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행 보고서 (내 고향 안국동)
배경음악이 고풍스럽더라도 이해하시도록. 고향방문기를 설명해 주는 배경음악 후보들 중 단연 최고였다.
누구나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길은 즐겁다. 나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고향이라면 의례 시골 마을을 연상한다.
그래서 그런지 하다못해 부산 사람들도 자기 고향이 부산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데 서울 사람이 자기 고향이 서울이라고 말하는 건 별로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 고향은 서울 종로구 안국동이다. 어찌된 일인지 본적은 중구 서소문동으로 되어 있지만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안국동이다.
sarnia 님의 생가(?) 안국동 000번지
이 집이 40 여 년 전 내가 살던 곳이다. 그러니까 내 생가(?)인 셈이다. 2 층 테라스와 앞마당이 없어지고 창문 구조가 조금 바뀐 것 이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듯 하다. 그래서 찾는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집이니 최소한 60 여 년이 넘은 고옥이다. 주변의 나지막한 한옥들은 옛날 그대로다. 그 때는 이 집 2 층 테라스에서 남산 케이블카가 보였었다. 물론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다.
모교. 당시 교장은 조광호 선생님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안동교회 부설 안동유치원과 재동초등학교가 어린 시절의 내 모교다. 안동유치원 시절 첫 번째 죽을 고비(?)를 넘겼다. 뻑 하면 대공포를 쏘아대는 불량이웃 청와대를 둔 덕에 총소리가 생소하지는 않았지만 그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1.21 사태 당시 안국동, 청운동, 삼청동, 효자동 일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분들이라면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년 sarnia 님이 타신 8 번 버스가 중앙청 앞에서 좌회전해서 아치를 지나고 있다 (사진 출처: 내가 서울 역사박물관에 걸려 있는 사진을 다시 찍은 것임. 그러니까 저작권은 sarnia 님에게 있음)
초등학교 3 학년 때 동교동으로 이사를 갔지만 전학을 하지는 않았다. 그 때부터 8 번 (새한버스)을 타고 통학을 했다.
8 번은 당시 우이동에서 성산동 사이를 운행하는 좌석버스였는데 말이 좌석버스지 출퇴근 시간에는 운전기사가 S 자로 꺾어야 차장(안내양이라는 용어는 한참 뒤에 나온 말이다)이 승객을 안으로 간신히 밀어 넣을 수 있는 만원 짐짝버스였다.
아니, 이 쌀람들이 여기 웬일이야?
첫 로맨스의 기억이 남아 있는 창덕여고를 가 보았다.
창덕여고는 재동초등학교 대각선 맞은 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추억의 여학교 간판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헌법재판소’라는 엉뚱깽뚱한 간판 하나가 떡 하니 걸려 있었다.
누님들 그때 미안했습니다
재동초등학교의 개구쟁이들은 창덕여고 대신 약간 멀리 떨어진 풍문여고로 원정을 가곤 했었다. 이 학교를 다녔던 50 대 초 중반의 누님들이라면 하교시간에 작대기를 들고 나타나 자기들을 괴롭히곤 하던 정체불명의 그 소년들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긴 여자 중 고등학교 앞에서 행패(?)를 부리던 개구쟁이들이 우리만은 아니었다. 그 동네에는 유달리 아이들이 많았는지 초등학교들이 많았다. 우리가 똥통학교라고 놀려대던 교동을 비롯하여 청운, 경복, 수송, 삼청 등등……
이 학교 길 건너편에는 신민당 중앙당사가 있었는데 그 앞에서는 아저씨들이 작대기가 아닌 각목을 들고 패싸움을 벌이곤 했었다. 이 장면은 특히 내가 8 번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많이 목격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 동네는 애새끼들은 애새끼들대로 작대기를 들고 동네방네를 휘젓고 다니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각목을 들고 패싸움을 자주 벌였으며 한 귀퉁이 마사오씨네 집에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미친 놈처럼 공중에다 총을 갈겨대는, 한마디로 졸라 골 때리는 동네였던 것 같다.
풍문여고는 그대로 있었지만 신민당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최초로 대선에 출마했을 당시 중앙당사도 이곳이었고, 오래전 부터 노망이 난 것으로 알려진 김영삼 전 대통령이 40 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대선 출마를 선언했던 곳도 이곳이었다.
그 자리 앞에는 인사동 입구임을 알리는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일대가 다 변했지만 가장 많이 변한 곳은 인사동이다.
이름만 들어도 고리타분하던 그 동네는 이제 이 일대에서 가장 활기찬 동네가 되었고, 대한민국에서 영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잘 통하는 국제동네로 탈바꿈 해 버렸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방문했던 동네도 인사동이다. 일단 이 동네에 들어서면 마음이 편해진다. 아마 오랜 외국생활로 약간 탈 한국화된 내 정서와 문화로도 비교적 자유로워 질 수 있는 동네가 이 동네이기 때문이 아닐까.
인사동에 있는 스타벅스는 간판도 한글이다. 영어 이외의 스타벅스 간판을 본 건 처음이다. 나는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그 회사가 Zionist 단체와 무기회사들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의외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이유로 어떤 회사 제품의 매입여부를 결정하지 않는다.
내가 이 브랜드의 커피를 마시지 않는 이유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다. 커피인지 탕약인지 맛을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걷는 것이다’
아마 ‘보리와 병정’에 나오는 말일 것이다. 지금 내게는 여행이 걷는 것이란 말이 더 실감이 난다. 매년 가도 사람도 도시도 놀랄 만큼 변해버린 서울이 내게는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걸어 다녀도 피곤하지가 않다.
물어물어 찾던 박당표구사 간판이 조그맣게 보인다. 그 간판을 찾은 이유는 표구사에 볼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가게 뒷골목에 있는 8 천 원짜리 꽃게장 백반집을 가기 위해~~ 그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별미를 즐길 수 있다는 것. 내가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자주 찾는 이유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