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주화 운동 ..(심장 약하신분들 금지요) 사체 사진 있슴다.
대검만으로는 모자랐던 걸까. 20일 오후부터는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사용하였다.
2시 30분경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시민들은 혹시나 자신들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TV를 통해 방영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모두 열심히 시청하였지만 TV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속극이나
오락프로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텔레비젼을 보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한 쪽에서는 죄 없이 같은 동포가 절규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저 텔레비젼의 다리를 흔들어 대는 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배신감이었다."
아...하늘이여....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에는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런 식으로 죽일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 놈들은 죽여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5월 19일
"5월 19일에 저질러진 공수부대의 만행은 어찌나 잔인했던지
진압하러 나온 경찰조차 시민들에게 울먹이면서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애원할 정도였다."
로타리 부근 전투에서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중이던 택시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부상자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기사는 안타깝게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호소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최소한 3명의 운전기사가 살해당했는데,
이는 다음날인 20일, 또 하나의 기폭제였던 차량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공수부대 병사들은 마음껏 모든 가능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였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못하도록 연발로 위협사격을 해대었다.
아직도 공수부대놈들의 사격선 부근에서 부상한 채로 살려달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애원소리는 처절했고, 이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피를 끓게했다.
공수놈들은 아직 죽지 않고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시민들을 구하려고 뛰어나가는 시민들에게조차 사격을 가해 사살해버렸다.
부근 건물의 벽에 바짝 붙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순식간에 금남로는 피와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과
주변의 건물에 숨어 보이는 사람들마다 져격하였다.
1시 30분경에는 한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윗통을 벗고 태극기를 높이 휘날리며 도청을 향해
'광주만세!' 를 외치며 달려들었다. 모든 시민들이 긴장되어 그를 응시하는
가운데 한 발의 총소리와 함께 피가 튀며 청년의 목이 꺽어졌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시민들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에 온몸을 떨었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전쟁' 이었다.
시민들은 곧 총을 얻기 위해 시내, 외의 무기고로 향했다."
5월 24일
공수부대는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학동과 진월동을 거쳐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야산으로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
인근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아이들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자 아이들은 둑 너머로 피신했지만,
전남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광범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또한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무차별 집중사격을 가했다.
모두 피신했지만 신발이 벗겨져 뒤돌아섰던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는 총에 맞고 즉사했다.
5월 25일
아침 8시, 황금동 부근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21세의 장계범이라는
사람이 도청 농림국장실에 쓰러지듯이 허겁지겁 들어닥치면서
어깨를 움켜쥐고는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쳤다.... (중략)
독침 사건이 발생하자 도청 안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살벌해졌다. 여기저기서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돌고 모두들 수군거리며 도청 안에는
불안해서 못 있겠다며 상당수가 빠져나갔다...(중략)
이 사건은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서 침투정보요원들의 도청지도부 교란작전이었다
전남대학교 교수들은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들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모든 사람들은 6.25때에도 이런 참혹한 살육전은 없었다고 울부짖으며 '모두 죽자'
'죽여달라' 를 외치며 짐승 같은 계엄군과 맨몸으로 싸웠습니다..... (중략)
고립된 우리 광주 시민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한시가 절박합니다.
민주시민이여! 민주화를 위해, 우리의 삶을 위해 일어섭시다."
5월 26일
전남 도청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미국의 일간지 <볼티모어 선>지의 기자 블레들리 마틴은
이 기자회견에서 만난 광주항쟁 지도부의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월 27일 0시를 기점으로 광주의 시외 통화가 끊기자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5월 27일
새벽 4시쯤 도청 앞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장갑자 위에 장착된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는 가운데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 통첩을 방송했다.
그러나 도청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곧 총성이 울림과 함께
계엄군의 서치라이트가 박살났다. 다시 캄캄한 어둠이
내리깔렸고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그 날 이후
광주학살의 참상을 목격한 후 서울로 올라왔던 서강대생 김의기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5월 30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글을 뿌리면서 투신 자살했다
후일,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 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사망자 수까지
합하면 전체 사망자 수는 2천명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처음부터
사상자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가 발생하는대로 트럭에 싣고
아무도 모를 곳에 파묻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