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8)
그때는 농번기라 3분1이상의 장병들이 농사일을 돕기 위해 휴가들 가 있었다 38선상의 충돌은 늘상 있던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이 저러다 말겠지 하며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이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하고 느끼기 시작했다
주공격로는 동두천 의정부 미아리로 이어지는 3번 국도상이었다 북한군은 완편 2개사단과 105전차여단 기타보급및 지원부대로 구성되었고
국군은 유재흥 준장의 7사단 이었고 실병력은 1개 연대도 되지않았다 선빵을 제되로 맞은 국군은 의정부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만들어 용감히 싸웠지만
창동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도봉산과 수락산 불암산이 요새처럼 서 있은 사실상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국군은 열심이 교통호와 개인호를 파서 창동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대전차 무기인 2.62인치 로켓포와 57미리 무반동포는 아예 효과가 없었다
말그대로 속수 무책이었다 포로로 잡은 북한전차병은 국방군에 대전차무기가 없다는 것을 안 북한군은 보병을 아끼기 위해 전차 단독으로
공격 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국방군이란 북한이 우리국군을 부르는 말이다 국군은 보급이 아예 없었다 탄약도.식량도 보급이 없었다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은 무조건 막으라는 말만했다 의정부전선이든 창동 방어선이든 미아리든 열심히 삽질하여 참호를 파고 싸우다가
탄약이 떨어지면 그냥 철수할수뿐이 없었다 소총이라는 것은 총알이 없으면 그냥 몽둥이만도 못하는것이었다 통신 수단도 없었다 잘싸우다가 탄약이
떨어 져서 철수하기시작하면은 의정부전선이 사라지고 창동방어선이 사라지고 미아리방어선이 사라졌다 국군이 용감하지 못해서 그런건
절대 아니었다 내가 군에 갔을때에 전투수칙이 4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나는 단 한발의 탄약도 아끼겠다,, 였다
얼마나 탄약에 한이 맻었으면 세월이 한참 흐른뒤에까지 우리국군의 전투수칙이 되었나 싶다
대전과 광주에 있던 사단들이 25일 아침에 출발하여 전선에 도착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계획적으로 방어지역을 선점해 방어 했어야 했으면 했는데
북한군은 한번의 전투후에 부대정비도 없이 쭉 밀어붙이는데 국군은 부대가 오는데로 축차투입해 대규모 공격하는 적의 아가리에 쳐 넣었다
서부전선 개성 문산 삼송리 조공 로에는 국군 1사단이 장비도 제되로 갖추고 있었고 병력도 그런데로 사단 완편된 조직이었다
사단장 백선엽은 보병학교에 교육 들어가 있었다 즉시 육군본부로가서 지휘권을 확인 받고 문산으로 가 1사단을 지휘했다
그런데로 전투다운 전투를 치르면서 일산 과 행주나루로 후퇴하였으나 노량진 한강교 조기폭파로 퇴로가 차단되어서
많은 장비를 파기 또는 유기한체 뗏목을 만들어 한강을 도하 했다
서울 동쪽의 포천쪽에는 육사생도 1기 2기 그리고 육사교도대가 퇴계원 북방에 서 진지를 구축하고 싸우고 후퇴하기를 거듭하면서 광나루를 거쳐
천호동으로 후퇴 했지만 후퇴명령을 받지못한 일부병력은 육사교정으로 후퇴 했지만 이미 퇴로가 끊겨서 취사장으로가 누릉지로 허기를 떼운후
식량과 탄약을 챙겨 불암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으나 1명만이 살아남고 전원 전사하였다 수많은 국군장병들이 조직적으로 철수하지못한체
한강을 도하해 수원이나 노량진으로 철수하였다 당시 미국대사 무쵸는" 적에게 집단투항 하지않고 처절하게 한강을 건너는 국군을 보고 한국군은 장래가
밝다며 칭찬 하였다 무쵸대사의 보고가 트르먼 대통령의 미지상군 투입승인에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6월 25일 오전에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채병덕을 불렀으나 의정부전선에 있다고 하여 오후에 이승만 대통령의 주재하에 국무회를
열었다 채병덕은 후방병력이 도착하면 적의침공을 막고 역습하여 북으로 진격하겠다고 보고하였다
모두가 미심적어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령 제377호를 하달 하였다 그내용이 피난민 대책도 아니고 정부기관 피난대책도 아니었다
비상사태하에 범죄처벌에 관한것과 다른 몇가지였다 그뒤로 전국각지에서 좌익으로 의심되는사람과 보도연맹원들이 체포되어서
처형되었다 다음날 밤중에 열차편으로 대구까지 도망 갔다가 다시 대전으로 북상 하였다
서울시내에 T34탱크가 서울시내를 굴러다니는 28일 오전까지 이승만 대통령의 음성이 서울시내 가로수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용맹무쌍한 우리국군이 북진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들은 안심하고 생업에종사하라,, 나중에 서울시민은 둘로 나뉜다
피난간사람과 안간사람 으로,,, 정부말을믿고 피난못간사람은 괜이 죄인이 되었다 손가락 재판으로 처형된 사람도 많았다
한강 폭파는 세벽 2시반이었고 북한군 탱크가 한강교에 나타난 시간은 오전 10시 반이었다 재장헐.......
노란 손수건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