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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네블라스카주 에서는 박용만 선생이 그곳 주립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 하고 있엇다
그리고 주변농장의 한인 학생들을 모아 군사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주립대학에서 군사학 전공자라면 백인이면 바로 미군 장교로 임관이 되었다
박용만선생은 후일 하와이로 옮겨서 하와이의 국민회를 이끌었다 초기의 우리의 미국교포 사회는 아무것도 해준것 없는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였다 말로 설명할수 없는 우리민족의 DNA이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성금을 지속적으로 보내주었다
그리고 해방후에는 자신들의 선조들이 배를 탓던 인천의 인 과 일을 했던 하와이 의 하자를 따서 지금의 인하대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조국에 대한 애틋한 정은 교포사회 어다서나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암튼 박용만 선생은 이곳에서 한인 학교를 세우고 군사학교도 세웠다 많은사람들이 이곳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독립투쟁을 위해 중국 대륙으로 떠낫다
바쁜가운데 워싱턴에 있던 이승만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조지워싱턴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대학의 석사 과정을 공부하였으나
낙제를 하엿다 대부분이 C학점이나 D학점 이었다 어찌 어찌해서 다시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 과정을 밝게 된다
선교사들은 그를 공부시켜서 조선의 큰 목사님으로 만들계획이었다 그를 낙제 시켰던 하버드 대학에서도 조선에서 큰목사님이 될
이승만에게 방학때 계절 학기때 한과목만 강의를 들으면 석사학위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프린스턴 대학에서 무사히 박사학위를 받게된다
전공이 정확하게 뭐였는지 뚜렷하지 않다 3.1 운동전에 조선에 한번 다녀오고서 신문에 글쓴것 외에 뚜렷하게 뭘 햇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고 있던차에 하와이의 박용만 선생 에게서 하와이로 와서 자신과 함께 일하자고 연락이 온다
박용만 선생과 이승만은 독립협회 사건으로 고종때 한성감옥에서 같이 복역한 인연이 있는 당시로는 절친이었다
별로 할일도 없었든 이승만은 하와이로 왔다 이렇게 해서 하와이 국민회에서 일하게된다
그는 하와이 동포들이 매달 내는 독립성금에 관심을 갖게된다 그리고 돈을 지배하는자가 정치에서 주도권을 쥐게된다는 정치학의 가설을 실행에 옮긴다
맹목적으로 그를 따를 사람들을 모으고 박용만을 쫓아낸다 하와이 주법원기록에 이승만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
"박용만 패당들은 미국영토에서 조선의 군대를 만들었으며 일본의 이즈모라는 전함이 호널룰루 항에 들어오면 폭파시킨다고 함니다
미국과 일본의 우호를 위하여 이들에 초치를 취해주십시오" 이렇게 법원 기록에 기록되어 있다 미국은 기록의 나라이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 해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때까지 그는 미국 주류사회가 일본과 친하면 친일파가되고 미국이 일본과 사이가 나쁘면
그도 반일이 된다 동포사회에서는 고종의 밀사로 미국대통령 만났다고 말하고 손가락 끝을 호호 불면서 일본 감옥에서 고문 당한 후유증 이라고
말하곤 했다 고종의 밀사였다는 것도 그의말외에는 어떤 문서도 없다 물론 일본 감옥은 가본적도 없다
미국사회와 동포사회에 했던 말이 각각 다르다 미국 CIA 파일에는 그는 미국사회에서 출세를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고 기록 한다
동포들로 부터거둬 들인 성금도 중국으로 보내는 자금도 13% 로 줄여버렸다 성과도 없는 구미외교 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유유자적 하였다 미국전역을 돌아다니며 강연을 하며 성금을 모았고 당시돈 500만 달러를 목표로 독립공체를 팔기도 했다
1970년대에 중앙일보에 독립공체가 사진으로 공개되었고 상해 임시정부로도 돈이 가지 않았고 행방이 묘연 했고
그돈을 우리정부가 동포들에게 상환되었다는보도는 보지 못하였다 암튼 그러던중 22살이나 어린 노디김이라는 오벌린대학에 다니는
여학생과 강연 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샌프란시스코 경찰에 체포된다 미국에는 청교도법 뭐비슷한 법이 있었는데
남녀가 성관계를 위해 주경계선을 넘으면 범죄가 된다고 했었다고 한다 경찰에서 법죄인 머그샷 사진도 선명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개망신 당하기 일보 직전에 하와이로 사건을 이첩 시켜줄것을 요구해 하와이로 온다 거기서 유야무야 없던일로 만들어 버렸다
이승만을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만든것은 임시정부에서 숫적으로 우세하던 기독교 세력 이었다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대통령으로 추대 되었지만 상해에는 한번도 오지않았다 임시정부 구성은 완료 되었으나 이승만은 미국에 있었다
그런대 백두산 간도에서 1920년대 초에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에서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연합작전으로 청산리 에서
나남 일본군19사단 연대급을 아작내 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상해임시정부는 크게 고무된다
홍범도 장군은 평양감영의 나팔수였는데 평안도와 함경도의 포수들을 모아 독립군 부대를 조직 하였고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는
단군할아버지를 모시는 대종교의 노력으로 조직된 부대였다 우리나라의 오래된 도시에는 사직동 이라는 동내가 있다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아직 조금은 남아 있다 대구 달성 현풍읍에는 사직단이 완벽하게 남아 있다 그것이 대종교다
이들이 체코군단으로 부터 당시 최신식총인 모신나강을 아낙들로부터 후원 받은 은가락지로 사들였다
체코군단 지휘관이 거의 공짜로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분이 쓴책에 그 흙묻은 가락지 사진이 있다 참으로 짠 하고 울컥했다
암튼 잔뜩 고무된 임시정부는 동북군벌 장학량 등과 합작으로 독립전쟁을 모색하자는등 활기가 돌았다
이때 센프란시스코 사건수습을 마친 이승만이 상해로 온다 대통령이 된지 일년만이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요구 했다 상해에 상주 하던가
실무적인 부분을 상해에 있는 사람들에게 위임해 달라고했다
그의 대답은 "상해에 있지도 않을것이며 어떠한 권한도 넘겨줄수 없다"였다
사람들은 그의 대답에 어의가 없었다 어떻게 하겠다는 애기도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흐르자
이승만은 대통령 연두교서라는것을 발표한다 내용은
우리 형편상 전쟁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에 일반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 하면서
여가 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
그러다가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 싸우자
임정 구성원들은 멘탈이 나가버린다
이런 연두교서를 남기고 비밀스러운 일이 있다면서 미국으로 돌아가 버린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대통령의직무를 정지시킨다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 시킨다 그리고 그 치욕스러운 임시정부 분열이 시작된다
탄핵을 시켜 버리자 이승만은 13%정도 보내주던 미국동포들의 자금도 보내 주지 않는다 그많은 자금을 해방될때까지
그의 개인 자금으로 사용한다 일본놈들은 스고이 스고이 이승만 라고 했겠지요
임정 요인들은 잠은 청사에서 자고 밥은 상해 동포들에게서 얻어먹고 버틴다
백두산 간도에서는 3만명의 동포들이 일본군의 보복으로 살해 당했고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이
와해되기 시작한다 겨우 몇분의 임정요인으로 임시정부가 버티고 각각의독립군 부대들은 기약없는 전투를 벌인다
영화 암살에서 허정우 배우님이 말한다 몇사람 죽인다고 독립이 되냐
전지연 배우님이 말한다 모르지 하지만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야지
그후로 독립운동 진영 에서 변절자도 많이 나온다 임시정부가 와해되는 수준 이었다
노란 손수건 이었습니다
민족문제 연구소 동영상과 도올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사를 아주많이 참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