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겨레를 끊지 못하는 이유...
내가 두 해 넘게 지속해온 ‘우리 안의 이명박’ 이야기에 대해 여러 논평들이 있었다. 주목할 만한 건 역시 ‘사람들이 사회구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회구조가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물론 사회구조가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사회구조가 사람들을 만드는 일과 사람들이 사회구조를 만드는 일은 실은 하나다. 대통령이 아니라 최고경영자(CEO)를 원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명박 정권이 탄생한 일과, 나라가 아니라 기업이 된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녹아나는 일은 하나이며 순환구조를 이룬다는 말이다. 그런데 다들 전자는 말하지 않고 후자만 말하니 나로선 고심 끝에 ‘우리 안의 이명박’ 이야기를 한 거였다.
그 비판엔 또한 ‘사회구조에 옴짝달싹 못하고 끼여 살 수밖에 없는 대중들의 욕망을 탓해서야 되겠는가’라는 점잖은 훈계도 들어 있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훈계에서 대중을 옹호함으로써 제 불편함을 면하려는, 말하자면 줄창 이명박만 욕하면서 손쉽게 정의롭고 진보적일 수 있는 민주화 이후 최고의 정신적 안락을 놓치지 않으려는 인텔리들의 낯간지러운 욕망을 느낀다. 분명히 밝히는바, ‘우리 안의 이명박’은 애초부터 대중에 대한 돼먹지 못한 윤리 설교와는 무관한, 전적으로 인텔리들, 특히 진보적 인텔리들을 겨냥한 이야기다. ‘우리 안의 이명박’ 이야기는 교육문제에 대한 내용이 뼈대를 이룬다. 이를테면 ‘이명박의 시장주의 교육을 욕하면서 제 아이의 시장 경쟁력은 알뜰히 챙긴다’는 내용을 보자. 그건 이른바 ‘2외2공 현상’과 관련한 것이다. ‘2외2공 현상’이란 <고래가 그랬어> 식구들이 만든 풍자어로, 한국엔 아이를 일찌감치 외국에 보내거나 적어도 외고에 보내는 부모들과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도 어려워 공부방에 보내다 결국 공고에 보내는 부모들이 있다는 것이다. 정치계와 언론계와 학계에 몸을 두고 문화자본을 행사하는 진보 인텔리들의 아이들은 ‘2외’에 속할지언정 ‘2공’에 속하진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소리쳐 이명박의 교육정책을 욕하고 학벌주의를 개탄해봐야 대중들에겐 감흥이 없다. ‘저 사람들 말은 저렇게 하면서 제 자식은 감쪽같이 빼돌리지’ 하는 것이다. ‘2외’를 벗어난 진보 인텔리 부모들의 관심은 대안학교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들은 한국의 대안학교들을 거지반 망가뜨려 놓았다. 그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낸다. 그들은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되는가가 목표가 되어버린 교육현실을 뛰어넘어 아이의 대안적인 삶을 모색하는 게 아니라, 아이가 까다롭고 섬세한 그들의 취향을 자꾸만 거스르게 하는 공교육 현장을 우회하여 대학에 들어가길 바란다. 말하자면 그들이 대안학교에 기대하는 건 ‘대안적 삶’이 아니라 ‘대안입시’다. 대중들이 대안학교를 ‘귀족학교’라 비아냥거리게 된 건 단지 학비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중적 탐욕에 분이 나서다. 이명박 정권과의 싸움이야 너나가 있겠는가. 인간성을 간직한 모든 사람이 힘을 모아 싸워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안의 이명박’과의 싸움은 경우가 다르다. 이 싸움엔 순서가 있다. 누가 먼저 싸워야 할까. 모든 아이들이 모든 아이들을 상대로 싸우는 이 참혹한 검투장을 누가 먼저 탈출할 수 있을까. 대학을 못 나와서 사람대접 못 받았고 먹고살기 힘들었다는 한을 가진 부모들이 먼저 싸워야 할까. 일류대학을 나와서 반체제 운동 할 때조차도 유리했던,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먹고사는 일엔 절박함이 없는(진보 인텔리) 부모들이 먼저 싸워야 할까. 이건 이념이나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염치와 자의식의 문제다.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