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정희 씨의 기일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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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정희 씨의 기일을 맞아......

sarnia 11 568

10 26 일은 박정희 씨의 기일입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는 31 년 전인 1979 10 26 일 오후 7 40 분경, 당시 22 세의 여대생과 25 세의 여가수가 시중을 드는 청와대 옆 비밀요정에서 최 측근 세 명과 술을 마시다 그 측근 중 한 명인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가슴과 머리를 차례로 맞고 피살됐습니다. 당시로서는 한 국가의 비극이자 망신이었지요. 


 


그가 피살된 비밀요정은 중앙정보부의 부장직속조직인 의전과 라는 요상한 이름의 부서에 의해 극비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이 시설은 그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종로경찰서는 물론이고 그 지역이 위수지역인 수도경비사령부 담당 경비단 ( 30 단 당시 단장 장세동 대령) 조차 접근이 불가능한 특수 지역이었습니다.  이 비밀부서의 책임자는 해병대 대령출신 박선호 씨였는데 자기 업무에 대한 회의와 고민이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대통령 나이의 손녀 뻘에 해당하는 여자들을 일 주일에 서 너 차례씩 발굴해서 공급해야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대통령으로서 불명예스러운 장소에서 비명횡사 한 박정희 씨의 공과에 대해 말들이 많습니다. 공과를 구분해서 평가해야 한다는 말 이지요.


 


백 번 지당한 말 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지도자의 공과를 평가할 때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공적과 과오를 서로 상쇄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입니다.         


 


1 차 대전 패전국으로서 국가적 파산에 이른 독일이 세계경제공황기인1930 년대에 승승장구한 시기는 묘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시기와 일치합니다. 이 시기에 전쟁 중 파괴된 생산시설 대부분이 복구됐고 국가의 대동맥인 아우토반이 건설됐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경제재건의 선구자로 치켜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네오나치주의자들이 아니라면 말이죠.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폭력지배로 인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결과적으로 26년이 늦어졌고, 26 (1961 년부터 1987 년 까지) 동안 철저하게 파괴된 민주사회의 문화적 토양을 재건하는데 또 수십 년을 소비했습니다. 불합리와 폭력, 부정과 권위주의의 잔재들은 2010 년 오늘도 대한민국 여기저기서 악취를 풍기며 남아있습니다. 공동체의 피나는 노력으로 많이 사라지긴 했지만요. 박정희 씨와 일부 장교들의 헌법유린행위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경제적 가치로 환산이 불가능한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남긴 셈입니다.       


 


암튼 그 분의 기일이 다가오니만큼 머리 아픈 이야기는 이쯤하고,


 


그 분의 기구한 인생역정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가운명까지 기구해졌던 사연들을 반추하며 고인을 제 방식대로 추모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박정희 씨처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 간 분도 드물 것 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분이지요. 그만큼 위기도 유달리 많이 겪었던 분 이고요.


 


첫 번 째 위기는 태아였을 때……


 


며느리와 함께 임신한 45 세 어머니는 그를 낙태시키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썼지만 실패하고 출산합니다.


 


두 번 째 위기는 문경보통학교 교사 시절,


 


원래 교사직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그는 사소한 문제로 교장과 다투고 실직하게 되지요. 만주로 건너간 그는 만주군관학교 입학을 거절 당하자 황국신민 멸사봉공을 선언하고 혈서를 써서 간신히 천황군대의 장교가 되는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세 번 째 위기는 8. 15 해방,


 


독립투사들을 토벌하는 관동군 장교로 복무한 그에게 해방이란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었을 것 입니다.   


 


네 번 째 위기는 그가 공산주의자로서 남로당 군사책임자로 있을 때……


 


여순항명사건으로 조직이 노출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그는 수사실무자 김창룡 (후에 특무대장)과 백선엽 (후에 육군참모총장) 에게 사정하여 군부 내 남로당 조직원 수 백 명의 명단을 넘겨주고 그 대가로 사형을 면합니다. 수 백 명의 목숨이 그의 배신으로 인해 황천길로 사라진 대신 자신의 목숨만은 구명하게 되지요.


 


여기서 잠깐…… 전향이란 평소에 해야 그 자주성과 진의를 인정 받을 수 있는 것이지 목숨구명 등 거래가 필요할 때 한 전향을 어떻게 진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배신이라고 합시다. 배신했으니까 나쁜 놈이다. 이런 말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말 입니다.


 


다섯 번 째 위기는 물론 한국전쟁……


 


1950 년 여름 후퇴국면에서 육군소령으로 복직되기는 했는데 후방으로만 돌아다니는 바람에 전쟁 내내 총알이라곤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는 당나라 유람객으로 전쟁을 무사히 넘깁니다.


 


여섯 번 째 위기는 쿠데타 직후.


 


당시 미국은 박정희를 새 권력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불법 쿠데타로 합법정부를 뒤엎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공산주의자일지 모른다는 의심 때문이었지요. 재수가 없으려니 북한에서는 황태성을 특사랍시고 내려 보냅니다. 황태성은 박정희가 어린 시절 가장 존경했던 셋째 형 박상희의 절친한 친구로 뛰어난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그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지요.     


 


황태성 특사사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축출위기에 몰린 박정희는 형의 친구이자 자신의 멘토였던 황태성을 간첩으로 몰아 죽여버립니다. 스스로의 위기는 모면한 셈이지요.


 


일곱 번 째 위기는 1974


 


이 해에 긴급조치가 연달아 선포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1973 년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악화된 한일관계에다 반 유신운동이 격화되고 이런 정세동향으로 인해 권력내부에 심각한 균열이 생겨 정권자체가 붕괴위험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권력균열의 한 축인 윤필용과 육사 11 출신 일부 장교들(당시 대령-준장급) 이후락 등을 제거하긴 했지만 권력기반자체가 엄청나게 취약해져 버린 것 이지요.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두 번 째 부인 육영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부인(김호남)이 있었는데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이가 어린 여대생과 연애행각을 벌이다 전쟁직후 소령으로 복직되자, 이번에는 느닷없이 충청북도 옥천의 거부 육종관의 둘째 딸 육영수와 재혼합니다. 육영수의 아버지 육종관 씨는 이 결혼을 펄펄 뛰며 반대하고 사위가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를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긴 그 시대에 어느 아버지가 애 딸린 홀애비 (그 때 그는 김호남과의 사이에서 난 딸 박재옥- 이 있었음)에게 고이 키운 처녀 딸을 시집 보내겠습니까?     


 


암튼 당시 새로 개관한 국립극장에서 난데없이 날아 온 총알에 맞고 비명횡사한 그의 부인 육영수 씨 덕분에 그는 1974 년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여덟 번 째 위기는 1979 년 그 해 전반에 걸쳐 그의 숨통을 조입니다. 그 해 5 30 일 반유신강경투쟁 노선을 견지하던 김영삼 의원이 신민당 총재로 당선됩니다. 김영삼 씨는 1971 년 대선 이후 서로 반목해오던 DJ 동교동계의 지원을 받아, 체제순응노선으로 일관하던 이철승을 물리치고 새 야당총재로 등장한 것 입니다.


 


이 때 상황에 대해서는 제가 6 년 전에 써 놓은 아래와 같은 글이 있군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이철승을 누르고 당선되던 그날 저는 왠지 모르게 통쾌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 반 이 지난 어느 여름날 밤 야당 당사에서 농성 중 이던 여공(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개처럼 끌려갔을 때 이 정권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느낌은 신통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줄곧 박정희 혼자 이 나라의 국가원수였기에 다른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기 힘든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 해 9 , 멀쩡한 야당 총재를 밀어내고 정운갑 인가 뭔가 하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 총재직무대행이라는 직함으로 신문에 등장했습니다. 어떤 놈들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꾸몄을까 하는 게 제 관심사였을 정도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정치공작 이었지요.


 


뉴욕 타임즈와 기자회견을 한 야당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되고 부마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박정희 씨가 죽었습니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나와 아무 애증관계도 없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렇게 기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거액의 외화 밀반출과 보석밀수로 이름을 드날린 적이 있는 우리 학교의 이사장만이 전교생이 모인 채플시간에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울먹이며 호들갑을 떨어댔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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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은 공적이고 과오는 과오이듯이 역사는 역사이고 개인은 또 개인 입니다.


 


sarnia의 청소년 시절 가장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한 사람의 기일을 맞아 sarnia 방식으로 그 개인 박정희를 추모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이 생전에 즐겨 듣고 불렀다는 엔카를 배경음악으로 넣어보았습니다. 친일파 어쩌구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구요.(일제차 몰고 벤또 좋아하는 sarnia 가 설마 박정희 씨가 엔카 좋아해서 친일파라고 하겠습니까?) 

그냥 개인 sarnia 가 개인 박정희 씨를 추모한다는 의미입니다.   


 


  

 

11 Comments
Charlie 2010.10.23 23:07  
제 생각은 위기가 한번더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유신과 71년 부정선거..
그러고보니 10/26이 바로 면전입니다.
저는 sarnia님처럼 성격이 좋치 못해 기일'이라는 말도 쓰고 싶지않습니다.
아주 친한 형님고 박정희에대해서 밤새 술마시며 끝장토론했던 기역이 스믈스믈 떠오릅니다.
아직도 살아서 활개치는 박정희의 망령을 보자치면 그냥 냉수 한사발 마십니다.
쇼와의 가오리가 물씬풍기는 엔카가 박정희씨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군요....흠..
sarnia 2010.10.24 11:41  
챨리님 안녕하세요. 자료검색을 하지 않고 기억에만 의존해 쓰다 보니 몇 군데 오류가 보여서 교정하러 들어왔습니다^^.  박정희 교사가 신경군관학교 입학이 거부되자 재차 응모하면서 지원서에 동봉한 편지에 혈서를 쓰게 되는데 그 내용이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황국신민 멸사봉공’이 아니라 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 라고 썼답니다. (1939 년 3 월 31 일자 만주일보) 박정희 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 의외인데 아마 창씨개명 (태평양 전쟁 이후 본격 시행) 이전이라 그런 것 같군요.

아, 그리고 1971 선거와 그 선거결과에 충격을 받아 돌아버린 뒤에 나온 유신...... 정말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역시 챨리님 답게요^^.

그 사람이 죽고나서 그 다음 주 화요일인가 (금요일 밤에 죽었읍니다) 전교생이 강제로 학교 근처 서대문 충정로에 있는 새마음봉사단이라는 단체 건물에 가서 묵념인지 지랄인지를 했지요. 묵념 안 하고 뻣뻣이 고개들고 서 있으니까 직원으로 보이는 웬 여자가 묵념 안 하는 아이들 (저 뿐 이 아니라 몇 명 더 있었지요) 이름을 적어가더군요.

박정희 망령...... 저는 여기서 실감하지는 못 하지만 언젠가 여론조사를 보고 좀 놀라기는 했습니다.
plantubig 2010.10.24 21:14  
요즘  모 여론조사에서  느낀 점 인데요~

나무만 보고 숲을 보았다고 할수 있을까요~?
장님이 코끼리 다리만 만져 보고  코기리는 마치 기둥 같이 생긴 동물이다 라고 했다는군요.


우리 집안은 자유당이  끝나고 5,16 군사 정부가 들어서면서  홀라당  망한 집안 입니다.

조부님은  윤 보선씨와  잠시,,,충북 청천면의 향교에서 동문수학 했던  이유로 ....
운영하던 제사공장(비단직조공장)과  비료공장을  박정희 정권에 뺐겨,,아니 그냥 줘 버렸지요.
현찰이 나오는 공장을  뺏겼으니,,
청천면 진외가 댁 부근의 蔘 밭  만여 평은 일꾼들 삯을 주지 못해  갈아 엎어버렸고,
(40여년간 묵정 밭으로 있던걸 제가 최근에  개간 했읍니다, 콩이라도 심어 볼 요량으로요.)

그리고는 중량교 뚝방에서 뭐라도 해 보시겠다고 앙고라 토끼를 수백여 두 키우셨는데
사라 호 태풍으로 토끼장과  농장이 다 날라가서 알거지가 되셨지요.
이쪽 정권과 저쪽 정권의 경계에서 속된 말로  피를 보고 쪽박을 차신 분이 제 조부 이시지요.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먹고 산다던데,,,,뭐,,,집 하나 달랑 지키며 힘들게 살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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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여고 다닐때 잠시 유신에 반대 하는 무리에 휩쓸려  다녔지요.
집안이 어려워 진게 박정희 군사정권 때문이라는 생각 외 유신이 뭔지도 모르면서 말입니다.

조계사에서 만나게 된  고대생과  연대 출신 효x스님이  제게  정부에 대해  눈뜨게 했지요.

대학 가서도 ,,  삼일빌딩 앞에서  무릎도 깨져 보고 최루탄에 눈물도 좀 흘려 보았지요.
그당시  모대 학생회장,,한때 MBC기자였던  심모  의원과도 안면을 트기도 했었구요.....

뭐 그런 시절을 보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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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가을  마지막 학기를 3달  남겨 놓고...아침 저녁으론 쌀쌀한 늦가을,,,
아침 등교 길의 버스, 라디오에서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들려오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 하셨다고 아나운서가  방송을 했는데,,
저는 잠시 서거가 무슨 뜻인지  헷갈렸읍니다.

조부님이  몰락 하신걸 순전히 박정희 군사정권 탓으로 돌렸던 저는
순간 ,,,만감이 교차 했었지요.
특히  조부의 몰락으로 괴로워 하시던 작고하신  아버지 생각에  눈물이 나더군요,

학교도 나라도 뒤숭숭하고  최 규하 정부는  진도개 1호 인지 태프콘1호 인지 발표하고,
한남동이 쑥대밭이 되고,,,,,

그런 혼란한 시기에  저는 그래도 취업걱정만 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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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으로  나라가 요즘 분주 하지요~??

우리는 어떤 시대정신으로 이 시대를  살아야 하는건지요??
과거의 망령에  사로 잡혀  원망하고 질책하고 살아야 하는건지요~??
이런 저런것도  역사의 한페이지 아니,,한줄이므로  멋진 새 역사를 창조하며 살아야 하나요??

이런것들이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던져진 숙제 이겠지요~^^/

아~~~ 여론조사와 관계없이 저는 고 노무현 대통령과 고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합니다.
이유요~~??  아직 그 분들 보다  존경하고 싶은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포스팅 잘 보고 갑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요.
sarnia 2010.10.24 21:56  
토론이란 사물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같습니다. 장님들이 만져 본 코끼리의 각 부위를 종합하다보면 사실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거니까요. 그 장님들이 불필요하게 자기가 만진 코끼리 부위만이 코끼리의 전부라고 쓸데없는 고집만 피우지 않으면 되겠지요.^^

그 MBC 기자 출신 심모의원은 1980 년 5 월 14 일 서울역 회군이라는 역사적 오명을 남긴 그 분인가요? 그 때 저는 어린 고등학생이었지만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지만 역사에 대한 면밀하고도 정확한 평가는 더 할 수 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치독일은 단지 1930~40 년대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재등장할 수 있는 개연성이 있습니다. 항상 깨어있으면서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세상사란 옳은 쪽 정의로운 쪽으로만 굴러가는 사필귀정의 원칙에 의해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수 많은 이익집단 이념집단간의 힘의 균형의 향방에 따라 그 가는 길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멋진 새역사를 창조하는 길에 반드시 함께 가져가야 할 목록들은 아주 다양하지 않을까요?^^ 챨스 1 세의 목없이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란 있을 수 없었고 짜르의 죽음없이 몰셰비키 혁명이 성공하기는 어려웠으며 루이 16 세 와 마리의 피 없이 프랑스 민주주의가 오늘을 맞이했다고는 보기 어렵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열심히 (바빠서 자주는 못 하지만^^) 이야기하고 있는거구요.
plantubig 2010.10.25 08:36  
역대 어느 지도자나 어떤 사상도 다 공과가  있지요.

19세기  당대 지식인및 사회 저층의 노동자들에게  우상처럼 받들어 지며 
유럽 몇몇 국가들의  전제주의를 붕괴시킨 원동력이었던
마르크스 레닌의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이념도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위(사회민주주의)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읍니다.

모택동도 신해혁명 후  그의 사상에 따른 혁명적인  활동이 시작 되었지요.
그의 사상과 정치적이념은 (?)은 마르크시즘이며 무산계급을  주장 했었고
결국은  중국 최고위직인 중화인민 공화국의 주석이 되었지요.

그가  만들었던 신세계는  문화혁명과 천안문사태를 겪으며
조금씩 조금씩  프롤레타리아의 망령에서 깨어나  자본주의에 눈뜨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시대를 살아가며  그 시대의  시대정신을 만들고  그 시대를 풍미했으면
그 사람의  인품이나 사상, 행위를 떠나서  비범한  사람임에 틀림없읍니다.

완벽한 조건에서 마춤식 교육을 받으며 훈련된 마춤형 지도자는 없읍니다.
악조건 속에서 그걸 뚫고 나와서  민중을 이끌었을때 위대한 지도자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몇년도에  무얼 했고, 몇년도에 어쨌고 결혼을 몇번 했고,,,
등등은 지도자의 공생에 포함 되지는 않습니다.
또 그게  민초들의  민생고에 크게  해악이 된다고 생각진않습니다.
민초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건  "밥"이지요.

지도자가 된 후,,,변절자가 되는 사람도 있는 세상인데,,,,,

참,,,이건 쓸데없는  얘기인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라 회자되고 있는 솔로몬 말입니다.

위대한 지도자이자 책략가 였고, 문장력도 뛰어나 수많은  시를  남겼고,
명석함으로  부당함과 온당함을 잘 판단해서 지혜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솔로몬도
바알이 그려진 거대한 왕궁(시전)을 건축했고 바알을  숭배하는 과오를 범했지요.
또 그의 두아들 제로보함과 르호보함도 피 튀기는 권력다툼으로  나라를 반으로 쪼개 놓았구요.


"달을 가르키니 달은 안 보고 손가락 끝은 왜 쳐다보냐"던  부처의  가르침이 떠오릅니다,


괜히,,,,주절거리다  갑니다,  죄송합니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 됩니다,  이 한 주도  치열한 한 주 되시길요~
sarnia 2010.10.25 12:14  
plantubig 님을 대한민국방에서 뵈니 분위기가 새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반갑기도 하구요. 오늘 아침엔 눈이 올 줄 알았는데 진눈개비만 잠깐 날리고 마네요.

박정희 논쟁은 개별적 존재에 대한 공과 평가가 아니라 대한민국 진보-보수진영간의 이념대립의 산물로 봐야 할 것 입니다. 모든 정치적 리더들에게는 공도 있고 과도 있다는 일반론으로 매듭지어 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는 말 이지요. 보수진영은 자신들이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문화권력을 되찾기 위해 박정희 논쟁을 촉발시켰습니다. 1960 년대에 경제인프라가 구축된 것이 그의 집권시기에 맞아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1949 년까지도 한반도를 방위선 안에 넣느냐 마느냐로 논쟁을 벌이던 미 국방성과 국무성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반공방어선을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일본 외에도 방어선 최전방에 있는 남한을 공업국가로 만드는 플랜을 짜게 되는데 느닷없는 군사쿠데타로 인해 그 담당자가 바뀐 것 뿐 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박정희 군사정권 아니었어도 60 년대의 빠른 공업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거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 있어서 그런 가정은 무의미할 뿐 만 아니라 오만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대한민국 보수진영이 박정희 정권을 ‘대한민국 정통성’과 연결시켜 이 정권의 윤리적 가치까지 부각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반발이 심각다는 점 입니다. 헌정을 유린하고 인권을 탄압한 정권이 한 국가공동체의 윤리적 가치까지 담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서는 1930 년대 나치정권 예를 들었지만 세계 어느 나라도 일정한 공이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륜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한 정치집단을 국가 정통성 모델링으로 삼지는 않습니다. 이거야 말로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칠레 사람들이 피노체트 정권을 자랑하지 않고 필리핀 사람들이 마르코스 정권을 자랑하지 않으며 니카라구아 사람들이 소모사 정권을 내세우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이겠지요.   

다만 제가 이 본문을 쓰면서 잘못한 게 한 가지 있습니다. 엔카를 집어넣고 사생활 문제를 등장시켜 불필요한 이죽거림으로 보이게 한 것이 그 예 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plantubig 님의 간접적 지적은 수용하겠습니다. 이게 정식으로 박정희 시대를 비판한 글이 아니고 추모사라는 일종의 문학적 장르를 빌렸기 때문에 제가 긴장이 좀 풀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마치 1998 년 모니카 르윈스키를 이용해 클린턴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던 깅그리치 일당 같은 짓을 제가 저지르고 말았네요.

저 역시 공인의 사생활은 공무에 관련된 평가와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확고하게 지지합니다.

댓글 감사하구요. Plantubig 님도 활기찬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좀 있다가 쿨쿨하러 들어갈 겁니다^^
plantubig 2010.10.25 15:29  
저를 비롯한 거개의 50대 주부의  관심사는 위정자의 공과나 정치적 사안이 아니고
몇 평 짜리 집에서  어떤차를 타고  주식이 얼마나 떨어졌나,,,,
추락하는 집 값이 바닥을 칠것인가,,,아니면 다시  2008년도 처럼  날개를 달 것이냐,,,
이러다가 부동산 시세 일본짝 나고  이담에 역모기지 론 도 못 받는것 아닌가,,,등등 이지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 이구요,

.저는  사회성 짙은  이슈에는 논리나  테스티머니가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하찮은 제 댓 글에  깊이있는 답글 달아 주심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애증의 폭,  존경의 폭을  더욱 넓게 해 주신 포스트  고마웠읍니다,
Charlie 2010.10.26 16:22  
가끔 생각해 봅니다.  어떤 인물에대한 사회적인 평가 정치적인 평가 역사적인 평가 인간적인 평가 등등...참 평가의 종류도 많습니다. 물론 관점들도 모두 틀리구요.

그런데 그러한 평가를 하기 위해 먼저 가장 기본적인 보편적인 관점에서의 옳고 그름의 판단이 선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문제는 그 보편적인 관점이 획일화 되어있는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달리 할것이며 그 다양성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하는데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인정하지 말자는게 제 이야기는 아니고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게 생각할수 있는 부분을 우리는 다른 관점을 덛붙이며 자신의 이기적인 생각을 덛씌우면서 문제의 핵심에서 벋어나는 이야기 즉 평가를 하게되는게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즉 "난 정치적인 문제는 잘모르지만 전두환씨 덕분에 올림픽두 잘치루고 그당시 경제성장도 상당히 했으며 그가 한강을 정비하면서 올림픽대로를 만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겠냐"하면서 그의 공덕을 치하하는 것과 별반 다를게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저에게 저런 이야기를 하시는분이 정말 몰라서 그를 저리 평가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하나를 덧 붙이자면 모 조그만한 아이티 업체의 이사직에 있는 후배가 대선전에 이명박씨의 당선을 기원하면서 "우리같이 사업하는 사람들은 말이지 이명박씨가 당선되어야해..종합부동산세 같은것도 말이지.."하면서 그를 지원하던 이야기를 하길래 제가 "너 강남에 아파트 한채라도 있냐?" 하고 되물었던 기역이 있습니다. 완전 코메디입니다.
나마스테지 2010.10.27 02:00  
네. 인생은 한 편의 코메디다, 라고.
칠레광부 구출 사건도 그렇고,..
지하에서 기 앞으로 발생할 수익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다지요 555
주식도 절대 안하고 부동산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몹시 불쾌한 나 자신을 경하합니당^^
쿤스트 베-이고 싶다.............
캐절정꽃미남 2010.11.14 19:38  
박정희(다카끼 마사오)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명박(츠키야마 아키히로:오사카 출신의 전과14범)도 없었겠죠?
세븐 2010.11.14 20:15  
한창 데모하던 시절..
경기 남부 노련..참 시게 했죠..단..님과 심..의원....

멋 모르던 시절..
3.1 고가 도로위에서 청계로로 포니 차량에
 "가자 북으로"..떡 붙이고 내려오는거 보고
집으로가.. 암 생각없이 ..떠돌았던 생각이 납니다..삼민투의 시작이었죠..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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