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소리만 들으면 식은땀, 너네 어디 아프니?
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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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가 다른 곳 <에큐메니안>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같은 주제를 가지고 매체에 기고할 글과 일반 게시판에 올릴 글을 따로 작성할 수는 없으므로 같은 글을 가져오되, 예의상 최초로 글을 올렸던 매체의 주소를 링크하는 것이니 다른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8384
마음을 비우고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간단하고 소박하게 이런 질문부터 해봤다.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가장 이득을 본 집단과 가장 손해를 본 집단은 각각 어디일까?
내가 찾은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결과적으로 대박에 가까운 이득을 본 집단은 미국의 오바마 정권이다. 반면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을 정도로 손해를 본 집단은 천안함 사건 당시 일본의 집권세력이었던 하토야마 정권이다. 아마 이 답변에 토를 달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천안함 사건덕분에 대일본 통제시스템 붕괴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미국이, 이 사건에 대한 초기접근부터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럽더니 지금은 잊어버리고 싶은 귀찮은 존재처럼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는 아예 피해당사국인 대한민국의 눈치 없는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의 ‘천’ 자만 꺼내도 벌컥 짜증을 내는 형국이 돼 버렸다. 왜일까?
당시 백악관과 하토야마 정권간에 벌어졌던 갈등의 본질이 후텐마 해병대 항공기지 이전 문제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후텐마 기지이전문제는 그야말로 갈등의 현상 중 피상적인 한 부분에 불과했다. 백악관과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은 오히려 이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상대방을 가격할 도구로 사용했다 뿐이지 애당초 이 기지 이전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양측의 긴장감이 조성됐던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은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해석은 가능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후텐마 기지이전 문제’란 상대방을 가격할 칼이었는데 천안함 사건 이전에는 그 칼자루를 하토야마 정권이 쥐고 있었고, 천안함 사건 이후에는 갑자기 백악관이 쥐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일 두 나라간에 조성된 긴장과 갈등은 무슨 군사기지 이전 문제 따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보다 구조적이고 근원적인 것이었다. 일본 민주당 정권은 안보-외교전략의 대전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골자는 ‘일본의 의지에 따라 일본의 평화를 지킨다’는 개념을 토대로 ‘미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의지’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 방편으로 미국과의 동맹보다는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과 전략적 유대를 강화하는 외교 혁명을 추진해 나가고 있었다. 물론 하토야마 정권의 아시아 중시 외교가 1940 년대의 대동아공영권과는 전혀 다른 것이지만 미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미일관계는 2 차 대전 종전 이후 최악이라고 할 만큼 일촉즉발의 긴박하고도 위험한 국면을 달리고 있었다.
미국은 놀랍게도 갈등 현안에 대한 타결노력을 경주하기보다는 하토야마 정부의 축출을 목표로 한 정면돌파 공격작전을 구상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야 말았다. 하토야마 정권 8 개월을 전후해서 게재된 오바마 대통령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몇 달 동안 부쩍 늙었다는 느낌이 오는데 이것만 봐도 양국관계의 심각한 국면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다. 상황이 이랬는데도 당시 국내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기지이전을 둘러싸고 양국 관리들이 벌인 기싸움과 신경전 같은 쓸데없는 정보들만 나열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종-일 밀월과 미-일 갈등으로 동북아 정세지형이 뿌리부터 바뀌고 있었는데도 그 지각변동의 의미와 본질을 추적해서 해설한 기사는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1 년 여 전, 다시 말해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2009 년 12 월 9 일 오후 9 시. 백악관 상황실에는 분노와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완벽한 도청차단장치가 설치된 이 방에서는 이미 퇴근을 했어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해서 미국 내 16 개 정보기관 총괄책임자인 데니스 블레어 국가정보국장,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 커트 켐벨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 등 안보관계 핵심 고위관계자들이 모여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비상대책을 논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같은 시간 일본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전대미문의 희한한 사태가 전개되고 있었다. 백악관 비상대책회의가 열리고 있던 워싱턴 DC 보다 14 시간이 빠른 10 일 오전, 도쿄 나리타 공항과 하네다 공항, 그리고 오사카-간사이 공항에서는 다섯 대의 전세기가 세 군데 국제공항 활주로를 이륙하고 있었다. 세 군데 국제공항을 동시에 출발한 다섯 대의 전세기는 한반도 상공을 가로질러 서해바다를 건너가더니 약 세 시간 후 중국 베이징 국제공항에 차례로 착륙했다.
북경공항에 도착한 다섯 대의 전세기에서는 민주당 정권의 실세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을 비롯해서 그가 이끌고 온 143 명의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등 총 643 명의 일본 정치인과 고위관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정부는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에게 국가원수의 국빈방문 때나 제공되는 국빈용 방탄 리무진을 제공했고 나머지 방문객들과 수행원들을 수송하기 위해 수 십대의 고급승용차와 리무진 버스를 동원했다. 이윽고 수 십대의 공안사이드카가 앞뒤로 호위하는 가운데 기나긴 차량행렬이 저마다 경광등을 번쩍이며 북경시내에 있는 인민대회당까지 요란한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북경시내 거리의 시민들과 여행객들은 이 느닷없는 차량행렬이 도로를 질주하는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멤버들은 중-일 동맹의 역사적 신호탄이 될지도 모를 이 날의 사건을 경악과 공포에 휩싸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2009 년 12 월 29 일 자 시사IN 보도에 따르면 오자와 일행의 북경방문 약 보름 전인 그 해 11 월 27 일에는 량광례 중국 국방부장이 일본을 방문해서 도시미 일본 국방상과 회담을 갖고 ‘중-일 해상합동군사훈련’ 실시를 비롯한 9 개항을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달 후, 량광례 국방부장은 북경을 방문한 오자와 간사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군사 고위층 상호 방문, 안보 논의, 장교 및 해군함 교류' 등을 정례화하자고 제안했다.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위험수위를 넘을 정도로 악화된 시점은 2009 년 11 월 14일이었다. 그 전 날인 13 일에는 오바마 대통령과 하토야마 수상간의 정상회담이 있었는데 그 정상회담 역시 순조롭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백악관은 이 정상회담 일정을 수단으로 삼아 하토야마 정권의 반미의지의 수위를 시험해 보려고 했다. 백악관은10 일로 예정된 군부대 총기난사사건 희생자 추모제를 이유로 방일 일정과 정상회담 날짜를 하루 늦추겠다고 갑자기 통고한 것이다. 양국의 시간차를 고려하더라도 희생자 추모일정 때문에 방일 일정을 하루 늦출 필요는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 이런 요구를 한 이유는 일본에게 지금 당장 미국과 아시아 중 하나를 택해보라는 협박이 섞인 경고 겸 시험을 해 보기 위해서였다.
사정은 이러했다. 방일 일정을 하루 늦춘다는 의미는 오바마 대통령의 일본출국 일자를 11 월14 일로 하루 연기하겠다는 의미였다. 하토야마 총리는 원래 13 일 오바마 대통령을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싱가포르로 먼저 출국 시키고 나서 그 날 저녁에 싱가포르로 출국할 예정이었다. APEC 정상회의는 14 일에 시작하므로 도쿄에서 싱가포르까지의 긴 비행시간을 고려할 때 당일 출발은 무리였다. 이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일정연기를 통고해 온 백악관의 의도를 간파한 일본 정부의 대응은 단호했다. 14 일에 일왕 방문일정이 예정돼 있는 오바마를 도쿄에 남겨놓은 채 하토야마 총리는 13 일 저녁 예정대로 출국을 강행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해석하면 외국의 국가수반을 자국에 남겨놓은 채 그 나라의 국가수반이 자기나라를 떠나버린 중대한 외교적 결례이지만 그 결례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훨씬 심각한 것이었다. 미국의 무례한 협박성 질문에 일본 역시 무례한 거절로 답해버린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약 20 일전인 2009 년 10 월 23 일자 조선일보는 ‘미-일 충돌 일보직전이라는 제목아래 ‘우리를 협박하나 길들이나’ 라는 부제를 달고 양국간의 갈등 현안을 비교적 상세하게 보도했다. 조선일보의 이 날 보도에 따르면 일본은 자위대 해외파병의 근거법인 PKO협력법을 개정하려 하고 있었다, 오카다 가쓰야 외상이 전날인 22 일 행한 어느 강연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대한 지원을 줄이는 대신 유엔의 승인을 받은 평화유지활동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하토야마 정권 출범 한 달만의 일이다.
불행하게도 미-일 간 불평등 군사-외교 시스템을 바꾸어보려고 시도했던 하토야마 민주당 정권의 행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민주당 정권을 일거에 파멸로 몰아 넣은 사건 두 개가 연이어 발생한 것이다. 그 하나는 민주당 정권의 두 축인 하토야마 수상과 오자와 간사장의 비서가 도쿄지검에 의해 전격 구속되면서 정치자금 수사가 시작된 것이고, 또 하나는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일본 내의 친미-안보 여론이 우세해 지는 바람에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 밖 철수를 추진해 온 일본 정부의 계획이 무위로 돌아간 사건이다. 두 달 간격으로 발생한 이 사건들로 하토야마 정권은 치명상을 입었고, 결국 천안함 사건에 대한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있은 지 딱 13 일 만인 2010 년 6 월 2 일 사퇴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사퇴하기 5 일 전인 5 월 28일에는 기지 이전에 대한 수정안을 합의 내용으로 담고 있는 미-일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사민당 당수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穗) 소비자-저출산담당장관을 파면했다. 후쿠시마 장관의 파면은 사민당의 연정 이탈을 초래했는데, 하토야마 총리는 며칠 후 사퇴선언을 하면서 이 문제를 자신이 사퇴를 결정하게 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고 말함으로써 후쿠시마 장관에 대한 파면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자신 스스로에 대한 파면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했다.
2010 년 6 월 2 일 도쿄 AFP 퉁신을 인용한 연합뉴스와 서울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 날 중의원 회의에서 이런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의 평화는 일본 국민에 의해서 지켜져야지 미국에 더 이상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토야마 수상은 “그러나 그것이 결국 나의 시대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 고백했다.
난데없이 발생한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후텐마 칼자루를 거머쥐게 된 백악관은 지체하지 않고 하토야마 정권을 고강도로 압박해 목을 날려버림으로써 전대미문의 골치거리였던 ‘반미 일본’을 8 개월 만에 종식시켰다.
여담이지만, 지난 후쿠시마 원전 사태 당시 미국이 ‘원전폐쇄를 전제로 한 냉각기술 제공’을 극비리에 제안한 것은 하토야마 정권과의 갈등사태를 계기로 미국이 일본에 대한 핵공조 정책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저장소에 보관해 온 약 60 만 개의 폐연료봉은 국제원자력기구의 방조아래 그 동안 미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추진해 온 비밀 핵공조의 증거다.
오늘 이런 생각이 떠 올랐다. 만일…… 만일에 말이다. 대한민국 국민의 약 80 % 가 믿고 있는 대로 천안함을 수장시킨 장본인이 북한이었다면, 그런 명령을 내린 북한 지도부는 모두 접싯물에 코를 박고 자살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당시의 국제정세 속에서 무슨 보복을 하기 위해 포항급 초계함 따위에 그 위험을 무릅쓰고 어뢰를 발사했다는 군사책임자들은 모조리 국가반역죄를 뒤집어 쓰고 정치범수용소에 가야 할 지도 모른다. 아울러 그런 바보 정권이 60 여 년간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불가사의한 사실은 정치-사회학자들이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진실이란 멀리 있지 않다.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는 처음으로 되돌아가 ‘명백한 사실들’만을 가지고 상식적인 추리를 하는 게 정석이다. 진실추구보다는 상업적인 유혹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늘어놓은 엉터리 해설 기사나 여론을 유도할 목적으로 작성한 거짓말 칼럼 따위를 읽고 혼란에 빠지는 것 보다는 독자 스스로가 명백한 사실정보들에 입각해서 상식적인 추리노력을 하는 것이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데 훨씬 유용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해답을 찾아내는 논리적인 사고력과 창조적인 상상력, 기사 행간을 읽어낼 줄 아는 추리력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오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이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취득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 아닐까 한다.
2011. 04. 25 07:30 (MST) sarn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