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일지라도......
유튜브는 펌
--------------------
얼마 전 어느 분으로부터 한국의 개헌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솔직히 개헌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었다. 고국에서 논의되고 있는 개헌 문제에 관한 기사를 정독한 적이 없어서 의견을 피력할만한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개헌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던 이유는 대한민국에 거주하지 않는 해외교포로서 그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제 그 분의 부탁이 생각난 김에 국내 언론 사이트 정치면을 열고 이 문제에 관한 기사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개헌 문제에 대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조국 정세의 흐름 중 중요한 부분인 개헌 문제의 기본 개념들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다가 문득 대한민국 헌법 전문부터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매우 신통한 생각이었는데, 개헌 문제에 대한 분석은 현행 헌법 전문과 조항들을 정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은 1987 년 대통령 선거를 두 달 남짓 앞두고 개정된 것이다. ‘6 월 항쟁’의 역사적 산물인 셈이다. 이 새삼스런 사실을 상기하자 그 동안 대한민국 헌법에 너무 무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자성이 일어 꼼꼼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헌법의 전문과 조문들을 읽으면서 몇 가지 새삼스런 의문이 생겼다. 대한민국의 출생비밀과 관련된 비극적인 스토리와 영토조항의 문제들이 그것이었다.
우선 영토조항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들부터 살펴보자.
대한민국 헌법 제 3 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돼 있다. 아시다시피 이 유명한 헌법조항은 대한민국 정부의 한반도 유일합법정부이론과 국가보안법의 합헌적 근거가 되는 조항이다.
근데 내가 오늘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이니 국가보안법의 합헌적 근거니 하는 부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런 거 다 떠나서 이 헌법 3 조야말로 건국이래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는 유령조항이 아닌가 하는 의문에 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만일 북한 체제가 붕괴하면 북한지역은 이 대한민국의 헌법조항에 따라 당연히 대한민국에 귀속되는데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북한 전역은 고사하고 한국전쟁 정전 당시 남한 측이 회복한 38 선 이북 지역에 대한 통치주권이 대한민국 정부에 아무 문제없이 이양되었었는가 하는 점이다. 정전 이후 남한 측이 회복한 38 선 이북지역이란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강원도 북부지역과 서해 5 도 등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1950 년 10 월 12 일 유엔결의안에 따르면 이 지역은 기술적으로(technically) 유엔사의 군사적 점령지구에 불과했다. 한국정부의 끈질긴 요구로 1954 년 11 월 대한민국 정부에 행정권만 이양됐을 뿐 통치주권 (de jure sovereignty) 이 완전히 이양된 것이 아니다. 유엔사가 이 지역에 대한 행정권을 대한민국 정부에 이양하면서 ‘통치주권 보류조항’을 넣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유엔사가 대한민국 정부에 이 지역에 대한 통치주권을 주고 싶지 않아서 안 준 것이 아니라 통치주권을 이양해 줄 국제법상의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유엔의 어느 결의안에도 유엔군 사령관이나 미국군 제 8 군 사령관이 전쟁점령지구에 대한 통치주권을 보유할 수 있다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 대한 거의 유일한 연구자료인 ‘유엔군사령부의 수복지구 점령정책과 행정권 이양’ 역사비평 제 85 호에 실린 한모니까의 논문에서 요약 인용)
유엔은 한국전쟁 당시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북한 대부분 지역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주권을 인정한 적이 없었다. 그 이유 역시 38 선 이북 지역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지역이고 전쟁을 수행하는 유엔사가 점령했더라도 유엔사에게는 통치주권을 이양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물며 현재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각 유엔에 가입한 독립국이다. 만의 하나 북한에 ‘급변사태’든 천재지변이든 현재의 북한 정부조직이 더 이상 통치권을 행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더라도 대한민국이 그 지역에 군대를 진주시킬 수 있는 근거란 유엔의 요청을 전제로 한 평화유지군의 자격 이외에는 없다. 만일 대한민국 정부가 대한민국 헌법 제 3 조를 피켓에 써 들고 북한 지역에 들어가려 했다가는 불법 침략자라는 비난과 제재를 면치 못 할 것이다. 주변 강대국은 대한민국이 그런 일을 벌이도록 군사적으로 가만히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는 남북통일이란 남북한 두 지역에 대해 온전한 영토-군사-외교 주권을 가진 자주 국가 사이의 통치주권을 근거로 한 상호 접근과 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6.15 선언이 공연히 나온 게 아니고, 전시작전통제권 회수가 듣기 좋고 말하기 좋아서 하는 주장이 아니다.
영토조항 문제는 이쯤 해서 끝내고……
두 번째는 대한민국의 ‘호적등본’이 정직하지 못 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출신이 뭐 그리 중요한가. 비록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자식’일지라도 지금 제대로 살면 그만이다.
이게 sarnia 의 기본 생각이다. 다른 분들도 대개 같은 생각일 것이다. 따라서 나의 문제제기는 출신에 관한 부분이 아니라 정직성에 관한 것이다.
왜 대한민국 호적등본이 정직하지 않은가에 대한 해답은 현재 대한민국 헌법 전문을 읽어보면 당장 발견할 수 있다. 현행 헌법 전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일본 제국주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나라에 세운 정부가 항일투쟁조직으로부터 그 법통이 이어져 왔다면 그처럼 자랑스런 일도 없을 것이다. 갑오년전쟁 (나는 농민전쟁이나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래 1945 년까지 이어져 온 항일투쟁의 대맥은 세 줄기로 구분할 수 있다. 만주의 유격투쟁, 중국해방전쟁과 맥을 같이한 조선의용군, 그리고 우익활동가들 중심의 외교투쟁노선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그 세 가지 주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에 적어도 만주 유격투쟁노선과 중국북부의 조선의용군 투쟁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몹시 애매하기 때문이다.
만일 헌법 전문에 나와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정부가 1948 년 8 월 15 일 수립된 이승만 정부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그야말로 ‘명백한 호적등본 조작’이다. 이승만 정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지 않았다. 우선 이승만 자신이 무덤에서 튀어나와 전문에 이런 문장을 집어 넣은 초안자의 멱살을 붙잡고 늘어질 일이다.
여기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의부터 다시 내릴 필요가 있는데 헌법 전문에 명기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란 1919 년 11 월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 임시정부를 통합한 기구와 조직을 의미한다, 상해에서 시작해서 중경에서 해방을 맞은 항일투쟁 우파 진영을 대표하는 기구다.
이승만은 1920 년 이 기구 의정원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는 했으나 미국에 또아리를 틀고 앉아 기구의 본부가 있는 상해에는 거의 코빼기를 비춘 적이 없었다. 임시정부 대통령이라는 직함만 걸어놓고 그 직함을 이용해 재미교포사회와 미국조야에 이름 알리기에만 매달렸을 뿐, 직무를 유기한 것이다.
그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한 일이 딱 두 가지가 있는데, 그 한 가지는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조선을 위임 통치해 주십사’ 하는 굴욕적인 위임통치청원서를 보내 재미교포들과 고국의 독립운동가들을 격분시킨 일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위임통치청원사건 때문에 임시정부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자 재미교포들로부터 걷은 독립운동 지원금 중 상당부분을 상해로 보내지 않고 떼어먹은 것이다.
결국 그는 임시정부로부터 공금을 가로챈 도둑놈으로 몰려 1925 년 3 월 의정원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대통령직에서 쫓겨남으로써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청산한다. 이승만은 이후 미군 정보기관인 OSS 첩자 자격으로 해방이 되자마자 그의 직속상관인 OSS 부책임자 밀라드 굳펠로우를 따라 한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승만은 1948 년 5.10 총선 이후 처음 열린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국회의장의 자격으로 “오늘 열리는 이 국회는 대한국민대회의 계승이요, 이 국회에서 건설되는 정부는 즉 기미년에 서울에서 수립된 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이며, 이 날이 29년 만의 민국의 부활일임을 우리는 이에 공포” 한다는 말을 했다.
그가 여기서 언급한 임시정부란 헌법 전문에 명시된, 즉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통합조직으로서의 그 임시정부가 탄생하기 몇 달 전 기독교 인사 몇 명이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 말고 서명을 해서 만들었다는 ‘한성임시정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승만이 뚱딴지같이 1919 년에 사라진 이 기독교인사들의 식당모임을 가리켜 ‘부활’운운하며 거창한 소개를 한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겠다.
첫째는 독립운동기구의 법통을 이어받았다는 언급을 하긴 해야겠는데 자신을 쫓아낸 중경임시정부 (해방 당시 소재지)를 언급하기는 죽기보다도 싫었을 것이고, 더구나 당시 그 기구를 대표하는 인물이 이승만으로서는 ‘천하에 재수없는’ 김구였다는 것도 짜증나는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는 비록 미미한 기독교 단체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해 워싱턴 정가에 생색을 내게 해 준 한성임시정부에 대한 향수 비슷한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셋째는 OSS 직원으로 상관을 따라 한국에 들어와서 국회의장 (당시)까지 된 마당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뜻을 거스르는 언급을 할 수 없었던 것이 마지막 이유였을 것이다.
이런 건국 당시의 사정으로 볼 때 대한민국 초대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헌법 전문은 완전히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헌법 전문에는 법통을 계승한 주체가 대한민국 초대정부라는 문장이 등장하지 않지만 법통이라는 것이 야구공이 아닌 다음에야 초대정부를 건너뛰어 계승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지적이 가능한 것이다. 만일 초대정부를 건너뛰어 계승된 것이라면 도대체 어느 정부가 어떤 근거로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했는지 그 족보를 밝혀야 할 것이다.
새로 헌법 전문을 작성한다면 이렇게는 고칠 수 있을 것이다,
즉 ‘초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금을 착복하다 쫓겨난 사이비 독립운동가와 친일지주-관료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부로 출발하긴 했으나, 그 이후 민주화와 진정한 자주독립을 열망하는 전 국민의 노력으로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게……’
비록 ‘법통’은 이어받지 못했지만 ‘정신’은 나중에라도 계승할 수 있으니까 대한민국이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대한민국도 항일투쟁 족보에 법통이 아닌 정신이나마 그 연결선상에 올려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날은 언제 올까? 대한민국이 일제강점과 전쟁에서 비롯된 굴욕적인 외교-군사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로 바로 서는 날이 그 날이 아닐까?
외교-군사주권을 온전하게 되 찾아 온 자주민주정권이 수립되는 그 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여의도의 어느 교회 예배당에 이런 표어를 걸어놓으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Though your beginning was small, yet your latter end would increase abundantly” (Job 8:7)
2011-02-28 (<?xml:namespace prefix = st1 />16:30 MST)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