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살인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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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살인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sarnia 21 786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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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집권 노동당 청소년캠프에서 자동소총을 난사해 85 (추정)을 학살한 범인 Anders Behring Breivik 은 보수 기독교인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우 침착하고 차분하게 천천히 걸어가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차례로 죽이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들에게는 자동소총대신 권총으로 바꾸어 쥐고 그들의 머리를 향해 조준 발사했다.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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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미친놈같지도 않았고 당황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조차 없었다. 경찰복장 차림의 살인자는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는 성직자 같이 확신해 차 있는 표정과 자세로 청소년들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도륙했다.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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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 소녀는 이런 말을 했다.


 


미국에서나 벌어지는 줄 알고 있었던 일이 내 나라 (노르웨이)에서 벌어졌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 열 아홉 살짜리 소녀의 <미국에서나>라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단순하게 <미국이 총기살인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소녀의 이 발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타자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 발산하기를 좋아하는 <원시문명>이 횡행하는 나라>라는 북유럽인들 나름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후반부 고백에는 이번 사건으로 그 노르웨이 소녀가 가져왔던 자기가 사는 나라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자괴감이 담겨있다.         


 


용의자가 체포되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그의 기록들이 공개되자 언론은 <Anders>를 가리켜 기독교 근본주의자 (Christian fundamentalist) 나 극우 인종주의자 (far-right wing racist)라고 불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나 백인 우월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는 사상가가 아니다. 평소에는 그저 컴퓨터게임이나 즐기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에 쌓여온 비기독교적 문화-종교현상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감을 언제든지 폭력적 돌발행동으로 치환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평범한 보수 기독교인이었다. 도대체 평범한 한 인간의 내면에 밑도 끝도 없는 증오를 차곡차곡 쌓아준 외부의 사상과 문화적 환경은 무엇이었을까?


 


증오의 본질을 쉽게 요약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두려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열등감이다. 그런데 두려움과 열등감은 감정이지 이념이 아니다. 감정적 증오란 일시적으로 폭발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동소총을 마구 난사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평온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차분하고 침착하게 학살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의 증오감을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신념화해 준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 무엇인가에는 정치적 이념도 있을 수 있겠고 개똥철학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강력한 그 무엇인가는 삐뚤어진 <종교적 신념>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다.


 


학살자 <Andres>는 극우 인종주의자였다. 그가 노르웨이에서 가장 증오하는 집단은 리버럴한 대다수 노르웨이 국민들이고, 그 대표적인 기구가 다문화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집권 노동당 정부다. 그래서 그는 그 노르웨이 집권당이 주최하는 청소년 정치집회를 목표물로 삼았다. 도대체 그 反다문화주의와 인종주의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서구 인종주의를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젠가 언급했지만 반유대주의 (Anti-Semitism) 는 두 가지 맥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강한 종교적 결집력에 대한 소외의식에서 비롯된 백인 주류(majority) 의 집단적 반발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집단이 가지는 뛰어난 지적 재능에 대한 인종적 열등감의 소산이다. 전자는 고대시대부터 있어왔고 후자는 주로 18 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과학과 경제 분야에서 유대인들의 활약과 부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러프하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반유대주의와 함께 서구 인종주의를 이끌어 온 쌍두마차의 또 다른 한 축은 보수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신관과 폐쇄적 구원론이다. 20 세기까지 서구를 지배해왔던 전통적 기독교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과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매우 수상쩍은 사상을 가르쳐왔다. <인류사상사>에 존재하는 최대의 불가사의가 있다면 이렇게 이해가 안되고 논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사상이 한 종교의 주류 사상으로 무려 2000 년을 지탱해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 사내가 전 인류의 죄 때문에 대신 죽었으며 그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음으로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의미다. 놀라운 것은 그 유대인 사내는 이 세상에 실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사복음서 이외에는 그 기록조차 변변치 않다는 것인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예수의 부활, 그리고 대속 (대신 속죄)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설파한 또 다른 유대인 사내 바울은 예수를 구경조차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내가 <전통 기독교 예수 구원론>의 핵심인 요한복음 14 6 절에 나오는 <>라는 의미가 예수가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말로서의 <>가 아니라 凡我, 즉 인간 일반의 자아로서의 <>라는 개념으로 썼을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예수가 한 말이 아니라 후대에 가필된 문장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단다.           


 


암튼 이런 교리는 그 자체로 폐쇄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소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에 공존을 위한 타협이란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사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Christian Identity 같은 극우 종교단체가 인종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서해석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보수 기독교의 <전통적 신관과 구원론> 그 자체가 Christian Identity 같은 극우 기독교단체와 <Andres> 같은 기형적 테러리스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종교교리적 토양을 제공해 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는 변화해야 한다.


 


아니 사실 변하고 있는데 가만 보면 대한민국 기독교만 깜깜 무소식인 것도 같다. 


 


하나의 참고사항으로, 기독교인들이1945 년 나그함마디에서 새로 발견된 문서들과 1947 년부터 10 년 간에 걸쳐 사해 (Dead Sea) 북서쪽 해변 11 개 동굴에서 발견된 약 900 여 편에 달하는 히브리 성서를 포함한 사해사본을 잘 연구하면 기원후 325 년 경 로마 황제권력과 종교권력의 수상쩍은 야심과 야합에 의해 조립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사상에서 벗어난 획기적인 새 기독교의 새 패러다임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sarnia 2 년 전쯤 나그함마디 문서 중의 하나인 The Gospel of Thomas 번역과 해설을 읽으면서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문서는 나그함마디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 아니라 19 세기 나그함마디에서 북쪽으로 250 km 떨어진 곳에서 그리스어로 된 파피루스 두루말이형태로 그 일부가 발견됐다고 한다.)


 


예전에 sarnia 는 기독교에 대해 참 답답해 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지만 경전 어디를 봐도 사랑이 강조된 이야기는 별로 없고 <맹신>에 대한 강요만이 판쓸이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딱 한군데, 고린도 전서 13 장이 예외이기는 한데 sarnia는 혹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고린도 전서 13 장이 <낙하산>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나머지는 답답한 이야기들 천지다. 성경 구절들에 생명이 있다면 고린도 전서 13 장은 다른 장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예전에 sarnia 가 기독교에 대해 답답해했다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가령 이런 것이다. 


 


아래는 사도바울의 옥중 서신으로 알려진 (sarnia 는 그렇게 들었다) 빌립보서 3 8 절이다.        


 


“Yet indeed I also count all things loss for the excellence of the knowledge of Christ Jesus my Lord, for whom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as rubbish, that I may gain Christ.”


 


sarnia 는 목사님의 외손자이므로 중학교 2 학년 때부터 이 구절을 읽었다. 성경읽기를 중시하시는 모친의 뜻을 받을어 성경을 읽었고, 영어책 읽기를 중시하시는 선친의 뜻을 받들어 영어 성경으로 읽었다.


 


빌립보서 3 8 절을 풀어 말하자면,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지식인데, 이 가장 높은 지식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잃어도 무방하며 다른 것들, 즉 세상 지식이란 허튼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구절의 주장이다. 어떤 성경에서는 <허튼소리>라는 의미의 rubbish- 쓰레기라는 의미도 있지만- <배설물>이라고 감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암튼 나는 영어고 한글이고 이 소리가 뭔 소리인지 수 십 년 동안이나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철이 들어 생각해 보니 내가 문장 이해력이 부족해서 이 구절을 이해 못했던 것이 아니고 이 문장이 원래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진리란 합리성은 둘째치고 우선 보편성이 있어야 그 온전함을 인정 받을 수 있다. 누구에겐가는 전혀 설득도 이해도 안 되는데 다른 누구에겐가는 맹신과 광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 <진리>라는 것은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sarnia 는 오늘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노르웨이에서 이런 종류의 극우기독교 광신자의 무지막지한 증오범죄가 일어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어느 노르웨이 소녀가 <미국에서나>라고 말한 그 미국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대규모 테러가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내가 알고 있기로 가장 최근의 대규모 테러사건은 1995 Timothy McVeigh 가 일으킨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 폭파사건이다. 물론 길가던 동성애자를 붙잡아 린치를 가한다던가 낙태 시술을 하는 산부인과 클리닉에 사제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은 심심하지 않게 발생한다. 


 


근데 만일 오늘 대한민국의 인구 중 약 10 퍼센트인 500 만 명이 무슬림 이민자들이었다고 가정하면 전체 기독교 인구의 90 퍼센트 이상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그 나라에서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상상만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다.       


 


남의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2011. 07.23 21:00 (MST) sarnia


21 Comments
세일러 2011.07.25 01:09  
기독교는 변화해야 한다는 명제에는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그러나 저는 좀더 나아가서 종교자체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고 싶네요. 인류가 사는 곳이 좀 더 평화로운 곳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도킨스가 그렇게 집요하게 종교를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저는 도킨스를 지지합니다.

미국에 비해 북유럽사람들이 갖는 문화적 우월의식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다시금 편견에 대한 문제를 꺼내지 않을 수 없네요. sarnia님이 모든 종류의 편견을 경계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위의 글에 많은 편견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특히 "유대인의 뛰어난 지적능력"에 대한 서구사회의 열등감이라는 대목은 편견이라고 봅니다.

다위니즘이 핍박받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나치의 유대인 인종청소에 논리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이용되었기에, 지식인 사회에서 다위니즘을 경계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종류의 편견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고, 편견을 경계하는데요, 사실 편견은 존재할 수 밖에 없고, 또 자연스런 현상이라 생각합니다.

너무 모든 종류의 편견을 심하게 경계하실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거구요, 아무리 경계하려 해도, sarnia님의 글에서 나타나다시피, 유대인이나 북유럽문화에 대한 편견 같은 것은 자연스레 나타날 수 밖에 없구요...(딱히 sarnia님의 편견이라기 보다는 보편적 편견..)
sarnia 2011.07.25 06:36  
종교란 문화현상들 중 하나입니다. 모든 문화현상에는 광신적 요소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종교 정치는 물론이고 대중음악이나 스포츠에 조차 광신적 요소가 발현됩니다. 다만 <지속적 확신>을 근거로 죄책감 없이 자행되는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종교적 광신이 정치적 광신을 비롯한 다른 부분들에 비해 그 해악과 폐해의 정도가 깊고 광범위하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류의 탄생과 함께 그 역사를 같이해 온 문화현상으로서의 종교 자체가 아니라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부적합한 권위와 권력에 관한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의 부적합한 권위와 권력에는 사회에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뿐 아니라, 반과학적인 교리를 권역 밖에 존재하는 일반사회에 강요하는 행위와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공격적 선교-전도 행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는 종교적 광신으로부터 이성적 준거들을 지켜내는데 공을 세운 과학자이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기독교 근본주의나 복음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부적합한 교리나 신앙의 문제들과 논쟁하는 데는 유능한 패널이 아닙니다. 종교적 fundamentalist 들이 두려워하는 상대는 도킨스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해당 종교의 신학과 종교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 내부의 liberalists 일 것 입니다. 도킨스는 근본주의자들과 싸울 수는 있으되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기독교 내부의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근본주의의 뿌리를 정교한 논리들을 동원하여 송두리째 뒤 흔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문에서 <기독교는 변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이 명제는 <교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로 사용했습니다. 서구 기독교는 더 이상 Christianity 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게 어려워 질 만큼 그 패러다임이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이건 좀 설명이 필鄂祁� 바울 시대 이후 거의 20 세기 후반까지 2000 년 동안 기독교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犬� 부활과 같은 초자연적인 신화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구원론>에 초점을 맞춘 교리가 근간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 세기 중반쯤부터 빈곤이라든가 정치적 탄압에 대한 저항 여성문제 세계화 낙태 환경 문제들을 다루는 신학이 등장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이 개인의 <구원> 따위가 아니라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좀 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테제이어야 한다는 통찰을 갖게 되지요. 요즘은 이런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깨달음-enlightenment->를 중심으로 한 상당히 철학적인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아주 도식적으로 축약하면 그렇다는 말이고,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 설명될 주제는 물론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아직 첫 번째 유형에 매몰되어 있다시피 한데, 문제는 이런 유형의 폐쇄적이고도 배타적인 교리가 20 세기 이후 종교 문화간 이동과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시대에는 더 이상 <좋은 기능>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 입니다. 노르웨이 사건은 서구 기독교가 가지고 있었던 과거 잔재의 부작용 중 하나일 것 입니다. 잔재라고 표현한 이유는 <첫 번째 유형의 신앙>이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는 더 이상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한 것 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다를 것 입니다. 서구에 남아있는 <과거의 잔재>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현실적 주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이 조용한 이유는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비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충돌을 일으킬만한 사회적 대상이 아직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대한민국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에 필적할만한 또 다른 배타적인 종교문화가 확산되면 (근본주의 이슬람 같은) 대한민국은 세계 그 어느 나라 못지 않은 폭력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불교가 있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 한국의 불교는 적어도 교리적으로는 그렇게 배타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본문은 노르웨이 총기난사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전통적 교리 자체에 대한 비판만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바로 대한민국 보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폭력성을 경고하기 위해 작성한 것 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세일러 2011.07.25 10:46  
역시, 논지에서 벗어나는 쟁점으로는 가지 않으시는군요... ㅎㅎ

노르웨이뿐 아니라 유럽의 기독교는 지적하신대로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enlightment"를 포함한 철학적 수준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도 지적하신대로 사회적 변화에 의해 더 이상 과거 교리에 얽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구요.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해도 신도들로 꽉 찼었지만, 이제는 텅빈 유럽의 교회를 보고 그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잠시 갸우뚱하다가 "사회복지제도"의 발전이 아니겠냐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통찰이라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개인의 구원이라는 기독교 교리가 설 땅을 잃어버린 것이고, 변화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토양이 유럽에는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미국과 한국의 기독교가 아직도 구원론에 매달리는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것을 사회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적자생존의 자본주의 정글인 사회에서 기독교의 구원론이 아직도 주류일 수 밖에 없는 이유죠. 그래서 철학적 경지로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구요. 당장 생존이 문제인 사람들에게 어필 할 수 있는건 철학이 아니니까요.

한국 기독교의 성향으로 볼 때, 또다른 근본주의 종교가 발현한다면 폭력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농후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100%라고 봅니다. 노르웨이 사태 기사에 달린 댓글 중, 한국에 총기가 허용됐으면 벌써 유사한 사건 생겼을 것이란 글이 있더군요. 공감합니다.

한국 기독교가 유럽의 기독교 수준으로 발전하려면 (이런 점에서는 미국의 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사회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글의 취지인 한국 기독교의 잠재적 폭력성을 해결하려면, 한국 내부에서 문제가 불거지기전에, 한시바삐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한국 교회의 근본주의자들(나는 이 부류를 근본주의자라고 부는 것도 적절치 않다고 보는데요, 그냥 "광신"이기 때문이죠.)이 설땅을 잃게하고, 유럽식 기독교로 발전하려면 말이죠. 지금같은 치열한 경쟁사회에선, 요원한 일이지만요.

도킨스가 근본주의자들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는 말에 동의합니다만, 근본주의자는 어느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내부의 liberalist도 근본주의자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다만 근본주의자들을 고립시킬 수는 있는데, 도킨스는 충분히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에 물음표를 던진다는 저의 글은, "기독교 근본주의"라고 수정해야겠군요. 문화적 현상으로서 종교가 존재하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저는 여전히 다위니스트일 수 밖에 없습니다.
sarnia 2011.07.25 11:39  
세일러님의 종교에 대한 통찰이 매우 깊고 정확하시네요. 아카데믹한 것이든 저널리즘 감각에 바탕을 둔 통찰이든 기쁘고 반갑습니다. 언젠가 말했지만 저는 유신론 무신론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굳이 내기를 걸라고 한다면 무신론에 올인하겠습니다. 수학자 파스칼은 유신론에 거는 게 확률상 유리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지만 그건 <믿음=구원>이라는 교리에 알게모르게 영혼이 협박받고 있던 수학자 이야기고 저는 그런 협박 따위를 위협으로 느끼지는 않으므로 <상식적인 게임>을 하려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루 하루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이니 궁극실재니 종교간의 만남이니 에큐미니즘이니 하는 이야기 따위가 귀에 들어올리 없지요. 분배정의나 정치적 해방을 다룬 해방신학이니 환경문제 여성문제를 아우른 에코패미니즘 신학이니 하는 말들도 다 뜬구름 잡는 말로 들릴 수 밖에 없고요. 1970 년대 한국에서 오순절 교회들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배경도 이런 사회환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 입니다.

더 이상 서구에서는 초자연적 구원을 추구하는 기독교가 주류는 아니지만 1980 년대 이후 벌어지는 새로운 종교현상이 있습니다. 다른 여러가지 형태의 유사종교가 그 자리를 조금씩 메꾸고 있다는 것이 그 첫번째고 기독교 안에서는 자유주의 성향의 교단보다는 복음주의 성향의 교단의 교회들이 빠르게 재성장하고 잇다는 것이 그 두번째 입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바로 말씀하신 북미 사회의 중산층 해체및 빈곤층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1950 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종교학자들이 기독교를 비롯한 <초자연적 구원론>에 의지하는 종교가 조만간 사라질 것으로 예측했는데 1980 년대 이후들어 갑자기 반대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새로운 현상에 대한 지적과 고백은 하버드 대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치는 하비 콕스가 그의 대표적인 저서 중 하나인 <When Jesus came to Harvard>에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종교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무엇엔가로 대체되어지며 변화해 갈 뿐 이라는 말이지요. 그 대체되어지는 무엇인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그 종교현상이 벌어지는 사회적 환경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담이지만 보도에 따르면 Andres 는 범행 수 시간 전에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선언문을 남겼다고 하는군요. 지금 영어로 번역된 문건을 검색 중인데, 일단 내용은 예상했던 대로입니다. 전통적 기독교가 유럽에서 쇠퇴하는 대신 이슬람인구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좌절감, 1960 년대부터 확산하기 시작한 패미니즘에 대한 증오, 가부장제가 복귀해야 한다는 신념, 한국과 일본의 민족주의와 가부장제로부터 배울 점이 많다는 엉뚱한 주장 등등......
Drifter 2011.07.26 19:41  
후!
제가 가지고 있었지만 근거나 지식이 부족해 펼쳐보일 수 없는 생각이었는데 잘 말씀해 주셨군요.
논리적인 글 항상 감사합니다.
sarnia 2011.07.27 17:25  
Drifter 님 항상 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

건강하시고요. 대한민국방에서는 항상 무겁고 우울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다른 곳에서는 행복하고 예쁜 이야기로 만나뵈요~
먼지 2011.07.27 20:53  
저는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지식인데..>가 --->예수가 알고있는 훌륭한 지식 (즉 진리)에 비교하면 다를 모든 지식이라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니 최상의 지식인 진리를 추구하라. 라고 보여지는데 오버 한 건 가요?ㅎㅎ
먼지 2011.07.27 21:36  
-증오의 본질을 쉽게 요약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두려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열등감이다-

보통 누군가 자신이 소중히 하는 것(자신을포함)에 대해 중대한 해를 끼쳐 반발심이 일어날때 동반하여 나타나는것도 증오심일텐데 이런 증오심을 두려움과 열등감으로 치부하는것은  어색해 보이네요.ㅎㅎ
sarnia 2011.07.28 05:29  
사도바울이 저 말을 언급한 한 이유는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와서 바울의 저 말이 주로 <진화론>등 현대과학과 인류가 이룩해 놓은 인문적 성과들을 때려잡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문제겠지요. 아무리 좋은 말도 다른 컨텍스트 안에서 잘못 인용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기서 증오란 hate crime 할 때 그 증오를 말합니다. 물론 본질은 일반 개념으로서의 증오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입니다.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기는 것에 대한 반발심의 본질은 두려움입니다. 인간이 변화, 특히 부정적이고 퇴행적인 변화에 두려음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게 나쁘다는 말을 한 게 아니고 다만 본질이 그렇다는 것이고요. 제가 열등감이라고 표현했는데 사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제와서 생각하니 열등감은 <좌절감>으로 교체하면 더 좋을 것 같군요.

문제는 독점해야 할 것들이 아니고 나누어야 마땅한 부분들을 자신들만이 <소중하게 독점>해야 한다고 믿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소중한 독점을 위해 말로든 물리력으로든 폭력을 휘두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지 2011.07.28 11:57  
잘못 인용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그것이 잘못 인용되어진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생각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과연 어느쪽이 옳을 까요? 보통인간들의 수준에서는 비판은 비판으로 반응하는데<그래서 예수도 비판하지 말라고 했을지도 모르겠군요.ㅎㅎ>이는 끝없는 대립만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됩니다. 비판보다는 이해와 포용이 낳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증오에 대한 해석은 쉽게 정의 내릴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저같은 경우에 도둑이나 소매치기가 내 물건을 훔쳐같을때 본능적으로 훔쳐간 행위보다는 행위자에게 증오심이 생기는데 거기에는 손실에대한 좌절감과 보복심이 생기지 두려움은 못느끼는데.. 제가 잘못 된건가요?.ㅎㅎ 물론 잃어버리기전에 잃어버림에대한 걱정은 두려움으로 해석할수있지만 이를 결과의 산물인 증오와 연결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합니다.
먼지 2011.07.28 12:20  
아참! 제가 사니아님의 글에 이런식으로 댓글을 다는것은 님글을 읽고나서  은연중에  님이 설정해 놓은 대상에 대해 부정적이던 긍정적이던 선입관이 생겨서 입니다. 이런 선입관은 어떤 식으로든 선입관 가지기 이전으로 되돌려 놓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어  화자의 중립적 입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편향되지 않은 좋은 글 많이 부탁합니다.
sarnia 2011.07.28 12:38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본문에서 제가 사용한 증오의 개념을 본문 문맥 안에서의 개념으로 축소해서 이해하시면 어떨까요? 소매치기에 대한 증오로까지 그 개념의 범위를 확대하지 마시고 <역차별과 박탈감-사실은 스스로의 오해와 피해망상->으로 인한 공포를 엉뚱하게 사화적 소수에 대한 증오로 둔갑시키는 일부 다수와 주류의 그 부당한 심리를 말하는 개념으로만 말이지요.

비판이 반격과 대립만으로 재생산되는 것은 <비판하는 행위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토론과 논쟁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와 포용은 두 가지 경우에 가능한데 첫째는 논쟁과정에서 동의와 수용이 성립되었을 때이고 둘째는 지엽적이고 비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소모적인 갈등이 다음 단계의 논의를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해서 어느 한 쪽, 또는 양방이 정치적 타결을 했을 경우입니다. 이해와 포용은 그것대로 원칙과 절차가 있는 것이지 상대주의에 무조건 빠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제 본문은 <성서>에 대해 시비를 걸기위한 글도 아니고 <증오>에 대한 개념정의를 하기 위해 심리학 발제도 아닙니다. 게다가 <증오론>에 대한 먼지님의 두 차례에 걸친 문제제기는 첫째, 본문 컨택스트 상의 'hatred' 와는 다른 광의의 의미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 둘째, 본문의 핵심 주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제가 님의 문제제기 동기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긍정적인 수용을 하기 어려운 이유는 님의 제기한 개별문제 (성서와 증오) 에 대한 논지 자체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니라 그 동기를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가 바울서신 등에 대해 언급한 관점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시다면 그냥 그 견해를 말씀하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말씀하신 <편향>에 대한 지적은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먼지 2011.07.28 16:13  
어떤 것이 작을 때와 클 때의 성질이 다르다면 그것을 같은 것이라 보기 어렵겠지요. 증오도 크게 보던 작게 보던 그성질은 같아야 된다고 봅니다.

이해와포용은 타협과 다르다고 봅니다. 타협은 자신의 주장이 남아있는 결과물이지만 이해와포용은 자신의 주장,이익을 완전 배제시켜야 가능한 거니까요. 

제가 말하는 중립적 입장이란 상대로 하여금 스스로 정확하게 판단할수있게 꾸밈없는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입장을 말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하기위해 경계해야하는것이 자신의 편향되지 않은 감정과 옳바른 사실,지식, 옳바른 언어의 사용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정확한 사실을모르고 주관이 뚜렸치 아니한 저같은 어리석은 이들이 좋지 않은 선입관이 생겨 또다른 극**주의자로 만들 수 있음을 우려하기에 어설픈 코멘트를 한 것 입니다.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kairtech 2011.07.28 23:12  
고교 국어시간에
근세 문학의 초기 시를 해부하여 가르치던때 생각이 나네요
SARNIA 님의 글을 읽다보면
글은  참  잘쓰신다  라는 생각이 드네요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설득력있게 글로 표현하는건  축복입니다
sarnia 2011.07.29 00:51  
토론이란 누가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서로 다양한 관점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취재기자가 보도기사를 작성하는 것이 아닌 이상 <중립의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글이 아니고 어떤 사건에 대해 제가 제 관점에서 판단하고 해석한 관점을 독자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예를들어 칼럼 종류의 글들은 모두 마찬가지인데 칼럼니스트들이란 정확한 정보를 중립적인 입장에서 전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자기가 해석한 관점을 독자들에게 설득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즉 <사상전>을 수행하는 프로파겐더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글에 필자의 감정과 주관이 개입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입니다.

게시판에서 의견을 개진하는 네티즌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가치에 대해 최종적인 판단하는 것은 필자의 몫이 아니고 독자의 몫입니다. 가혹한 말 같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요. 정보란 어차피 널려 있는 것이고, 요즘처럼 온갖 종류의 미디어가 발달해 있는 사실에서 정보를 취합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 입니다. 과거에 비해서 말이지요. 

제가 독자로서 어떤 사람의 글을 읽을 때 주목하는 것은 그 사람의 글이 주관적인 관점으로 쓰여진 편향된 시각을 가지고 있는냐 하는 여부가 아니라, 그 글을 쓴 필자가 자기의 관점을 설득하기 위해 사실관계를 어느 정도로 왜곡하거나 날조하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일입니다. 반론의 근거는 바로 이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상대방의 <편향이나 주관점 관점>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논리를 수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방콕중 2011.09.09 13:36  
필자에게 양심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
나마스테지 2011.07.29 03:48  
s님, 저는 머리가 너무 아파서 위의 글들을 거의 못읽고 나갑니다. 본글 댓글 모두.
찬송가를 들으면 머리가 아파요. 혹 저 말고 그런 분 계시나요? 혹시 제가 사탕일까요?
아...숨이 가파서 그만.....
나마스테지 2011.07.29 03:50  
한마디만,

내부의 리버럴리스트가 그런 역활을 과연 할 수 있을까요? 회의적입니다 저는.
장대익교수도 신재식교수를 못바꾸는 것 보면요....ㅎㅎ
sarnia 2011.07.29 05:03  
<불경스런 포스팅에 찬송가를 깔아 기독교를 모욕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었어요.

근데, 바꾸고 못 바꾸고가 문제가 아니라...... 근본주의자들이 장대익같은 사람들은 안 무서워하는데  그들은 무서워 한다니까요. 마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원수 취급을 하죠. <내부>라는 말은 제가 편의상 붙인 거지 실제로 근본주의자들이 가장 강대한 적으로 생각하는 집단이 그들이랍니다.

예를 들어 도킨스 저서 중 God Delusion 에서 창조론을 공격하는 핵심 장이 제 4 장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 이른바 <틈새신학>에 대한 부분이예요. 이 가장 중요한 장에서 도킨스도 무신론자가 아닌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훼퍼의 신학이론을 차용하고 있지요.

참, 그리고 찬송가 들을 때 머리 아프면 안되요. 무신론자 또는 과학적 유물론자는 종교의 부적합성에 대해 확신을 갖는 사람을 의미하는 거지 Christophbia 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니까요.
나마스테지 2011.08.06 00:44  
제가 머리가 아픈 제일 큰 이유는, 40 이후로 클래시크와 연주곡만 듣기 때문입니다.

옴마니팟메홍....만 계속 나오는 곡은 또 괜찮아요. 거의 연주곡이니까^^
al 2011.10.03 08:17  
2000년 전에 살았던 아랍놈 하나가 왜 인류를 이렇게나 괴롭히는 지..생긴 모습이야 지금의 아랍놈들을 닮았을테지,  심판을 하러온다니.. 만약 온다면 이순신 장군은 당연히 지옥행인가?  세종대왕도?  지금의 우리를 있게해준 선조들을 지옥으로?  그럼,오늘날의 기독교도들은 선조들을 지옥으로 보내려고 심판하러 오세요 오세요 하는건가?    기독교도는  천당으로, 세종대왕님은 지옥으로?  아들이 이 아랍놈을 믿고 아버지는 믿지 않는다면, 아들은 천당으로  아버지는 지옥으로 보내달라고 백마타고 온다는 이 아랍놈을 기다리고 있는건가?  이 깝죽대는 아랍놈을 어쩌지?  온다면 귀싸대기를 올려야겠지.  물론 지옥이나 천국은 존재조차 안하지만 말이다. 2000년 역사의  큰 불행들은 모두 종교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가져온 것이 아닐까?  아직도 우린 이 두 종교의 치명적 해악을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인류가 무지했을 때 종교였지 과학으로 발가벗겨 놓으니 이젠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먹사들이 점점 미쳐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의 기독교의 족적은 지금 뒤돌아보면 인류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인류의 희생이 기본 토양인 것같다. 많은 먹사들의 타락은 그자체로 기독교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같다. 이슬람도 하는 짓은 비슷하다.  남성,여성 구분할 것 없이 이성적 존재를 병신으로 만들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이슬람교도들은 정신병자가 되어 살인을 서슴지 않고 있다. 우리 죄없는 한국인의 수급을 잘라도 그들의 조상인 예수나 모하멧을 비난하는 데는 침묵한다.  먹사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지옥을 꺼내들어 신도들을 공포속에 몰아넣고  십일조를 강요한다. 이 모든게 종교의 폐해가 아니고 무엇인가? 깨어나라.  먹사들에게 줄 돈이 있다면, 모든 악의 근원인 종교에게 줄 사랑이 있다면  이제부턴 자신의 가족과 이웃에게  더 사랑을 베풀어서 예수와 모하멧이 가르치고 있는  증오의 괘변에서 벗어나야할 것이다.  우리 인류는 얼마나 더 죽어야 한단 말인가?  매 주 아랍놈들에게갈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에 지금의 우리를 있게해준 을지문덕 장군, 세종대왕, 이 순신장군 등 여러 선조들에게  존경의 예를 표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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