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불의 사라 카리미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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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의 사라 카리미에게 보내는 편지

필리핀 4 181

 

6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어리둥절할 때가 있는데 단 하루도 살아보지 않은 아프간에 대해 얼마나 알겠어요.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를 각자의 기준으로 판단할 뿐이죠.

 

제가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아래의 제 글 <아프간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의 댓글에서 사니아님도 강하게 비판을 했듯이, 아프간에서 탈레반이 재집권한 것을 민족해방이라고 하는 건 잘못이에요. 아프간에는 해방시킬 민족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혼란스러운 거죠.

아프간은 식민지 제국주의 시절에 영토가 정해지면서 언어와 생김새와 종교가 다른 부족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나라예요. 때문에 단일한 민족(국민) 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했어요. 때문에 아프간에 민족은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에 대한 개념도 느슨합니다. 이와 같은 부족 중심 사회는 그 부족의 질서와 전통만 존중해주면 더 강력한 정치권력에게 머리를 숙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탈레반은 아프간 최대 부족인 파슈툰족을 기반으로 하는 종교적 이념조직이에요. 우리나라에도 특정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조직(정당) ‘묻지 마 지지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탈레반이 지금껏 존속하는 이유도 그런 관점으로 해석하면 이해가 빠르겠죠.

과거 탈레반 집권 시기에 끝까지 저항했던 북부동맹은 아프간 제2의 부족인 타지크족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요. 탈레반이 재집권하자 반 탈레반을 선포한 세력들이 북부동맹의 근거지인 판지시르 지역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결국 탈레반의 재집권은 민족해방이 아니라 정권교체일 뿐이며,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부족들 간의 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거죠. 

 

아래의 글은 손아람 작가가 818일자 한겨례 신문에 발표한 칼럼이에요. 전적으로 공감하는 내용이어서 옮겨왔어요. 참고로 사라 카리미는 아프가니스탄의 여성 영화감독으로 세계가 우리에게 등을 돌려선 안 된다.”고 호소하는 편지 글을 SNS에 올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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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의 사라 카리미에게

 

뉴스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어떤 기사는 수도가 함락되자마자 현금다발을 싸 들고 도망친 대통령을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흥미진진하게 묘사했습니다. 미국의 국제전략 기조를 상세하게 분석한 기사도 있었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접경한 아프가니스탄의 정세 변화에 곤두선 중국의 속내를 넘겨짚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마치 귀환한 영웅을 칭송하듯이, 강대국에 맞선 오랜 투쟁 끝에 승리를 쟁취한 탈레반의 업적을 읊어 내려간 기사도 보았습니다. 그런 기사들에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긴 어려웠습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표정 대신 비행기 바퀴에 매달려 탈출하다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해 죽은 사람의 실루엣으로 당신들의 사정을 짐작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곳의 삶보다 죽음을 더 상세히 압니다. 그때 저는 당신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당신은 탈레반 남성들과 강제로 혼인한 여자아이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복장 때문에 살해당한 여성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고문 끝에 죽은 시인과 코미디언에 대해, 멸망을 앞둔 예술에 대해, 우유가 없어 죽어가는 아기들에 대해, 학교에서 쫓겨나고 있는 900만의 여자아이들에 대해, 마침내 얻게 된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여학생들에 대해 말했습니다. 당신은 탈레반과의 평화협정이 합법적이지 않다고 말했고, 침묵하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편지의 독자들이 자국 언론에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의 요청에 응하기 위해 여기 답장을 씁니다.

 

제가 당신의 편지를 읽은 815일은 마침 한국의 광복절이었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으면서,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로 파견된 이위종의 연설 한국의 호소가 떠올랐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헤이그를 방문한 그는 일본이 평화를 거듭 강조하지만 총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평등한 기회의 약속은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통치로 바뀌었다고 외쳤습니다. 그가 비난했던 세계의 야만성은 당신이 맞닥뜨린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역사를 배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위종의 호소가 반박할 수 없이 정당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반박 대신 이해할 수 없이 조용했던 응답을 기억합니다. 당신이 세계의 침묵이라 불렀던 가혹한 고요를. 한국은 세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나라였습니다. 헤이그의 세계인들은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그들이 한국을 위해 목소리를 낸다 해도 어디에 가닿을지, 어떤 의미와 영향을 가질지 확신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잘 모릅니다. 아프가니스탄에 가본 적도, 아프가니스탄 사람을 만나본 적도 없습니다. 또한 카불에서 날아온 당신의 편지에 대륙 맞은편 서울에서 응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편지에서 절절하게 묻어나는 섭섭한 마음은 한국인인 저에게도 너무 익숙한 것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계에는 우리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어두운 영역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침묵은 합의된 부정의가 아니라 외면으로 인식되지조차 못하는 무관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답장하자고 결심하는 것으로 무관심의 유혹에 맞섭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억누르는 그 어떤 권력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삶의 요구는 서로 다른 법과 종교와 언어가 공유하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의 싸움에 총 대신 사소한 말을 보탭니다. 저는 당신과 당신 국민들의 살아갈 권리를 지지합니다. 이런 말이 당신을 향해 날아가는 총알을 막아줄 수도 없고, 당신을 향해 다가가는 적을 뒷걸음질 치게 만들지도 못할 것임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지난 전쟁 동안 당신의 정부가 가졌던 무기들도 그런 일을 해내지 못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지나치게 순진한 접근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그들 역시 자신의 삶이 위협받는 순간에는 똑같이 순진한 희망으로 세계의 도움을 구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특별히 희망이 가진 힘을 믿습니다. 해마다 815일이 돌아오면, 바로 그런 순진한 희망이 현실이 된 사건을 기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읽기] 카불의 사라 카리미에게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hani.co.kr) 

 

 


4 Comments
sarnia 08.21 10:52  
지금 이 시간에도 카불공항에서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어요.
특히 젊은 부모들이 아이만이라도 이 나라를 떠나게 해 달라며 철조망 안 다국적군 병사들을 행해 자기 아이를 집어던지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타전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공항 활주로에서 발견된 아이도 구약에 나오는 모세처럼 일부러 놓고 간 아이일 겁니다.

탈레반이 특별비자를 받은 자국민의 출국을 방해하는 등 약속을 어기고 있는만큼 바이든 행정부는  새로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불시내의 제공권을 재장악하고 중무장병력을 공항 밖으로 전개시켜 피난민들의 탈출루트를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프가니스탄은 변했어요.
2001 년 이전 5 년 간 탈레반이 집권하던 시절이 아닙니다.
미국이 제국주의적 침략을 했든 어쨌든 지난 20 년 간 사람들은 인식의 변화를 겪었고 그때 태어났거나 아주 어렸던 30 세 이하 세대가 인구의 태반을 차지하는 세대교체가 일어난 시대에 탈레반의 재집권은 엄청난 참극의 불씨가 될 수 있습니다.
필리핀 08.21 11:11  
사니아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국경을 봉쇄하고 난민을 거부하는 나라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네요ㅠㅠ
아프간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미국과
영국, 러시아가 앞장 서서 책임을 져야 하는데...
두루아빠 08.21 11:20  
아프간을 난도질 했던 강국들이 끝까지 돌봐줄 것이라고 기대했다면 참 어처구니 없는 일 입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저기서 10년 동안 난장을 피우다가 철수 한다면 우리 국민들은 난민들 다 데려오라고 할까요?
타지크족은 파슈툰족을 미국과 같은 외국 점령군으로 인지할까요? 과연 어떤 시각이 아프간 민중의 시각일까요?
필리핀 08.21 22:00  
SNS에 아프간 현지인들의 메세지가 여럿 올라와 있어요.
아래 기사에도 현지인들의 상황이 등장하네요.
https://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08407.html#c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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