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얼굴에 침을 뱉으마!
내가 수년 전부터 주목해서 관찰해온 세대가 있다...
6.25전쟁 이후로 대한민국이 가장 큰 혼란에 빠졌던
1997년의 IMF 사태 때 초, 중, 고, 대학생이었던 세대이다...
현재 30~40대의 나이로 우리 사회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이 세대의 특징은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반면
사회적으로는 무척 개인주의적이라고 어느 사회학자가 분석한 바 있다...
이른바 IMF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 세대는
묵묵히 시키는 일만 해왔던 자신의 부모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무참하게 내쫓기고
단란했던 가정이 경제적 궁핍으로 파탄 나는 일을
생생하게 겪은 세대이다...
그러한 어려움을 한창 예민한 성장기에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게 한이 되었다...
그래서 자기 것을 지키려는 욕구는 강하지만,
그 외의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매우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다소 모순된 가치관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그 사회학자의 주된 분석틀이다...
나는 그 사회학자의 분석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IMF 세대가 이중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만든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도 상당히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세대 중 특정 부류가
꽤 우려스러운 사회적 행동을 하는 게 포착되었다...
몇몇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사회 정의와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양심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인터넷, 사이버 공간의 폐해를 잘 안다...
그래서 인터넷도 최소한으로 하고 SNS는 거의 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인터넷의 최대 폐해는, 자기 검열의 부재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는 자체 검열을 통해
어느 정도 순화된 언어와 행동을 한다...
만약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거나
손찌검을 한다면 그 사람은 즉시 왕따 당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전력이 있는 사람은
다음부터는 그런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안 그랬다가는 당장 퇴출된다는 걸 본인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는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내세우며
자체 검열 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글들이 너무나 많다...
인격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글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장 기초적인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거나
아니면 일부러 왜곡하는 글들도 무수히 많다...
진실을 잘 알고 그것을 지키려는 사람이나 집단이
그런 왜곡을 일일이 찾아내서 바로잡지 않는 이상,
그러한 왜곡은 시간이 지나면 진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장황하게 지껄이는 건,
대한민국방의 몇몇 꼴뚜기들 때문이 아니다...
최근 모 개그맨이
삼풍백화점 사고 최후의 생존자를 비하하는 방송을 했다...
사회적 비난이 빗발치고 그 생존자로부터 고소를 당하자
그 개그맨은 즉시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고
생존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30초를 기다렸느니 3시간을 기다렸느니 하는,
본질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문제가 화제가 되더니
‘웃기려고 한 말이니 이제 그만 용서하고 고소를 취하해라’
라는 말까지 나돈다고 한다...
삼풍백화점이 어떤 사고였는가?
당시 대한민국의 총제적 부실을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었던가?
빨리 빨리로 상징되는 이른바 고속성장의 신화 속에서
멀쩡해야 할 한강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 건물이 폭삭 주저앉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일들이 벌어졌던 게
불과 수년 전의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이 이만큼이나 유지하고 있는 것은
특정 정치인이 잘하고 특정 기업주가 뛰어나서가 아니다.
독재 권력의 살인적 억압과
악덕 기업들의 폭력적 착취 속에서도
묵묵히 일만 해오다가
다리 끊겨서 빠져 죽고
건물 무너져서 깔려 죽고
직장 짤려서 가정 파탄 나고
그렇게 바보처럼 살아온 대다수 국민들 때문이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라
나는 박정희를 그리워하고 박근혜를 애틋하게 여기는
일부 노인 분들은 차라리 애잔하다...
그런데, IMF 세대는
어느 정도 민주화된 세상을 살아온 세대들이다...
독재나 착취와는 거리가 먼 세대이다...
이전 세대보다는 밝고 건전해야 할 세대이다...
대다수의 30~40대는 건전하고 상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 일테면 삼풍백화점 최후 생존자에게
‘이제 그만 용서하고 고소 취하해라’고 말하는 자들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생존자는 그야말로 죽다가 살아나온 사람이다...
그런 생존자를 개그맨은 ‘웃기기 위해서’ 비하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웃기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없는 자리에서는 대통령도 욕한다는데,
웃기기 위해서 삼풍백화점 생존자를 소재로 삼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개그맨은 웃기는 게 직업이다...
즉, 남을 웃겨야 돈을 버는 사람이다...
개그맨은 자신의 수입,
즉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삼풍백화점 생존자,
즉 자신보다 상대적 약자를 비하한 것이다...
일반인이 대통령을 욕하는 건
개인적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 아니다...
나라 좀 잘 이끌라는 표현의 오버일 뿐이다...
대통령 개인은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그런 비난은 대통령 자리에 있는 이가
감당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신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상대적 약자를 비하하고 조롱하고 짓밟는 행동은
사회 정의 차원에서 마땅히 비난 받을 짓이다...
글구 그러한 상황에서 용서를 하고 말고는
오롯이 피해 당사자만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생존자가 무려 17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꼼짝도 못하는 상황에서
실시간으로 느꼈을 죽음에 대한 공포와 고통을
그 어느 누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인가?
IMF 세대들이 이전 세대와는 다른 차원의 고통으로 인해
무척 힘든 성장기를 보낸 건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사회적으로 자리도 잡고 나니
사회적 발언도 하고 싶고 자기주장도 펴고 싶은 것도 이해가 간다...
아픈 성장기에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았고
혼자서 그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것에 대한
서운함이나 억울함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회 정의라는 게 있고
인간으로서의 양심이라는 게 있다...
아니,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도
최소한의 자기 검열이라는 것도 있다...
삼풍백화점 최후 생존자에게
‘이제 그만 용서하고 고소 취하하라’고 하는 이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면
그 얼굴에 침을 뱉어주고 싶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네가 정말 욕해야 할 사람은
튼튼한 다리 짓고 건물 올리는데 써야 할
국민들 세금 삥땅쳐서 부실공사 하는 바람에
무고한 사람들 죽게 만든
바로 그 놈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