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년 후, 파시스트들에게 나라를 넘기지 않으려면......
필리핀 님의 좋은 분석 감사합니다. 답글로 달기에는 내용이 길어 새 창을 연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쓰다보니 필리핀 님의 분석에 대한 답글이라기 보다는 다른 주제 이기도 하구요.
저는 한국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현장감각을 토대로 정세분석을 한다는 것이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2007 년12 월 대선 국면에서처럼 한국의 친구들과 대화망을 유지하며 이번 지방선거에 관심을 집중해 온 것도 아니어서 이번 선거결과에 대해 무슨 말을 보태는 것 자체가 좀 외람된 감이 들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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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단 기분은 좋습니다. 2006 년 5 월 그 끔찍한 완패에 이어 2007 년 12 월 중앙권력이 날아갔던 참담한 사태를 생각하면 격제지감이지요. 저는 2007 년 대선 패배 후 당시 ‘1980 년대 사고방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진보진영’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친구들에게 보낸 적이 있습니다.
차라리 생물학적 생존본능과 윤리가 충돌할 때 생존본능을 택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행동양식이고 이번 선거에서 그 보편적인 행동양식을 보여준 것이라는 어느 복음주의 목사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굳이 장일조 교수의 욕망과 충족의 변증법을 동원해 증명하지 않아도 동의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겉으로는 종부세에 찬성하는 척 하면서 결국 집값 올려 줄 후보에게 몰려간 한국의 3-40 대 가 이를 멋지게 증명해 주었습니다. 답은 아주 가까운데 있는데 쓸데없이 멀리 돌아가기를 좋아하는 진보진영의 활동가들과 인텔리들이 그저 복잡하게 머리만 굴리다 보니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소리를 다 하면서 이명박 당선자가 아닌 대한민국의 선거대중을 씹어댔을까요?
이명박 정권이 이번 선거에서 치명상을 입은 이유는 단지 단체장 선거에서 수리적인 완패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로서는 결코 져서는 안 될 부문에서 패배를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교육 쟁점을 정치-이념적 대결국면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한 경기도 교육감 선거를 비롯하여 충남지사-경남지사-강원지사 선거가 그 사례일 것 입니다. 한나라당은 이 상징적인 대결에서 모두 고배를 마심과 동시에 그들의 텃밭인 대구 경북에서는 무소속 후보들이 선전했습니다. 한마디로 양수겹장을 당한 셈이지요.
투표율이 낮은 선거일수록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선거대중은 부동층이 아니라 비슷한 사유체계를 공유하고 있는 정치적 대중인 것 같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선거대중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중도실용보수’ 가 아니라 ‘범진보진영’과 ‘극우세력’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범진보진영이 승리한 것은 2006 지방선거 국면 때보다 지지율 자체가 높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비슷한 조건에서, 즉 부동층의 적극적 참여가 저조한 상황에서 범 진보진영에 속한 ‘적극적 선거대중’의 참여가 반대쪽 대중보다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 제가 대선 당시 끄적거려 놓은 것을 토대로 부연 설명하겠습니다.
이미 제 1 세계 형 가치대결구도로 서서히 전이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추상집단으로서의 대중은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세력으로 분화해 나가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제 의견입니다. 공통된 신념체계를 가지고 제반 쟁점에 대한 의견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으로서의 대중이 과거의 소극적인 부동층을 대체해 가고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대중이라기 보다는 의사 표현집단 또는 세력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 의사표현 집단들이 균형과 견제를 이루며 한 국가 공동체를 이끌어 갑니다.
이 집단은 중단기적인 정세변화나 선전 선동가들의 설득에 따라 자기 신념이 휘둘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자신들을 대변할 정치세력을 확고하게 지지하는 적극적 대중입니다. 때로는 그 정치집단의 엘리트들 보다 훨씬 강경하게 여론을 조성해 내기도 하고 전문가 뺨치는 세밀하고 구체적인 사유체계와 이론을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역동적이고도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지지세력’들이 등장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전자매체의 발달로 인한 지식과 정보의 폭발적인 확산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미국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한 작은 예 입니다. 2005 년 12 월 펜실베니아 주의 도버라는 도시의 교육위원회에서 창조론의 변형인 지적설계이론을 교육과정에 편입시키자는 결정이 났습니다. 주민투표가 실시됐고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이 정신 나간 기독교 근본주의자 교육위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낙선 시켰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포털 사이트를 통해 이 도시 시민 전체를 상대로 증오와 저주를 퍼붓는 댓글과 의견들이 수 십 만 건이 쇄도했고 이 무명 도시는 일약 그때부터 미국 전역을 휩쓸었던 창조론과 진화론간의 새삼스런 논쟁의 중심지가 돼 버렸습니다. 88 년 공화당 대통령 예비후보로 무시 못할 지지를 받았던 팻 로버트슨 같은 작자는 ‘도버의 주민들 당신들은 하나님의 저주가 내릴 때 기도 따위는 할 생각도 말라’는 폭언을 여기 저기서 퍼 붓고 다녔습니다.
이런 종류의 대중은 한국의 많은 재래식 정치인들이 기대하듯 설득하면 다시 돌아설 수 있는 대중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가치와 신념체계를 구축하고 적극적 정치행위를 하고 있는 이념집단입니다. 주목할 점은 어떤 의사 표현집단이건 전 연령대와 전 사회경제적 계급을 골고루 망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은 종교-이민-동성결혼-낙태-해외파병 등의 문제를 둘러 싸고 대중들간에 (정치집단 간이 아닙니다) 칼로 벤 듯이 나뉘어 져 서로 직접(간접이 아닙니다)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문화 배경을 가진 미국이나 캐나다 하고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공화당의 고정적 지지집단을, 또는 민주당 지지집단을 이번에 한나라당을 선택한 지지집단, 또는 범 진보 후보를 선택한 지지집단과 단순 비교하는 것이 무리가 있는 줄은 압니다. (솔직히 한국에 살지 않아 차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상대방의 정치세력에게 표를 주지 않을 사람들이 점점 늘어간다는 점에서 한국도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력은 단순히 진보-보수와 같은 두리뭉수리한 양대 세력이 아니라 보다 세분화된 양상으로 분화돼 나갈 것 입니다.
저는 진보진영만 분열돼 있는 것이 아니고 보수진영 역시 점점 구체적인 이념집단으로 세분화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고급정보가 대중화되면서 개인의 사물에 대한 사유체계가 정교해지고 구체적인 것으로 변화함에 따라 당연히 나타나는 현상이겠지요. 이런 현상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고무적인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보수진영의 세분화와 관련해 말하자면, 조만간 한국에서는 한나라당과는 전혀 다른 극우정당이 새로 창당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분화는 지금까지 선거를 의식하고 이합집산하던 지역당이나 선거용 당 같은 사이비 분열하고는 그 성격이 다른 이념적 분열입니다.
이 극우정당은 처음에는 적극적 반북-친미 정당으로 출발했다가 결국에는 모든 사회적인 제반 쟁점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고 국가지상주의적인 주장을 내세우는 파시즘 정당의 성격을 가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지금 이 자들은 공공연하게 탈북자들을 조직해 과거의 서북청년단과 같은 테러조직을 만들어 이른바 ‘종북좌파’를 박살내고 ‘배신자 이명박 정권을 탄핵하자’ 고 소리치며 집단광기를 연출하고 있는 중 이지요.
21 세기 개명천지에서 그런 극우정당이 출연한 들 무슨 대단한 지지를 받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뭐, 설마 그들이 집권하는 일이야 없겠지요.
암튼 ‘적극적 대중’ 뿐 아니라 ‘부동층까지 많이 참여할 2012 년 대선에서는 이 세분화된 진보-보수 양대 세력이 각각 어떻게 절묘하게 협조하고 연합하여 부동층을 설득하고 상대세력을 제압하여 중앙권력을 차지하게 될까하는 것이 핵심적 의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이루어 낸 유시민-심상정 협조는 2 년 후 대선국면에서의 범 진보진영 내부의 전략적 연대를 위해 아주 긍정적인 시금석 역할을 할 것 같습니다.
2 년 남짓 남았는데 이와 관련해 필리핀 님이 좋은 문제제기를 해 주신 것 같습니다.
추신: 서울에 형이 두 분 사는데 한 분은 대치동에 살고, 한 분은 경희대 근처에 삽니다. 형수들과 각각 통화했는데 딴 건 안 물어보고 서울시장과 서울시 교육감 누구찍었느냐고 살짝 물어봤습니다. 경희대 근처에 사는 형수는 둘 다 한씨-곽씨를, 대치동에 사는 형네 부부는 둘 다 오씨-이씨를 찍은 모양입니다. 형은 몰라도 그 형수는 옛날에 제 절대적인 사상교양(?) 의 영향 아래 있었는데 대치동 살면 사람도 변하는 모양이지요? 거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