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정희 씨의 기일을 맞아......
10 월 26 일은 박정희 씨의 기일입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는 31 년 전인 1979 년 10 월 26 일 오후 7 시 40 분경, 당시 22 세의 여대생과 25 세의 여가수가 시중을 드는 청와대 옆 비밀요정에서 최 측근 세 명과 술을 마시다 그 측근 중 한 명인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가슴과 머리를 차례로 맞고 피살됐습니다. 당시로서는 한 국가의 비극이자 망신이었지요.
그가 피살된 비밀요정은 중앙정보부의 부장직속조직인 의전과 라는 요상한 이름의 부서에 의해 극비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이 시설은 그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종로경찰서는 물론이고 그 지역이 위수지역인 수도경비사령부 담당 경비단 (제 30 단 당시 단장 장세동 대령) 조차 접근이 불가능한 특수 지역이었습니다. 이 비밀부서의 책임자는 해병대 대령출신 박선호 씨였는데 자기 업무에 대한 회의와 고민이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대통령 나이의 손녀 뻘에 해당하는 여자들을 일 주일에 서 너 차례씩 발굴해서 공급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대통령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장소에서 비명횡사 한 박정희 씨의 공과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공과를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말 이지요.
백 번 지당한 말 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지도자의 공과를 평가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공적과 과오를 서로 상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1 차 대전 패전국으로서 국가적 파산에 이른 독일이 세계경제공황기인1930 년대에 승승장구한 시기는 묘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시기와 일치합니다. 이 시기에 전쟁 중 파괴된 생산시설 대부분이 복구됐고 국가의 대동맥인 아우토반이 건설됐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경제재건의 선구자로 치켜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네오나치주의자들이 아니라면 말이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폭력지배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26년이 늦어졌고, 그 26 년 (1961 년부터 1987 년 까지) 동안 철저하게 파괴된 민주사회의 문화적 토양을 재건하는데 또 수십 년을 소비했습니다. 불합리와 폭력, 부정과 권위주의의 잔재들은 2010 년 오늘도 대한민국 여기저기서 악취를 풍기며 남아있습니다. 공동체의 피나는 노력으로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요. 박정희 씨와 일부 장교들의 헌법유린행위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경제적 가치로 환산이 불가능한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남긴 셈입니다.
암튼 그 분의 기일이 다가오니만큼 머리 아픈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 분의 기구한 인생역정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운명까지 기구해졌던 사연들을 반추하며 고인을 제 방식대로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박정희 씨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분도 드물 것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분이지요. 그만큼 위기도 유달리 많이 겪었던 분 이고요.
첫 번 째 위기는 태아였을 때……
며느리와 함께 임신한 45 세 어머니는 그를 낙태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지만 실패하고 출산합니다.
두 번 째 위기는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원래 교사직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그는 사소한 문제로 교장과 다투고 실직하게 되지요. 만주로 건너간 그는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거절 당하자 ‘황국신민 멸사봉공’을 선언하고 혈서를 써서 간신히 천황군대의 장교가 되는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세 번 째 위기는 8. 15 해방,
독립투사들을 토벌하는 관동군 장교로 복무한 그에게 해방이란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을 것 입니다.
네 번 째 위기는 그가 공산주의자로서 남로당 군사책임자로 있을 때……
여순항명사건으로 조직이 노출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그는 수사실무자 김창룡 (후에 특무대장)과 백선엽 (후에 육군참모총장) 에게 사정하여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 수 백 명의 명단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사형을 면합니다. 수 백 명의 목숨이 그의 배신으로 인해 황천길로 사라진 대신 자신의 목숨만은 구명하게 되지요.
여기서 잠깐…… 전향이란 평소에 해야 그 자주성과 진의를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목숨구명 등 거래가 필요할 때 한 전향을 어떻게 진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배신이라고 합시다. 배신했으니까 나쁜 놈이다. 이런 말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말 입니다.
다섯 번 째 위기는 물론 한국전쟁……
1950 년 여름 후퇴국면에서 육군소령으로 복직되기는 했는데 후방으로만 돌아다니는 바람에 전쟁 내내 총알이라곤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당나라 유람객으로 전쟁을 무사히 넘깁니다.
여섯 번 째 위기는 쿠데타 직후.
당시 미국은 박정희를 새 권력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불법 쿠데타로 합법정부를 뒤엎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공산주의자일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지요. 재수가 없으려니 북한에서는 황태성을 특사랍시고 내려 보냅니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어린 시절 가장 존경했던 셋째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뛰어난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그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지요.
황태성 특사사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축출위기에 몰린 박정희는 형의 친구이자 자신의 멘토였던 황태성을 간첩으로 몰아 죽여버립니다. 스스로의 위기는 모면한 셈이지요.
일곱 번 째 위기는 1974 년
이 해에 긴급조치가 연달아 선포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1973 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악화된 한일관계에다 반 유신운동이 격화되고 이런 정세동향으로 인해 권력내부에 심각한 균열이 생겨 정권자체가 붕괴위험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권력균열의 한 축인 윤필용과 육사 11 기 출신 일부 장교들(당시 대령-준장급) 이후락 등을 제거하긴 했지만 권력기반자체가 엄청나게 취약해져 버린 것 이지요.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두 번 째 부인 육영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부인(김호남)이 있었는데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가 어린 여대생과 연애행각을 벌이다 전쟁직후 소령으로 복직되자, 이번에는 느닷없이 충청북도 옥천의 거부 육종관의 둘째 딸 육영수와 재혼합니다.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 씨는 이 결혼을 펄펄 뛰며 반대하고 사위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를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긴 그 시대에 어느 아버지가 애 딸린 홀애비 (그 때 그는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난 딸 –박재옥- 이 있었음)에게 고이 키운 처녀 딸을 시집 보내겠습니까?
암튼 당시 새로 개관한 국립극장에서 난데없이 날아 온 총알에 맞고 비명횡사한 그의 부인 육영수 씨 덕분에 그는 1974 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덟 번 째 위기는 1979 년 그 해 전반에 걸쳐 그의 숨통을 조입니다. 그 해 5 월 30 일 반유신강경투쟁 노선을 견지하던 김영삼 의원이 신민당 총재로 당선됩니다. 김영삼 씨는 1971 년 대선 이후 서로 반목해오던 DJ 동교동계의 지원을 받아, 체제순응노선으로 일관하던 이철승을 물리치고 새 야당총재로 등장한 것 입니다.
이 때 상황에 대해서는 제가 6 년 전에 써 놓은 아래와 같은 글이 있군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당선되던 그날 저는 왠지 모르게 통쾌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반 이 지난 어느 여름날 밤 야당 당사에서 농성 중 이던 여공(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개처럼 끌려갔을 때 이 정권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느낌은 신통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줄곧 박정희 혼자 이 나라의 국가원수였기에 다른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기 힘든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해 9 월, 멀쩡한 야당 총재를 밀어내고 정운갑 인가 뭔가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 총재직무대행이라는 직함으로 신문에 등장했습니다. 어떤 놈들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꾸몄을까 하는 게 제 관심사였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정치공작 이었지요.
뉴욕 타임즈와 기자회견을 한 야당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고 부마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박정희 씨가 죽었습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나와 아무 애증관계도 없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기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거액의 외화 밀반출과 보석밀수로 이름을 드날린 적이 있는 우리 학교의 이사장만이 전교생이 모인 채플시간에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울먹이며 호들갑을 떨어댔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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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은 공적이고 과오는 과오이듯이 역사는 역사이고 개인은 또 개인 입니다.
sarnia의 청소년 시절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한 사람의 기일을 맞아 sarnia 방식으로 그 ‘개인 박정희’를 추모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이 생전에 즐겨 듣고 불렀다는 엔카를 배경음악으로 넣어보았습니다. 친일파 어쩌구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구요.(일제차 몰고 벤또 좋아하는 sarnia 가 설마 박정희 씨가 엔카 좋아해서 친일파라고 하겠습니까?)
그냥 개인 sarnia 가 개인 박정희 씨를 추모한다는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