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미필 저격범의 귀신같은 사격솜씨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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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nia 는 한 번 기억한 특별한 날짜를 결코 잊는 법이 없다. 가령 이런 것이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나오는 오스카의 생년월일을 질문 받았다면 나는 1976 년 8 월 18 일이라고 즉시 답을 할 수 있다. 드라마에서 스치듯 지나 간 콘도 출입구 비밀번호가 760818 이기 때문이었는데, 이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는 sarnia 가 오스카의 팬이어서가 아니고 바로 이 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제 5 초소 부근에서 북한군과 미군 병력간에 패싸움이 벌어져 미군 장교 두 명이 사망하고 북한군-미군 양측 병력 10 여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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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e Cutting Incidents-나무 자르기 사건> 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은 1968 년 1 월 북한 영해를 침범한 미군 정보함 프레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된 사건에 이어, 두 번째 북미전쟁 발발의 위험천만한 도화선이 될 뻔 한 사건이었다.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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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sarnia 는 1974 년 8 월 15 일 역시 개인적인 특별한 날짜로서 기억하고 있는가?
물론 기억하고 있다.
이 날은 sarnia 의 외할머니가 외삼촌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날이었다. 따라서 부모님을 따라 김포공항으로 외할머니 전송을 나가야 했다. 그런데 sarnia 는 아침에 가족들 몰래 혼자 집을 빠져 나와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 날 대한민국 사상 처음 생긴 지하철을 타보기 위해서였다. 그날 개통된 지하철 구간은 서울역에서 청량리까지 제 1 호선 구간이었는데, 그때는 1 호선이고 뭐고 그 구간이 전부였다.
Anyway……
오스카의 생일처럼 sarnia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날 아침 10 시 20 분. <8.15 광복 제 29 주년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던 서울 중구 장충동 소재 국립극장 안에서 일곱 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렸다.
그 일곱 발 중 네 발은 문세광이 발사했다. 문세광은 일본여권을 소지한 만 23 세의 재일교포였는데, 나중에 수사검사 정치근 씨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자칼의 날>을 통독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자칼의 날을 통독했다는 문세광의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작전은 소설 속에서 샤를르 드골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는 전문적인 살인청부업자 자칼하고는 처음부터 영 그 모양새가 달랐다.
우선 그는 저격용 권총을 구입하는데 실패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격용 권총을 구입하는데 실패한 게 아니라 문세광은 애당초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던 게 분명했다. 저격용 권총이라면 최소한 브라우닝 반자동 피스톨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사용했던 권총) 이라든가 콜트 45 구경 정도는 되어야 명중률과 치사율을 어느 정도 보장 받을 수 있는데, 그는 그런 권총을 하다못해 암시장에서라도 구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사카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발견한 어느 파출소에 들어가 웬 구닥다리 권총 한 자루를 훔쳤다. 일본의 어느 엉성한 파출소가 그 날 문세광에게 도둑맞은 권총은 스미스웨슨 38 구경이었는데,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유명한 반전영화 <디어 헌터>에 나오는 러시안 룰렛 게임에 등장하는 그 크고 묵직한 리볼버를 말한다.
문세광은 그 묵직한 권총을 허리에 차고 서부활극에 나오는 총잡이 흉내를 내며 숙소인 중구 소공동 소재 조선호텔을 나섰다. 그는 <서울 2바 1091> 포드 20 M 을 타고 국립극장 정문을 통과했다. 고급승용차 뒷자리에 앉아 정문을 통과하는 스물 세 살짜리 청년에게 외곽경호임무에 투입된 서울시경 소속 경찰관은 힘차게 거수경례를 올려 부쳤다. 입구에서도, 극장 안에서도 비표조차 달지 않은 이 청년을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탕탕탕탕탕탕탕
청년이 기념식장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 30 여 분쯤 지나 일 곱 발의 총성이 수 분에 걸쳐 식장 안을 뒤 흔들었다. 이 날 기념식장 안에서 울린 총성은 모두 한 종류의 권총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저격범 문세광과 역시 권총을 발사한 경호원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권총인 스미스웨슨 3.8 구경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대목을 떠 올릴 때마다 덴젤 워싱턴이 주연한 영화 <인사이드맨>이 생각난다. 뉴욕 맨하튼 월스트리트에 있는 한 은행이 무장강도조직에 순식간에 장악되는데 범인들이 인질들에게 자기들과 똑 같은 옷을 입혀 범인과 인질의 구분을 사라지게 함으로서 완전범죄를 가능하게 만드는 그 영화…… 그냥 생각난다는 것뿐이지 딴 뜻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이 날 녹화된 비디오를 보면 두 번 째 총성이 나고 나서 연단의 모든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비호처럼 어디론가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은폐-엄폐물이 거의 없을 것 같은 연단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순식간에 어디론가 싹 숨을 수가 있었는지 그 장면을 볼 때마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박정희 대통령은 연단 아래로 몸을 낮추었고 다른 요인들은 의자 뒤에 숨거나 꿩처럼 의자 밑으로 머리를 처 박기도 했다.
단 두 사람 예외가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씨가 그 때까지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앉아있었고, 박종규 경호실장이 연단 앞으로 뛰어나와 관객석을 향해 마구 권총을 난사했다. <마구 권총을 난사했다>는 표현은 그가 발사한 것이 분명한 탄환 중 하나가 저격범인 문세광의 위치와 전혀 다른 각도에 있었던 성동여상 합창단원 장봉화 양 (당시 17 세)를 맞추어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장봉화 양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피스톨 박>이라는 별명이 붙은 박종규 경호실장은 졸지에 벌어진 상황에 당황에서 오발을 했다고 쳐도, 저격범 <자칼 문>의 권총저격솜씨는 <요인암살비사>에 <뒷담>으로 기록될 만큼 황당했다. 이 청년이 소지한 리볼버에는 다섯 발의 탄환이 장전되어 있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뛰어나가면서 권총을 꺼내다 방아쇠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자신의 허벅지에 첫 발을 발사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문세광이 발사한 탄환은 약실에 남아있던 한 발을 제외하고 모두 네 발이었는데 아까 말한 대로 첫 발은 자신의 다리를 맞추었고 두 번 째 탄환은 단상에 맞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두 발을 더 발사했다. 문제는 세 번 째 총성부터 일곱 번 째 총성까지는 누가 발사한 총에서 난 총성인지 순서를 가늠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녹화된 화면을 보면 육영수 씨는 세 번 째 총탄에 머리를 맞은 것으로 확인된다. 문제는 사건 직후 청와대 경호실에서 모든 탄피와 탄환을 수거해 가버리는 바람에 육영수 씨가 누가 쏜 총에 맞은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게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저격사건이 엄연한 형사사건이니만큼 현장은 검사 지휘아래 수사관할구역의 경찰 감식반이 도착할 때까지 보존되어 있어야 하는데 사법-수사기관도 아닌 청와대 경호실이 가장 중요한 증거물인 탄피와 탄환을 수거해 가는 바람에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현장에서부터 벽에 부딪혔다. 명백한 증거인멸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당시 현장감식에 참여한 이건우 서울시경 감식계장 (작고) 는 사건 후 15 년이 지난1989 년 9 월 <월간 다리>와의 인터뷰에서 “육여사는 문세광의 총에 의해 죽은 게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햿었다. 육영수 씨가 문세광의 총에 죽었다는 증거도 없지만 그가 쏜 총에 죽지 않았다는 반증도 찾을 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는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이건우 경감은 33 년 베테랑 수사관만이 감지할 수 있는 확신에 가까운 의혹으로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있는 베일에 싸인 문제들을 간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1 년 전에 발생한 DJ 납치사건 이후 수세에 몰려있던 한국이 문세광 사건 이후 대일관계에서 그 수세를 극복하고 일거에 공세로 전환한 정황을 이야기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한일관계에 있어서의 딜레마 뿐 아니라 1974 년은 박정희 정권이 연초부터 긴급조치를 잇달아 선포해야 할 만큼 정권위기가 고조되었던 해이기도 했다. 정권위기는 야당이나 재야의 반유신투쟁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라 권력내부의 균열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3 년 벌어진 윤필용 사건 이후 육사 11 기 이후 기수의 군부내 사조직인 하나회와 대립함으로써 스스로의 권력기반이 위험할 정도로 흔들렸던 시기도 이 때였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언급은 쓸데없는 주제확산의 위험이 있으니 이 글에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다.
이 날 총잡이 문세광이 국립극장에 타고 들어간 고급승용차 포드 20M 에 달린 <서울 2바 1091>는 위장번호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위장번호판을 단 차량을 운용하는 곳은 당연히 정부기관인데, 청와대,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 내무부 치안국 (현재의 경찰청) 국세청, 검찰 같은 권력기관이나 사찰기관뿐이다. 이 재일교포 청년은 당시 한국 수사기관의 발표와는 달리 조총련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일본 수사기관에 의해 밝혀졌고 오히려 친한단체인 재일거류민단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도대체 이 청년의 정체는 무엇일까? 37 년이 지났는데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날 비명에 유명을 달리한 육영수는 49 세였다.
큰 딸 근혜는 22 세였는데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에 다니다가 프랑스에서 유학 중에 어머니가 피격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고, 둘째 딸 근영 (서영으로 개명) 은 20 세로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다니고 있었다. 막내 지만은 16 세로 중앙고등학교 1 학년 학생이었다.
육영수 씨는 어디선가 날아 온 총탄을 머리에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한 게 아니라 종로구 원남동에 있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으로 후송되어서 뇌 절제 수술을 받고 난 후 그 날 저녁 운명했다. 옛날에 박목월 시인이 쓴 <육영수 여사>에서 육영수 씨가 운명하던 시간, 그 날 내내 흐리고 비가 내리던 서울 하늘이 갑자기 밝아지면서 갑자기 광채 같은 게 서울 상공을 뒤덮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sarnia 는 당시 서울 하늘에서 전혀 그런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아무튼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생전의 인연들은 누구였을까? 말썽꾸러기 막내아들과 함께, 아마 1950 년 12 월 12 일 이래 24 년 간이나 의 연을 끊고 살다시피 한 그녀의 아버지 아니었을까?
이 사건의 내막이야 무엇이건……
그 날 이후 박정희 씨는 무너졌다.
흐르고 있는 이 노래의 어느 가사 대목처럼……
2011-06-30 (MST <?xml17:00) <?xml<?xml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