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10)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1961년 5월 어느 따뜻한 봄날 세벽에 자신들만이 조국의 미래라고 생각하던 청년장교들이 한강다리를 건넜다 다리끝에는 헌병 검문소가 있었고 써치라이트를 강하게 비추고 있었다
맨 앞에 있던 해병 소대장이 외친다 "야 라이트 까" 이렇게 한강변에 총성이울린다... 5.16 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남산 방송국에서는 혁명공약이 전파를 탔다 법적으로는 5.16은 군사반란으로 정의 되었지만 평가는 역사의 몫이 되었다
우여곡절끝에 정권을 잡는데 성공했지만 정부의 곡간은 텅비어 있었고 사람들은 6.25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민간에서는 은행에 저축을 하지 않았고 방법이 없었다 화폐개혁을 하여 화교자본을 확보할계획이었으나 신뢰만 잃어버린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시작된것이 자유당때부터 시작한 한일청구권 협상 재개였다 자유당때는 이것저것 합해서 30억 딸러를 요구했다
일본은 6.25 전쟁때 미군의 병참기지 역활을 하며 큰돈을 벌었지만 순순이 한국요구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학생들의 한일 회담반대 많은 학생들이 잡혀가고 많은 혼란을 격은뒤에야 한일회담이 타결되었다 다 합해서 8억달러... 해방전에 조선인들이
일본은행에 저축한돈 보험 징용임금 조선 민간인들이 받아야 될 모든 돈보다 적은돈으로 그냥 퉁쳐 버렸다 현금이 아닌 그것도 일본의 사양화되어버린 설비들을 들여 와야했다 그리고 기술 갑질은 장난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 판 검사와 군수 경찰서장은 있었서도 기술자는 아예 없었다
그것이 언제나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이었다
그때 마침 베트남 전쟁에 빠져 들던 미국으로 부터 파병 요청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을 미국으로 초청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열었다 카퍼레이드도
하고 한국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카 퍼레이드 였다 이로서 5.16을 미국이 인정한 정치적인 이득이 있었다
66년부터 연인원 32만명의 군인이 월남전에 다녀왔다 군인들 월급의 20%는 현지 지급 하고 80%는 국내 송금이었다 년간 8억 달러였다
5년간 40억 달러 였다 민간 기업들이 벌어들이돈과 미군이 지원한 주월 한국군사령부에 무기와 지원금은 덤이었다
미국은 우리에게 많지않은 원조금이나 잉여 농산물을 제공 하였지만 대규모 경제 차관이나 지원은 하지 않았다
정부는 이돈을 중화학공업에 투자 하였다 기자들이나 평론가들은 과잉투자라고 비판했다 나중에 이것이 한국경제의 신의 한수가 된다
70년초 1차 오일 쇼크때 우리나라는 중동으로 진출하여 경제개발 자금을 확보한다 그돈은 100대 연구과재를 설정 연구 하여 오늘날의 우리나라
첨단산업에 투자된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나라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된다
98년 방콕 카오산에서 아란야 쁘라떼트로 가서 하루자고 포이펫 국경을 통과아여 시스폰으로 가서 왼쪽길에서 시엠립까지 픽업트럭 기사와 흥정을 한다
시엠립까지 153Km이다 아침나절에 출발했는데 도착은 밤8시쯤 한다 도로가 폴포트 애들이 파괴해 버려서 속도를 낼수도 없고
다리는 완전 파괴되어서 H빔 두개로 바퀴에 맞추어 건넌다 지금 생각해도 악몽같은 도로이다
지금도 훈훈하게 기억 하는것은 같이 간 아낙들이 건네준 망고스틴 이다 비가오면 같이 포장 쪼가리로 비를 피하고 .....
프놈팬에서 목바이 국경 까지가는데 우기때는 길하고 하얀 탑같은 무덤들만 보인다
호지민에서 출롱 가는길에 안동마켓이라는 5층짜리 건물이 있다 기념품같은것을 단체관광객에게 파는곳이다
안동 마켓 뒷쪽으로 노점상에서도 판다 미군들의 시계나 군번줄 한국군 것도 있다 내가보았을때는 진짜이다
5년동안 연인원 32만명이 참가한 전쟁에서 한국국방부의 공식 입장은 포로나 실종자 그리고 남겨진 국군 유해는 없다는것이다
말도 안되는 애기다 나중에 한국군 주둔지역을 여행 할적에 베트남 정부는 전사자 유해발굴 비슷한것을 하고 있었다
베트콩 전사자들은 하얀탑 같은것으로 좋아 보였는데 그옆에 그냥 땅에 번호가 쓰인 나무 말뚝이 있는 무덤이 있었다 난쭈딘(한국)것이란다
지금 베트남 정부와 수교를 할적에 과거 전쟁에 대해서 우리정부는 사과를 하고 싶다고 했으나 베트남 정부는 그럴필요 없다고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무슨 인도주의 단체에서 베트남 전쟁때 민간인 인권유린에 대해서이슈화 시킨다고 한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베트남 정부가 그러필요 없다는 것에 타당한 사유가 있다 제네바 협약에 포로에 관한것이 있는데
포로가 발생하면 지체없이 국제 적십자사에 포로의 인적사항을 알려야 한다 전사자도 인식표에 있는것도 알려야 한다
우리나라 파주에 적군묘지가 있는것도 그런이유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군에 예를 갖추어 넘겨주었고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심지어 북한으로 국군 포로들을 보내버렸다 1975년 사이공 함락 때 이대용 공사와 4명의 영사들은 끝까지 한국대사관에 남아 베트남 지방에서
모여드는 교민들을 보살폈다 남겨졌던 150명 이상의 교민들은 공산 베트남으로 부터 식량배급까지 받으며 지내다 무사히 귀국 하였다
하지만 우리 외교관들은 체포되어 치와 형무소에 감금되어 끝없는 심문과 북한으로 갈것을 회유당했다
이것은 외교관 지위에관한 빈협약 위반이다 5년만에 석방되어서 귀국 했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영사로서 교민보호의
소임을 다한 이대용 공사와 4분의 영사님들을 기억 해야 할것입니다
채명신 장군... 파병전에 미군과 작전지역 협상을 할때 미군들이 원한 메이콩 델타 지역을 피하고 우리나라와 비슷한 남베트남 중부지역을 선택했고
작전권을 주월 한국군 사령부가 행사 할수 있게 했고 한국군 특유의 중대전술 기지를 구축해서 대비정규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했다
서북 청년단 출신으로 강원도 에서 공비소탕을 하였고 대비정규전에 특화된 군인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것은 월남전이 끝나고
포로교환이나 유해수습에 대해 한번도 언급이 없었다는것이다 오래전에 월남에 남겨진 국군유해에 관한 MBC 탐사프로를 보도하였는데도 월남 의 국군유해들이 돌아 왔다는 뉴스를 들어본적이 없다 베트남전에 참전 했던 수많은 장교들도 나중에 대통령 까지 되신분도 있는데
국군포로 송환이나 유해송환을 언급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 참전전우회등 월남전 관련단체들도 마찬가지다
부하들을 데리고 갔으면 다시 데리고 와야지 ,,,,,,, 나는 그들을 군인 이라고 생각 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유해를 송환해 와야 한다 국격의 문제이고 쪽팔린다
노란 손수건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