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놈이 주범인지 구별부터 똑바로 해야......
sa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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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23 22:31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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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온라인에서 어떤 분이 “‘광주사건’은 미국이 주도한 국제정세의 산물이었다”는 흐리멍텅한 소리를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상중(喪中) 이므로 이런 소리에 핏대를 올리면서 반박할 사정은 아니지만 조금 정리할 필요는 있겠다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작년에 제가 ‘서른 아홉살 아줌마 고마워요’ (김여진 님의 전두환 발언과 관련해서)라는 글을 올렸을 때 벼라별 댓글이 다 달렸었습니다. 그 중에는 광주학살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강조한 것도 있었는데, 일리있는 부분도 있으나 대부분 미국의 역할에 대한 나이브하고 터무니없는 확대해석으로 이 사건의 역사적의미의 본질을 흐려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긴박하게 전개되는 어떤 사건이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같은 큰 틀을 짜는 상부조직의 사전플랜에 따라 아귀가 딱딱 맞게 진행되기 보다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하부집단간의 권력투쟁의 전개동향에 따라 사건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미국이나 주변강국의 이해에 따라 남한의 군부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는 해석은 내릴 수 없는 것 입니다. 미국은 미국이고 전두환 그룹은 전두환 그룹입니다. 복수의 비대칭 권력집단이 각각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한 이해부터 명확히 해야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연결부분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입니다. <?xml
사건 전개의 구체적인 일정이나 디테일한 정보들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광주사건은 국제정세의 산물”이라느니 “전두환과 민주화 세력의 대립이 본질이 아니라 카터의 재선을 위한 목적이 지대했다”느니 운운하는 것은 하나도 의미있는 발언이 아닙니다. “아고라방 가면 자료얻을 수 있다”는 말도 황당한 소리입니다.
저는 아고라방이라는 곳을 최근 5 년 간은 들어가 본 적이 없으므로 그 곳이 뭐하는 방인지 긴가민가하지만 광주항쟁에 대한 자료란 그런데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보도기사부터 검색해서 현대사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짧게는 1979 년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타협파인 이철승 당권이 무너지고 김영삼 체제가 김대중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출범한 사건부터, 그 해 8 월 11 일 일어난 YH 사건-김영삼 제명-10.26- 12.12사태- 안개정국- 전두환 중정 접수- 5.14 서울역 회군- 5.17 비상계엄 확대- 광주항쟁- 국보위 출범- 최규하 하야- 전두환 정권 출범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그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가가 좀 더 분명해 집니다. 최근 공개된 미국 국무부와 CIA의 기밀전문들은 새삼스런 것들이 아니라 이미 이런 흐름 속에서 뻔히 파악되어져 온 것들을 문서상으로 확인한 것에 불과 합니다.
판타지 소설을 의미있는 통찰로 바꾸려면 개별사건에 대한 면밀한 의미부여와 각 사건간의 연관성이 무엇을 뜻 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
미국이 광주학살을 승인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선 백악관국가안보회의가 광주 무력진압을 승인한 날짜는 1980 년 5 월 22 일 입니다. 이 날은 모두 아시다시피 초파일의 유혈극이라고 불리우는 도청 앞 집단발포사건이 일어난 5 월 21 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미 전 날, 즉 5 월 21 일 저녁부터 광주시 전역은 시민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크게 당황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이 때부터 광주항쟁 무력진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최초의 개입행동이 바로 한국군 보병 제 20 사단을 한미연합사의 통제에서 풀어 준 것 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측은 보병 제 20 사단의 사용승인 신청을 광주항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5 월 16 일에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을 통해 미국측에 해 두었는데 내내 승인을 해 주지 않다가 광주시가 시민군의 손에 떨어지자마자 그 승인을 해 주었다는 것 입니다. 이 말은 애당초 신군부가 20 사단을 서울에 투입하기 위해 사용승인신청을 했는데 승인을 미루고 있던 백악관이 광주시가 시민군에게 점령되자 승인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실 당시 미국이 당면한 가장 큰 해외문제는 한국시위사태가 아니라 주 테헤란 미국대사관 인질구출작전 실패였습니다. 이 사건이 제 기억으로는 바로 그 해 봄에 일어났고 카터임기 말에 미국의 제3세계 통제체계가 도미노처럼 붕괴되는 사상최악의 외교위기에 봉착한 시점이었습니다. 대외정책을 보수화하고 반공쿠데타를 재지원하기 시작한데는, 또 광주재탈취작전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한데는 그 해 한꺼번에 벌어졌던 제3세계 통제위기가 큰 역할을 했을 것 입니다.
어쨌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1979 년 10 월 26 일 저녁 7 시 40 분, 섹스파티를 앞두고 있던 박정희가 느닷없이 피격 사살되자 즉각 한반도 비상대책반 일명 Cherokee 를 구성해서 운영해 왔습니다. 이 비상대책반 멤버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차관, 리챠드 훌부르크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담당 차관보,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등 모두 국무부 소속 관리들이었는데, 이 조직이 광주항쟁 내내 백악관의 의중을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사령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미국이 이 조직을 통해 전두환 그룹의 계획을 가로막지는 않는다는 내용의 기밀문서들은 최근 뿐 아니라, 이미 지금으로부터 16 년 전인 1996 년 Journal of Commerce 지에 의해 최초로 폭로된 바 있습니다.
어쨌든 이 조직을 통해 1980 년 5 월 7 일 전두환 군부의 군대사용 계획을 승인해 주는데 이 때의 승인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서 전국적인 학생시위사태를 염두에 둔 것이었고, 위에 이야기한 5 월 22 일 승인이란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으로서 시민군으로 부터 광주시를 도로 탈취하기 위한 대국민 무력전투행위를 승인한다는 의미입니다.
광주학살의 핵심은 1980 년 5 월 18 일 오전 10 시부터 5 월 21 일 오후 한 시 경까지 벌어진 민간인 학살인데, 이 나흘 간 동원된 부대는 특전사 소속 제 3,7,11 공수특전여단 입니다. 미국은 5 월 7 일 포괄적의미의 군대사용을 승인하기는 했지만 이 나흘간 광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살육사건은 한미연합사 통제를 받지 않는 특전사 소속 부대를 미국측에 통보없이 파견한 것이므로 5 월 22 일 이후 벌어진 미국의 적극적 개입과는 다른 성격의 개입, 일종의 방조 또는 격려, 묵인 정도의 의미로 구분하여야 할 것 입니다.
미국의 사실상의 종용이나 다름없는 5.22 승인이 떨어진 바로 그 날,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 재탈환을 수립합니다. 광주재탈환 작전의 공식명칭은 상무충정작전입니다. 이 상무충정작전에 대해서는 제가 작년에 어떤 분에게 답변하기 위해 써 놓은 것이 있으므로 그대로 가져옵니다. 상무충정작전이란… 5 월 22 일 백악관국가안보회의의 보병사단 사용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 특전사령관 정호용을 통해 전남북지구 계엄분소장 소준열 (전투교육사령관) 에게 공수부대를 특공조로 하는 광주 탈환작전을 계획할 것을 부탁했고, 이에 따라 소준열이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에게 지시하여 수립한 작전입니다. 원래 계획단계에서는 상무충정계획이라고 부르다가, 5 월 25 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에게 전교사에서 올라온 상무충정계획을 바탕으로 상무충정작전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고 같은 날 오후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국방장관 주영복, 육참총장 이희성, 육참차장 황영시, 수도경비사령관 노태우 등이 모여 작전명과 작전시각을 확정하게 됩니다.
이 상무충정작전에 동원된 병력 수는 총 47 개 대대 2 만 317 명이었고 5 개 방면에서 잔공작전을 전개했다고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군요. 공수부대로 편성된 특공조는 모두 3 개로, 동원병력은 3 공수 특공조가 13/66, 7 공수 특공조가 20/181, 11 공수 특공조가 4/33 인데 목표지점은 각각 전남도청, 광주공원. 전일빌딩 이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미국이 보병 제 20 사단에 대한 사용 승인을 하지 않았다면 상무충정작전은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특전사는 지대와 팀으로 구성되어 여단이라고 해봐야 병력수가 얼마 안 되므로, 대규모 시위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중화기로 무장한 대규모 보병사단의 진주없이 광주재탈취란 애당초 불가능했다는 것 입니다.
만일 미국이 마음먹고 한미연합사 예하부대인 제 20 사단의 사용을 불허했다면 전두환은 굴복하고 말았을 거라는 거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미국 책임론이 대두되는 것 입니다. 미국책임론이 대두된다고 해서 전두환이 씨X놈에서 개X끼로 감면되는 거 아니구요. 그 죄가 가벼워 지는 거 절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