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어떤 사람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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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은 어떤 사람인가??? 1

필리핀 3 124
“살아온 길을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2003년 3월 청와대.
이라크 파병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국방관료: 미국은 5천에서 7천명의 전투보병을 요청해왔습니다. 하지만 최소 1만명은 돼야 독립적인 작전이 가능해요. 아니면 미군의 지휘를 받아야 합니다.”
청와대의 외교·국방·안보 라인은 1만명 이상의 파병을 주장했습니다.
이 때 문재인 민정수석이 발언합니다.
문재인: “이라크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또 만일 파병을 했다가 희생장병이 생기기라도 하면 책임질 수 있습니까?”
대통령도 문수석의 발언에 공감을 표합니다.
대통령: “나도 개인적으로 파병이 마땅치 않습니다. 문수석 말이 백번 옳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네오콘을 중심으로 북한폭격이나
제한적 대북 공격설까지 나오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하지만 한반도에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어요. 미국의 요구를 외면할 수만은 없습니다.”
북핵문제와 이라크 파병.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안전.
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대통령도, 문재인 수석도,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해법을 찾았습니다.
‘미국의 파병요구를 받아들이되 파병규모는 비전투병 3천명으로,
파병성격은 전투작전 수행이 아니라
전후재건사업 지원으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방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면서
우리 장병들의 고귀한 인명피해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너무 소극적인 파병이라고 반대하는 강경파들을
문재인 수석은 설득해나갔습니다.
파병자체를 반대하는 시민사회진영을 설득하는 것도
문재인 수석의 역할이었습니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결정이었지만 파병을 계기로
북핵문제는 우리가 바라던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협조를 얻어 6자회담이라는 다자외교의 틀을 만들고,
북한폭격까지 주장하던 미국 네오콘의 강경론을 누그러뜨리면서
위기관리를 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를 회고하며 문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재인: “이라크 전쟁은 정의롭지 못한 전쟁이었습니다. 우리가 파병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국익을 위해 필요하면 파병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국가경영입니다.”
‘국가경영’이란,
개인의 가치와 신념, 그 어떤 정파적 이해보다 더 우선하는 것.
당장의 현실보다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보고 결정하는 것.
문재인은 그것을 경험하고 실천한 사람입니다.
 
청와대 입성
2003년 1월. 서울 사직동의 어느 음식점.
문재인이 노무현 대통령당선인과 마주 앉아 있습니다.
당선인이 무겁게 얘기를 꺼냈습니다.
대통령: “문변호사.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맡아주세요.”
청와대 민정수석은 여론과 민심의 동향을 살펴,
대통령을 보좌하는 핵심요직입니다.
문재인: “네? 제가요? 아니…그건 좀…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대통령: “허허, 뭐가 이렇게 뜨뜬미지근 합니까? 당신이 나를 정치에 나가게 했고 대통령까지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닙니까?”
사실 그랬습니다.
인권변호사 동료였던 노무현 변호사가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을 때
부산에서 가장 앞장서 선거 지원을 해온 것이 문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는 민주당원도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정부에서 민정수석이 맡아야 할 우선과제는
청와대의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권력기관들을 개혁하여 정치로부터 독립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새 정치의 시작은 거기서부터였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문재인은 더 이상 몸을 사릴 수 없었습니다.
문재인: “알겠습니다. 한 1,2년 눈 딱 감고 죽었다 생각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원리원칙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해서 문재인의 청와대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해결사 문재인
청와대 시절 문재인의 별명은 ‘해결사’였습니다.
골치 아픈 문제가 벌어지면 어디든지 나타났고
대개의 경우 그 문제들을 해결했습니다.
2004년 10월의 어느 날.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문재인 민정수석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청와대 뒤편 북악산을 개방하려 하는데
경호실의 반대가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북악산은 1968년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40년 가까이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민간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었습니다.
청와대 경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문수석은 묵묵히 얘기를 들은 뒤 대답합니다.
문재인: “북악산 개방,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경호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나요? 반대하는 쪽을 설득하려면 절충안이 있어야 합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북악산 전체 개방이 아닌
서울성곽 개방이라는 절충안을 내놓았습니다.
서울의 4대문을 잇고 있는 서울성곽을 개방하면
그것이 곧 북악산 개방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민정수석실이 주관이 돼서 곧장 관계기관회의를 열었습니다.
국방부와 산림청, 심지어 야당 출신의 서울시장과도 협의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7년 4월 서울성곽이 개방되고
40년 동안 갇혀있던 서울의 문화유산이
시민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일이 다 마무리되고 문화재청장이 물었습니다.
유홍준: “북악산 개방에 그렇게 적극적이셨던 이유가 있습니까?”
문재인: “우리 문화유산은 함께 보고 함께 느껴야 그 가치가 더 높아지는 것 아닙니까? 선조들이 남긴 유산인데 청와대 경호라는 이유로 언제까지 막고 있으면 안되는 것이지요.”
정치는 힘을 휘두르는 일이 아닙니다.
정치는 이해가 다른 각 집단의 의견을 조정하여
가장 좋은 방안을 찾아내는 일입니다.
무엇이 옳은가를 생각하되 그 옳은 일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경청과 끈기 있는 조율이 필요합니다.
문재인은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것이 그가 ‘해결사’로 불리게 된 이유입니다.
 
단호한 추진력
문재인은 인상도 부드럽고 말도 부드럽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부드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한번 ‘안된다’고 할 때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을 만큼 단호했습니다.
정부에서 교육혁신을 추진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정부는 입시위주의 낡은 교육 시스템과
시험성적 중심의 인재선발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교육부 관료들은 ‘개혁’을 ‘혼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설왕설래 회의가 길어지면서 교육부총리가 강수를 두었습니다.
교육부총리: “정 그러시다면 제가 사표를 쓰겠습니다.”
그때 문재인 수석이 말했습니다.
조용하게, 딱 한마디였습니다.
문재인: “그럼 사표, 쓰세요.”
좌중의 분위기는 순간 얼어붙었습니다.
문재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한없이 순하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자신이 지켜야 하는 일에는 강철 같은 심지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정부의 중점 과제 중 하나는 검찰 개혁이었습니다.
검찰개혁의 출발선은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문재인이 민정수석에 부임했을 때의 일입니다.
문재인: “이 전화는 뭐죠?”
직원: “검찰과 연결되는 전용회선입니다. 대 검찰업무가 80%나 되다보니…”
문재인: “그 회선, 지금 바로 끊으세요.”
민정수석실에는 검찰이 제공한 업무용 차량도 있었습니다.
문재인: “왜 검찰에서 차량을 지원하는 거죠?”
직원: “청와대 업무차량이 부족하다보니…”
문재인: “검찰로 돌려보내세요.”
사소한 것 같지만 문재인은 이런 것들이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런 엄격함이
법원도 검찰도 모두 반대했던 사법개혁특위를 기어이 성사시켜
사법제도 대부분을 민주적 제도로 바꾸어낸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새누리당 정권 5년,
검찰개혁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남북정상회담
문재인의 청와대 시절 가장 큰 사건은
2007년 10월의 남북정상회담이었습니다.
위기 국면으로 치닫던 북핵 문제가,
6자회담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된 데에는 우리 정부의 노력이 컸습니다.
그 흐름 속에 쌓인 신뢰를 바탕으로
비로소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상회담이 결정되고 나니 남은 시간은 불과 4개월 남짓.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이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을 맡아
양 정상이 논의할 의제와, 공동성명,
합의문에 담아야 할 사항들을 미친듯이 챙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0월 4일, 역사적인 날이 왔습니다.
대통령 내외는 마침내 노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습니다.
정상들이 웃으면 악수하는 동안
실제 합의문을 논의하는 남북 실무진들의 테이블 위는 불꽃이 튀었습니다.
특히 서해 평화지대를 설치하여 충돌의 위험을 없애자는 우리 제안이
벽에 부딪쳤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협상팀: “위원장님, 이거 큰일 났습니다. 북한 군부가 이 조항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합니다. 협상이 안됩니다. 이 조항을 빼야 할 것 같습니다.
문재인: 안됩니다. 서해상 남북 충돌을 방지하려면 그 조항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관철해야 합니다.
정상회담이 타결되기 몇 시간 전,
우리 실무진으로부터 마침내 북측과의 합의안이 날아왔습니다.
서해 평화지대 설치 문제가 합의되었을 뿐더러
우리가 추진하고자 했던 의제들이 대부분 다 담긴 것이었습니다.
문재인: “만세, 대한민국 만세”
문재인은 감격했습니다.
남북간 평화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을 놓았던 것입니다.
평화가 곧 가장 강력한 안보이기 때문입니다.
남북 대치상황에서 국가의 안전을 지키는 일은
총칼을 앞세운 위협이 아니라
남북간의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간절함으로 나랏일을 해와
청와대에 있는 동안
문재인은 치과병원의 단골손님이 되었습니다.
치과에서 드릴로 이를 가는데 그는 잠이 듭니다.
의사: “어휴~ 이제는 코까지 고시네. 제가 치과의사 20년째인데요. 치료받으면서 코골고 자는 환자는 선생님이 처음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잠이 부족했으면
입안에서 치과드릴이 돌아가고 있는데 잠이 들 수 있을까요?
청와대 시절 그만큼 그는 항상 과로했습니다.
분명 일도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일의 양이 많아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는 늘 열정을 넘어 간절함으로 나랏일을 대했습니다.
그런 간절함 때문에
문재인은 스스로를 혹사했습니다.
덕분에 열 개나 되는 이를 뽑고 임플란트를 해넣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의 발음이 부정확하고 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정확한 발음이 아름다운 것 또한 그 때문입니다.
 
“살아온 길을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3 Comments
여우야여우야 2012.12.10 13:31  
살아온 길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는 말씀 정답니다.

문재인이 살아온 길... 일단 부산저축은행 껀부터
블루문 2012.12.11 00:12  
맞습니다. 살아온 길을 봐야죠.
공주님이 받았다는 1979년인가의 6억, 공짜로 받은 집, 최근 1여년의 유체이탈 도술에, 최측근들의 끊임없는 비리, 첨예한 경제문제에 대한 해법까지..그죠..^^
여우야여우야 2012.12.11 10:36  
아직 6억 떡밥입니까?
공부 좀 더 하고 오세요
민주당에선 꺼내지도 않는 식은 떡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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