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워할 수 없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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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제 ‘평화를 위한 대 반전’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써 올렸던 글인데 조금 다르게 바꾸어 올리는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격식을 갖춘 글 아니고 자유롭게 하는 이런저런 이야기니까 읽으실 분들은 마음 편하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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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반전 영화를 좋아합니다. 여기서 반전 영화란 전쟁반대영화라는 의미가 아니고 영화 막판에 멋진 국면의 전환을 이루는 영화를 의미합니다. 식스 센스나 올드보이의 경우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초반에 반전의 실마리를 건질 수도 있지만 The Others 는 관객의 뒤통수를 때리� 막판의 반전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특히 ‘죽어보고 나서야 천국 지옥 따위가 없는 걸 알았다’는 주인공의 고백은 심오한 종교적 메시지까지 가미하고 있는 점에서 이 영화의 격을 한 결 높여줍니다.
Shutter Island 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합니다. 가정의 비극과 전쟁의 상흔을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가는 한 남자의 라이프에 반전과 스릴러를 결합시킨 이 영화는 영화 전반에 걸쳐 쉴 새 없이 드러나는 반전의 힌트들 때문에 오히려 따라잡기가 쉽지 않은 영화입니다. 반전의 힌트들이 주는 모호함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스토리 따라잡기에 급급했던 관객들을 한 순간에 다음과 같은 닥터의 대사 하나로 어리둥절하게 하는 짓궂음이 돋보입니다.
“You are Andrew Laedis”
연평도 포격전은 한반도 정세를 국지전 일보직전까지 내몰았던 위기임과 동시에 북미 평화협정의 길로 방향의 대전환을 이루게 하는 한반도 평화의 역설적인 신호탄일 수도 있습니다. 즉 반전의 계기 일 수 잇다는 말이죠.
이런 이야기 잘못 했다가 ‘축포녀 삼촌’이라는 별명 얻을까 조심스럽지만, 어쨌든 저는 개인적으로 그 포격전이 전화위복이 되어 한반도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로 기능하길 바랍니다.
CNN이 12 월 20 일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전쟁위기 속에 평양을 급거 방문했던 빌리 리차드슨 뉴 멕시코 주지사와 평양의 고위당국자 사이에 군사위원회 구성을 협의하기로 동의했다는데, 여기서 말하는 군사위원회란 북미 평화협정 회담을 위한 기구라는 의미입니다.
북측은 이미 1 년 전인 지난 해 1 월 11 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정전협정 당사국들이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 비핵화를 진심으로 바란다면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평화협정 체결 협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한편 이를 위해 군사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북미 평화협정은 한반도 전쟁위험 제거라는 거시적이고 전력적 목표를 위해서 중요하지만 서해 5 도 등 정전협정상으로는 그 인근수역에 대한 안전보장장치가 분명치 않은 수복지구 영토와 주민의 안전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체결돼야 하는 조약입니다.
아시다시피 1953 년 체결된 정전협정 제2조 13항에 따르면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경계선 북쪽과 서쪽에서 당시 미군이 점령하고있던 백령도와 연평도 등 5개섬을 제외한 나머지 섬들과 모든 해역은 북한측이 관할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전협정 제2조 15항에 따르면 양측 쌍방이 각각 관할하는 연해지역에서 그 어떤 군사행위도 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 달 후인 그 해 8 월 당시 유엔군사령관 클라크가 북방한계선, 즉 NLL 을 일방적으로 그어놓았습니다. 명분은 당시 정전협정에 불복하는 이승만 정권의 군대가 지나치게 북측 영토에 접근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유야 어찌됐건 이 NLL 선포는 정전협정을 위반한 행위로서 언제든지 북한측의 시비 가능성을 열어 놓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아래 어느 덧글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정전협정 제 5 조 61 항은 “각 조항에 대한 수정은 쌍방의 합의 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NLL 은 정전협정 주체인 미국과 북한이 합의한 사항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더구나 미국은 NLL 에 관해 1968 년 1 월 플레블로호 사건 직후와 1970 년대 초에 이미 NLL 이 불법임을 스스로 인정한 적이 있습니다.
근데 도대체 수복지구의 영토 영해 문제가 왜 이렇게 복잡한 걸까요?
우선 정전협정 체결 훨씬 전인 1950 년 가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1950 년 10 월 1 일 유엔군은 당시의 군사분계선이었던 북위 38 도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시작합니다. (최초 돌파 부대는 유엔군 산하 한국군 제 3 사단 23 연대)
에치슨 국무부와 맥아더 동경 유엔사 사이의 격렬한 논쟁에서 승리한 전쟁지휘 군부는 전쟁목표를 ‘북한군의 38 선 이북으로의 격퇴’에서 ‘격멸’로 바꾸고 그 북한군의 근거지나 후방 보급기지가 될 북한지역의 모든 군사-민간시설에 대한 완전파괴를 위해 전무후무한 융단폭격을 감행하게 되지요.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희생자들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 북한 지역에서 미 공군에 의해 발생한 것 입니다. (다른 이야기지만 우리 인류는 언젠가 1950 년 가을과 겨울 미국 공군전력에 의해 자행된 이 엄청난 민간인 학살행위를 반인륜범죄차원에서 심판해야 할 것 입니다.)
암튼 그 해 북진을 시작한 뒤 유엔군의 38 이북 대부분의 영토를 손에 넣게 됩니다.
근데 당시 유엔사는 이승만 정부에게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같은 논리로 정전협정 당시 유엔군이 확보한 38 이북 지역 (주로 강원도의 화천, 양구, 고성 등)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정부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다가 1954 년 여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정부에 행정권만 이양합니다. 그러니까 당시 미합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의 협정 대표들이 맺은 정전협정상으로는 이 지역이 모두 유엔사 점령지역으로서 그 시계가 1953 년 7 월 27 일로 멈춰있는 상태라는 말이지요.
양구 화천 고성 등등은 그래도 육지이기 때문에 행정권이 유엔사에서 대한민국 정부로 이양된 후부터는 애매할 게 없어졌는데 서해 5 도는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이기 때문에 그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것 입니다. 섬 자체를 제외한 수역에 대해서는 별도의 조약을 만들어 놓지 않았으니 적어도 정전협정 체제 아래서는 완전히 고립된 절해고도나 다름없다는 말 이지요.
북한의 입장에서는 제깐에 선심을 쓴답시고 이 섬들에서 남한으로 통할 수 있는 폭 20 km 정도의 수로를 해상분계선 외 지역으로 자기들의 수역에서 제외시켜 놓았던 모양입니다.
근데 정전협정 당사국도 아닌 남한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NLL 이 마치 군사분계선인양 주장하며 훈련을 한답시고 뻑하면 아무데나 포를 쏘아대니 북한으로서는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게 아니라 역사를 토대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북한으로서도 할 말이 있다 이런 말이지요.
중국의 일방적인 (?) 북한사랑에 대해서도 섭섭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국가 때 국가의 차원을 떠나 북한과 중국간의 특수한 관계를 저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정과 의리 차원으로도 바라봅니다.
중국 혁명 1 세대는 그들의 어려웠던 시기 강한 항일투쟁의식과 몸을 사리지 않는 전투력으로 중국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100 만에 달하는 재중 조선인들과 무장투쟁의 중심세력이었던 조선의용군에게 내심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가져 왔습니다.
조선과는 달리 항일민족의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했던 중국 농민들을 항일투쟁에 나서게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는데 조선 출신 독립투사들과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재중조선인들이 그들의 모범이 되어 준 것이지요.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1942 년 5 월 일본 제국육군 화북 방면군은 팔로군 중앙 지휘부 위치에 대한 결정적인 정보를 확보하고 태항산의 팔로군 근거지를 포위공격 합니다. 분지에서 불시의 공격을 당한 팔로군 주력은 폭격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에 의해 섬멸될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당시 이곳에는 등소평, 팽덕회, 좌권(이 전투에서 사망) 을 비롯해 향후 혁명중국을 이끌고 나갈 걸출한 인물들이 모두 있었습니다. 그 중요한 인물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가장 선두에서 일본군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이들이 죽음의 십자령을 무사히 빠져 나가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부대가 바로 조선의용군들이었습니다.
후에 북한의 국가검열상과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 부위원장을 지낸 김원봉의 절친한 친구인 윤세주와 그의 동료 진광화는 이 전투에서 팔로군 주력을 구출하고 자신들은 장렬한 최후를 맞습니다. (제가 재작년에 밀양을 가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윤세주의 흔적을 찾고 싶어서였고 그런 연고로 그의 단짝친구 김원봉과 그 김원봉의 평생동지 박차정 여사의 애틋한 스토리를 알게 됐습니다. 덤으로 박시춘과 아랑 귀신 누님도 그 때 밀양에서 만났지만요)
이 조선의용군 주력 대부분이 나중에 북한군으로 편제되고 그들의 옛 동지 방호산을 중심으로 인민군 제 6 사단을 편성하게 되는데 이 인민군 제 6 사단이 1950 년 6 월 28 일 창동 교두보를 돌파해서 최초로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 선봉부대입니다. 당시 남한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원수 같은 부대일 것 입니다. 사단장에서 하사관에 이르기까지 간부 거의 전원이 항일무장투쟁전선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인연으로 맺어진 이 부대는 세계 전사상 참 드문 예라고 합니다.
3 개월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이 위기에 몰렸을 때 중국이 지원군 사령부를 즉시 편성 파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그 심리적 기저에는 옛 동지들에 대한 의리라는 측면도 매우 강하게 작용했을 것 입니다.
후에 조중연합군사령관이 될 팽덕회는 당시 서북 군정위 주석으로서 혁명 후 경제재건에 집요한 관심을 가졌던 인물인데, 나름 보람과 평화가 보장됐을 그 자리를 내 던지고 혹독하게 추웠던 그 해 겨울 죽음의 전쟁터로 다시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노병은 전쟁지원기지로 날아가는 전용기 안에서 만주벌판을 내려다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팽덕회 개인으로서는 십자령 전투에서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한 그 조선 젊은이 윤세주를 떠 올리며 속으로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 이 봐 윤 동지, 이젠 내가 자네의 친구들을 도와주러 가네, 편안히 잠드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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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에 관계없이 공동체의 정의나 평화를 위해 무언가를 표현하고 비판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개인 일이 아닌 주변과 사회, 나라 그리고 인류에 대해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고 의견을 내고 봉사하고 도네이션을 하고 조직을 만들어 어떤 활동을 하고 하는 이런 모든 행위들은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 불의에 대한 공분의식, 그리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 이런 마음들과 하나로 연결이 돼 있다고 믿고 있구요.
저는 욕을 먹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항상 자기 생각을 합리적이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분들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어떤 명예욕이나 승부욕, 또는 아집에 사로잡혀서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관심과 따뜻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이렇게 ‘사람과 그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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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 그만두고, 김정일이 죽일 놈이네 이명박이 살릴 놈이네 이런 이야기도 그만두고,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 해 보았습니다.
2011. 1. 9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18:30 (MST)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