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과 노무현(문재인은 노무현의 길을 걷지 말라)
노무현을 처음 만난 것은 1987년 6월 서면 거리에서였다. 대열의 가장 앞에 서있던 그의 직함은 국본(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집행위원장이었다. 나중에 들어서 알았지만 경찰은 그를 일부러 체포하지 않았다. 그만큼 지랄맞은 사람이었다.
그는 1988년 부산 동구에서 김영삼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면서 정치권에 데뷰한다. 당시 상대는 허삼수, 5공 정권의 핵심 실세였다. 부산 동구의 입후보자는 민정당 국회의원 허삼수, 신민당 국회의원 한석봉, 통일민주당의 노무현이었다. 허삼수의 당선은 따논 당상이었고 2,3위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지만 한석봉의원이 노무현 지지를 선언하고 단일화에 합의하면서 상황은 바뀐다. 하지만 투표 전날 유세에서 만나본 노무현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며 한석봉과 함께 무대에 선 노무현을 보았지만 나는 그가 당선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무현을 찍은 부산 동구 구민들도 나처럼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노무현은 당선되었고 역대 가장 유명한 초선 의원이 되었다. 전두환을 향해 자신의 명패를 던지기도 하고 의원직 사퇴서를 던지기도 하며 좌충우돌 임기를 마쳤지만 날마다 약수터, 목욕탕, 시장을 돌았던 허삼수에게 1992년 총선에서 패하고 만다. 김영삼의 3당 합당을 반대하며 따라가지 않았던 탓이 가장 컸을 것이다.
그 이후 당선보다는 낙선을 더 많이 한 정치인으로 지역감정에 대항해 싸우는 정치인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계속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최초의 팬클럽을 가진 정치인이 되었다. 노사모라는.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이인제가 민주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노무현은 대선에 대한 도전장을 던지게 된다. 이인제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던 노무현은 이인제가 대통령이 되는 건 참을 수 없다며 출마 동기가 이인제에 대한 반감때문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2002년 3월 지지율 3%미만 지지 국회의원 천정배 한사람이었던 노무현은 국민경선에서 광주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다. 그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최강의 야당 후보 이회창을 꺽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의 당선이 정해지고 여의도에서 그는 노사모 앞에 섰다. 자 이제 제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노사모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감시! 감시! 감시! 그렇게 노사모는 외쳤다. 하지만 노무현은 감시를 하지말고 무조건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해도 지지해달라고. 노사모였던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위화감을 느꼈다. 뭔가 어긋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난 3년 뒤 2005년 거리에서 시위를 하던 농민 어르신 두명이 경찰에게 두들겨 맞아 돌아가셨다. 그분들의 이름은 전용철, 홍덕표. 노무현 정권의 국가인권위원회는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두 분이 돌아가셨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11월에 중순에 돌아가신 그분들에 대해 당시 대통령 노무현이 사과를 하기까지는 한달이 넘게 걸렸다. 그해 12월 27일 노무현은 기자회견을 열고 사과를 했지만 전용철, 홍덕표를 때려 죽인 경찰은 아무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 1991년 노태우 군사정권에서 강경대를 때려죽인 전경은 징역형을 선고 받았고, 2015년 박근혜 정권에서 물대포로 백남기 농민을 죽인 경찰은 기소되었지만 말이다.
그보다 더한 것은 집회를 하러가는 노동자 농민을 가로막은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집회를 하러가는 노동자 농민을 톨게이트에서 가로막았다. 경찰들이 톨게이트 통과를 저지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한 불법이었지만 노무현 정권의 경찰은 거리낌이 없었다.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41844
또한 2007년에 열린 노동자 집회를 금지 통고하면서 원천봉쇄했다. 1992년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래 매년 열렸던 전국 노동자 대회를 금지하고 원천봉쇄한 것은 노무현정권이 처음이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86319
이외에도 노무현은 한미FTA, 대연정 제안,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이학수 선배 등등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없는 많은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그때 소위 민주민족 진영에서는 이러한 정책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지만 보수 세력의 강력한 저항과 함께 노사모로 대표되는 친노무현 세력에게도 저항을 받으며 투쟁 동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인해 노무현을 이전 군사정권 독재자 보다도 더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다. 차라리 이회창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힘을 모을 수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가 앞장서고 당시 한나라당이 뒤를 받치니 역학구도가 확연히 저쪽으로 기울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는 개인적으로 큰 기대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남북 화해 모드에 문재인 대통령이 한축을 지탱하고 있는 것을 보며 그동안 가져왔던 의구심을 조금은 지울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 5월 25일 최저임금법을 개악하는 최저임금법 개정안이 상임위를 통과했고 결국 28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문재인은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원으로 인상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당선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최저임금을 깍는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개정된 법에 따라, 최저 임금이 인상되어도 그 혜택을 보지못하는 사람은 그동안 상여금과 점심 식대, 교통비 등 복지 수당을 받아왔던 노동자들이다. 이 노동자들은 주로 대기업의 생산직들이다. 노조가 없는 대기업이나 노조가 약한 대기업, 중견 기업에서 일하는 생산직들이 최저 임금 인상의 혜택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동안 최저임금에 포함되지 않았던 상여금, 점심 식대, 교통비 등이 최저임금에 포함되면서 최저임금은 오르는데 월급은 제자리이고 오히려 줄어드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게 되었다.
최저 임금이 올해 17% 가까이 오르면서 이슈가 되었던 것은 자영업자들이다. 최저임금대로 알바들에게 급여를 지급하면 자신이 손에 쥐는 돈이 바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최저임금 인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자영업자들이며 그들의 손해를 줄이기 위해 여러가지 방안들을 강구해 왔었다. 하지만 이번에 개정된 최저임금법은 자영업자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상여금을 줄 수 있는 기업들이 모든 혜택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최저임금법을 개악해놓고서 정부와 청와대는 갖은 변명과 요설로 월급이 줄어드는 사람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28일 하루 한시적인 총파업을 벌였고 정부와의 모든 대화 테이블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국노총도 정부와의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때에 문재인을 지지하는 소위 문파라는 이들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공격하고 있다. 사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이번 최저임금법 개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은 최저임금법이 개악되든 없어지든 간에 자기가 받는 월급은 변하지 않는 고임금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과는 별개로 문재인 정부와 각을 세운다는 이유만으로 문파들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고 있다.
거기가 더해 문재인은 자신의 공약이었던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폐기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8060186357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100&key=20180601.99099000192
이러한 이슈가 남북, 북미 간의 큼지막한 사안에 묻혀 희석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지 정확히 1년만에 우회전이 시작되었다. 그의 남은 임기는 앞으로 4년, 어떻게 그 임기를 마칠지 걱정이 된다. 문재인은 노무현과는 확실히 다른 개성을 지닌 정치인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권이 했던 그 길을 따라간다면 그는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문재인이 성공한 대통령으로서 자연인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