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일 가지고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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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여행 일정 중 빠뜨릴 수 없는 코스가 브루클린 브릿지를 도보로 산책하는 것이예요. 브루클린과 맨하튼 금융구역(월스트릿)을 잇는 이 다리에서 바라보는 로어맨하튼 풍경이 볼만해요. 특히 맑은 날 해질무렵에는 저녁놀에 붉게 물든 빌딩숲을 감상하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북적여요.
브루클린 다리가 맨하튼 쪽에서 끝나는 지점 맞은편에 뉴욕시청이 위치하고 있고, 왼쪽에 금융구역이, 오른쪽에 US Attorney’s Office Southern District of New York 이 각각 자리잡고 있어요. 한국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뉴욕남부지방검찰청’ 정도로 표기할 수 있어요.
뉴욕남부지검은 세계의 심장 월가를 관할구역(jurisdiction)으로 하는 검찰청인만큼 세계최고수준의 와잇칼라범죄수사인력이 집결해 있는 곳이예요. 내년 1 월 20 일 정오 임기가 종료되는 felony (중범죄)형사 피의자 도널드 J 트럼프가 뻔질나게 들락거려야 할 장소이기도 하죠.
뉴욕 주 검찰과 맨하튼 뉴욕남부지검이 포착해 수사와 기소를 기다리고 있는 트럼프의 혐의는 중형선고가 예상되는 felony 경합범죄가 대부분이예요. 금융 및 회계부정, 탈세, 보험사기 등인데, 검찰이 처음부터 인지해서 수사를 기획했다기 보다는 트럼프의 전 개인 변호사 마이클 코언을 수사하던 중 그의 진술과 폭로에 의해 수사자료를 취득했다고 보는 게 타당해요.
마이클 코언은 트럼프의 중범죄사실에 대한 진술을 검찰에만 한 게 아니예요. 2019 년 2 월 27 일 하원 감독개혁위원회에서 매체들이 생중계하는 가운데 여섯 시간 동안 줄줄이 폭로했어요. 또 올해 출간한 자신의 저서 Disloyal 에서 더 자세하게 폭로했어요. 새로 밝혀진 혐의에 대한 수사는 물론이고, 면책특권에 의해 수사가 중지되었던 사건들에 대한 재수사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셀프사면이니 바이든 측과의 사면협상이니 하는 소리들은 미국의 사법시스템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가짜뉴스니까 귀담아 듣지 마세요. 기소는 커녕 수사도 시작되기 전인 사건에 대한 사면이란 있을 수 없고, 바이든 당선인이 각 주 사법당국 관할인 형사범죄에 대해 사면약속을 할 수 없어요. 트럼프에게 제기된 민사소송은 아예 논외로 치고요.
빼빼로데이에 Arlington 국립묘지에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는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침울한 표정으로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dumb show 를 펼쳐 보였어요. 제가 면상표정을 좀 읽을 줄 아는데, 그의 표정은 패배에 대한 상실감이 아니라, 앞날에 대한 공포와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지지자들에게 ‘나를 좀 살려달라’는 무언의 호소가 그대로 드러난,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요. 얼굴에서 흐르는 물이 빗물인지 눈물인지는 구분하기가 어려웠지만요.
13 일의 금요일인 어제, 미국 코비드-19 하루 감염확인자 수가 무려 18 만 명을 돌파했어요. 그런데도 오늘 백악관 앞에서 지지자 집회를 강행하고 있는 중이예요. Oath Keepers Militia 라든가 Proud Boys 같은 루저들이 수 백 명 모여 소란을 떨어봤자 그에게 이득이 될 건 없어요.
워싱턴DC는 전체 유권자의 93.21 퍼센트가 바이든-헤리스 팀을 몰빵지지한 대표적인 Dark Blue 도시들 중 하나인데, 집회참가자들은 그런 곳에서 MAGA 모자 쓰고 어정거리다 봉변당하지 말고, 또 남의 도시에 와서 병이나 퍼뜨리지 말고 빨리 ‘각자 고향앞으로 가’는 게 좋을 거예요. 샬러츠빌에서 처럼 사고가 나서 사람이라도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The Insurrection Act of 1807 에 의거, 트럼프에게 헌정유린을 목적으로 한 내란혐의가 추가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번 주는 하루 하루가 트럼프 최악의 날들이었어요.
그가 제기한 선거관련 소송들이 주 법원에서 줄줄이 기각되었고, 공화당 정권 출신 관료집단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Karl Rove 가 WSJ 칼럼 “그래봤자 선거결과를 바꾸지 못한다” 를 통해 트럼프에게 일격을 가한데다, 전국의 선거감시망을 가동하고 있는 연방 국토안전부(US 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 소속 CISA 와 사이버안전국이 이번 대선은 미국역사상 가장 안전하고 공정하게 치뤄진 선거였다는 입장을 발표했어요.
펜실베니아 선거소송을 맡았던 로펌 Porter Wright Morris & Arthur 가 이 소송이 승산은 커녕 로펌의 존망에 위협이 될 수 있다며 의뢰자체를 취소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이 중에서도 로펌의 소송의뢰 포기와 연방 국토안전부의 반기가 트럼프를 한 풀 주저앉힌 계기가 되었을 것이예요.
어제 8 일만에 입을 연 (트윗 말고 진짜 입) 트럼프는 뚱딴지같이 Pfizer 백신에 대해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횡설수설했는데, 자신의 운명과 관련해서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마디 남겼죠.
“Time will tell”
오늘 트럼프는 의뢰를 취소한 로펌대신 자신의 소송을 맡을 변호사로 루돌프(보통 Rudy 라고 불러요) 줄리아니를 임명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고립무원에 처해 있는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고 있죠. 루돌프 줄리아니는 노망이 난 게 분명한데, 아마 끝까지 트럼프 곁을 지켜줄 사람일 겁니다.
그건 그렇고,
며칠 전, 한국매체에서 참 한심한 뉴스타이틀을 보았어요. ‘트럼프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라는 제목이 그것이예요. 한국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대사를 패러디해서 마치 트럼프가 연방선거법과 당선인 인준절차를 활용해 치밀하게 작전을 짜고 승산가능한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식으로 기사를 실었던데 미국발 가짜뉴스를 토대로 헛된 의미를 부여해 준 전형적인 바보소리죠.
옛날에는 음모론이 꽤 오랫동안 그럴듯하게 설칠 수 있었지만 실시간으로 팩트체크가 가능한 지금은 QAnon 따위가 살포하는 음모론을 확인도 하지 않고 실어나르다간 생기는 것도 없이 바보되기 십상이니까 조심해야 되어요. 명색이 주류언론들이 그런 바보대열에 합류하면 안되죠.
내가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고, 한국과는 원수같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지난 수요일 좐 볼튼이 WP 에 기고한 글은 트럼프와 그의 눈치를 보고 있는 일부 공화당 의원들의 장래운명을 합리적으로 예측하고 있어요.
볼튼 기고문의 제목이 재미있군요. “Time is running out for Trump, Republicans coddle him” ‘공화당이 트럼프를 버릇없고 나약한 철부지로 만들었는데, 이제 그를 내쫒아야 할 때이고 만일 공화당이 지금 어정쩡 하고 있다가 때를 놓치면 저 어처구니없는 악동(트럼프)과 함께 동반자살하는 참사가 벌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주요 내용이예요.
또 그건 그렇고,,
아직 조지아 주 재검표가 남아있지만, 결국 306 대 232로 트럼프-펜스 팀은 완패했어요. 전국 파퓰러 득표차는 지금도 점점 벌어지고 있는 중이예요. 각 주 개표는 아직 끝난 게 아니고 속속 도착하는 우편투표들을 적어도 다음 주말 까지는 개표할 것 같은데, 두 후보간 차이가 곧 600 만표 차이로 벌어질 것 같아요.
스윙스테이츠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한 것 때문에 압승이 아닌 것 같은 착시현상을 일으키지만, 사실은 반-트럼프 시민연대의 압승이고 극우-루저-보수기독교 삼각동맹의 몰락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제가 지난 주 스윙스테이츠의 tight race 만 보고 바이든-해리스 압승을 예측한 이코노미스트와 NYT 등의 잘못된 여론조사를 비판하면서 그들보고 접싯물에 코를 박으라고 했는데, 이 말은 취소해야 겠어요.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예측이 사실과 근접하고 있으니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