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하나님 없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인데...... 안 되나요?
작년 초엔가 진화론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제가 잘 아는 목사님들과 벌이게 됐던 토론인데요. <?xml
하긴 토론이라기보다는 종교재판하듯 퍼붓는 질문에 sarnia 가 대충 둘러댈 ‘진술조서용’ 답변을 작성해 놓았던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개신교 교단 사이트였기에 대화가 가능했지 한기총 소속 교회였다면 sarnia는 그 자리에서 당장 파문(?)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프라인이었다면 몰매를 맞고 쫓겨났을지도 모르지요^^
그냥 제 의견일 뿐 이니까요. 동의하지 않으셔도 그만이구요. 반론하시는 건 서로의 배움과 성장을 위해 아주 좋은 일 입니다. 다만 화를 내는 건 백해무익하답니다^^
질문: 당신같이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신론자 아닌가요?
답변: 그렇지 않습니다. 진화론은 과학이고 무신론은 철학적 사상의 하나입니다. 무신론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포함한 모든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는 이데올로기적 사고체계이지만, 과학으로서의 진화론은 이데올로기와 상관없는 자연과학적 이론체계랍니다. 한마디로 계통이 다른 것이죠.
무신론과는 달리 진화론은 초월적 존재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이 일부 신자들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이유는 자연과학으로서의 그 이론이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교의 경전에 수록돼 있는 문자적 의미의 창조신화와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무신론자들의 거의 전부가 진화론을 지지한다고 말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진화론자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무신론을 지지한다고는 말 할 수 없겠죠. 서구 기독교인들의 상당수는 진화론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고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일지라도 이른바 ‘지적설계론’이라는 변형된 사변적 논리를 통해 진화론의 기본 개념들을 부정할 수 없는 정설로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구요.
어쨌든 진화론은 기독교 신앙과 충돌을 일으킬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등 극히 일부 교파들이 무슨 배짱인지 아직 진화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기는 합니다. 미국의 창조과학회라는 단체는 이 교파가 주도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질문: 그러면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가 모두 거짓말이라는 겁니까?
답변: 저는 창조이야기가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재단할 수 있을 만큼 ‘초월적으로 똘똘하지’ 않습니다. 비극적 한계이지요.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창세기를 읽고 받아들이느냐에 있지 않을까요? 저는 창세기에 있는 창조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들의 말씀을 들을 때 마다 과연 저 분들이 창세기를 제대로 읽어보기나 하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지금 당장 창세기를 펴놓고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첫째 장과 둘째 장에 나와 있는 창조 이야기가 서로 전혀 다르거든요. 문자적으로 일치시키려 해서는 양립할 수가 없을 정도로 창조의 순서고 뭐고 다 뒤죽박죽인데다가 다른 사람이 다른 시대에 쓴 글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드러날 만큼 문체도 다릅니다.
창세기 2 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세요. 당장 이상한 곳을 한 군데 발견할 수가 있을 겁니다. 2 장 3 절과 4 절 이하가 같은 장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연결되지가 않는다는 점 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 모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내용의 2 장 3 절은 1 장부터 연결된 내용(천지창조)이고 그 다음 다음절인 2 장 5 절부터는 전혀 다른 이야기(인간과 신의 관계)가 시작됩니다. 4 절은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연결하기 위해 편집자가 끼워 넣은 접속문장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게다가 기원전 10 세기 경에 작성된 문서로 보이는 2 장은 ‘하나님 조차도 진화하는 분’이라는 강력한 시사를 하고 있습니다. 별 생각 없이 아담부터 덜컥 먼저 만들어 놓고 나서는, ‘아이구 쟤가 있을 곳이 없네’ 하시며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을 만드신 다음에 보니까, ‘아하! 쟤가 심심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떠 올라 각종 동물을 만드시고, 그래도 뭔가 허전하고 쓸쓸해 보이자 장고를 거듭한 끝에 여자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2 장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근엄함과 권위를 강조하는 제사장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1 장에 비해 다소 칠칠치 못해 보이는 2 장이 400 년 가량이나 먼저 작성된 ‘선배문서’임에도 불구하고 2 장으로 밀려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2 장의 자리나마 지키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어지는 엄청 중요한 이야기, 즉 ‘인간의 원죄’를 다룬 3 장의 대전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 장이야 말로 두고두고 우려먹을 ‘인간의 죄 된 본성’ 사상의 보물창고로써 결코 빠질 수 없는 문서인데 이 3 장의 전제가 되는 2 장을 칠칠치 못하다는 이유로 제외시킬 수는 없었을 것 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제가 창세기를 읽은 소감이니까 다른 의견이 있을 수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어쨌든 조금이라도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왜 이렇게 다를까’ 하는 질문과 동시에 ‘왜 같은 장(2 장)에 다른 내용이 뒤섞여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 입니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뒤섞어 표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편집해 놓았다는 자연스러운 방증인데 그렇다면 즉각 두 가지 질문과 한 가지 과제가 생깁니다. 누가 왜 편집했을까 하는 점과 그럼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의문이 생겼다면 그 해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해답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 어떻게 해답을 찾아야 할까요? 평신도들은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목사님이나 장로님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한마디로 번지수를 잘못 찾아간 것 입니다.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성서학자는 아니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바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성서가 어떤 문화적 배경에서 어떻게 쓰여지고 편집됐는가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 이것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빌리지 않으면 목적을 달성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안입니다. 그것도 서로 다른 학자들의 의견을 각각 세심하게 들어보고 결국 결론은 항상 자기 혼자 외롭게 내려야 합니다.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적인 깨달음의 문제이니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창세기에 나와 있는 창조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서 그 자체의 내용만으로도 벌써 불가능하다는 걸 환기하려고 좀 장황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혹시 1 장 따로 2 장 따로 문자 그대로 믿겠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질문: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는 설 자리가 없는 것 아닙니까?
답변: 저는 진화론과 창조신화를 같은 인식론적 잣대로 비교 평가하려는 시도 자체가 돈키호테 같은 짓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돈키호테 같은 짓은 비단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일부 안티기독교들이 과학이론을 가지고 성서를 조롱하는 방법에서도 똑같이 드러나고 있지요.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춘향전을 읽고 나서 작품 감상을 해 보라니까 ‘장원급제라도 대과에 갓 급제했으면 종 6 품인데 갑자기 당상관인 어사가 되어 종 3 품 도호부사인 남원부사를 추포했다는 이야기가 사실관계와 맞지 않는다’는 따위의 썰렁한 말을 하는 것이 바로 그 돈키호테 같은 짓(비유가 좀 심했어도 그냥 넘어 갑시다) 입니다. 제가 옥스퍼드의 도 박사에 대해 약간 불만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분 이야기는 제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하는데 마음에 드는 게 대부분이긴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춘향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광신한 나머지 ‘그 시대 그 연도로 추정되는 기간에 재임한 남원군수가 변학도가 아니라고 적어놓은 역사기록은 모두 사탄이 만든 가짜 역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돈키호테들보다 한 급수 낮은 산쵸 취급 (이것도 그냥 넘어 갑시다)을 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춘향전이 설 자리가 따로 있고 승정원일기나 남원부 기록이 설 자리가 따로 있듯이 진화론과 창조신화는 그 설 자리가 각각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진화론은 가설이지 사실은 아니지 않습니까?
답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과학자들의 몫인데,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혼자 답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관련 분야 집단이 합의하여 함께 답변해야 할 사안입니다. 관련 분야 집단으로서의 과학은 진화론을 더 이상 가설이 아닌 사실이라고 분명히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선 진화론과 관련된 과학 네트워크는 진화생물학, 발생생물학, 집단유전학, 고생물학, 해부학, 지질학, 우주물리학은 물론이고 최근에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등장한 분자생물학, 분자유전학, 유기화학 등 첨단과학에 이르기까지 총망라되어 한 목소리로 진화의 사실성을 확고하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현대 첨단과학은 모든 종들이 아주 적은 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화돼 나온 것 이라는 사실을 밝혀 줌으로써 개별 종의 genome 지도에 이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의 계보지도(family tree)를 완성할 날이 코 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진화론을 빼면 자연과학을 토대로 한 다른 학문체계의 성립이 불가능할 정도의 현실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입니다.
우리도 따분한 소리나 하며 허송세월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우선 일반인들도 이해할 수 있게 기초부터 설명을 잘 해 놓은 http://www.talkorigins.org 같은 사이트부터 방문해 공부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 사이트의 장점은 항목 별로 일목요연하게 설명도 잘 해 놓았지만 최신 references (참고서적이나 논문) 목록이 잘 정비돼 있어 전공자들에게는 물론 이 주제에 대해 좀 더 깊은 연구를 하고 싶은 분들에게도 유용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점 입니다.
어떤 사상에 대한 감정적인 증오나 편견에 사로 잡혀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엄청난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면서 적어도 진화를 직접 확인하거나 강력하게 시사하는 압도적인 증거들 앞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입니다. 그리고 문명국들의 정부와 사법부가 ‘창조론은 포기할 테니 지적설계론이라도 교과서에 진화론과 함께 넣어달라’고 갖은 추태와 난동을 부리는 일부 보수기독교의 압력을 왜 그토록 단호하게 거부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것 입니다.
질문: 창조과학회 회원들도 과학자들 아닌가요? 같은 과학자인 그들은 왜 창조론을 주장할까요?
답변: 아, 그거야 제가 모르죠. 그건 그 사람들에게 직접 물어 봐야죠. 그런데 이 문제에 답변을 제 방식대로 하자면 그 분들의 학자로서의 자격 등 윤리적인 문제를 지적해야 하기 때문에 그만 두겠습니다. 다만 캘럽의 통계자료 하나를 인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까 합니다.
창조론자들의 창궐(이 용어가 마음에 안 드시면 ‘분포’라는 말로 바꾸어 읽으셔도 무방합니다)비율이 매우 높은 미국의 예 입니다. 진화론과 상관없는 분야를 포함해 약 1300 만 명의 과학자 중 95 % 가 진화론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 중 지구과학과 생명과학 분야에 종사하는 과학자 48 만 명 중에는 불과 700 명을 제외한 99.85 % 가 진화론을 지지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이 통계자료는 지금으로부터 14 년 전인 1995 년도에 나온 것이고 그 이후에는 이런 식의 여론조사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여론조사 자체를 때려 치웠는지 더 이상 이에 대한 통계조사를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만 더 하고 제 진술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창조과학회 과학자라는 사람이 나타나 ‘진화론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통일돼 있지 않아 서로 싸우고 있다’는 식의 말을 한다면 그 말의 사실 여부만이 아니라 전달하려는 메시지의 목적도 분명히 파악해야 할 것 입니다.
그가 한 말은 일단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유전학 안에서도 결정론과 환원론이 논쟁하고 있고 돌연변이 외의 형질변이를 인정함으로써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환원론 역시 그 선택의 단위를 아직까지는 유전자로 제한함으로써, 선택의 단위를 유기체로서의 개체 또는 종으로 보는 다른 분야의 과학자들과 논쟁하고 있는 것 등이 그 사례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과는 별도로 그 창조론 과학자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진실과 동떨어진 사기꾼 같은 모략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학은 질문과 회의에서부터 동기가 출발합니다. 이 과정에서 논쟁이 수행되고 이론의 정의에 적합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면 낡은 이론은 그 새 이론에 의해 교체됩니다. 진화론의 특정한 부분들이 논쟁과 상호비판의 주제는 될 수 있어도 그런 이유로 인해 진화론 자체의 큰 틀이 잘못됐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입니다.
과학자라면서 이걸 모른다면 그는 학위를 도둑질한 사이비일 것이고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 이라면 학자로서의 윤리감각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일 것 입니다.
질문: 우연히 생명이 만들어 졌다니 그게 확률상 말이 되는 일입니까?
답변: 예. 말이 되는 일입니다. 수학적으로 있을 수 없는 확률이 뭐가 있나요? 제가 마음에 들었다 안 들었다 한다고 소개한 옥스포드의 도 선생은 어느 강연에서 석고조각상이 스스로 구경꾼에게 손을 흔들어 줄 확률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그 현상이 실제로는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느끼기에 그 석고상은 공간이 없이 밀집된 원소로 구성돼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 석고상을 구성하고 있는 원소들은 서로간에 엄청난 거리(원소의 크기를 기준으로 할 때)를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숫자개념으로는 상상 조차할 수 없이 많은 (아마 100 의 수십 자승?) 원소들이 어느 한 순간에 같은 방향으로 이동하면 그 석고상이 손을 흔드는 현상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 이죠. 물론 제 상상이 아니고 도 선생의 말인데 자기 전공이 아닌 그 역시 물리학자들에게 빌어 온 말을 제가 또 인용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확률이 희소할 뿐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주에서 우연한 계기에 의해 생명이 출현한다는 것은 별로 개연성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석고상이 스스로 손을 흔들 확률보다는 ‘엄청’ 높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 확률은 여전히 낮아 140 억년 정도로 추정되는 우주의 나이와 팽창된 우주 공간의 부피를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많은 횟수가 아닐 거 라는 게 과학자들 이야기지요. 아마 딱 한 번 일어난 사건일지도 모르지요.
사실 이 희소한 확률은 다른 환경적 조건들, 예를 들면 지구상에 수소 외의 다른 원소들을 출현시키게 한 강력(원자핵의 구성요소들을 묶는 힘)의 골드락스 값 0.007 (생명출현의 선결조건이자 화학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초래하는 수소핵의 질량비)이라는 조건형성도 같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 등등 저같이 전공이 아닌 사람들은 이해하기 조차 어려운 여러 가지 부수 조건들도 포함하는데 아무튼 그들(과학자)의 표현대로 참으로 개연성이 없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한 것 이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생명의 우연한 출현은 “probable, however, unlikely” 한 사건일 뿐 “completely impossible”한 사건은 아니라는 것 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복잡한 우연을 관장하고 사건을 통제하는 전우주적 지성이 존재할 가능성은 어떠냐?
목사님들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시죠? 창조주 없이 이 세상이 저절로 생겼다는 주장은 고물상의 고철더미가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지면서 저절로 컴퓨터나 747 비행기가 조립됐다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제가 오늘 그 비유를 똑같이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른바 보수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신으로서의 하나님'이 존재할 가능성은 “고물상에서 고철더미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 '개인용 모니터가 장착된 747-400 비행기'가 저절로 조립될 가능성”에 더 가깝다는 것이 제 상상입니다. 그냥 제 상상이니까 틀렸으면 그걸로 그만이구요. 아무튼 가능성이 더 없다는 것 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저 같이 ‘독실한’ 기독교인 겸 ‘비’ 무신론자뿐 아니라 열렬한 무신론자들이나 유물론자들도 고철더미가 747 이 될 확률 역시 수학적으로는 가능하다는 인정하에 요새 “probably”라는 겸손한 단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겸손한 무신론자들은 특히 신사의 나라인 영국에 많아서 그들이 시내버스에 써 붙인 광고문안에는 항상 ‘probably’라는 겸손한 단어가 등장한다고 하지요.
저는 이 겸손한 무신론자들이나 유물론자들이 자기도 안 믿는 이야기를 신자들에게 믿으라고 강단을 탕탕 치며 고함을 지르는 대다수의 목사님들이나 밥줄이 떨어질까 봐 학교와 교회에서 각각 딴소리를 하는 일부 신학자들, 그리고 ‘비밀이 까 밝혀지면 신에 대한 모독이 될까봐’ 판도라 상자 뚜껑을 깔고 앉아 쉬쉬한다는 반쯤 깨어있는 아주 소수의 신자들보다는 훨씬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추신: 진화 이전에 태초에 존재했던 그 무엇을 우리가 아직 모른다면 계속되는 질문과 탐구의 영역일 뿐이지요. 천박한 신학(神學)이 아니라면 이런 틈새에 기어들어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있지는 않을 겁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아주 위험한 짓이거든요. 이 이야기는 제 말이 아니고 신학자 본훼퍼가 한 말을 제가 좀 각색한 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