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살인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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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집권 노동당 청소년캠프에서 자동소총을 난사해 85 명 (추정)을 학살한 범인 Anders Behring Breivik 은 보수 기독교인이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우 침착하고 차분하게 천천히 걸어가며 가까이 있는 사람들부터 차례로 죽이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쓰러진 사람들에게는 자동소총대신 권총으로 바꾸어 쥐고 그들의 머리를 향해 조준 발사했다.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서였다.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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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미친놈’ 같지도 않았고 당황하거나 서두르는 기색조차 없었다. 경찰복장 차림의 살인자는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는 성직자 같이 확신해 차 있는 표정과 자세로 청소년들을 포함한 희생자들을 도륙했다.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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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한 소녀는 이런 말을 했다.
“미국에서나 벌어지는 줄 알고 있었던 일이 내 나라 (노르웨이)에서 벌어졌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이 열 아홉 살짜리 소녀의 <미국에서나>라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단순하게 <미국이 총기살인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나라>라는 의미가 아니다. 소녀의 이 발언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타자에 대한 증오로 바꾸어 발산하기를 좋아하는 <원시문명>이 횡행하는 나라>라는 북유럽인들 나름의 관념을 반영하고 있다.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후반부 고백에는 이번 사건으로 그 노르웨이 소녀가 가져왔던 자기가 사는 나라에 대한 문화적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났다는 자괴감이 담겨있다.
용의자가 체포되고 페이스북을 비롯한 그의 기록들이 공개되자 언론은 <Anders>를 가리켜 기독교 근본주의자 (Christian fundamentalist) 나 극우 인종주의자 (far-right wing racist)라고 불렀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나 백인 우월주의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고 있는 사상가가 아니다. 평소에는 그저 컴퓨터게임이나 즐기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에 쌓여온 비기독교적 문화-종교현상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감을 언제든지 폭력적 돌발행동으로 치환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평범한 보수 기독교인이었다. 도대체 평범한 한 인간의 내면에 밑도 끝도 없는 증오를 차곡차곡 쌓아준 외부의 사상과 문화적 환경은 무엇이었을까?
증오의 본질을 쉽게 요약하면 두 가지다. 하나는 두려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열등감이다. 그런데 두려움과 열등감은 감정이지 이념이 아니다. 감정적 증오란 일시적으로 폭발해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동소총을 마구 난사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평온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차분하고 침착하게 학살하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의 증오감을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신념화해 준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 무엇인가에는 정치적 이념도 있을 수 있겠고 개똥철학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강력한 그 무엇인가는 삐뚤어진 <종교적 신념>일 가능성이 가장 높겠다.
학살자 <Andres>는 극우 인종주의자였다. 그가 노르웨이에서 가장 증오하는 집단은 리버럴한 대다수 노르웨이 국민들이고, 그 대표적인 기구가 다문화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집권 노동당 정부다. 그래서 그는 그 노르웨이 집권당이 주최하는 청소년 정치집회를 목표물로 삼았다. 도대체 그 反다문화주의와 인종주의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서구 인종주의를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언젠가 언급했지만 반유대주의 (Anti-Semitism) 는 두 가지 맥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들의 강한 종교적 결집력에 대한 소외의식에서 비롯된 백인 주류(majority) 의 집단적 반발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집단이 가지는 뛰어난 지적 재능에 대한 인종적 열등감의 소산이다. 전자는 고대시대부터 있어왔고 후자는 주로 18 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과학과 경제 분야에서 유대인들의 활약과 부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했다. 러프하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반유대주의와 함께 서구 인종주의를 이끌어 온 쌍두마차의 또 다른 한 축은 보수 기독교의 배타적 유일신관과 폐쇄적 구원론이다. 20 세기까지 서구를 지배해왔던 전통적 기독교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과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매우 수상쩍은 사상을 가르쳐왔다. <인류사상사>에 존재하는 최대의 불가사의가 있다면 이렇게 이해가 안되고 논리적이지도 윤리적이지도 않은 사상이 한 종교의 주류 사상으로 무려 2000 년을 지탱해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인 사내가 전 인류의 죄 때문에 대신 죽었으며 그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믿음으로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의미다. 놀라운 것은 그 유대인 사내는 이 세상에 실재했는지 여부에 대해 사복음서 이외에는 그 기록조차 변변치 않다는 것인데, 더더욱 놀라운 것은 그 예수의 부활, 그리고 대속 (대신 속죄)을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설파한 또 다른 유대인 사내 바울은 예수를 구경조차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 내가 <전통 기독교 예수 구원론>의 핵심인 요한복음 14 장 6 절에 나오는 <나>라는 의미가 예수가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말로서의 <나>가 아니라 凡我, 즉 인간 일반의 자아로서의 <나>라는 개념으로 썼을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신학자들은 이 구절이 예수가 한 말이 아니라 후대에 가필된 문장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단다.
암튼 이런 교리는 그 자체로 폐쇄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소통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때문에 공존을 위한 타협이란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사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 Christian Identity 같은 극우 종교단체가 인종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성서해석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보수 기독교의 <전통적 신관과 구원론> 그 자체가 Christian Identity 같은 극우 기독교단체와 <Andres> 같은 기형적 테러리스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종교교리적 토양을 제공해 온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독교는 변화해야 한다.
아니 사실 변하고 있는데 가만 보면 대한민국 기독교만 깜깜 무소식인 것도 같다.
하나의 참고사항으로, 기독교인들이1945 년 나그함마디에서 새로 발견된 문서들과 1947 년부터 10 년 간에 걸쳐 사해 (Dead Sea) 북서쪽 해변 11 개 동굴에서 발견된 약 900 여 편에 달하는 히브리 성서를 포함한 사해사본을 잘 연구하면 기원후 325 년 경 로마 황제권력과 종교권력의 수상쩍은 야심과 야합에 의해 조립된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사상에서 벗어난 획기적인 새 기독교의 새 패러다임을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sarnia 는 2 년 전쯤 나그함마디 문서 중의 하나인 The Gospel of Thomas 번역과 해설을 읽으면서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문서는 나그함마디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 아니라 19 세기 나그함마디에서 북쪽으로 250 km 떨어진 곳에서 그리스어로 된 파피루스 두루말이형태로 그 일부가 발견됐다고 한다.)
예전에 sarnia 는 기독교에 대해 참 답답해 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지만 경전 어디를 봐도 사랑이 강조된 이야기는 별로 없고 <맹신>에 대한 강요만이 판쓸이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딱 한군데, 고린도 전서 13 장이 예외이기는 한데 sarnia는 혹시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고린도 전서 13 장이 <낙하산>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나머지는 답답한 이야기들 천지다. 성경 구절들에 생명이 있다면 고린도 전서 13 장은 다른 장들로부터 왕따를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예전에 sarnia 가 기독교에 대해 답답해했다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가령 이런 것이다.
아래는 사도바울의 옥중 서신으로 알려진 (sarnia 는 그렇게 들었다) 빌립보서 3 장 8 절이다.
“Yet indeed I also count all things loss for the excellence of the knowledge of Christ Jesus my Lord, for whom I have suffered the loss of all things, and count them as rubbish, that I may gain Christ.”
sarnia 는 목사님의 외손자이므로 중학교 2 학년 때부터 이 구절을 읽었다. 성경읽기를 중시하시는 모친의 뜻을 받을어 성경을 읽었고, 영어책 읽기를 중시하시는 선친의 뜻을 받들어 영어 성경으로 읽었다.
빌립보서 3 장 8 절을 풀어 말하자면, <예수를 아는 것이 가장 높은 지식인데, 이 가장 높은 지식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잃어도 무방하며 다른 것들, 즉 세상 지식이란 허튼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이 구절의 주장이다. 어떤 성경에서는 <허튼소리>라는 의미의 rubbish- 쓰레기라는 의미도 있지만-를 <배설물>이라고 감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암튼 나는 영어고 한글이고 이 소리가 뭔 소리인지 수 십 년 동안이나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철이 들어 생각해 보니 내가 문장 이해력이 부족해서 이 구절을 이해 못했던 것이 아니고 이 문장이 원래부터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에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진리란 합리성은 둘째치고 우선 보편성이 있어야 그 온전함을 인정 받을 수 있다. 누구에겐가는 전혀 설득도 이해도 안 되는데 다른 누구에겐가는 맹신과 광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그 <진리>라는 것은 수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sarnia 는 오늘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노르웨이에서 이런 종류의 극우기독교 광신자의 무지막지한 증오범죄가 일어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어느 노르웨이 소녀가 <미국에서나>라고 말한 그 미국에서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대규모 테러가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내가 알고 있기로 가장 최근의 대규모 테러사건은 1995 년 Timothy McVeigh 가 일으킨 오클라호마 연방정부 청사 폭파사건이다. 물론 길가던 동성애자를 붙잡아 린치를 가한다던가 낙태 시술을 하는 산부인과 클리닉에 사제폭탄을 투척하는 사건은 심심하지 않게 발생한다.
근데 만일 오늘 대한민국의 인구 중 약 10 퍼센트인 500 만 명이 무슬림 이민자들이었다고 가정하면 전체 기독교 인구의 90 퍼센트 이상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라는 그 나라에서 과연 무슨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까? 상상만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일이다.
남의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2011. 07.23 21:00 (MST)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