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행 보고서 (해운대 달맞이 고개)
부산에 그렇게 많이 놀러 갔어도, 심지어 부산에서 2 년 6 개월 동안 군 생활을 했는데도 해운대를 찾은 적은 별로 많지 않다. 이번에는 해운대에 가 보았다. 뜬금없이 그 근처에 있는 추리문학관을 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해운대를 가 본 게 1989 년 봄 이었으니 꼭 20 년 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해변을 따라 고층건물이 늘어서 있는 것이 호놀루루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해 봄에 부산에 몇 번 내려갔던 이유는, 시위 도중 경찰에 쫓기다 머리를 크게 다쳐 뇌사상태로 봉생병원에 입원해 있던 어느 여학생을 취재하고 그의 부모를 면담하기 위해서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 여학생의 이름은 이경현이고 당시 부산교육대학을 다녔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해운대와 송정 사이 달맞이 고개 언덕위에 자리잡은 추리문학관
추리작가 김성종 씨의 작품 중에는 부산, 그 중에서도 해운대를 배경으로 한 것이 많다. ‘국제열차 살인사건’의 주인공 추동림과 남화는 해운대의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에서 살았다. 가난한 어부의 맏딸 ‘백색인간’의 홍난미의 집은 송정에 있었다. 그녀는 섣달 그믐날 밤 부산으로 가는 야간열차에서 만났던 남자 주인공 서남표와 해운대의 한 호텔에서 재회해 운명적인 관계를 맺는다.
나는 아직도 제 5 열의 주인공이 최진인지 다비드 킴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원조할매집의 국밥은 변함이 없다. 옛날에 비해 매운 기가 좀 가신 것 같기도 하고……
박차정 여사의 생가는 동래에 있었다. 이틀 전 밀양에 갔을 때 그의 묘소를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부산에 온 김에 대신 그의 생가를 찾은 것이다.
내가 본 안내문에는 박차정 여사의 생가를 가려면 지하철 동래역 2 번 출구로 나와 대동병원과 동래고등학교 사이에 있는 골목길로 들어가면 된다고 적혀 있었다. 이 안내문이 완전히 엉터리라는 걸 현지에 와 보고서야 알았다. 대동병원에서 동래고등학교까지는 무려 1 킬로미터 가량 되는 거리였고, 그 사이에 골목길이 수 십 개는 되는 것 같았다.
샐러리맨으로 보이는 길가던 30 대 사내에게 혹시 박차정 여사의 생가가 어딘지 아느냐고 물었다. 고개를 갸우뚱 하던 그 사내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잘 모르겠는데예” 하고 대답했다. 잘 모르는 게 아니라 그런 이름은 난생 들어 본 적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번에는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아저씨에게 물어봤다. 그 아저씨는 혼잣말로 ‘박차정… 박차정…’하고 생각을 더듬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이렇게 되물어왔다.
“이 동네 사는 사람인교?”
별로 시간낭비하지 않고 결국 찾기는 찾았다. 동래고등학교 버스 정류장 부근 골목에서 '박차정생가'라고 쓰여진 갈색 표지판을 발견한 것이다. 관람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생가 관리인은 어디 출타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좀 열어주이소" 하고 두 번이나 크게 외쳤는데도 개만 요란하게 짖어댈 뿐 인기척이 없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초대 국가검열상과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약산 김원봉(박차정 여사의 남편)이 1958 년 당적을 박탈당하고 처벌된 이유는 그가 장개석의 스파이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항일 무장투쟁을 수행할 당시 장개석의 재정적 후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은 역설적으로 김원봉의 청소한 연배와 진보적 정치노선에도 불구하고 장개석이 그의 정치적 비중을 높게 평가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의 더 큰 죄는 아마 그의 무장투쟁경력이나 지적인 논리정연함, 그리고 걸출한 인물됨이 김일성 당시 수상의 위상을 위협할 정도로 화려했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는 김일성보다 무려 열 네 살이나 연상이다.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고 항일투쟁을 시작했을 때 김일성은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나이로 보나 투쟁경력으로 보나 그는 한국전쟁 이후 완고해진 김일성 체제와 같이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인물이었을 것이다.
박차정은 중국 중경에서 1944 년 사망했다. 5 년 전인 1939 년 일본군과의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이 여성 혁명가의 시신은 해방 이후 남편 김원봉에 의해 수습되어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안장된다.
내가 부산에 간 날은 마침 부산 국제영화제 폐막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10 월 16 일, 이 날은 공교롭게도 딱 30 년 전 부마항쟁이 시작된 바로 그 날이기도 하다.
지하철 자갈치 역 7 번 출구로 나오면 자갈치시장과 국제시장이 마주보는 지점으로 나오게 된다. 자갈치 시장은 2 년 만이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호객행위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시장의 catchphrase 가 바뀌어 있었다. 과거에는 “오이소, 보이소, 사이소” 였는데 지금은 “오이소, 보이소, 노이소” 다. 자갈치 축제 기간이라 임시로 내건 건지 모르겠지만 똑똑한 변화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배경음악 ‘그 저녁부터 새벽이 오기까지’는 정수년의 해금독주곡이다. 원래는 무용음악 ‘태양의 집’의 일부였다가 뛰어난 해금연주에다 곡 자체의 완성도가 높아 독주곡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