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있었기에 경제 발전이 가능했을까?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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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있었기에 경제 발전이 가능했을까? 1편

호루스 2 248

박정희의 경제 개발에 대한 논의는 두가지로 함축된다.

 

하나는 긍정이요 무한한 찬양, 하나는 부정이요 이미 IMF의 씨앗을 배태시킨 사이비 경제발전이요, 그가 아니더라도 경제 발전은 가능했고, 오히려 그가 없었더라면 IMF도 없는 더 나은 경제 발전을 했을수도 있으리라는 강력한 부정.

 

그냥 혼자 생각해온 잡설을 풀어보자.

 

* 고등학교 1학년의 추억

 

담임은 목적을 위한 철저한 폭력주의자였다.

'니들이 대학 못가면 인문고 나와서 뭐할래? 그냥 쓰레기일 뿐이야.'

'머리에 똥만 들어찬 자식들.'

'나 아직 젊어, 니들 두들겨 팰 체력은 충분하다.'

 

그는 매일 저녁마다 반에서 공부 좀 하는 애들 선발해서 각 과목을 판서해서 시험을 보았고 80점 밑으로는 벌금 100원씩을 걷었다.

 

또한 80점 미만, 76점은 1대, 72점 2대, 68점 3대...식으로 엉덩이를 몽둥이로 두들겼다.

 

컨닝? 공모? 꿈도 꾸지 못했다. 고1이라 각 중학교에서 왔으니 친분도 없고, 무작위로 답안지를 교환해서 채점했으며, 입학식 첫날부터 싸대기 신공을 발휘하여 분위기를 다잡았으니 말이다.

 

입학식날 그의 욕질과 싸대기질에 난 '고등학교는 다 이런가? 학교가기 싫어진다.' 뭐 이런 생각뿐이었으니.

 

더구나 막 입주가 시작된 동네라, 반 정원이 45명에 불과하고, 12개반 뿐이었다. (당시 서울 강남 지역의 고등학교는 15개반 60명, 한 학년 900명 정도가 일반적이었다.)

 

국가로 따지면 네덜란드 수준의 중소규모라 지휘통제가 용이했다는 의미다.

 

국영수는 80점 넘기가 쉽지 않으니 몽둥이질 하기가 쉽지 않다. 3월의 쌀쌀한 날씨에서도 땀을 뻘뻘 흘려가며 몽둥이질을 한대도 생략하지 않고 매일같이 하는 것도 정성이긴 하다.

 

결국 100원이 쌓이고 넘쳐서 그 돈으로 등사기를 사서 판서로 문제를 내는 대신 등사로 진짜 시험지를 만들어서 매일 시험을 쳤다. 이후 내는 돈은 잉크와 종이값이 되었고.(지금 생각하니 분명히 돈이 남았을텐데...그 떡고물은 누가 먹었을까? 돈 사용처에 대한 공개는 없었다.)

 

그 덕분에 우리반은 언제나 학년에서 1등, 그것도 간발의 차이가 아닌 항상 2점 이상 높은 심하면 8점도 높은 우수한 수학능력(?)을 과시하게 된다.

 

부수적으로 담임이라는 보스몹을 공동의 적으로 둔 학급 친구들은 결속력이 좋아서 내 기억으론 고등학교 생활중 동료간 우애가 가장 좋았다.

 

결국 고3이 지나 연락을 해보니 오리지날 멤버 45명 중(추후 입주가 시작되어 60명까지 정원이 늘었다.) 재수를 하거나 재수없이 모두가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놀라운 일 아닌가? 전문대도 아닌 4년제 대학에 학급 전원이 진학하다니, 학교에서야 서울대를 몇 명 보내냐가 중요하겠지만, 학생 개개인에 대한 인생에 대한 영향이라면 좋던 나쁘던 모두가 대학 진학에 성공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는 우리와 함께 2학년, 3학년 담임을 계속 해 나갔지만, 1학년 때처럼 약발이 듣진 않았다. 애들도 이젠 익숙해졌고, 그도 매일같은 몽둥이 찜질은 힘에 부쳤기 때문이리라.

 

그는 술을 좋아해서 수업에 술냄새를 풍기며 들어오기도 했고, 돈봉투를 밝힌다는 소문도 돌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 덕분에 45명 중 20명을 제외한(대략 그 정도가 우리학교 평균의 대학 진학 수준) 25명에게는 고졸 학력을 대졸 학력으로 만들어준 은인이었으니.

 

그리고 그의 훈육 방식은 분명한 한계점이 있었는데...대학을 못가거나 하위권 대학을 갈 수준을 하위권 대학이나 중위권 대학으로 밀어올리는데는 성과가 있었던 반면, 상위권 대학을 갈 수준의 아이들은 여전히 그 수준이지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는 점(즉 연고대 수준이 서울대 수준은 못된다는 점), 그리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의 무대뽀식 훈육은 거의 먹혀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걸 우리나라에 대입해보면, 완연한 경제파탄 수준의 무식한 수준의 국민들을 채찍질해서 먹고살수 있는 수준까지는 어찌어찌 밀어올릴순 있었지만...그의 강압식 통치는 세월이 지날수록 국민들에게 내성이 생겨 먹혀들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중진국 중에서도 상위 클라스에 다가갈수록 전혀 경제 성과를  내지 못한 점에서 유사성을 볼수가 있다.

 

내 작은 경험에서 나온 추론이지만, 만약 그가 유신을 선포할 지점에서 퇴장하고 문민통치로 바톤을 바꾸었다면, 아마 지금쯤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이상이 30대 전반기까지의 경험과 배움으로 해석해본 박정희의 경제발전 성과에 대한 평가...

 

이후 3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까지 나의 박정희의 경제 발전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이야기는 2편으로 넘기자.

 

2 Comments
sarnia 2014.09.15 22:14  
흠,, 이 문제는 이렇다할 결론을 내기가 참 어려운 문제로군요.
제 개인적인 추론은,, 1970 년대 대한민국 경제인프라가 질적인 변화를 이룬 사건은 매우 일회적이고도 우연적인 사건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우연성의 중요한 요소 중 유신독재를 빠뜨릴 수가 없겠고요.
유신독재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관료들의 의한 은행과 자본지배인데, 그 목적은 그들이 구상하고 있었던 명치유신식 자본투자, 즉 5 대 기간산업을 만드는 것이었지요.
2 년 전인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한 백년전쟁을 보면 유신독재의 경제개발정책을 미국이 지도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건 솔직히 잘못된 이야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미국은 중화학공업 투자가 무모한 짓이라고 반대했을 뿐 아니라, 삼성 현대 등 대기업들도 유신독재의 강압적 투자강요가 아니었다면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았을거라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습니다.
당시 실패가능성이 거의 백프로에 가까운 모험을 했다는 점에서, 유신독재의 경제개발플랜을 도박이었다고 표현한 적이 있고, 경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플랜을 밀어부친 박정희 씨를 노름꾼으로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박정희가 있었기에 경제개발이 가능했다.. 라기 보다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매우 우연적 요소들이 기적적으로 작용하여 성과를 내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박정희가 있었기에 경제개발이 가능했다,, 라는 말이 단순한 논리이듯이, 거꾸로 다른 사람이 당시 정권을 잡았어도 지금과 같은 한국경제의 질적 변화가 가능했다는 말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960 년대 에서 오늘에 이르는 코리아 경제발전과정에는 반증이 불가능할 정도로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 존재하니까요.
2014.09.15 23:36  
웃긴 건 이북도 마찬가지였다는 겁니다. 소비에트가 절대 중화학공업 하지마라고 했죠. 김일성이 고집으로 밀어붙인 결과가 지금의 로케트, 핵개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작용도 엄청났죠. 이제야 핵이 있으니 경공업에 집중해 소비재를 부족하지않게 생산하겠다고하니 지금까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는지 알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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