으로 만들었다. 특히 1946년 프랑스 식민 당국은 아편 전매를 폐지하며 표면상 아편근절운동을 시작했지만, 뒷구멍으로는 정보부를 통해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Indo-china War·1946∼54년)의 전비를 마련하고자 이른바 ‘오퍼레이션 X’라는 작전명 아래 인도차이나의 아편 재배와 운송을 지원하는 철저한 이중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당시 부패한 프랑스 정보국은 오늘날까지 악명을 떨치는 코르시카 마약 신디케이트와 손잡고 국제 마약시장을 휩쓸었다.

그 뒤 프랑스로부터 베트남 전쟁을 물려받은 미국도 1960년대 라오스를 인도차이나에서 사회주의 확장을 막는 방파제로 삼겠다며, 이른바 대라오스 비밀전쟁(Secret War)을 치르면서 프랑스 정보국을 본떠 마약을 ‘전략화’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라오스의 소수민족인 몽족 게릴라를 조직하면서 그 대가로 몽족의 아편 재배를 조직적으로 지원했고, 또 그이들이 생산한 마약을 자신들이 운영하는 에어아메리카(AA)로 사이공의 ‘안전지대’까지 실어다주었다. 그 결과, 베트남 전쟁판은 마약 소굴로 변했고, 참전 미군의 10∼15%가 마약을 복용하기에 이르렀다. 이건 1970년대를 지나면서 세계적으로 마약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결국 식민주의 정보 당국과 무장세력들이 합작한 국제마약사(國際痲藥史)를 거쳐 오늘날 아시아는 마약 생산의 중심지로 또 마약 소비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영국·미국·프랑스·일본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잘나가는 ‘선진국’들은 시치미를 뗀 채 아시아를 마약의 원흉으로 지목해서 ‘아니꼽게’ 노려보고 있다.





국민당 관련 연표

1911년 : 신해혁명
1912년 : 청 멸망. 중화민국 수립
1916∼28년 : 군벌 춘추전국시대
1919년 : 5·4운동. 중국국민당 창당
1921년 : 중국공산당 창당
1924∼27년 : 제1차 국공합작
1927년 : 중국공산당 혁명정권 ‘중화소비에트’ 수립
1935년 : 중국공산당 8·1선언(항일민족통일전선 제창)
1936년 : 서안사건
1937년 : 중일전쟁 발발. 제2차 국공합작
1938년 : 국민당의 공산당 공격. 적전 내전 돌입
1945년 : 일본 패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1949년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패전 국민당 대만으로 도피
1949년 말 : 국민당 윈난 지역 잔당 버마 국경과 인도차이나반도로 도피
1950년 : 국민당 잔당 버마 정부군과 전투. 한국전쟁 발발
1951년 : 국민당 잔당 중국 남부 윈난 공격
1953년 : 한국전쟁 휴전
1954년 : 국민당 잔당 대만으로 제1차 철수. 국민당 잔당 해체 공식 선언
1954∼61년 : 잔류 국민당 잔당 버마 국경에서 전투 지속
1961년 : 국민당 잔당 대만으로 제2차 철수. 국민당 철수 완료 공식 선언
1961-1973년 : CIA, 국민당 잔당과 중공군 한국전쟁 포로 대라오스 비밀전쟁 투입
1967년 : 국민당 잔당과 쿤사 사이에 ‘마약전쟁’ 발발
1970∼74년 : 타이 정부, 대레드메오(Red Meo) 진압 작전에 국민당 잔당 동원
1981년 : 타이 정부, 대타이공산당(CPT) 박멸 작전에 국민당 잔당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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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 정부군 산하의 준군사조직으로 편입


1967년 5월, 타이 경찰이 치앙라이(Chiang Rai) 지역 양귀비 재배를 단속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다 메오족- 타이인들이 몽족(Hmong)을 일컫는 말- 마을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일로 산악 민심이 흉흉해지자, 10월 들어 타이 정부는 치앙라이주와 난(Nan)주에 대해 ‘공산주의 진압작전’이라며 중무장 경찰과 군대를 파견해 메오족을 더욱 자극했다. 이어 1968년 초, 타이군이 네이팜탄으로 메오 마을들을 공격하자 흥분한 메오족들이 산악 ‘해방구’를 설치해 무장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타이군이 ‘산악전투’에 치명적인 결함을 보이면서 사태가 더욱 꼬이자, 타이군과 타이군에 뒷돈을 대던 미국은 산악 게릴라전의 명수인 국민당 잔당을 동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타이 정부는 외국 군대인 국민당 잔당을 불법자로 간주하면서도,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그 불법자들을 정부군 산하의 준군사조직으로 편입했다. 그리고 1970년 12월 국민당 잔당 제5군사령관 돤시원은 휘하 부대원들을 주력으로 아카(Akha), 리수(Lisu), 라후(Lahu) 같은 산악 소수민족을 조직해 타이군 대신 대 ‘레드 메오’ 박멸작전에 뛰어들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1970년부터 1974년까지 약 1500명에 이르는 국민당 잔당이 레드 메오 진압작전에 참여했다. 그이들이 없었다면 그 작전은 불가능했다. 그들 가운데 300여명이 전사했고 40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레드 메오 진압작전 당시 진압본부에서 국민당 잔당을 타이군으로 조직했던 타이 육군 퇴역 대령 칸차나(Col. Kanchana Prakatvudhison)의 증언이다.


살아남은 잔당들, 시민증을 얻다

그렇게 ‘용병’이 된 국민당 잔당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으며 군사적으로 타이군에 편입됐음에도, 타이 정부와 CIA는 오히려 국민당 잔당 제5군 본부인 도이 매살롱과 제3군 본부인 탐 응옵을 최악의 마약 생산기지라 폭로하면서 국민당 잔당을 윽박질러 새로운 전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1981년 국민당 잔당들은 다시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타이군은 입헌군주제와 군사독재를 부정하며 타이-라오스와 타이-말레이시아 국경에서 무장 봉기해온 타이공산당(CPT) 박멸작전에 국민당 잔당을 동원했다. 타이군은 1970년대 ‘레드 메오’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국경 산악을 근거지로 저항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하고자 ‘공산주의 저격수’를 자임해온 국민당 잔당 400여명을 타이공산당의 마지막 산악 해방구였던 펫차분(Phetchabun)에 ‘의용대’란 이름으로 투입했다.


“그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돼 당시 시민들은 물론 군 내부에서도 핵심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어. 왜냐하면 국민당 잔당들을 민간인처럼 꾸며 전선에 투입했기 때문이야.” 칸차나 대령은 타이 정부가 국민당 잔당이라는 외국 용병을 다시 한번 국내 분쟁에 투입한 사실을 증언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너무 고통스러운 과거였어.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는 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펫차분 작전에서 공산당 300여명을 죽였다는 천마오슈(陳茂修·87·치앙라이) 대령은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다”는 말로 한평생 ‘반공 비밀전쟁’에 바친 자신의 이야기를 닫았다. “펫차분이 마지막 전쟁이었어. 일생 동안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왔고, 후회 같은 건 없어. 난 군인이었으니!” 레이위톈(雷雨田·87·도이 매살롱) 장군은 평생을 ‘반공 비밀전선’에 바친 대가로 얻은 도이 매살롱 산상 호텔의 정원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타이 정부를 위해 싸웠던 국민당 잔당들은, 살아남은 그 잔당들은 타이 정부에서 ‘시민증’을 얻었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전쟁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우들이 보상금도 없어 사라져버린 대가였다.

그렇게 반세기를 온갖 전쟁터에서 보낸 국민당 잔당들은 이제 대부분 사라지고, 그 후손들이 타이 국경지대에서 ‘KMT’(국민당·Kuomintang)라는 달갑잖은 이름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국민당 잔당들은 아시아의 비극사였고, 냉전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러나 국민당 잔당들을 국제 반공전선의 용병으로 이용해먹었던 미국 정부도 대만 정부도 타이 정부도 모두 철저히 입을 닫았다. 그렇게 해서 국민당 잔당은 버림받은 역사로 묻혀져왔고, 그이들에게 남은 건 오직 ‘국제 마약시장의 원흉’이라는 꼬리표뿐이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국민당 잔당들의 역사를 온전히 복구하지 않고는 아시아를 말아먹었던 ‘제국주의 비밀 침략사’도 그리고 아시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미국의 ‘비밀 반공전쟁사’도 모두 어두운 세계사의 공백으로 남겨지고 말 것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역사 속에서 과연 아시아의 미래가 있을까?’ ‘누가 국민당 잔당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화두를 안고 일곱달에 걸친 취재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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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수 채우려 몽족까지 송환시켜


그럼에도 국민당 잔당은 대약진운동의 여파에 따라 중국에서 버마로 넘어온 이들을 규합해 1960년 말 5천~6천명에 이르는 병력을 갖췄다. 위기로 판단한 우누는 1960년 10월 “인민해방군이 버마 영내 12마일까지 진격해서 국민당 잔당을 공격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고 중국과 손을 잡았다. 결국 1961년 1월26일, 2만여명에 이르는 인민해방군이 버마의 샨(Shan)주 켕퉁(Kengtung)쪽으로 진격했고, 버마 정부군은 메콩강쪽 몽 팔리아오를 공격했다. 국민당 잔당은 3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고 타이와 라오스 국경으로 쫓겨났다. 그들 가운데 400~500명은 라오스군으로 편입되면서 살길을 찾아갔다.

한편 버마 정부군이 국민당 잔당들의 본거지였던 켕랍과 몽 팔리아오 공격에서 미국제 무기를 대량 발견한데다, 버마 공군이 국경지대에서 대만 소속 미국제 항공기(PBY)를 격추시키면서 워싱턴과 타이베이 사이에는 큰 혼선이 빚어졌다. 곧장 케네디는 버마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했고, 장제스에게 강력한 항의 전보를 날려 국민당 잔당 소환을 압박했다. 동맹국 맹주의 압박을 못 이긴 장제스는 마침내 ‘꿈’을 접고 국민당 잔당 철수를 결정했다.



△ 타이완 송환자에 포함된 아이들. 국민당 잔당은 타이완 송환이 결정되자 이렇게 현지 아이들을 군인 대신 타이완으로 보냈음이 이 사진으로 잘 드러난다.






그렇게 해서 1961년 3월17일~4월12일에 버마와 라오스 국경지대에서 국민당 잔당 3371명과 그 관계자 825명이 대만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돤시원 장군의 제5군 소속 1800여명과 리원환 장군의 제3군 소속 1400여명, 마쥔궈(馬俊國) 장군의 제1독립부대 정보요원을 포함한 총 3천명을 웃도는 국민당 잔당들이 대만으로 송환을 거부한 채 타이 국경지대에 남았다. 그로부터 버마와 국경을 맞댄 타이의 도이 매살롱(Doi Mae Salong)은 국민당 잔당 제5군, 그리고 탐 응옵(Tam Ngop)은 제3군 본부가 되었다.

여기서 눈여겨볼 지점이 있다. 총 병력 수 4천~5천명으로 추산했던 국민당 잔당 가운데 공식적인 송환자 수가 4196명에 달했는데 어떻게 현지에 남은 잔당들이 3천여명이나 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다. 그건 한때 켕랍에서 무전병으로 근무하다 1961년 제2차 송환 때 대만으로 건너간 국민당 잔당 출신 친이후이(覃怡輝·중앙연구원 중산인문사회과학연구소) 교수의 증언을 통해 풀어낼 수 있다.

“머릿수를 채우려고 국민당과 관계없는 몽족(Hmong)을 비롯한 산악 소수민족들 아이나 여자들을 송환자에 포함시켜서 대만으로 보내고, 군인들은 국경에 남았던 거지.”


마약 루트를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나


그렇다면 왜 국민당 잔당들은 대만으로 가지 않고 국경에 남았던가라는 의문이 또 남는다. 돤궈샹(段國相·78·제3군) 대령의 설명은 이랬다. “대부분 고향이 윈난인데 대만으로 가면 영영 되돌아오기 힘들다고 믿었기 때문이야.” 그러나 당시 국민당 잔당이 버마-타이-라오스를 잇는 국경지대의 마약 루트 90%를 장악하고 있었던 걸 보면, 돤 대령이 말하는 그런 개인적인 ‘감성’으로만 상황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더구나 장제스가 여전히 잔당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아무튼, 제2차 철수가 끝나면서 대만 정부는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어떤 형태로든 국민당 잔당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국경에 남은 이들은 더 이상 대만 정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로부터 국경에 남은 국민당 잔당들은 국적도 정체도 없는 불법 무장세력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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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잔당들, 시민증을 얻다

그렇게 ‘용병’이 된 국민당 잔당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으며 군사적으로 타이군에 편입됐음에도, 타이 정부와 CIA는 오히려 국민당 잔당 제5군 본부인 도이 매살롱과 제3군 본부인 탐 응옵을 최악의 마약 생산기지라 폭로하면서 국민당 잔당을 윽박질러 새로운 전장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1981년 국민당 잔당들은 다시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타이군은 입헌군주제와 군사독재를 부정하며 타이-라오스와 타이-말레이시아 국경에서 무장 봉기해온 타이공산당(CPT) 박멸작전에 국민당 잔당을 동원했다. 타이군은 1970년대 ‘레드 메오’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국경 산악을 근거지로 저항하는 공산주의자들을 진압하고자 ‘공산주의 저격수’를 자임해온 국민당 잔당 400여명을 타이공산당의 마지막 산악 해방구였던 펫차분(Phetchabun)에 ‘의용대’란 이름으로 투입했다.


“그 작전은 비밀리에 진행돼 당시 시민들은 물론 군 내부에서도 핵심 지휘관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어. 왜냐하면 국민당 잔당들을 민간인처럼 꾸며 전선에 투입했기 때문이야.” 칸차나 대령은 타이 정부가 국민당 잔당이라는 외국 용병을 다시 한번 국내 분쟁에 투입한 사실을 증언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너무 고통스러운 과거였어. 이제 남은 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사는 게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해.”

펫차분 작전에서 공산당 300여명을 죽였다는 천마오슈(陳茂修·87·치앙라이) 대령은 “다시는 되새기고 싶지 않다”는 말로 한평생 ‘반공 비밀전쟁’에 바친 자신의 이야기를 닫았다. “펫차분이 마지막 전쟁이었어. 일생 동안 공산주의자들과 싸워왔고, 후회 같은 건 없어. 난 군인이었으니!” 레이위톈(雷雨田·87·도이 매살롱) 장군은 평생을 ‘반공 비밀전선’에 바친 대가로 얻은 도이 매살롱 산상 호텔의 정원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타이 정부를 위해 싸웠던 국민당 잔당들은, 살아남은 그 잔당들은 타이 정부에서 ‘시민증’을 얻었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전쟁을 위해 싸우다 죽은 전우들이 보상금도 없어 사라져버린 대가였다.

그렇게 반세기를 온갖 전쟁터에서 보낸 국민당 잔당들은 이제 대부분 사라지고, 그 후손들이 타이 국경지대에서 ‘KMT’(국민당·Kuomintang)라는 달갑잖은 이름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국민당 잔당들은 아시아의 비극사였고, 냉전의 희생자들이었다. 그러나 국민당 잔당들을 국제 반공전선의 용병으로 이용해먹었던 미국 정부도 대만 정부도 타이 정부도 모두 철저히 입을 닫았다. 그렇게 해서 국민당 잔당은 버림받은 역사로 묻혀져왔고, 그이들에게 남은 건 오직 ‘국제 마약시장의 원흉’이라는 꼬리표뿐이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국민당 잔당들의 역사를 온전히 복구하지 않고는 아시아를 말아먹었던 ‘제국주의 비밀 침략사’도 그리고 아시아를 불바다로 만들었던 미국의 ‘비밀 반공전쟁사’도 모두 어두운 세계사의 공백으로 남겨지고 말 것이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역사 속에서 과연 아시아의 미래가 있을까?’ ‘누가 국민당 잔당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이 두 가지 화두를 안고 일곱달에 걸친 취재를 마쳤다.

용병의 선물, 쓸쓸한 최후


타이-버마 국경을 맞댄 팡(Fang)의 반마이 마을 한 구석에는 룽민즈자(榮民之家)란 간판을 단 중국식 출입문이 하나 서 있다. 이 문을 지나 가파른 계단 300여개를 오르면 초라한 합숙소와 마주친다. 이곳에선 ‘레드 메오’ 진압작전과 ‘타이공산당’ 박멸작전에 참전했던 국민당 잔당 전상자들을 수용하고 있다. 1988년 대만 정부가 마련해준 룽민즈자에는 가족 없는 전상자 43명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는 시간만 꼽으며 ‘그냥’ 살아가고 있다.

“리미 장군은 우리한테 대만으로 가라고 말한 적이 없어. 그저 우린 리미 장군이 가는 곳만 쫓아다녔을 뿐이야. 난 말야,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근데 사정이 이러니….”

윈난성 징구(景谷)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양쑹녠(楊松年·78) 룽민즈자 책임자는 한숨부터 쏟아내며 자료를 챙겨갖고 나왔다. 그 자료에는 룽민즈자를 짓기 위해 대만 정부가 350만바트(약 1억원)를 들였다는 사실과, 대만 종교자선단체(慈淸功德基金會) 기부금으로 수용자들에게 매달 1100바트(약 3만원)를 주고 있다는 기록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대만 정부는 10년쯤 전부터 아예 지원을 끊었다.”

양씨는 못내 아쉬워했다. 이는 대만 정부가 국민당 퇴역군인들에게는 계급에 따라 엄청난 돈을 지급해온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국민당 잔당으로 1954년 대만으로 철수한 리차오쿠이(李朝魁·73·타이베이 쭝신촌) 대령의 경우 한국 돈으로 매달 200만원쯤 되는 돈을 받고 있다. 리차오쿠이 대령과 똑같은 국민당 잔당 군인 출신으로, 본토 수복을 꿈꾸었던 대만 정부를 대신해 반공전선ㅇ르 뛰었던 룽민즈자의 전상자들은 매달 3만원을 받고 있다. 그 3만원마저도 대만 정부가 아니라 자선단체 기부금이다. 대만 정부는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혔다가 대만을 택한 본토 출신 사병 퇴역자들에게도 매달 40만원이 넘는 돈을 지급하고 있다.

이게 대만 국민당 정부를 위해, 중국 본토 수복을 위해, 공산당 박멸을 위해 대만 국민당 군인들과 같은 군복을 입고 평생을 싸우다 중상을 입은 국민당 잔당들의 현실이다. 돈타령을 했지만, 사실은 룽민즈자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윈난성 겅마(耿馬) 출신인 자잉왕(査英旺·60)씨는 14살 소년병으로 국민당에 참전했다. 그는 1972년 파탕의 ‘레드 메오’ 진압작전 때 낙하산 부대원으로 투입됐다가 지뢰를 밟아 왼쪽 다리를 잃고 목발에 의지한 채 룽민즈자에 살고 있다. 불행하게도 그이는 정신마저 가물가물해서 보는 이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그이에게 유일한 낙이라곤 타이 정부에서 받은 시민증(사실은 국민당 잔당임을 확인하는 증)을 훈장처럼 만지작거리는 일뿐이다.

피부염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윈난성 롱링(瀧陵) 출신 자오잉파(趙英發·85)씨는 알아듣기조차 힘든 가녀린 소리로 하루 종일 세상을 원망하고 있다. “리미 장군은 우리를 초대한 적이 없어. 그리고 자신은 대만으로 떠났어. 갈 수만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근데 난 시민증이 없으니….”

자오씨 같은 이들은 아예 시민증조차 받지 못한 채 살아온 무적자(無籍者)다. 이런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룽민즈자에서 먹을거리나 입을거리를 눈여겨본다는 건 사치스런 일이 되고 만다. 룽민즈자에는 콧구멍만 한 콘크리트 방만 죽 만들어져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 가족도 없고 돌보는 이도 없는 늙고 깨진 전사들 43명이 모여 마지막 가는 인생을 탓하고 있을 뿐이다. 누가 이들에게 냄새나는 몸뚱어리를 탓할 것이며, 누가 이들에게 지저분한 옷을 탓하겠는가. 이런 게, 대만 정부의 본토 수복 꿈을 위해 일생을 바친 국민당 잔당들의 현실이다. 이런 게, 타이 정부를 위해 반공전선에 목숨을 바친 국민당 잔당들의 인생이다. 이런 게, 미국 정부를 위해 국제 비밀전쟁에 신명을 바친 국민당 잔당들의 최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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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an Rebellion: The Road to Chaos


For Chan Shee-fu the 1967 Opium War marked the beginning of the end. Far more importantly for the Shan movement as a whole, his defeat represented the last significant attempt by any rebel leader to establish himself as something more than just another petty warlord. After his troops retreated across the Mekong from Ban Khwan, Chan Shee-fu remained in the mountains near the Thai border, reportedly waiting for another crack at the KMT. (287)However for reasons never satisfactorily explained, the second battle never took place, and he returned to the northern Shan States in late 1967. Since Chan Shee-fu had lost a considerable amount of money, arms, and prestige at Ban Khwan, his troops began to drift away, and by late 1968 he had considerably less than a thousand men under arms. (288) Apparently convinced that another stint as a guerrilla would revive his sagging fortunes, Chan Shee-fu began making contact with a number of Shan rebel leaders. When Burmese military intelligence learned that he was engaged in serious negotiations with the rebels, they had him arrested and sent off to a Rangoon jail for an indefinite period of confinement. (289) Many of his officers and men were arrested as well, but Shan rebel leaders claim that several hundred more are still actively battling government forces in the northern Shan States.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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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tudy of these facts will show how Thailand, although heaping blame on Myanmar in connection with narcotic drugs suppression, had blatantly strengthened the Shan insurgents inside Myanmar, enabled them to get hold of modern weapons and supported them to engage in narcotic drug trafficking.

KMT fugitives led by KMT Colonel Chen Mo Sup stationed in Thailand had played an effective role in the form of mercenaries in supporting the Thai Army to suppress the border uprisings of the Thai Communists. Since KMT forces had common interests with the Thai Army, the latter had not done anything to hinder the KMT’s drug trafficking business. In fact, the Thai Army was not bold enough to do so.

In the mid-1971, one CIA message got leaked and the presence of an important heroin laboratory in the Golden Triangle area was brought to light. The lab was located at Mae Salong, the headquarters of the KMT Fifth Army inside Thai territory (70 miles east of Mong Hsat in Myanmar).

At the same time, the American NBC also telecast another heroin laboratory at Tam Ngop inside Thailand, at the headquarters of KMT Third Army. In spite of these revelations, the Thai government and the Thai Army did not take any action against KMT forces. The Thai government and the Thai Army will know the answer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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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US supported the KMT in Myanmar through airdrops of arms and food supplies and overt landing of C-46 and C-4 aircrafts; an through supply of arms by companies such as the South East Asia Trading, Corporation, the Western Enterprise Corporation, and the Bangkok Trading Corporation. Two American Ambassadors to Myanmar, David MacKay and William J. Sebald, resigned in protest when the discovered that the US Government had kept them in the dark about the support of US Government for KMT activities in Myanmar.
It was the KMT who turned Myanmar into the then world's largest opium producer. The KMT were supported by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 to fight the Govern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but having failed to do so they became opium producers and traffickers. Consequently, opium production of the KMT in the Shan State increased 10 fold.
The KMT, fleeing from the offensives mounted by the Tatmadaw, moved to Laos and other countries, where they traded opium for arms, ammunition, and other supplies, using air transport for their trafficking. In 1959 the laboratories for producing morphine and cocaine captured from the KMT were shown to foreign orrespondents. The KMT's machinations increased the yield of opium from a pre-war total of 40 tons to 300-400 tons in 1962.
The KMT controlled a full one-third of the world's opium market till 1970. In addition they began to refine this into heroin. All this was aided and abetted by the CIA and certain nations, which preferred to turn a blind eye to the KMT's activ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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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MT's main Bangkok connection, General Phao, the commander of the Thai police who coordinated CAT air traffic with the KMT, was also the commander of the Thai government's relationship with the CIA. Explained KMT Gen. Tuan Shi-wen, "To fight you must have an army, and an army must have guns, and to buy guns you must have money. In these mountains, the only money is opium." According to Professor McCoy, to whom Gen. Tuan was speaking, the first snow-white #4 heroin lab was opened by KMT-affiliated Hong Kong chemists on the Thai-Burma border in the late 60's. The KMT are also known, fittingly, as the "White Chinese."

The KMT's lawyer, "Tommy the Cork" Corcoran, was also United Fruit's lawyer. Corcoran was intimate with the entire leadership of the CIA, which he had helped to organize, and which was, in any case, extremely sympathetic to United Fruit. Walter Bedell Smith, Gen. Eisenhower's wartime chief of staff and Truman's CIA director, was now John Foster Dulles' Undersecretary of State. In 1953 he had asked Corcoran for the presidency of United Fruit, and in 1955 was named to its board of directors. Gen. Robert Cutler, chairman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already sat on the United Fruit board. Robert Hill, ambassador to Costa Rica, got to the UF board in 1960. Hill was connected to Grace Shipping, another CIA friend heavily invested in Guatem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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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ret War in Burma: The KMT


While the work of French clandestine services in Indochina enabled the opium trade to survive a government repression campaign, some CIA activities in Burma helped transform the Shan States from a relatively minor poppycultivating area into the largest opium-growing region in the world. The precipitous collapse of the Nationalist Chinese (Kuomintang, or KMT) government in 1949 convinced the Truman administration that it had to stem "the southward flow of communism" into Southeast Asia. In 1950 the Defense Department extended military aid to the French in Indochina. In that same year, the CIA began regrouping those remnants of the defeated Kuomintang army in the Burmese Shan States for a projected invasion of southern China. Although the KMT army was to fail in its military operations, it succeeded in monopolizing and expanding the Shan States' opium trade.

The KMT shipped bountiful harvests to northern Thailand, where they were sold to General Phao Sriyanonda of the Thai police, a CIA client. The CIA had promoted the Phao-KMT partnership in order to provide a secure rear area for the KMT, but this alliance soon became a critical factor in the growth of Southeast Asia's narcotics traffic.

With CIA support, the KMT remained in Burma until 1961, when a Burmese army offensive drove them into Laos and Thailand. By this time, however, the Kuomintang had already used their control over the tribal populations to expand Shan State opium production by almost 1,000 percent-from less than 40 tons after World War 11 to an estimated three hundred to four hundred tons by 1962. (130) From bases in northern Thailand the KMT have continued to send huge mule caravans into the Shan States to bring out the opium harvest. Today, over twenty years after the CIA first began supporting KMT troops in the Golden Triangle region, these KMT caravans control almost a third of the world's total illicit opium supply and have a growing share of Southeast Asia's thriving heroin business. (131)

As Mao's revolutionary army pushed into South China in late 1949, Generalissimo Chiang Kai-shek and his Kuomintang regime planned to make craggy Yunnan Province their last bastion. However, the warlord of Yunnan Province, Gen. Lu Han, harbored bitter grievances against Chiang. At the end of World War 11 Lu Han had been ordered to occupy northern Indochina for the Allies while British forces moved into the southern sector. Eager for plunder, Lu Han sent his ragged divisions into Tonkin, where they ravaged the countryside like a plague of locusts. To satiate Lu Han's greed and win his tolerance for the Nationalist movement, Premier Ho Chi Minh organized a "Gold Week" from September 16 to 23, 1945. Viet Minh cadres scoured every village, collecting rings, earrings, and coins from patriotic peasants. When Lu Han stepped off the plane at Hanoi airport on September 18, Ho Chi Minh presented him with a solid gold opium pipe. (132) During Lu Han's absence, Chiang sent two of his divisions to occupy Yunnan. When the Chinese withdrew from Indochina in early June 1946, Chiang ordered Lu Han's best troops to their death on the northern front against the Chinese Communists, reducing the warlord to the status of guarded puppet inside his own fiefdom. (133) (Incidentally, not all of the KMT troops withdrew in early June. The Ninety-third Independent Division delayed its departure from Laos for several weeks to finish collecting the Meo opium harvest. (134))

And so, when the People's Liberation Army entered Yunnan in December 1949, Lu Han armed the population, who drove Chiang's troops out of the cities, and threw the province open to the advancing revolutionary armies. (135) Nationalist Chinese stragglers began crossing into Burma in late 1949, and in January 1950 remnants of the Ninetythird Division, Twenty-sixth Army, and Gen. Li Mi's Eighth Army arrived in Burma. Five thousand of Gen. Li Mi's troops who crossed into Indochina instead of Burma were quickly disarmed by the French and interned on Phu Quoc Island in the Gulf of Thailand until they were repatriated to Taiwan in June 1953. (136)

However, the Burmese army was less successful than the French in dealing with the Chinese. By March 1950 some fifteen hundred KMT troops had crossed the border and were occupying territory between Kengtung City and Tachilek. In June the Burmese army commander for Kengtung State demanded that the KMT either surrender or leave Burma immediately. When Gen. Li Mi refused, the Burmese army launched a drive from Kengtung City, and captured Tachilek in a matter of weeks. Two hundred of Li Mi's troops fled to Laos and were interned, but the remainder retreated to Mong Hsat, about forty miles west of Tachilek and fifteen miles from the Thai border. (137) Since the Burmese army had been tied down for three years in central Burma battling four major rebellions, its Kengtung contingent was too weak to pursue the KMT through the mountains to Mong Hsat But it seemed only a matter of months until the Burmese troops would become available for the final assault on the weakened KMT forces.

At this point the CIA entered the lists on the side of the KMT, drastically altering the balance of power. The Truman administration, ambivalent toward the conflict in Southeast Asia since it took office in 1945, was shocked into action by the sudden collapse of Chiang Kai-shek's Kuomintang regime. All the government agencies scrambled to devise policies "to block further Communist expansion in Asia, (138) and in April 1950 the Joint Chiefs of Staff (JCS) advised the Secretary of Defense that,

"Resolution of the situation facing Southeast Asia would ... be facilitated if prompt and continuing measures were undertaken to reduce the pressure from Communist China. in this connection, the Joint Chiefs of Staff have noted the evidences of renewed vitality and apparent in creased effectiveness of the Chinese Nationalist forces." (139)

They went on to suggest the implementation of "a program of special covert operations designed to interfere with Communist activities in Southeast Asia..." (140) The exact details of the "special covert operations" planned for Burma were not spelled out in the JCS memo or any of the other Pentagon Papers because it was one of the most heavily classified operations ever undertaken by the CIA: the U.S. ambassador to Burma was not told; top ranking officials in the State Department were kept in the dark; and it was even hidden from the CIA's own deputy director for intelligence. (141)

From what can be gleaned from available documents and the events themselves, it seems that the Truman administration feared that Mao was bent on the conquest of Southeast Asia, and would continually probe at China's southern frontier for an opening for his "invading hordes." Although the Truman administration was confident that Indochina could be held against a frontal assault, there was concern that Burma might be the hole in the antiCommunist dike. Couldn't Mao make an end run through Burma, sweep across Thailand, and attack Indochina from the rear? (142) The apparent solution was to arm the KMT remnants in Burma and use them to make the Burma-China borderlands-from Tibet to Thailand-an impenetrable barrier.

The first signs of direct CIA aid to 'the KMT appeared in early 1951, when Burmese intelligence officers reported that unmarked C-46 and C-47 transport aircraft were making at least five parachute drops a week to KMT forces in Mong Hsat. (143) With its new supplies the KMT underwent a period of vigorous expansion and reorganization. Training bases staffed with instructors flown in from Taiwan were constructed near Mong Hsat, KMT agents scoured the Kokang and Wa states along the Burma-China border for scattered KMT survivors, and Gen. Li Mi's force burgeoned to four thousand men. (144) In April 1950 Li Mi led the bulk of his force up the Salween River to Mong Mao in the Wa States, where they established a base camp near the China border. As more stragglers were rounded up, a new base camp was opened at Mong Yang; soon unmarked C-47s were seen making air drops in the area. When Li Mi recruited three hundred troops from Kokang State under the command of the sawbwa's younger sister, Olive Yang, more arms were again dropped to the KMT camp. (145)

In April 1951 the attempted reconquest of Yunnan began when the 2,000 KMT soldiers of the Yunnan Province Anti-Communist National Salvation Army based at Mong Mao crossed the border into China. Accompanied by CIA advisers and supplied by regular airdrops from unmarked C-47s, KMT troops moved northward in two columns, capturing Kengma without resistance. However, as they advanced north of Kengma, the People's Liberation Army (PLA) counterattacked. The KMT suffered huge casualties, and several of their CIA advisers were killed. (146) Li Mi and his Salvation Army fled back to Burma, after less than a week in China. Undeterred by this crushing defeat, however, the General dispatched his two thousandman contingent at Mong Yang into southern Yunnan; they too were quickly overwhelmed and driven back into Burma. (147)

Rather than abandoning this doomed adventure, the CIA redoubled its efforts. Late in 1951 the KMT reopened the old World War II landing strip at Mong Hsat so that it could handle the large two- and fourengine aircraft flying in directly from Taiwan or Bangkok. (148) In November Li Mi flew off to Taiwan for an extended vacation and returned three months later at the head of a CAT (Civil Air Transport, later Air America) airlift, which flew seven hundred regular KMT soldiers from Taiwan to Mong Hsat. (149) Burmese intelligence reported that the unmarked C-47s began a regular shuttle service, with two flights a week direct from Taiwan. A mysterious Bangkok-based American company named Sea Supply Corporation began forwarding enormous quantities of U.S. arms to Mong Hsat. (150) Burmese Military Intelligence observed that the KMT began sporting brand-new American M- 1 s, .50 caliber machine guns, bazookas, mortars, and antiaircraft artillery. (151) With these lavish supplies the KMT press-ganged eight thousand soldiers from the hardy local hill tribes and soon tripled their forces to twelve thousand men. (152)

While preparing for the Yunnan invasion, the KMT had concentrated their forces in a long, narrow strip of territory parallel to the China border. Since Yunnan's illicit opium production continued until about 1955, the KMT were in a position to monopolize almost all of the province's smuggled exports. The Burmese government reported that, "off and on these KMT guerrillas attacked petty traders plying across the border routes . . . . (153)

After a year-long buildup, Gen. Li Mi launched his final bid to reconquer Yunnan Province. In August 1952, 2,100 KMT troops from Mong Yang invaded China and penetrated about sixty miles before the Chinese army drove them back into Burma. (154) There would be no more invasions. While Gen. Li Mi and his American advisers had not really expected to overrun the vast stretches of Yunnan Province with an army of twelve thousand men, they had been confident that once the KMT set foot in China, the "enslaved masses" would rise up against Mao and flock to Chiang Kai-shek's banner. After three attempts had conspicuously failed to arouse the populace, Gen. Li Mi abandoned the idea of conquering China and resigned himself to holding the line in Burma. The KNIT stopped concentrating their forces in a few bases on the China border and troops spread out to occupy as much territory as possible. With the Burmese army still preoccupied with insurgency in other parts of Burma, the KMT soon became the only effective government in all the Shan States' territories between the Salween River and the China border (Kokang, Wa, and Kengtung states). These territories were also Burma's major opium-producing region, and the shift in KMT tactics allowed them to increase their control over the region's opium traffic. The Burmese government reported:

The KMTs took over the control and administration of circles (districts) and village tracts. They started opening up revenue collection centers, and local people were being subjected to pay gate-fees and ferry fees, in entering their occupied area. Customs duties were also levied on all commodities brought into their territories for trade. The taxes were collected in kind as well as money. . . . By means of threat and coercion, these KMT aggressors forced the local inhabitants to comply with their demands. (155)

The KNIT occupation centralized the marketing structure, using hundreds of petty opium traders, who combed the Shan highlands. The KMT also required that every hill tribe farmer pay an annual opium tax. One American missionary to the Lahu tribesmen of Kengtung State, Rev. Paul Lewis, recalls that the KNIT tax produced a dramatic rise in the amount of opium grown in the highland villages he visited. Tribes had very little choice in the matter, and he can still remember, only too vividly, the agony of the Lahu who were tortured by the KMT for failing to comply with their regulations. (156) Moreover, many Chinese soldiers married Lahu tribeswomen; these marriages reinforced KMT control over the highlands and made it easier for them to secure opium and recruits. Through their personal contact in mountain villages, their powerful army, and their control over the opium-growing regions, the KMT were in an ideal position to force an expansion of the Shan States' opium production when Yunnan's illicit production began to disappear in the early 1950s.

Almost all the KMT opium was sent south to Thailand, either by mule train or aircraft. Soon after their arrival in Burma, the KMT formed a mountain transport unit, recruiting local mule drivers and their animals. (157)Since most of their munitions and supplies were hauled overland from Thailand, the KMT mule caravans found it convenient to haul opium on the outgoing trip from Mong Hsat and soon developed a regular caravan trade with Thailand. Burmese military sources claimed that much of the KMT opium was flown from Mong Hsat in "unmarked" C-47s flying to Thailand and Taiwan. (158) In any case, once the KMT opium left Mong Hsat it was usually shipped to Chiangmai, where a KMT colonel maintained a liaison office with the Nationalist Chinese consulate and with local Thai authorities. Posing as ordinary Chinese merchants, the colonel and his staff used raw opium to pay for the munitions, food, and clothing that arrived from Bangkok at the Chiangmai railhead. Once the materiel was paid for, it was this colonel's responsibility to forward it to Mong Hsat. (159) Usually the KMT dealt with the commander of the Thai police, General Phao, who shipped the opium from Chiangmai to Bangkok for both local consumption and export. (160)

While the three CIA-sponsored invasions of Yunnan at least represented a feebly conceived anti-Communist policy, the next move defied all logic. With what appeared to be CIA support, the KMT began a full-scale invasion of eastern Burma. In late 1952, thousands of KMT mercenaries forded the Salween River and began a well-orchestrated advance. The Burmese government claimed that this was the beginning of an attempt to conquer the entire country. But in March 1953 the Burmese fielded three crack brigades and quickly drove them back across the Salween. (Interestingly, after a skirmish with the KMT at the Wan Hsa La ferry, Burmese soldiers discovered the bodies of three white men who bore no identification other than some personal letters with Washington and New York addresses.) 161

As a result of the invasion, Burma charged the Chinese Nationalist government with unprovoked aggression before the United Nations in March 1953. While the KMT troops had previously been only a bother -a minor distraction in the distant hills-they now posed a serious threat to the survival of the Union of Burma. Despite the United States' best efforts to sidetrack the issue and Taiwan's denial of any responsibility for Gen. Li Mi, the Burmese produced reams of photos, captured documents, and testimony convincing enough to win a vote of censure for Taiwan. By now the issue had become such a source of international embarrassment for the United States that she used her influence to convene a Four-Nation Military Commission (Burma, the United States, Taiwan, and Thailand) on the problem in Bangkok on May 22. Although all four powers agreed to complete KMT withdrawal from Burma after only a month of negotiations, the KMT guerrillas refused to cooperate and talks dragged on through the summer. Only after Burma again took the issue to the United Nations in September did the Taiwan negotiators in Bangkok stop quibbling and agree to the withdrawal of two thousand KMT troops: the evacuees would march to the BurmaThailand border, be trucked to Chiangrai, Thailand, and flown to Taiwan by General Chennault's CAT.

However, the Burmese were suspicious of the arrangements from the very beginning, and when representatives of the Four-Nation Military Commission arrived in northern Thailand to observe the withdrawal, Thai police commander Phao refused to allow the Burmese delegation to accompany the others to the staging areas. (162) The next problem arose when the first batch of fifty soldiers emerged from the jungle carrying a 9' X 15' portrait of Chiang Kai-shek instead of their guns, thus completely discrediting the withdrawal. U.S. Ambassador to Thailand Gen. William Donovan cabled the U.S. Embassy in Taiwan, demanding that the KMT be ordered to bring out their weapons. On November 9 the U.S. ambassador to Taiwan, Karl L. Rankin, replied that if the United States did not ease its pressure Chiang threatened to expose CIA support of the KMT in Burma. Donovan cabled back that the "Chicoms" and Soviets already knew about the CIA operations and kept up his pressure. When the KMT withdrawal was later resumed, the soldiers carried rusting museum pieces as their arms. (163)

The Burmese observers, now allowed into the staging areas, frequently protested that many of the supposed Chinese looked more like Lahus or Shans. Although other observers ridiculed these accusations, the Burmese were correct, Among the 1,925 "soldiers" evacuated in November-December 1953, there were large numbers of boys, Shans, and Lahus. (164) Today there are an estimated three hundred Lahu tribesmen still living on Taiwan who were evacuated during this period. Although some were recruited by the promise of jobs as generals or jet pilots, most were simply press-ganged from their villages on a quota basis, given Chinese names, dressed in KMT uniforms, and shipped off to Taiwan. Many husbands and wives have been separated for seventeen years, and some of the families have moved to Thailand to await the return of their sons or husbands. So far only two men have come back." (165)

Frustrated with their attempts to remove the KMT through international negotiations, in March 1954 Burma launched its largest military operation against the KMT. After the Burmese air force bombarded Mong Hsat for two days, (166) the army captured the KMT headquarters and drove its two thousand defenders south toward the Thai border. (167) Negotiations were reopened in Bangkok, and during the next two months CAT flew another forty-five hundred KMT troops to Taiwan. On May 30, 1954, Gen. Li Mi announced the dissolution of the Yunnan Province AntiCommunist National Salvation Army. (168) However, there were still six thousand KMT troops left in Burma. Fighting began again a month later, and continued sporadically for the next seven years.

While the continuing struggle faded from American headlines, in June 1955 the Rangoon reported that six hundred KMT troops had been smuggled into the Shan States from Taiwan. (169) A new commander was appointed, and a headquarters complex was opened up at Mong Pa Liao near the Mekong River.170 The KMT continued to rule the hill tribes with an iron hand. In 1957 an American missionary reported:

"For many years there have been large numbers of Chinese Nationalist troops in the area demanding food and money from the people. The areas in which these troops operate are getting poorer and poorer and some villages are finding it necessary to flee." (171)

Not only did the KMT continue to demand opium from the tribes, but they upgraded their role in the narcotics trade as well. When the Burmese army captured their camp at Wanton in May 1959, they discovered three morphine base refineries operating near a usable airstrip. (172)

Although forgotten by the international press, the KMT guerrilla operations continued to create problems for both the Burmese and Chinese governments. When delegations from the Union of Burma and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met to resolve a border dispute in the summer of 1960, they also concluded a secret agreement for combined operations against the KMT base at Mong Pa Liao. (173) This base, with a runway capable of handling the largest transport aircraft, was defended by some ten thousand KMT troops entrenched in an elaborate fortifications complex. After weeks of heavy fighting, five thousand Burmese troops and three full People's Liberation Army divisions, totaling 20,000 men, (174) finally overwhelmed the fortress on January 26, 1961. (175) While many of their hill tribe recruits fled into the mountains, the crack KMT units retreated across the Mekong River into northwestern Laos. Burmese officers were outraged to discover American arms of recent manufacture and five tons of ammunition bearing distinctive red, white, and blue labels. (176) In Rangoon 10,000 angry demonstrators marched in front of the U.S. Embassy, and Burma sent a note of protest to the United Nations saying that "large quantities of modern military equipment, mainly of American origin, have been captured by Burmese forces." (177)

State Department officials in Washington disclaimed any responsibility for the arms and promised appropriate action against Taiwan if investigation showed that its military aid shipments had been diverted to Burma. (178) Another round of airlifts to Taiwan began. On April 5 Taiwan announced the end of the flights, declaring that forty-two hundred soldiers had been repatriated. (179) Six days later Taiwan joined the State Department in disavowing any responsibility for the six thousand remaining troops. (180) However, within months the CIA began hiring these disowned KMT remnants as mercenaries for its secret operations in northwestern Laos. (181)

At first glance the history of the KMT's involvement in the Burmese opium trade seems to be just another case of a CIA client taking advantage of the agency's political protection to enrich itself from the narcotics trade. But upon closer examination, the CIA appears to be much more seriously compromised in this affair. The CIA fostered the growth of the Yunnan Province AntiCommunist National Salvation Army in the borderlands of northeastern Burmaa potentially rich opium-growing region. There is no question of CIA ignorance or naivete, for as early as 1952 The New York Times and other major American newspapers published detailed accounts of the KMT's role in the narcotics trade. (182) But most disturbing of all is the coincidence that the KMT's Bangkok connection, the commander of the Thai police, General Phao, was the CIA's man in Thai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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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Comments
덱도이 2005.03.13 18:43  
  이역(異域)이란 영화에도 그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지금은 모두 대만시민권이 있어 언제던지 돌아갈 수 이쓴 것으로 아는데...
하여간에 메살롱 경치가 우리나라하고 비슷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국경에 잘못 들어가 고생한 것하고..
KIM 2005.03.13 18:51  
  그런가요..기사 한구석에 있네요....팡(Fang)을 비롯한 거주촌의 병든  게릴라들은 1,000밧 가량을 받으며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중대륙이 고향인 이들이 대만에 돌아가게 되면, 삶이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하는.. 200만원 연금을 받는 대만 전쟁영웅들..그리고 이 게릴라들의 운명과 삶은 180도 틀린듯 싶습니당.
덱도이 2005.03.13 19:07  
  저는 메살롱에 거주하는 2~3세대 분들만 알고 다른 늙은 게릴라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군요 메살롱에서 차밭경영해서 돈도 많고(과거에는 아편장사로) 해서 굳이 대만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들만 보고 알아서 그런 거주촌에서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는지 몰랐읍니다
하여튼 제가 알기론 그들(후손포함) 대부분은 태국북부나 버마에서 거의 유지급으로 살던데 전임 치앙라이 경찰서장도 메쌀롱출신입니다
타이타이 2005.03.13 21:18  
  흥미진진한 내용이군여....제 의문은 윈난성출신들은 윈난성으로 돌아 갈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인데....앞으로도 더 많은 일들이 밝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나도 한번 파 헤쳐 봐야쥐..... 
곰돌이 2005.03.14 19:14  
  '아는만큼 보인다' 라는 말이 있지요
KIM님 고맙습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아시아가  근현대에 수많은 전란을 겪어서, 사연이 없는 곳이 없는 듯 합니다.
KIM 2005.03.15 02:05  
  관심가져 주시는 분들께 제가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맘먹고 저역시 공부해봅니다. 역사의 문외한인 제가...오늘 또 새로운 자료와 관점들을 발견했습니다. 아....공교육이라는 것..참으로 무섭습니다. 나의 무지와 단순함을 부끄럽게 하는 새로운 많은 얘기들 앞에서..묘한...

즐겁고 아름답고 맛있는 얘기들만 가득차야 할 여행 게시판에..무겁고 복잡한 얘기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관심있는 분만 보아주십시요^^
날다.. 2005.03.15 09:46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타이타이 2005.03.20 17:43  
  오늘  "이역" 이란 비디오를 빌려다 보았습니다...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서 보니까, 한결 그들의 고통이 가슴에 와 닿는군여...
KIM 2005.03.24 13:37  
  저역시 <이역>을 빌려보았습니다. 유덕화가 나오네요. 잘 만들어진 영화라곤 할 수 없지만..나름대로 돈도 들이고, KMT의 아픔과 역사를 실어보려 한 영화인 듯 싶습니다. 흥행성 영화라기 보단..
타이타이 2005.03.25 20:59  
  영화의 질에 대해서는 별로 기대를 안했었습니다만.....젊음을 타국에서... 전쟁으로 보내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회한서린 그들의 인생이 가슴을 때립니다....
도이매사롱, 팡...그리고, 미얀마의 컹통, 몽삿, 몽양....언젠가는 꼭 가보아야 할 곳....여길 놔 두고 치앙마이. 치앙라이, 치앙센만 왔다갔다 했으니...참....
진짜 2005.04.26 15:39  
  kim님의 글들은 언제나 너무나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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