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강철대오, 자꾸 불러내서 미안해
우연히 이 노래를 찾았습니다.
지금 들으니 곡조와 가사가 약간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면서 웃음이 나는군요^^
"국민 여러분, 그리고 백만학도 여러분! 전대협이 드디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
ㅎㅎ 예, 임수경 씨 입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통과한 정전협정 이후 최초의 민간인입니다. 1989 년 8 월 15 일. 분단의 상징인 군사분계선이 무너졌습니다. 이 사건은 남북갈등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전 세계의 인식을 완전히 뒤 바꾸어 놓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당초 계획은 7 월 27 일 (정전협정 36 주년 기념일)에 걸어 내려올 예정이었습니다. 그 해 봄 소설가 황석영 씨 (3 월 20 일) 와 문익환 목사 (3 월 25 일)의 방북에 이어 세 번째 뒤통수를 맞자 거의 꼭지가 돌아버릴 정도로 격노한 노태우 정권이 길길이 뛰고 유엔사가 반대하는 바람에 7.27 판문점 도보 귀환 계획은 무산됐습니다.
당시 북한당국 역시 내심으로는 임수경 씨의 방북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청년학생축전행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환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겟지만 말이죠.
유엔사의 압력이 가중되자 입장이 곤란해진 북한당국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허담 씨를 임수경 씨가 묵고 있는 고려호텔로 보내 “판문점에서는 신변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으니 일단 출국해서 외국을 경유해 귀환하는 것이 좋겠다” 고 권유했습니다.
허담 위원장의 말을 들은 임수경 씨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창문 쪽으로 다가가더니 “판문점을 통한 귀환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 호텔에서 뛰어 내리겠다” 고 소리쳤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습니다.
임수경 씨는 판문점 귀환을 관철시키기 위한 단식투쟁에 들어갔고 이 당찬 여학생의 강철같은 고집앞에 유엔군사령부도, 외국 경유를 권유하던 북한당국도 결국 두 손을 들고야 말았습니다.
당시 스물 한 살에 불과했던 한 여학생의 당찬 행동은 그로부터 18 년이 지난 2007 년 10 월, 대한민국 대통령 부부가 함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군사분계선을 걸어 넘을 수 있게 한 남북화해의 첫 돌다리를 놓은 셈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남한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인식을 뒤바꿔 놓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이 미제와 파쇼정권의 압제아래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근데 면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난데없이 나타나서 자유분방하게 행동하는 이 남한 여대생의 모습 어디에도 헐벗고 굶주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 이지요.
고려호텔 미니바에 있는 북한산 룡성맥주가 맛이 없어서 하이네켄을 마셨다는 당당한 고백도 북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거고요.
전대협 진군가
이 노래가 대한민국을 울리던 그 시대에 이 노래는 결코 만만한 노래가 아니었지요.
…… 강철 같은 우리의 대오~총칼로 짓밟는 너~
조금만 더 쳐 다오~ 시퍼렇게 날이 설 때까지……
1980 년대 대한민국의 학생운동은 매우 특수한 양상을 띄고 있었습니다. 시위를 하는 학생이라기보다는 전투를 하는 전사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수 많은 학생들이 자기 생명을 걸고 이 전투에 임했습니다.
학생운동은 사회운동의 한 분야이지만, 당시 대한민국 학생조직은 가장 강력한 전투부대를 확보하고 있는 야전군에 해당했으므로 그들의 노래인 이 ‘진군가’야 말로 당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을 대표하던 주제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입니다.
막강하고도 광범위한 야전군의 목숨을 건 전투대형 앞에서 그 포악하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도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무릎을 끓고야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은 노태우 정권은 형편없는 약체 정권으로 그 초라한 명맥을 유지하다 1992 년 모든 것을 내놓고 물러가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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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년 남북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38 년간 쌓아온 공든탑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마치 핵전쟁 전야에라도 선 듯한 한반도 상황을 보고 있자니 열불이 나고 기가 막혀서…… ‘추억의 사건’ 이야기 하나 소개 했습니다.
2010. 12.24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