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너무 좋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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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너무 좋지 않네요

sarnia 16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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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북한)이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해 선택해야 할 최선의 방법은 분명해 보인다. 

최강의 적을 친구로 삼는 길이다. 

최강의 적이란 당연히 미국이다. 

중국이 가까운 미래에 미국의 원탑 위치를 replacing 할 거라는 엉터리 추측이 사라진 게 몇 년 전이다. 

2015 년 이후 G2 라는 용어 역시 그 엉터리 추측과 함께 동반실종됐다.   

당파를 떠나 이젠 좀 솔직하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정세분석 부문에서 전문가다운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조선 지도부 역시 이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해 오고 있었던 것 같다. 

최근 3 ~ 4 년 간 알게모르게 일어난 미국의 위상격상과 그에 따른 국제정세변화를 관찰하다보면 '2018 코리아반도 정세변화'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옛날 이야기부터 하나 하자. 

한국에서는 미국의 에너지혁명이 향후 어떤 형태의 혁명적인 국제정세변화를 몰고 올 것인지에 대해 깜깜무소식으로 침묵하고 있던 2015 년 봄. 

내가 태사랑 대한민국방에서 처음으로 그 주제를 올렸고, 그 의미에 대한 토론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토론패널 중 한 분이셨던 걸산브라더는 요즘 통 소식이 없는데 눈팅이라도 하실 것으로 알고 이 자리를 빌어 안부인사 전해드린다. 

 

그 포스트의 계기가 됐던 건 당시 오마이뉴스의 어떤 기사였다. 

유가폭락으로 반짝했던 미국 셰일산업이 사라질거라는 요지의, 사태의 본말과 의미를 완전히 거꾸로 해석한 글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나서 생뚱맞게도 치마를 뒤집어 입고 있는 옥희네 식모가 생각났다.  

옥희네 식모란 신상옥 감독의 영화 '사랑방손님과 어머니'에 나오는 푼수빠진 인물이다. 

 

비록 몇 년 전 이야기지만 

그런 중대한 오보에 대해서는 이제와서라도 그 때 무엇을 잘못 해석했었는지 한 번 쯤 다시 끄집어내서 복기하는 게 옳은 일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해당 매체에서 수정논평을 했다는 소식은 여태껏 들은 적이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줄곧 옳은 말만 했고 너는 틀리기만 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에너지혁명이야말로 오늘의 저 '건들건들하고 뻔뻔해 진 미국'을 가능하게 한 절대요소였던만큼 

국제정세의 흐름을 올바로 해석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점검사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에너지혁명 이후 미국의 정치지형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미국의 에너지혁명은 우선 러시아를 하루아침에 붕신으로 만들었다.     

노골적인 중동경시정책이 시작됐다. 

개입주의를 집어치우는 새시대의 신호탄이 오른 것이다.  

2017 년 주 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실천했다.

불과 2  년 전 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민유입과 해외지원에 제동을 거는 신고립주의 정책도 등장했다. 

이민은 부자이거나 고학력 전문직만 받고, 난민은 연간 5 만 명 정도만 받으며 

해외지원은 미국에 딴지를 거는 나라나 단체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리거나 대폭 축소하겠다고 협박을 해댔다.  

 

미국은 이제 그다지 많은 동맹이 필요없어졌고, 

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지키기위해 맘에도 없는 똥밟은 소리를 늘어놓을 필요도 없어졌으며, 

원료수송루트를 방어하기 위해 천문학적 액수의 군사비를 지출할 이유역시 파격적으로 줄어들었다.  

주한미국군 같은 대규모 군대를 외국에 주둔시키며 '동북아 패권을 위해 군대를 주둔시키네 뭐네'하는 험담을 듣을 이유역시 없어졌다.

군대 빼든지 너네가 돈내든지 하라는 말은 협상의 기술이 아니라 속에 있는 말 솔직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주한미국군은 전시작전권반환과 동시에 코리아반도 바깥으로 철수할 것이다.)

지난 가을 발생한, 저 개뚱딴지같은 카슈끄지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풀이 죽어있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하여금 저유가오일이 너무 많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앞으로 오래도록 알아서 기게 하는 목줄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이건 그야말로 미국으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보너스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코리아반도에서 일 년 남짓 펼쳐지고 있는, 평화정착이 될듯말듯한 이 천재일우의 기회역시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바탕으로 찾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국제정세변화, 그 원인과 결과는 다른 나라의 개입없이 미국에서 전부 발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이 트럼프식 정책을 사용하든 아니면 conventional power elites 식 국제주의적 패권주의로 회귀하든 미국 마음이다.

어떤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해서 어떤 정책을 꼴리는대로 구사하든 미국으로서는 어떤 경우에도 손해 볼 일이 적다는 이야기다. 


근데 조선의 입장에서는 미국내부의 파워가 어느 쪽으로 기울어지느냐에 따라 그 거래의 성격이 차원이 다르게 뒤 바뀔 수 있다.  

조선이 트럼프 집단과 거래할 때와, 국제주의적 패권주의자들과 거래할 때 각각 지불해야 할 비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트럼프가 가게문 닫기 전에 그와 빨리 거래를 끝내고 계약서에 도장찍어야 한다는 절박한 난제가 있다. 

 

지난 70 년 간 조미간 화해에 결정적인 장애로 작용해왔던 요소는 두 나라간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이었다. 

미국은 주로 조선의 'so called' 인권문제와 비시장경제체제를 두 나라간에 화합할 수 없는 이질성의 핵심으로 제기했었다. 

미국의 주류는 여전히 조선의 인권문제와 비시장경제체체를 강력한 딴지 이유로 삼는다.  

 

근데 이런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되자는 제안을 미국이 먼저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2017 년 백악관을 접수한 대안보수가 조선과 미국의 이런 이질성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앞 길에 평탄대로만 뻗어있는 미국의 입장에서, (정확하게 말해 그런 미국의 운전석에 앉게 된 트럼프 백악관의 입장에서) 

완성된 전략무기체계를 보유한 채 자기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원수처럼 대들고 있는 조선을 더이상 적국으로 방치하는 게 백해무익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조선역시 조선대로 언제까지나 원탑 초강대국 미국과 척을 지고 경제제재와 전쟁위협을 당하며 살 이유는 없었다. 

명분보다는 이익을 중시하는 트럼프 백악관과 사려깊고 판단이 빠른 노회한 조선의 전문가집단이 right time right place 에서 만나 이루어 낸 찰떡궁합은 동북아 분위기를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새 국제정세가 작동하는 변화된 조건에서 미국과 조선은 2017 년 5 월 경부터 일찌감치 비밀접촉을 시작했다. 

이 비밀접촉 과정에 대해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미국이 조선과 비밀접촉을 진행하기 위해 새로 창설한 첩보조직 KMC에 대해 

당시는 물론이고 그 첩보조직이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올해 2 월 경까지, 한국언론에서는 단 한 마디도 보도한 적이 없다. 

 

그 첩보조직의 이름과 책임자 이름이 처음 등장한 건 조선일보도 아니요 한겨레신문도 아닌 2018 년 2 월 태사랑 대한민국방이었다. 

당시 한국언론은 지난 2 월 말 그 조직의 책임자와 조선협상대표 김영철이 위커힐호텔에서 접촉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이야 앤드루 김이라는 이름을 온 세상이 다 알고 있지만, 

그때 까지만 해도 그 이름을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아 그를 소개하면서 작고한 패션디자이너 앤드루 (앙드레) 김과 혼동하지 말라는 잔소리까지 덧붙였던 기억이 난다. 

대한민국 언론이 자기나라 국정원장, 청와대 안보실장과 서울고등학교 동문선후배 관계인 미국측 공작책임자를 지난 2 월까지도 모르고 있었다면 참 놀라운 일이다.  


개인적인 사설이 길어졌는데  

어쨌든 서두에서 말한대로, 나는 지금의 조선 지도부가 미국의 새 집권세력의 의중과 국제정세의 변화된 흐름을 대체로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움직여 왔다고 본다.  

 

문제는 조선이 아닌 미국 안에 있는 것 같다. 

서로 친구가 되는 길목, 즉 종전선언과 유엔제재해제를 위한 조선측의 선물이 무엇이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 미국 내부에서 오락가락하면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은 순전히 미국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트럼프 백악관만 있는 게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강대한 국제주의 개념의 패권주의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들은 조미협상타결 조건으로 조선에게 전략무기체계 전체 리스트를 내 놓으라는 요구를 하라며 트럼프의 멱살을 붙잡고 닥달을 하고 있는 중이다. 

즉 백기항복하면 친구도 되어주고 투자도 해 주겠다는, 상대가 전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협상이 깨지다라도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으니 꿈을 깨고 좀 더 현실적인 조건을 제시해야 할 것인데 그들은 고집불통이다. (너네라면 리스트 다 주고 무기 내려놓겠니? 차리리 협상을 깨고말지)

 

큰 문제는, 

그들의 표적이 조선이라보다는 트럼프를 실각시키는데 대조선협상실패를 하나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의도가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엎친데 겹친격으로 현재 조선과 좋은 캐미컬을 유지해왔던 트럼프는 그 주변인맥이 지리멸렬하고 있는 정도를 넘어 혼자 외톨이처럼 남겨진 형국이다.  

 

지금 온 신경을 집중하고 주목해야 하는 포인트는 김정은 위원장이 언제 방남하고 어디 어디를 방문할 것인가가 아니라,  

특검수사결과발표를 앞두고 갈수록 사면초가에 몰리기만 하고 있는 트럼프가 언제까지 파상공세를 견뎌내며 대조선협상국면의 페이스를 지켜나갈 수 있을지 여부다.  

 

허송세월의 책임은 조선이 아닌 미국에게 있는데, 

시간이 조선편이 아니라는 점에 고약한 딜레마가 있다.    

 

   

 

16 Comments
필리핀 2018.12.10 10:53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답방"은 연내 불가능하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네요ㅠㅠ

근데, 작금의 남북미 삼각관계를 김진명 스타일의 소설로 한번 써보시죠?
농담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지하게 드리는 얘기입니다.,..
sarnia 2018.12.10 11:09  
아마 미국으로부터 받아갈 게 없는 방남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이 미국의 동의없이 조선에게 줄 수 있는 게 거의 없으니까요.
조선도 참 답답할 겁니다.
지금 거래처(트럼프)가 부도일보직전이라서요..
미국 대통령이란 작자가 비서실장 조차 구하지 못하는 판국입니다.
펜스 밑에서 일하던 서른 여섯살 짜리를 데려오려 했으나 그도 애들이 어리니 어쩌니 하는 온갖 핑계를 대고 고사했다고 하지요.
도대체 지금 누가 그를 자문하고 있는지도 오리무중입니다.
어이가 없지요.
강희제 2018.12.10 15:15  
사르니아라는 외국인이 우리나라가
오천년 역사를 가진 것을 잘 모르고
북한에 대하여 단편적으로만 보아 조선이라고
지칭하면서 말하는 것 같아
이에 대하여 알려주어 정보 제공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합니다.

먼저 고조선에 대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고조선(古朝鮮, 영어: Gojoseon,
기원전 2333년? ~ 기원전 108년)은 한국의
 역사상 최초의 고대 국가이다.
 본래 국호는 조선(朝鮮)이나,
 일반적으로 14세기 말 이성계(李成桂)가
 건국한 같은 이름의 왕조(조선)와의
 구분을 위해 '고조선'이라 부른다.
 문헌상의 기록에 따라 실존했던
 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관련 기록이 적고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직접적으로 고조선의 것이라
 암시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조선의 연대와
 강역·역사·문화 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일반적으로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하여 만주 및
 한반도에 있던 고대 국가라고 파악하고 있다.

국호
원래 국호는 조선(朝鮮)이며,
《삼국유사》에서는 위만이 찬탈한
조선(위만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古朝鮮)이라 불렀다. 오늘날에는
1392년에 건국된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 지칭하며,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하지 않은 채 모두
합쳐 고조선으로 본다.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고조선의 군주에
따라 둘로 나누어 단군이 다스린
조선(단군조선)을 전조선, 기자가
다스린 조선(기자조선)을 후조선으로
구분하여 불렀다. 이런 시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 전조선과
후조선이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존재하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가장 오래된 설로는
《사기집해》에 인용된 장안(張晏)의 견해로
그는 조선이 강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라
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의 어원이
숙신(肅愼)에서 나온 것이라 하고,
그 원래 명칭이 주신(珠申)이라 주장하였다.
고조선의 초기 도읍인 아사달(阿斯達)을
한역한 것이 조선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선의 글자 뜻을 그대로 해석하여
‘땅이 동쪽에 있어 아침 해가
선명하다(地在東表 朝日鮮明)’라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역사
건국
고조선의 건국은 일연(본관은 경주,
속성은 김(金)씨)이 쓴 《삼국유사》
에 최초로 등장한다.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신라계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일연은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 되므로 정확한 시기가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함께 실었다.[7]
《동국통감》〈외기〉에는 “동방은
애초에 군장이 없었는데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오니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셔 단군이라
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니
요임금 무진년이다. 처음엔 평양에
도읍하였고 나중엔 백악으로
옮겼다.”[8]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왕운기》 역시 건국 연도를
무진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에도 단군의 건국을
다루고 있으나 즉위 연도를 밝히고
있지는 않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단군 조선의
설립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고[9] 현행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들 역시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조선의
건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점을
잡아도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역사서의 건국 시점에 대한
서술이 실재와 부합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10]
2007년 교육부는 최근의 청동기
유물 발굴 결과 《삼국유사》의
건국 기록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고 보고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는
기술을 ' ~ 건국하였다'로 바꾸기로 한 바 있다.

기원전 2333년이라는 건국 연도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한 것으로
일연 스스로가 주석에 이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현대 사학계에서는 실제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조선의
강역으로 추측되는 랴오닝 성 및
한반도의 고고학 발굴 결과를
토대로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경에 청동기 시대가
본격화된다고 서술하고 있다.[12]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박광용은
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단군을 실제 인물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5차 교육과정
개편을 위한 〈교과서개편준거안〉
 작성 과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지적하였다. 1987년 확정된 이
준거안에서는 상고사에 관한
지침으로 단군을 역사적 사실로서
반영토록 하였고, 고조선은
중심지가 계속 이동함에 따라
영역도 바뀌는 ‘이동국가’가 아니라
확정된 넓은 강역을 유지하는
‘영역국가’로 기술하며 한사군의
존재는 본문에서 다루지 않고
각주로 처리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 결정 과정에는 정치권
및 언론계의 압력이 심하게
작용한 것으로 현대적 학문에
입각한 결정이 아니라 전통적
상식에 입각한 결정이었다는
비판이 있다.

고조선의 건국을 다루는 단군 신화는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 문명을
가진 외래 세력과 웅녀로 대표되는
 토착 세력의 결합을 통해 건국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으로는
조선으로 지칭되는 불특정한
소규모 지역 집단의 집합체가
초기 고조선의 사회모습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박광용은 단군 신화가
우리 역사의 귀중한 사료임에는
틀림없으나 고조선의 지배층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단군을 시조신으로 모신
이래 구전되어 오면서 수 많은
변형이 있었던 불확실한 사료로서,
제대로 밝히기 어려운 불확실한
신화적 사실을 섣불리 실재화하거나
신비화 할 경우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국수주의자 또는
복고주의자를 대량 생산할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문동석은 청동기 시대에
시작된 고조선을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24세기로 올려 잡는
것은 민족의 기원을 올려잡으려는
의도가 드러나 있다고 평가하였다.

초기
고조선이 최초로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7세기로, 이 무렵의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관자(管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전국시대에 성립된 기록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연나라의 동쪽, 바다의 북쪽에
있다고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특정한
국가를 지칭한다기보다는
요동지방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 집단을
통칭한 것으로 본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 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
집단이 존재하였는데, 이들이
큰 세력으로 통합되면서 고조선이라는
고대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통합한 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연나라와
관련된 사료인 《전국책》에서
조선이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언급된다. 적어도
이 무렵에 고조선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여 전국 시대(戰國時代)
중국의 국가와 대등한 외교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4세기 말에는 연나라와
분쟁이 일어나 고조선 측이
선제 공격을 꾀하였다가
중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중국은 종주국인
주나라가 쇠퇴하고 각 지의
제후들이 왕을 칭하고 있었는데
 연나라가 기원전 323년에
왕을 칭하자 고조선의
군주도 ‘왕’이라 칭했다고 한다.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
연나라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고조선은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광대한 영토를 상실하고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사료적 가치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받았던
위략에 따르면 연나라의 장수
진개(秦開)의 침입으로 고조선은
 2,000여 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만번한(滿潘汗)을 경계로 하게
되었고, 연나라가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지역에는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되었고 장성도 쌓았다고 한다.
이때 고조선이 상실하였다는
지역은 랴오닝 성 일대로 보이며,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이 패배로
고조선이 요동 지방을 상실하였다고 본다.

기원전 221년에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고 기원전 214년에
만리장성을 건설하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다.
그러나 직접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한 것으로 보아 표면적인
복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왕의 뒤를 이은 준왕(準王)
시기 진나라에 내란이 발생하고
뒤이어 유방과 항우가 전쟁을
벌이는 등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중국 유민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이주하였다. 기원전
202년에 중국을 통일한 전한은
연·진 시기의 장성이 멀어서
지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를 포기하고 요동의 옛
장성을 수리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위만조선
기원전 195년에 한나라가 임명한
제후인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나라 지역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위만(衛滿)은
이들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상투를
틀고 고조선의 복색을 하였다고 한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하여 박사(博士)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위만은 기원전 194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우고,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에 입성하여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조선이라고 부른다. 조선을
이어받은 위만의 출신에 대하여
여러 주장이 있는데, 과거 연나라가
정복한 고조선 지역의 주민,
즉 고조선 출신이라는 주장과
연나라 출신의 유력자라는
주장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위만의 출신을 연나라(중국인)이며
이를 중국의 식민 지배라
주장하였고 광복 후 일부 학자들은
 위만을 고조선의 유민이라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현재
대한민국의 학계에서는 위만이
고조선의 국호와 국체를
그대로 유지했다는 사실을 들어
위만의 출신이 어디이든
관계가 없다고 본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위만은
중국에서 철을 가져와
고조선에 널리 전파했다)
중국 문물(대표적인 문물 '철')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임둔
등의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는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濊君)
남려(南閭)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나라는 동방진출을
본격화하였는데, 그것은
위만조선과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양측은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는 누선장군
양복과 순체 등에게 명하여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이끌고
각각 위만조선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위산을 사신으로
보내 다시 외교적 절충을
시도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결국 전쟁이 재개되었는데,
 싸움이 장기화되면서 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이탈되었다.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진국으로 갔다. 또한 조선상
노인(朝鮮相 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 삼(尼谿相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기원전 108년에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군·임둔군·현도군·진번군의
한사군을 설치하였고 많은
고조선인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철기가
도입된 시기에 관하여 북한에서는
기원전 8∼7세기에 이미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많아서 지지 받기 어렵다. 남한에서는
대체로 위만조선 이전에 철기가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철은 기원전 8∼7세기에 이미
압록강과 두만강유역에서 생산되었으며,
연철 단계는 기원전 8∼7세기,
고온환원법의 발전된 방법은
기원전 3∼2세기에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17] 燕에서 전파된 발전된
방법 이전에 독자적인 제철기술이
함경도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만조선 시기 고조선
지역에서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된것은
사실이며, 기원전 3∼2세기에
보급이 시작되어 사회 전반적인
철제 농기구와 무기가 제작되는 등
철기문화가 사회의 발전 및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청천강 이북지역에 명도전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이후에는
세형동검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대체로
4세기경으로 보여진다.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도읍지
고조선의 도읍지는 여러 차례 이동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단군왕검이
처음에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이후 백악산아사달로 옮겨서
1천 5백 년간 나라를 다스렸으며,
이후 주나라 때 기자가
조선왕에 책봉되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 속의 수도 변천은
실제 사실로 보지 않는 것이
대한민국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70년대
이전까지 고조선의 도읍지를
랴오닝 성이라 주장하였으나,
주체사상의 강화 이후에는
오늘날의 평양시가 고조선의
도읍지라고 주장하면서 단군릉이
평양시에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사학의
입장 변화는 정치적 영향에
따른 것이라 비판된다. 한편
윤내현은 고조선의 도읍지
이동이 총 5차례라고 주장하며
그 위치를 모두 비정하는
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역사학계에서 지배적인
학설인 중심지이동설에 따르면
고조선은 초기에 랴오둥 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기원전 3세기 무렵 연나라의
침입을 받아 영토를 대거
상실하고 평양 일대로 중심지가
이동하였다고 한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인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검성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평양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중국의 랴오닝 성 지역에
있었다는 소수설도 있다.
기원전 108년 전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왕검성이 함락됨으로써
고조선이 멸망했다.
왕검성이 있던 곳에는
낙랑군이 설치되어 이후 수세기 동안
중국과 한반도의 중계무역 기지의 역할을 했다.

정치
위만조선의 관명(官名)으로는
박사(博士)·대부(大夫)·상(相)·
대신(大臣)·장군(將軍)·비왕(裨王)
등이 보인다. 이들 관직 모두의
구체적인 성격은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관직을 갖고
있으면서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지닌 자들이 있었다. 한나라에
대한 외교 정책에서 왕과 의견이
맞지 않자 휘하의 2천 호를
이끌고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이탈해 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 같은 이가 그런
예이다. 한나라와 전쟁 중 전선을
이탈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한 이계상(尼谿相) 삼(參)
등 세 명의 ‘상(相)’도 그러한 이들로
 추측되는데, 상은 일정한 세력
집단의 대표로서 중앙정부에
참여한 이들이 지닌 관직의
이름으로 여겨진다. 당시
위만조선에는 여러 명의 상이
있었는데, 이름으로 보아 다수가
고조선 인이었다. 상의 휘하에
있던 집단에 대해선 왕실의
통제력이 어느 정도 미쳤겠지만,
적어도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역계경 등의 집단적인 이탈행위가
가능했다는 점이 바로 이를 말해준다.

왕도 기본적으로는 그러한 집단들
중에서 가장 큰 집단의 장이었고,
위만조선 왕실의 경우 그 직할
집단이었던 것이다. 국가의 주요
결정은 이들 상들이 참가한 회의체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자연 왕권은 강력하지 못하였고,
중국식 제도에서 비롯된 관직명이
부분적으로 보이지만 관료 조직은
발달하지 않았으며, 정치 조직의 기본적인 틀은
자치집단들의 연맹체와 같은 것이었다.

유력한 수장 휘하에서는 촌락이
여러 개 귀속되어 있었다.
단 수장이 사적으로 지닌 우월한
경제적·군사적 힘이 이들 촌락을
규합하는 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점에서, 수장은 이미
지배계급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유력한
수장들을 통합하여 성립한 것이
위만조선이며, 위만조선의 왕권하에서
수장들은 ‘상’으로 상당한 자치권을
지닌 세력 집단을 대표하였다.
고조선의 중심을 이룬 이들
집단의 외곽에는 피복속 촌락
공동체들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구조는 삼국 초기의 정치 구조와 연관성을 지닌다.

단군왕검
단군왕검은 고조선 사회의 제주이자
군장으로, 단군은 대제사장적인
성격을 많이 담고 있으며 왕검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군주의 의미를
띠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제정일치의 지도자이다.
방언의 분포와 비교언어학적으로
살펴볼 때에도 제사장과 정치적
지도자를 함께 이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단군 신화
단군 신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이 가장 오래되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도 《단군고기》가
인용되었다. 《삼국유사》의 설명은
《고기(古記)》에 기록된 단군의
건국과 전해 내려오는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으나, 《고기》의 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단군신화의 내용은,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거하였으며, 그 아들인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왕권의 정통성과 국가의 존엄성을
수식하려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고조선의 왕은 매년
그의 조상신인 천신께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그때 베풀어진
의식은 단군 신화의 내용을 재현하는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제의에 고조선을 구성하던 모든
집단의 장들이 참여해 정치적
통합을 강화하고 결속력을 높였을
것이다. 곧 단군 신화는 고조선
당대의 정치이데올로기였고,
그 제의는 정치적 집회의 기능을
지닌 것이었다.[출처 필요]

참성단
참성단(塹星壇)은 오늘날 인천광역시
강화군 마니산 꼭대기에 있으며,
상고시대 단군이 쌓았다고 알려진
제단이다.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강화의 생김새가 천하의 요새이기
때문이며, 예로부터
마이(摩利)·혈구(穴口) 등은 하늘과
인연이 깊다고 전해온다.
또 개국신화의 등장인물인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도 마니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환웅의 권속이므로 단군이
참성단을 설치하여 하늘에 제사지낸 뜻을
짐작케 한다.
강희제 2018.12.10 15:18  
사회 및 문화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겨져 있다.
'8조법'이라는 법률이 정해져 있었다.
이 법은 권력층의 사회질서 유지
수단이었다. 그와 함께 가부장(家父長)
중심의 계급 사회로서, 사유 재산을
중히 여겼으며, 응보주의(應報主義)에
따른 형법을 지녔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현재는
그 중에서 3개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그 죄를 갚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자 하는 사람은 한 사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아 대문을 닫고 사는 일이 없었다.
모두들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서 음란하고 편벽된 행위를 하지 않았다.

당시 고조선 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로
계급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8조의 법금(法禁) 중 현재 전해지는
 3개 조항에서, 화폐 개념과 노비의 존재,
그리고 사유 재산에 대한 보호
조치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 분화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촌락에선 공동체적 관계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계층은 귀족, 촌락의
일반민, 노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가지면서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首長)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 노예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노예제 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화폐 경제의 발달,
도시의 번창과 같은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 기본적인 생산 활동을
담당한 이들은 촌락의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당시 농업이 지닌 낮은 생산력과,
가뭄이나 홍수 등에 따른
생산의 불안정성 및 철제 농기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소농(小農)
단위의 자립성을 유지할 수 없었으며,
촌락 단위로 상호 의존하여
생산과 소비생활을 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고고학적 연구
비파형동검과 탁자식 고인돌,
미송리형토기를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입증하는 고조선의
 유물로 보고 있으나, 비파형동검의
분포 및 유형에 따라 고조선이
아닌 동호의 문화에 속하는
지역도 있어 주의를 요한다.

역사서의 내용
한편 고조선의 역사는 여러
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기록 내용은 사서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아래의
사서들 중 일부는 학계에서
위서로 판단하기도 하며, 설령
진서라도 신화적 요소가 많은 경우도 있다.

삼국유사
삼국 시대의 역사가 일연(본관은
경주, 속성은 김(金)씨)이 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따르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있었는데
인간 세상을 다스리길 원해,
천부인 세 개와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에 내려와
도읍을 정해 신시라 했다.
태백산에 주를 달아 묘향산이라고 했다.

이후 환웅이 웅녀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한다.
단군왕검은 중국 요임금이 즉위하고
나서 50년 뒤인 정사년에 평양에
도읍하여 단군조선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 1500년을 다스렸다.

단군왕검이 도읍한 지 약 1500년이
지난 뒤에 은나라에서 기자(箕子)가
동래하여 임금이 되고, 단군은
신(神)이 되었다고 하니 이것이
기자조선의 시작이다. 그러나
기자조선의 존재유무와 기자조선의
성격 그리고 기자의 혈통에 관하여 논란이 많다.

사기
《사기》(史記)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기타 자료
'태원 선우씨'의 족보인 《태원선우씨세보(太原鮮于氏世譜)》
와 허목(許穆)의 《동사(東史)》에 따르면
선우씨는 기자조선의 48세의 왕과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 마한에 간 뒤의 일인)
마한의 9세의 왕을 지냈다고 하고,
<청장관전서> 에는 기자조선의 41세
왕과 8세의 왕이 기록되어 있다.

위서로 판명되고 있는 《환단고기》는
기자조선을 기술하지 않고 있고,
단군조선이 2096년간 지속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규원사화》의 1195년과
901년의 차이가 난다.

건국 연대 및 치세
일반적으로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알려졌고 단기도
그에 따르고 있으나, 사서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건국연대와
치세의 관한 기록은 다양하다.

건국 연대
고조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삼국유사》는 2가지 계통의
기록을 통해 고조선의 사적을
전하고 있다.
《위서》를 인용하여 요(堯)와
같은 시기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정확하게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현전하지 않는 미상의 문헌을 인용하여
당요 50년 경인년(기원전 2311년)을
단군의 원년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일연이 직접 주석을 통해 당요 50년은 경인년이 아니라 정사년(기원전 2284년)이라 정정하고 있다.
《제왕운기》에는 《본기》(本紀)를
인용하여 요와 같은 시기인 무진년(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고려사》 열전의 〈백문보전〉에
백문보가 공민왕에 단군 이후로 3,600년이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그 시기가 기원전 2240년 부근이 된다.
《동국통감》은 《고기》(古紀)를
인용하였는데, 그 내용은 《제왕운기》
와 거의 같다. 하지만 사론을 통해
《고기》의 기록이 틀렸다고 비판하며 요
즉위 25년인 무진년(기원전 2333년)
이라고 정정하고 있다. 《동국통감》의
저술을 전후한 시기에 고조선의 건국
연대가 무진년(기원전 2333년)으로
공인되는 양상이 보이는데,
학계에서는 요 원년 갑진년(기원전 2357년)과
 단군 원년 무진년(기원전 2333년)에서
명나라의 건국(1368년)과 조선의
건국(1392년)과의 기간이
동일하게 3725년 차이가 나도록
연대를 비정한 것으로 본다.
이를 통해 상고대 요, 단군의
즉위와 명 홍무제, 조선 태조의
즉위가 천명의 조화에 따른
것이라 미화하려는 의도인 것이다.[24]
조선 《성종실록》의 양성지
상언 내용 중에 단군 이후로
3,900년이 되었음을 주장하는데,
그 시기가 기원전 2420년이 된다.
심언광(沈彦光)은 《단군사(檀君祠)》라는
시에서 단군의 건국 연대를 요임금
갑자년(기원전 2337년)이라 기록했다.(《어촌집》 권4).
갑자년(기원전 2457년) 개기(開基)설이
있는데, 최명길의 시 등에 한마디
나오며, 그 의미는 명백치 않다.

치세
《삼국유사》는 《고기》를 인용하여,
평양성에서 다스리다가 백악산
아사달로 이주하여 1500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이후 기자에게 물려주고
장당경으로 옮겨갔다가 1908세가
되는 해에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총
통치 기간은 1900년 가량이고, 평양성
기간(미상)과 아사달 기간(1500년),
장당경 기간(미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다만 이 치세 기간은 전근대에
일반적으로 알려진 요 재위 시기와
기자의 동래 시기를 통해
추산할 수 있는 기간(약 1200년)보다
최소 300년 이상 길다는 점에서
상당한 오류를 보이고 있다.
《제왕운기》는 1028년으로 기록되었으며,
《본기(本紀)》에는 1038년이라 인용하였다.
《제왕운기》에는 시점과 끝점의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실제로 계산하면 1048년이 된다.
1028년, 1038년은 착오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조선《세종실록》 75권, 18년 12월 26일
정해 4번째 기사에서 전 판한성부사
유사눌(柳思訥)이 《세년가》에는
단군이 나라를 누린 것은 1048년이었다고
주장한 내용이 기록되었다.
《응제시주》는 단군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1000년 이상이며,
단군의 수명은 1048세라고 했다.
《역대세년가》는 단군의 수명을 1048세라고 했다.
《동국통감》은 1048년이 단군의
수명이 아니라 그 후손들이 역대로 다스린 햇수라고 기록했다.
《동사강목》은 단군의 수명을
 1048세라고 했다.
《기년아람》은 단군의 수명은
1048세 혹은 1908세라고 했다.
《여암전서》는 '무진년에서
을미년에 이르기까지 1048년인데, 이는 재위 년수'라고 했다.
《규원사화》에는 1205년으로 기록하였다.<출처 : 어느 백과사전 참조>

더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나에게 묻지 말고 공부하기 바람. 공부해서 남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임.
호루스 2018.12.10 23:00  
조선이라고 쓴 이유는 북한의 정식 명칭이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라서 그럴겁니다.
줄여서 조선이죠. 우린 남한 북한, 북한은 북조선 남조선 뭐 이렇게 퉁치긴 합니다만...
Pole™ 2018.12.10 14:36  
그러다 김정은이 열받아서 어차피 죽을거 혼자서는 안 죽는다 같이 죽자면서 핵을 미국에 쏘면 어떻게 되는건가요?
요새 자살하는 사람도 많은데 김정은이 우울증이라도 걸릴까봐 염려되네요
국제주의적 패권주의자들이 바라는게 그걸까요? 왜냐면 그 패권주의자들 배후에 전범세력이 있기 때문이죠
예전에 전쟁을 준비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니까 무슨 일루미니티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비웃은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전쟁은 늘 오판으로 촉발되는거잖아요 뭣보다 일본이 간절히 전쟁을 원하고 있구요
그나저나 주한미군 철수는 안할것 같은데요
sarnia 2018.12.10 22:05  
아침에 일어나보니 (한국시간 10 일 밤) 김정은 위원장 답방 무산 기사가 올라와 있군요.
청와대는 그 이유를 경호문제, 답방성과, 북미관계(조마관계) 라고 순서를 나열했지만 그 순서가 잘못됐습니다. 가장 핵심 이유는 조미관계고, 답방성과는 조미관계 난항에 당연히 따라올 수 밖에 없는 부속문제일 뿐 입니다. 경호문제는 그 두 가지와 병렬에 놓을 수 없는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지요. 청와대 관계자의 저런 식의 설명은 듣는 사람들을 아주 기분나쁘게 만드는 (듣는 사람을 졸로보고 무엇인가 속이려드는 듯한) 좋지 않은 설명방식인 것 같습니다.

트럼프는 단순한 사람이지만 (그나저나 이 친구 백악관에서 쫒겨나 감옥갈지도 모르게 생겼네요) 미국의 반북주류는 이념집단입니다. 그들은 조선의 핵과 체제 문제를 동시에 또는 순차적으로 타격하려 할 것 입니다. 조선이 전략무기체계를 나사 하나 볼트 하나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한미국군이 철수하는지 안하는지는 두고 볼까요 ^^
지난 주에 한국 국방장관이 전작권과 관련해 아주 노골적인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내년부터 인수추진한다고 구체적인 일정까지 발표했어요. 물론 미국의 동의를 받은 거구요. 아직 공론화되고 있지는 않은데, 현지주둔 미국군이 지휘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지역에서 병력을 철수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특히 정보자산을 전적으로 주한미국군에 의존하고 있는 있는 한국군이 거꾸로 주한미국군을 지휘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미국의 입장에서도 이제는 주한미국군이 그 전략적 가치를 상실해 가고 있는 애물단지고, 이들이 코리아반도에서 물러가는 것은 장기적으로 한국군이 홀로 바로 서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 입니다.
2018.12.10 22:37  
오랜만의 싸르니아님의 조미 관계 분석글 반갑습니다.

트럼프가 미국에서 몰리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사실상의 여론 국가인 미국에서 트럼프의 탄핵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간 선거에서의 팽팽한 결과는 사실상 트럼프에 대한 호불호가 팽팽히 맞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만약 탄핵이 추진된다면 그 결과에 따라 (탄핵을 추진한)민주당은 당운을 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싸르니아님의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트럼프의 통큰 결단을 그 주위 세력들이 막고 있고 이런 힘겨루기가 지속되면서 조미 간의 대화가 지지부진 한것 같습니다.

하지만 강경파라 불리는 존 볼튼이 제재 해제 가능성을 내비치는 가운데, 앤드루 김은 지닌 12월 3일 판문점 회담을 통해 제재 해제가 어떤 구체적인 선물인지까지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이라는 것이 조선의 양에 차지 않는 것이어서 이러한 교착 상태가 좀 더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은 결코 트럼프에게 유리하지 않습니다. 노벨 평화상 추천 마감이 2월이라는데 그는 그때까지 2차 조미정상회담을 마무리 짓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어놓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2019년 10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면서 2020년 본격적인 재선 가도에 시동을 걸고 싶어하겠지요.

트럼프가 어떤 정치력으로 이 교착 국면을 타개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입지를 가져갈지 나름 기대가 됩니다. 모든 언론은 지금 조선이 몸달아한다고 써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협상을 요청하는 쪽은 미국이고 튕기는 쪽은 조선입니다.

문재인 정부도 남북 축이 조미 축의 하위 종속 변수라는 것을 잘 파악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조미 축이 돌아야 남북 축이 돌고 문재인 정부는 그속에서 훌륭한 중재자라는 타이틀을 다시 공고히 하고 이를 국내 정치로 끌고들어오겠지요.
호루스 2018.12.10 23:18  
사르니아님 의견은 항상 잘 듣고 있습니다.
적어도 10년안에 주한미군 철수는 없다. 라는게 제 생각이고(아마 이걸로 얘기 나눈게 1년 지나지 않았나요? 검색해봐야겠군요.) 그럼 9년 남았네요.

한가지 질문 있습니다.

전작권을 회수한다는건 말 그대로 줬던걸 도로 돌려받는거죠. 결국 이 의미는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권입니다. 미군은 그냥 미군이 지휘하는거죠. 어떻게 미군이 한국군의 지휘를 받는다고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당연히 상당기간 정보를 의존할겁니다. 쉽게 주지도 않을거고, 쉽게 받기도 어렵겠죠.

다시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돌아와서,
그 이외의 이해타산에 따라 협상 조정하는데 몇 년, 물리적으로 준비하고 떠나는데 몇 년, 10년으론 부족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에도 논한 적이 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미군은 현재 대중국포위망을 만드느라 동분서주죠. 북한 해결된다고 대중국포위망으로서 한국의 가치가 그리 쉽게 비용대비 수익없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으로 빠져나가면 한반도를 중국 앞마당으로 인정하는건데, 지금껏 한국에 쏟아부은 돈과 인력이 얼만데 그걸 버립니까? 비용이 현저히 부담되면 모를까 계속 비용 떠넘기기 하고 있는데 말이죠.

북미협상 된다쳐도 북한을 파트너로 삼기엔 경험도 신뢰도 없는 사이이고. 결국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현재의 북한핵을 인정하고 미래핵 생산만 못하는 수준의 타결로 북미회담이 끝나고, 미군 빼는 순간 동북아는 핵러쉬가 일본 대만 한국에서 거의 동시에 벌어질테고(북한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보고) 이걸 국제 제재로 해결하는건 거의 불가능해지죠.

이런 통박 다 두드리면 미군 뺴는건 당파를 초월해서 미국에 별로 재미없는 장사입니다.
10년 내로 라는 근일에는 절대 불가 같습니다.(기준일은 오늘이 아니라 과거 사르니아 님 글에 미군 철수가 쉽게 안된다는 제 댓글이 있는 날입니다.) 아마 높은 확률로 사르니아님이나 저나 그때까지 생존할 것 같은데 정말 내기라도 하고 싶군요.
2018.12.11 01:19  
제 의견이라도 조금 보태자면요.

전작권 회수는 두가지 경우의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한미연합사 유지, 하나는 한미연합사 해체.

한미연합사가 유지되는 경우는 주한미군이 한미연합사령관(현재 미군, 전작권 이관 시 한국군)의 지휘 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타국의 지휘 아래 미군이 놓이게 되는 겁니다.현재 이렇게 논의가 진행 중이라는 기사도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67537.html

한미연합사가 해체 된다면 한반도 남부에 각기 다른 두개의 지휘체계를 갖춘 군대가 공존하게 되는 겁니다. 상호 긴밀히 교류하고 전시가 된다면 새로운 통합 체계가 생길지도 모릅니다만 이는 바로 미군 철수로 이어진다는 의심을 받게 되겠죠.

일본이 현재 그런 형태로 미군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자위대의 작전지휘권은 자위대가 갖고 있습니다만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므로 사실 전시작전권이라는 것이 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일본 열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유일한 합법 군대이고 미군은 미 태평양사령부가 작전권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상 미군이 전쟁이 발발할 경우 작전권을 행사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사실상 핵무장 국가입니다. 그리고 ICBM 보유국이기도 합니다. 일본이 보유하고 있는 엄청난 양의 플로토늅은 핵발전소의 연료로만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전세계에서 수입한 플로토늄은 언제라도 핵무기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적인 로켓 체계를 갖추고 있기에 ICBM으로의 전용 또한 일본 입장에서는 어렵지 않습니다.

미국도 이를 용인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플로토늄을 수입할 때 앞장서서 지원하고 지지한 나라가 미국입니다. 미국은 언제든지 일본의 핵보유를 용인할 준비가 되어있고 실제로 용인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북이 핵 강대국이 되었는데 주한미군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미군 주둔으로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전술적 이익이 하나도 없는데 주둔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트럼프는 이미 몇차례나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얘기한 전적도 있고 말입니다.

조미 정상회담 후 트럼프는 "나는 우리 병력을 빼오고 싶다,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절한 시기에 할 것이다(I will...)
sarnia 2018.12.11 06:02  
두 분의 고견 고맙습니다.

주한미국군 철수여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결정하는데, 이미 그 수장인 대통령의 입을 통해 그 의사가 확정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은 추론의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본토지휘부의 이 군대에 대한 전략가치평가는 종료된 것으로 보이나 내부논쟁이 끝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결심했다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 개인의 고집이나 결단이라고 볼 수는 없고, 이 군대의 철수 혹은 대폭축소를 지지하는 대안우파 어드바이저들의 논리에 설득되었다고 보는 게 옳습니다. 그 시기를 확정할 수는 없으나, 아마도 전작권회수 시기와 맞물려 진행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주한미국군 철수시기를 전작권회수시기와 일치시키는 이유는 며칠 전 정경두 국방부 장관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선 한국정부가 전작권 조기회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는 것은 만시지탄이라 할만큼 반갑고 좋은 일 입니다.

근데 이 자리에서 그는 좀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내년 전작권회수에 대비하여 한국군이 한미연합전력을 주도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말을 한 것 입니다. 이 말은 한미연합사를 해체하지 않은 조건에서 한국군 대장이 한미연합사 사령관을 맡아 한미연합사에 편제되어 있는 주한미국군을 통제하겠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이 말은 군사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기초지식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혀 납득이 안되는 소리라는 것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1941 년 12 월 8 일 이후 지금까지 77 년 3 일동안 거의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 세계 곳곳에서 실전을 벌여 온 전쟁국가의 전투병력을 1950 년 6 월 25 일부터 1950 년 7 월 14 일까지 단 19 일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전쟁(전투가 아니라)을 기획하고 지휘해 본 경험이 전무한 나라의 장성이 통제할 수 있느냐 하는 미국의 자존심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정찰첩보위성과 첨단정찰기, 한미연합사보다 상위부대인 태평양사령부의 직접 통제를 받는 정보여단 등을 지휘통제해 본 경험은 커녕 보유하지도 않고 있는 군대의 수장이 그것을 보유하고 있는 군대를 지휘한다는 게 우선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경두 장관의 저 말을 정치적 발언으로 해석했습니다. 주한미국군철수라는 말만 나오면 사시나무 떨듯 덜덜 떨어대는 일부 국민들을 안심시키고자 한미연합사라는 말을 끼워넣다 보니 저런 식으로 발언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본 것 입니다. 

만일 미국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해 트럼프와 그의 어드바이저들이 조선의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최종수단으로 전쟁을 도발하기로 결심하고 있다면 그들은 일찌감치 작년에 주한미국군의 대규모 육상병력과 그 가족들이 오히려 미국에게 크나큰 짐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렸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밥 우드워드 기자가 쓴 Fear. Trump in White House 를 읽어보면 그들이 지난 2017 년 초 코리아반도에서의 전쟁도발과 관련해 어떤 수작을 부리고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가 나오는데 그 자들의 솔직한 속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현재 백악관 오벌오피스에 앉아있는 작자는 한국국민들의 생명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지 않는 작자일 뿐만 아니라 그에게 조언하고 있는 대안우파의 어드바이저들 역시 전통적 보수 또는 리버럴의 주류와는 달리 한국의 전략적가치에 대해 낮은 평가를 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방어개념의 육상병력 철수를 망설일 이유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정보에 의한 판단이 아니라 제 개인적 추론이니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몇 달 전 김정은 위원장의 방남 시기를 잘못 예측했듯이 말이지요.
다람쥐 2018.12.11 04:41  
요즘 자주 생각이 드는것이!
무식은 죄과 아닐지라도,
무지막지안 무식을 떠버리고 다니는 것이 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전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내부 배신의 역사죠.
자랑거리가 있나요?

조선시대 성군이라는 세종대왕 이막동 씨 께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악법 2가지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는 '종노법' 이라는 전국민 노예만들기 법이고
또하나는 '부민고발금지법' 이라는 탐관오리 양성법이죠.

나라를 팔아먹고 큰소리 떵떵거리며 아직도 살아갈 수 있는
지구상 유일한 나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도 이만큼 살아가는 것은 한국인 특유의 욕심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한국인들은 유난히 욕심이 많습니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 란 속담을 보듯이
남 잘된 꼴을 보지 못하는 못됀 심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이죠.

잘못된 것은 고쳐야지
무얼 잘 한게 있다고 역사를 나열하며 자랑스러워 하는지..........

어릴때,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렸하고........
사계절 뚜렸해봐야 개고생이고 살기 힘들다는 걸 동남아만 가봐도 알수 있죠.

무얼 잘한 것이 있다고 배척을 합니까?
받아들이지 못하면 망하는 것이 그동안 보여준 역사에서 알수 있습니다.
제발 자신의 편파적인 지식을 가지고
편협하게 살지 말자고요.
대원군처럼 쇄국 할 것인지요?
고이면 썩씁니다!!!
sarnia 2018.12.11 06:42  
좋은 말씀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막동 선생이 사대부 계급의 성군이었던 것만큼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개나 걸이나 그들의 요구를 거의 다 들어주었으니 말이죠.
당시 전체 인구의 10 퍼센트 미만이었던 이 귀족계급은 모르긴몰라도 군역과 납세의 의무를 지지않았던 인류역사상 거의 유일한 귀족계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국가주의자는 아니지만, 어찌됐든 국가공동체의 가치와 의미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 가치와 의미를 미래에 두는 나라가 비교적 건강하게 발전하는 게 대부분의 사례라는 것을 저 분이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가치와 의미를 자꾸 과거에만 두려고 고집을 부리다보면 그동안의 상식과 사실이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인지부조화에 스스로 분노하게 될 뿐이겠지요.
과거란 현재의 거울로 삼아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지, 신격화된 영웅을 만들어놓거나 자화자찬이나 하라고 반추하는 게 아닌데 말이죠.
다람쥐 2018.12.11 09:09  
제가 좋아했던 백성들을 위했다는 세종대왕님께서
'종노법' 이라는 전무후무 한 전국민 노예만들기 법을 만들었다는 말을
사르니아 님의 글을 보고 난 후 알고나서, 역사에 대해서 많이 읽어봤습니다.
그 후 맨붕이 오래 갔습니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왕권 강화를 위해 만들었다고 이해 했지만,
그렇게 똑똑한 분이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을리 만무하니
참으로 어떻 마음으로 만들었는지 생각하기도 싫더군요.

그보다 더한 악법인 '부민고발금지법!'
남원 사는 사람은, 남원 사또가 나쁜짓을 해도, 남원 사또를 고발하면,
절때 안된다는 말도 안되는 법!
이러니 전국에 탐관오리가 양성 될 수 밖에 없었던거죠.
이법도 그 넘의 양반과 사대부(양반중 4품 이상 고위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희대의 멍청이라고 할 수 밖에 없죠.
아무튼, 2가지 악법 때문에 조선이란 나라는 시궁창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 백성들은 정말 순하고 착했죠.
(일부 같은 민족을 등쳐먹는 것들 빼고요)
지금도 그렇지만......
강희제 2018.12.11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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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 2018.12.1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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