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한 수사 1 (참고인 소환조사)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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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세계점령 사건을 수사하고 있습니다.
sarnia : 안녕하세요. 참고인 소환조사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참고인은 피의자가 아니지만, 피의자와 마찬가지로 역시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으며 옆에 계신 변호사가 대신 답변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조사의 객관성을 기하기 위하여 본 수사관은 성서를 조회할 때 공동번역이 아닌 KJV의 영어성경과 아울러 KJV 한국어 성경을 사용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참고인의 신상부터 재확인 하겠습니다.
참고인의 이름은 바울 (Paul), 바울은 그리스 이름이고 히브리어 이름은 사울 (Saul) 이지요? 참고인은 유대계 로마 국적자로서 헬라어나 라틴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고국에서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고인은 서기 5 년에 태어나 서기 67 년 사망. 출생지는 타르수스, 알려진 가족은 로마서 16 장 13 절에 언급된 어머니와 사도행전 23 장 16 절에 언급된 조카 (sister’s son) 가 있습니다.
이상이 귀하의 참고인 진술조서에 나와 있는 신상기록인데 맞습니까?
바울: 맞습니다. 회심 전 이름이 사울이고 회심 후에는 바울로 사용한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당시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문화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해했기 때문에 생긴 헛소문입니다. 저는 국내와 해외에서 각각 두 개의 다른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마치 수사관 님이 한국에서는 한국 이름을, 캐나다에서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sarnia: 사도행전 22 장 28 절과 29 절에서는 참고인이 자기를 가리켜 로마 시민권자라고 진술했지만, 같은 사도전 21 장 39 절에서는 현재의 터키 지방인 타르소스 시민이라고 엇갈린 말을 했습니다. 당시 로마가 이중국적을 인정했다는 기록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게 맞는 것 입니까?
바울: 사도행전은 제가 쓴 게 아니기 때문에 그 기록에 대해 아는 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는 날 때부터 로마시민권자였다는 것 입니다. 시민권을 기회주의적으로 활용했다기 보다는 저는 이것을 로마 등 황제의 통치권이 미치는 지역에서 효과적인 선교를 위해 사용했습니다.
sarnia: 그 말은 경우에 따라 로마인 행세를 하기도 하고 비로마인 행세를 하기도 했다는 것 입니까? 참고인이 로마군에 체포되었을 때 자신을 날 때부터, 다시말해 생득적 로마 시민권자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이는 로마 시민으로 위장해 위기를 모면하고 법적인 보호를 구하려고 지어낸 말 입니까?
바울: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자는 다른 식민지 주민에 비해 차별적인 특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었고 황제에게 항소할 수 있는 권리도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로마 통치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로마 시민권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로마의 관료와 군대를 상대하면서 로마 시민권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이 반민족적 부역행위라거나 기회주의적인 자세라고 매도하는 시각에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sarnia: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커스로 공무여행 중 참고인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사도행전 9 장과 22 장의 기록이 서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그 여행 중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참고인이 직접 증언해 주세요.
바울: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도행전은 나와 상관이 없는 문서 입니다. 적어도 사도행전은 주후 177 년 이전에는 인용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문서는 제가 죽은 후 적어도 100 년 정도 지나 쓰여진 문서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치 사도행전이 저 바울이나 초대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기의 생생한 장면인 것 처럼 착각하는 이유는 신약이 편집될 때 이 문서를 복음서 바로 뒤에다 끼워 넣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착시 유도 편집기법이지요. 복음서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일 신약이 연대기 순으로 편집됐다면 당연히 제가 직접 쓴 편지들이 맨 앞에 나와야 할 것 입니다.
sarnia: 아, 참고인. 잠깐만요. 이야기가 산만해 지는데 제 질문에 먼저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로 가는 공무여행 도중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바울: 그 사건에 대한 진술은……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sarnia: 변호인이 그 날 사건에 대해 참고인을 대신해서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바울의 변호사: 저는 일단 의뢰인의 답변거부를 존중합니다. 다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의뢰인이 편지에서 묘사하고 있는 문학적 표현과 자기고백이 사건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증명해 줄 수는 없지만,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서는 좀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사건의 개요나 의뢰인의 주관적 심리인 회심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방에 복음을 전파할 의뢰인의 사명을 실현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였다고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라고 봅니다.
sarnia :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변호인, 변호인께서는 이 자리에 법률적 조력자로서 참석한 것이지 신학적 변증을 하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는 것을 상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쨌든 본 수사관은 이른바 ‘다마스커스 도상에서의 회심’이라고하는 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참고인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일곱 편의 편지와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첨삭된 것으로 알려진 여섯 편 등 총 열 세 편의 편지들을 모두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저는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상하게도 참고인이 좀 전에 말씀하신 것 처럼 참고인 사후 100 년이나 지나서 작성된 사도행전에서는 그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는 반면에 참고인이 당대에 직접 쓴 일곱 편의 편지 어디에서도 그 사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갈라디아서 1 장 15 절과 16 절, 고린도 전서 9 장 1 절과 2 절, 고린도 전서 15 장 8 절 같은 곳에 단편적인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전부 입니다.
예를들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같은 말들인데, 참고인이 직접 작성한 진술이 사도행전 9 장, 22 장, 26 장에 각각 다르게 기록된 사건 기록을 뒷받침한다는 연결의 타당성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는 것 입니다. 만일 사도행전이 먼저 작성된 문서고 참고인의 편지들이 뒤에 작성됐다면 모르지만, 기록의 작성연대순이 그 반대인데다가 당대의 기록보다 100 년 후의 기록이 더 구체적이라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의심할만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참고인 스스로가 답변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다마스커스 사건’ 조사는 일단 유예하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sarnia: 세상에는 참고인이 아니었으면 기독교의 세계화는 가능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세상의 이런 평가에 대해 참고인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울: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런 평가에 대해 대체로 동의합니다.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내가 마치 이방선교에 중점을 둔 것 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은 지중해 인근 도시들에 모여 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주된 선교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다만 해외의 유대인 회당 (시나고스)에는 현지인을 비롯한 이방인들의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저와 제 동료들은 이런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해외선교현장에서 히브리 율법을 강요할 수는 없었습니다. 율법이 아닌 믿음, 또는 몽학선생 이야기는 이런 히브리 율법과 전통을 마냥 고집할 수만은 없는 특수한 선교조건에서 나온 것 입니다. 그런데 헬라어로 선교를 하다보니 헬라어를 할 줄 아는 현지인들과, 특히 부유한 로마시민들도 모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는 해외에 산재해 있는 시나고그가 선교대상이 아니라 선교거점으로 그 의미가 확대 발전된 것 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어 내가 죽은 뒤 200 여 년 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선포되는 일이 발생했다고 봅니다.
sarnia: 아까 참고인의 변호인은 비록 신학적 발언이긴 하지만 “이방선교를 그리스도의 역사” 라고 했는데 참고인은 “해외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하다보니까 이방선교가 덤으로 따라왔다” 는 진술을 하고 있군요. 어떤 게 맞는 것 입니까?
바울: 그건 어떤 게 맞고 틀리는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역사가 존재한다고 해서 내가 항상 그것을 인지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몰랐는데 이방선교의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역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sarnia: 히브리적 기독교와 참고인의 기독교의 차이를 한마디로 구별할 개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울의 변호사: 그건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적 기독교는 따지고 보면 히브리의 관습을 지킬 것을 강요한 데 불과했지만 바울선생…… 아, 죄송합니다. 의뢰인의 기독교는 그런 에스닉 바운드리를 벗어나 신자의 내면적 성찰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 그레코-로만 문화는 높은 수준이었는데 그레코-로만 문화의 지식층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의뢰인의 신학이 당시로서는 높은 지적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sarnia : 그렇다면 참고인의 기독교는 도시종교였고, 못배운 자 가난한 자 보다는 배운 자와 가진 자의 종교로 출발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군요?
바울: 그 질문에는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sarnia: 좋습니다. 여기 통계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Rodney Stark 이 제출한 건데, 그의 저서 중 하나인 Cities of God 67 페이지에 나와있는 자료 입니다.
가정통계이긴 하지만, 참고인이 회심했을 즈음인 CE 40 년 경에는 기독교인의 인구가 불과 천 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가정통계와 가정증가율, 실제 인구와 증가율 사이에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제국 통치지역의 전 인구가 약 6 천 여 만 명이었으니 매우 미미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정증가율을 적용하면 참고인이 선교를 시작한지 한참 지난 CE 50 년에도 기독교 인구는 크게 늘지 않아 모두 1,397 명에 불과하게 됩니다. 참고인이 죽은 지 33 년이 지난 CE 100 년에도 7,414 명에 지나지 않는데, 그후 150 년이 지난 후인 서기 250 년에 와서 1,120,246 명으로 갑자기 크게 늘어나 비로소 인구통계상 1.9 % 라는 숫자에 잡히게 됩니다. (이 수치가 학자들이 주장하는 서기 350 년의 기독교인구 최대치임, 따라서 초기 인구를 1000 명보다 많이 잡을수록 바울 선교 당대의 기독교 인구 증가율은 낮아짐)
그로부터 62 년 후, 즉 로마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 1 년 전인 서기 312 년 기독교 인구는 무려 8,904,032명, 전체 인구대비 14.8 %로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합니다. 기독교가 공인된 지 불과 37 년 후인 서기 350 년이 되면 로마 제국 전체 인구의 52.9 % 에 달하는 31,722,489 명으로 폭발적인 증가를 이룹니다.
이 가정 통계만을 놓고 보면 참고인의 신학은 성공했는지 몰라도 참고인의 당대 선교가 그리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추론을 할 수 있습니다. 즉 ‘기독교의 세계점령사건’의 주인공이 참고인이 아닌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요인들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말이지요.
앞으로 갈 길이 먼데, 어쨌든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일단 귀가하셔도 좋습니다.
CSI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