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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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필리핀 4 257

29년 전인 1987년 6월9일.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에서는 국민평화대행진(6·10대회)을 하루 앞두고 연세인출정결의대회가 열렸다.

 

【서울=뉴시스】권현구 기자 = 고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가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울삶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6.06.09.   stoweon@newsis.com【서울=뉴시스】권현구 기자 = 고 이한열 열사의 모친 배은심 여사가 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울삶에서 뉴시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16.06.09. stoweon@newsis.com【서울=뉴시스】김현섭 기자 =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 걸려 있는 고(故) 이한열씨 최루탄 피격 당시의 걸개그림. 2016.6.9   afero@newsis.com【서울=뉴시스】김현섭 기자 = 서울 신촌 연세대학교 학생회관에 걸려 있는 고(故) 이한열씨 최루탄 피격 당시의 걸개그림. 2016.6.9 afero@newsis.com 

 

'독재 타도' '5·18 진상규명'을 외치는 학생 1000여명의 함성 속에서 'YONSEI'가 새겨진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한 남학생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당시 22세)씨.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을 잃은 그는 신촌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7월5일 끝내 눈을 감았다.

그의 죽음은 6·10 항쟁의 기폭제가 됐고 '군사정권의 항복 선언문'이나 다름없는 6·29 선언의 도화선이 됐다. 스무살을 갓 넘긴 한 청년의 희생이 이 땅에 군부독재 철폐와 민주주의의 서막을 가져온 것이다.

 

"그 때도 올해 현충일처럼 연휴였었는지 한열이가 5일 새벽에 (광주 본가에) 내려왔다가 6일 밤에 올라갔어요. 9일 아침에 전화를 해볼까 했는데 남편이 '엊그저께 올라간 애한테 뭐하러 전화를 하냐'는 거예요. 요즘이야 휴대전화가 있어서 자다가도 전화할 수 있지만 그땐 집주인에게 부탁해서 그 집 전화로만 통화를 했거든요. 아침부터 그러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남편도 그렇게 얘기하고…. 그래서 그냥 안 했죠. 에휴, 그 때 해봤어야 하는데."

 

8일 서울 창신동 민주화유가족협의회 사무실 '한울삶'에서 만난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76) 여사는 근 30년이 흘렀지만 그 날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한열이 데모하는 거 알고 있었어요. 한열이가 인천여상 교사였던 셋째 누나하고 개봉동에서 방 얻어 같이 살았거든요. 셋째 딸이 얘기해줬어요. 한열이한테 최루탄 냄새가 난다고. 모르는 사람이 오면 자기 방 문 열어주지 말라고 했다고. 또 내가 가보니까 책상 아래 사회 관련 서적이 엄청 많더라고."

 

배 여사는 넷째(2남3녀) 아들의 '거짓말'을 믿었던 게 천추(千秋)의 한이다.

 

"'(데모를 해도) 뒤에 서서 하라'는 말만 했어요. 그 얘길 자꾸 하니까 하루는 '아따 엄마, 아들을 믿으랑께, 뒤에서 하고 있는데'라면서 신경질을 내는 거야. 그래서 믿었죠. 그런데, 사수대라고 알아요? 얘가 그걸 했더라고. 뒤에서 하긴커녕 제일 앞에서 한 거야. 엄마를 속인 거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강제로라도 데모 못하게 할 걸. 너무 후회가 돼요. 6일 밤에 서울 올라갈 때 '한열아 종강하면 금방 내려와라' 그러니까 '알았어. 방학하면 바로 내려올게요'라고 했는데, 그게 마지막 대화가 돼 버렸네요."

 

이씨는 경찰이 대각선 위를 향하지 않고 총을 발사하듯 수평으로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았다.

 

"인물이 못났으면 안 맞지 않았을까. 내 아들이라서 하는 말이긴 하지만 애가 귀티가 났어요. 당시에 175㎝가 넘었으니까 키도 컸고. 경찰 눈에 확 들어왔을 거야. 그래서 한열이를 조준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배 여사는 지난해 11월14일 '민중총궐기대회'에서 쓰러진 농민 백남기(69)씨와 그의 가족들을 보는 심정이 남다를 것이다. 최루탄에서 물대포로, 사망에서 뇌사로 바뀌었을 뿐 1987년 이씨와 2015년 백씨는 28년이라는 긴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똑같은 일을 당했다.

 

"난 병원은 못 가요. 중환자실 앞에 가면 맥박인지 뭔지 '똑딱, 똑딱'하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요. 그것만 들으면 29년 전 그 날이 떠올라서 병원은 절대 못 가. 딸(백도라지씨)만 한 번 만나고 왔지. 가족들이 어떤 마음일지 내가 정확하게 알잖아요. 둘이 무슨 얘기했냐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만나면 서로 할 얘기가 없어. 그냥 '앞으로 아버지 간호해야 할텐데 힘내라'는 말만 해주고 왔어요."

 

배 여사가 이름 석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사람이 둘 있다. 바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특히 전 전 대통령은 최근 신동아 6월호와의 인터뷰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발포 명령 책임을 부인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그때 어느 누가 국민에게 총을 쏘라고 하겠어.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라고 주장했다.

 

"하여간 난 한열이 장례식 때부터 '전두환하고 노태우는 인간이 아니다, 살인마다', 이렇게 규정을 지어버렸어요. 전두환은 아직도 그렇게 국민들의 정서를 못 읽는다니까. 그게(발포 책임 부인) 망령이 든 거야. 죽을 때가 돼서 망령이 든 거라니까. 백담사에서 죽게 뒀어야 하는데 다시 나와서 살게 해준 게 잘못이지."

 

배 여사는 요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고 했다. 4월에 있었던 제20대 총선 결과 때문이다.

 

"공천 과정 보니까 운동권 출신들 씨를 말려버리려 하더라고. 내가 그걸 보고 가슴이 다 쫄아붙었어요. 한열이도 운동권이었는데, 운동권의 '대명사' 같은 존재인데…, 그럼 결국 우리 한열이의 죽음마저 의미가 사져버리는 것 같고. 그런데 선거가 끝나고 보니까 결과가 뒤집어졌잖아요. '아, 요즘 젊은 사람들이 사는 게 힘들다보니까 눈에만 안 보이는 거지 결국 자기 주권을 지킬 줄 아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직 젊은 사람들의 힘이 살아있는 것 같아서 좋아요."

 

이번 총선 과정에서 당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더불어민주당(더민주)을 '운동권 정당'으로 규정해 공격했고, 김종인 더민주 비상대책위 대표는 취임하면서 "친노(친노무현) 패권주의와 낡은 운동권 정치를 청산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한 매체의 조사결과 20대 총선에서 당선된 더민주 당선자 123명 중 27명이 운동권 출신이었다. 19대 국회 더민주 소속 의원 중 운동권 출신은 24명이었다.

동공이 풀린 채 머리에 피를 흘리는 이씨를 이종창씨(당시 연세대 도서관학과 2학년)가 부축하고 있는 사진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6월만 되면 각종 언론에는 물론이고 연세대 학생회관을 비롯해 여기저기에 걸개사진 혹은 그림이 등장한다. 당시 정태원 로이터 사진기자가 찍었다.

 

"유명한 건 잘 모르겠고, 나한텐 너무 힘들고 괴로운 사진이지. 가끔씩 '저 안에 있는 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요. 종창이한테도 미안해. 그 사진 나올 때마다 자기 얼굴도 나올 수 밖에 없잖아, 좋은 기억도 아닐텐데…."

 

장례식 이후 다시는 못 올 것 같았고, 안 올 거라고 마음 먹었던 연세대이다. 하지만 배 여사는 30년이 다 돼 가도록 6월만 되면 대학 교정을 찾고 있다.

9일에도 연세대에서 오후 3시부터 열리는 '이한열 열사 29주기 추모제'에 참석해야 한다. 이씨가 최루탄에 맞고 쓰러졌던 지점에서 동판 제막식이 열리고 영정사진 속 이씨가 입고 있던 털조끼, 피격 당시 그의 피가 묻은 연세대 화학공학과 깃발, 기자로부터 28년만에 돌려받은 어린 시절 성적표 등이 공개된다.

 

"(연세대에 가는 게) 힘들죠, 너무 힘들어요. 아들 쓰러진 곳 어딘지 뻔히 아는데, 가면 생각나서 힘들지. 그런데 내가 힘들다는 소릴 할 수는 없잖아. 그런데 와 달라는 연락이 안 오면 또 내가 섭섭할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겠지, '이제 다들 잊어버리나보다'"


 

4 Comments
참새하루 2016.06.09 13:54  
그 시절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에게는
다른 나라 먼옛날 이야기일테고
겪고도 그 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빨갱이 앞잡이들 이겠지요
시간은 흐르지만
역사는 여전히 멈추어 있는듯 합니다
zipper 2016.06.09 14:56  
저도 그시절 도망가다가 직격탄에 옆구리를 맞아 한달동안 피멍이 들어 고생을 했습니다.
머리를 맞았다면 아무 죽었을지도 모르죠.

한국의 정의가 살아날려면,
검찰만이 가지고 있는 기소권을
경찰에게도 줘야 합니다.

대통령도 우습게 아는자들이 검찰입니다.

아무리 나쁜짓을 해도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으면
재판조차 받지 않는 나라가 헬조선입니다.
jindalrea 2016.06.11 12:03  
이제야 제대로 읽었네요. 아이고.. 어머니의 한이.. 절절해서.. 눈물이 납니다.
백남기님.. 얼른 일어나셔야 하는데.. 꼭 그러셔야 하는데.. 아이고..
이런 글을 접할 때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진파리 2016.06.12 20:51  
87년6월9일.
이한열 열사가 쓰러진날 난 뭐하고 있었나?
군대 말년 이었네요.
우리 부대는 충정부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충정부대 라는게 데모진압하는 부대 입니다.
병과의 특성상 훈련은 안받았지만 연병장에선 하루종일
충정훈련을 하는것을 보아 왔지요.
부대가 용인에 있어 출동하는건 못봤지만(출동대기는 많이 봤지요)
이한열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소속부대까지 출동하는 장기적인
불행한 사태가 지속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더 많은분들이 희생 되었을지도요.
그런데도 이땅은 아직도 그 후예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니
참 그렇네요.
이한열님을 비롯한 많은분께 진 마음의 부채를 갚아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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