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서른 아홉살 어느 '아줌마'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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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른 아홉살 어느 '아줌마'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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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는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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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겸 탤런트 김여진 씨가 전두환를 가리켜 학살자라고 불렀다. 진상규명도 단죄도 사과도 용서도 없이 기억 저편으로 묻혀져 가던 사건 하나를 새삼 일깨워 준 것이다. 김여진 씨는 광주항쟁이 있던 그 해 여덟 살짜리 소녀였었다.

대통령 이명박 씨는 전두환을 가리켜 ‘큰 사돈 어르신’이라고 부른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전두환의 아들 전재만의 부인은 이윤혜다. 이윤혜는 한국제분 회장 이희상의 딸이다. 이희상에게는 딸이 셋이 있는데 둘째 딸 이유경은 신동방그룹 회장 신명수의 조카며느리다. 이희상의 막내 딸, 그러니까 이윤혜의 여동생이자 전재만의 막내처제 이름이 이미경이다. 이미경은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큰아들인 조현준의 부인이다. 조현준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하나 있다. 쉽게 말해 효성그룹 회장 조석래의 동생이 그의 작은 아버지인데 그가 바로 한국타이어 회장 조양래다. 조양래에게는 조현범이라는 아들이 있다. 조현범의 부인 이름이 이수연이다. 이수연은 이명박의 딸이다. 뭐 지금 언급한 가문 외에도 거미줄처럼 엮인 혼맥으로 대한민국 명사들의 이름이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이어지는데 다 생략하고, 일단 지금까지 공부한 내용만 간단하게 총정리하면 전두환의 막내아들 전재만의 동서의 사촌 제수가 이명박의 딸인 셈이다. 그래서 이명박이 사석에서 전두환만 보면 ‘아이고! 큰 사돈 어르신’ 하면서 90 도로 허리를 꺾는 것이다.      

전두환이 29 만 원 가지고 퇴임 후 지금까지 23 년 동안 1 년에 만 원 씩만 쓰면서 굶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를 결사 보위하는 막강한 대한민국 로열 패밀리 덕분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는 지금쯤 대한민국 교도소가 아니라 반인륜범죄자들을 처벌하는 국제전범재판소 감옥에 수감돼 있어야 마땅한 자다.

암튼 그건 그렇고, 영화배우 겸 탤런트 김여진 씨가 광주항쟁 당시 여덟 살이었는데 이명박 씨는 그 해 서른 아홉 살이었다. 그러니까 이명박씨는 김여진 씨의 올해 나이에 그 엄청난 사건을 목격한 셈이다. 그는 대통령이면서도 3 년 째 광주 국립묘지를 찾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광주 국립묘지를 찾은 적이 있기는 있는데 한 번은 묘소를 참배하고 나오면서 갑자기 실성한 인간처럼 파안대소를 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었다.

김여진 씨와 이명박 씨를 비교하는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미국 이야기를 조금 하자.

그 때, 신군부에게 자신감을 심어 준 장본인은 미국이었다. 이미 기력을 소진한 공수부대만 가지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실의에 빠져 있던 전두환과 신군부에게 미국은 한미연합사를 지휘하는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지휘아래 있던 대규모 보병사단을 그들에게 넘겨 준 것이다. 5 월 21 일 도청 집단발포사건 이후 공수부대를 철수시킨 이래 의욕을 잃고 사무실로 출근도 안하고 있던 전두환에게 그 순간의 미국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5 월 27 일 광주 재점령작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신군부의 5 월 27 일 광주재점령 성공이야말로 신군부의 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견인차가 되었고, 신군부의 집권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다시 12 년이나 늦추어 놓았다.  

그 날 새벽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는 제 3 공수특전 여단 소속 11 대대 1 개 지역대로 편성된 선봉 특공조가 조선대학교 뒷산을 조용하게 출발했다. 수류탄과 M16A1 소총으로 경무장한 특공조는11 대대장인 임수원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장악 목표물인 도청과 광주 YMCA 전일빌딩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투입된 것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지쳐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특공조 지휘관 임수원 중령은 일주일 전인 5 월 21 일 정오 도청 앞에서 사수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대대장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 날 그의 부하 사병 한 명이 시위대의 장갑차에 깔려 사체가 박살이 난 채 죽는 모습을 눈 앞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공포스러웠던 그 날 낮과는 달리 오늘 새벽 그의 뒤에는 미국이 보내 준 보병사단 대병력과 대규모 화력이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엄군의 광주시 재점령을 위한 이 날의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이었다. 상무충정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특공부대로 편성된 제 3, 7, 11 공수특전여단과 공격 및 거점 장악 부대로 편성된 제 20 사단 (사단장 박준병 소장) 소속 3 개 보병연대, 외곽 포위 및 공격지원부대로 편성된 제 31 향토사단 및 보병, 포병,기갑학교 등 광주시내 주둔 3 개 군사교육기관 소속 기간병을 포함해 약 2 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특공부대가 기관총을 난사하며 도청과 전일빌딩 인근으로 난입하던 그 시간에 20 사단 소속 보병연대로 편성된 공격부대의 주력은 수 백 대의 차량에 분승한 채 전차와 APC 장갑차를 앞세우고 광주시내의 간선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GMC 트럭에 분승한 병력 중 앞 뒤의 경계병들은 M16A1 소총 총구를 보도 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광주 시내로 진격을 시작한 이 대병력을 엄호하기 위해 광주시 상공에서는 제 101 항공대에서 차츨된 일곱 대의 AH-1J 공격용 헬리콥터가 지상으로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저공비행하고 있었다. 이 공격용 헬리콥터에는 분당 750 발을 발사할 수 있는 20 mm 구경 발칸포는 물론 2.75 인치 로켓포와 대전차 토우 미사일까지 장착하고 있었다.    

그날 새벽 80 만 광주 시민은 깨어있었다. 살인면허를 받은 2 만 명의 중무장 병력이 이 도시를 에워싸고 섬멸작전을 개시하듯 이 도시로 진격해 들어왔다.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에게 제 20 보병 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 이양을 처음 요청한 것은 1980 년 5 월 16 일이었다. 광주항쟁이 시작된 시각은 정확히 1980 년 5 월 18 일 오전 10 시였으니 신군부는 광주와는 관계없이 시위진압에 대규모 군병력 투입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 보병사단을 서울에 투입할 계획이었다가 광주항쟁이 시작되자 주한미군사령부에 다시 전문을 보냈다. 사용목적변경에 관한 허가신청을 한 것이다. 5 월 22 일 주한미군사령부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의 승인을 거쳐 당시 한미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고 있었던 이 사단을 한국정부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는 허가 전문을 보내줬다.

5 월 27 일 오전 1 시에 개시된 도청 진공작전은 도박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신군부는 당시 정세분석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대규모 공격작전을 감행했다. 이 도박은 퇴로가 없었던 신군부에게는 밑져야 본전이었지만 사실 80 여 만 명의 광주시민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벌인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우려되는 이 작전을 미국은 흔쾌히 승인해 주었다.    

미국의 이 허가전문 덕분에 광주 재점령과 이후의 12 년 군사독재가 가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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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Comments
필리핀 2011.05.19 07:40  
우리의 젊은이들 중에서
5.18을 기억하는 이가 몇이나 되는지...
가슴이 답답할 뿐입니다...
sarnia 2011.05.19 07:45  
공교롭게도 제 아이 생일이 오늘 (여기는 오늘이 5 월 18 일)입니다. 그 아이는 엄마 아빠가 자기 생일 때 마다 하도 이야기를 해 주어서 그런지 조금 알고는 있답니다......
필리핀 2011.05.19 08:08  
어제 밤 늦게 홍대 캠퍼스를 산책했는데
축제기간이라서 온 캠퍼스가 거대한 클럽으로 변해 있더군요...
어제가 어떤 날인데... 하필 이날 축제라니...
sarnia 2011.05.19 15:16  
조금전에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요. 개념배우들 중엔 기절할 정도로 잘생긴 배우가 없다며 그 예로 '문소리 김여진 권해효 문성근 문근영' 등등을 드시길래, 그런가?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기절할 정도는 아니지만 김민선 이쁘잖아" 하고 답을 해 드렸어요. 말이 되는 문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오기가 나서~~

흠~ 그렇군요. 겨울방학없이 학기를 1 월에 시작해서 4 월 말에 끝내는 게......
필리핀 2011.05.19 18:43  
배우는 외모보다 연기력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요???
그분... 염불보다 젯밥에 더 욕심이 나시는 듯... ㅎㅎ
곰돌이 2011.05.19 19:04  
sarnia 님~~

여진이 언니는 올해 38살입니다.

만으로 따져서 나이를 줄여도 억울할 판에...  나이를 늘리시다니....^^;;


전두환이 학살자 인것은,  내가 알고, 네가 알고,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

당연한 말을 했는데,  난리가 났더군요...


*두환..... 

이름만 들어도,  다시 화가 치밉니다. !

sch 2011.05.19 23:18  
전두환 은 학살자 입니다 .. 노태우 또한 학살자 입니다 ...    그들과 같이 이땅에서 살아가는    저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이곳 이상한 나라에서 말입니다
sarnia 2011.05.20 00:58  
아, 아직 생일이 안 지났군요. 1972 년 출생년도만 확인했지 생일은 확인 안 했어요^^ 서른 여덟 맞습니다.  (속으로 하는 말 = 마흔인데......)

sch 님 말씀들이니 '광주 5 적' 다시 생각납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박준병 미국......

한나라당 전문위원 겸 자문위원 박용모라는 작자 결국 사퇴했군요. 혹시 양아치 출신인가요?
sch 2011.05.20 22:28  
광주 5적 그중 1등 은 미국  2등 두환이..    박용모 한나라당 간판양아치 선두주자...  아이큐 50  이하 ...  예전에  두환이 생일때 두환이 한테 넙죽 큰절올린 원희룡 의원 ....너무 기가차서 말이안나옴  공중파 탓음.... 이곳 이상한 나라에서 몆자 올림
내려놓기 2011.05.21 00:17  
아 그래서 이대통령이 5.18민주항쟁 기념식을 바쁘다는 핑계로 피해다닌 거군요. 누구 눈밖에
날까봐.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 전씨. 그런 사람 기린다고 공원(일해)도 만들어 주고 미친x 못생긴x 하면서 대신 대들어주고 ㅋㅋㅋ  그런 사람들도 대단하고. 슬픈 세상입니다.
참 개념 배우들 안이쁜 사람이 많은게 아니라 성형을 안했거나 적게한 사람이 많은듯...그리
생각하니 내눈에는 누구보다 더욱 이뻐 보이는데요. 개념이 있다보니 자기의 본모습에도 연기에도 충실한가 봅니다^^
코코마드모아젤 2011.05.21 00:36  
태국종자들에게 꼭 필요한 지도자가 전두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느릿느릿하고 만사 천하태평이고 책임감없는 태국종자들에겐 강력한 통치를 하는 전두환같은 지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지요 안그런가요?
간큰초짜 2011.05.21 10:54  
그럴줄 알았습니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아니 더 한 사람일겁니다.
타오킴 2011.05.23 23:08  
이 글의 60%정도는 사실과 많이 다르군요...『그들은 더 이상 지쳐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특공조 지휘관 임수원 중령은 일주일 전인 5 월 21 일 정오 도청 앞에서 사수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대대장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그 날 그의 부하 사병 한 명이 시위대의 장갑차에 깔려 사체가 박살이 난 채 죽는 모습을 눈 앞에서 목격하기도 했다. 공포스러웠던 그 날 낮과는 달리 오늘 새벽 그의 뒤에는 미국이 보내 준 보병사단 대병력과 대규모 화력이 든든하게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
자료를 좀 더 조사 했으면,,이런 오류는 없었을 겁니다. 또한, 『계엄군의 광주시 재점령을 위한 이 날의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이었다. 상무충정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특공부대로 편성된 제 3, 7, 11 공수특전여단과 공격 및 거점 장악 부대로 편성된 제 20 사단 (사단장 박준병 소장) 소속 3 개 보병연대, 외곽 포위 및 공격지원부대로 편성된 제 31 향토사단 및 보병, 포병,기갑학교 등 광주시내 주둔 3 개 군사교육기관 소속 기간병을 포함해 약 2 만 명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 이부분 또한 있지도 않은, 아니면 틀린 작전명을 만들어 쓰샸군요....21일의 사건이 아니라 그 며칠전에 일어난 병력동원 전투상보에 나온 것이지요..

삼가 5.18 영령들의 안식을 기도 합니다.
sarnia 2011.05.24 02:56  
상무충정작전은 계엄군의 5 월 27 일 광주 재탈환 작전의 공식명칭입니다. 5 월 22 일 백악관국가안보회의의 보병사단 사용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 특전사령관 정호용을 통해 전남북지구 계엄분소장 소준열 (전투교육사령관) 에게 공수부대를 특공조로 하는 광주 탈환작전을 계획할 것을 부탁했고, 이에 따라 소준열이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에게 지시하여 수립한 작전입니다. 원래 계획단계에서는 상무충정계획이라고 부르다가, 5 월 25 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에게 전교사에서 올라온 상무충정계획을 바탕으로 상무충정작전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고 같은 날 오후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국방장관 주영복, 육참총장 이희성, 육참차장 황영시, 수도경비사령관 노태우 등이 모여 작전명과 작전시각을 확정하게 됩니다.

백과사전에는 이 상무충정작전에 동원된 병력 수가 총 47 개 대대 2 만 317 명이었고 5 개 방면에서 잔공작전을 전개했다고 기록되어 있군요. 공수부대로 편성된 특공조는 모두 3 개로, 동원병력은 3 공수 특공조가 13/66, 7 공수 특공조가 20/181, 11 공수 특공조가 4/33 인데 목표지점은 각각 전남도청, 광주공원. 전일빌딩 이었습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임무를 맡은 도청 특공조 조장이 3 공수 11 대대장인 임수원이었습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아, 한 가지는 바로 확인했습니다. 5 월 21 일 13 시 집단발포시 도청 앞에 포진하고 있던 부대가 3 공수가 아니라 11 공수 61, 62 대대였는데, 자료확인이 아닌 대충 기억에 의존해 쓰는 바람에 11 공수여단을 3 공수 11 대대와 혼동해 당시 11 여단 소속 권용운 일병 -장갑차에 깔려 압사- 을 3 공수 11 대대장 임수원 중령의 부하로 착각했군요. 지송~)

제가 이 글에서 쓰고자 한 가장 중요한 요점은 미국이 보병 제 20 사단에 대한 사용 승인을 하지 않았다면 상무충정작전은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전투상보와 비교하면서 뭐 틀리거나 빠진 거 없나 만 검토하시지 말고 본문 논지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먼저 이해해 주셨으면......
타오킴 2011.05.24 18:41  
뭐...미국이 보병 사단의 사용을 승인 했다가 아니라...무시하고 감행한.....이 맞을 겁니다. 또 우리나라엔 공수부대란 명칭이 없고..아시란가 모르겠습니다만...미군의 직접 관할이 미치지 않는 유일한 부대가 있지요..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장 불행한 역사로 기록 되어질 그 날의 일들이..카더라라는 통신에의해서
일부 변질되고,일부 확대 재생산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무슨이야기냐 하면...
일부 사람들..좌든,우든..(이렇게 짝짓기하는게 맞는가 모르겠습니다만)
이용해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 했다는 후과도 있었군요..

미국 입장에선..대한민국은 그저 껌 값이라는데..
예전에도 그렇게 글 올린적이 있었고..지금 생각도 변함이 없습니다..

왜관 켐프케럴 일만하더래도...
파키스탄 영내를 제 집처럼 드나드는 미국을 생각하면 비슷한 느낌이 드는군요..

예민한 이야기는 그냥 가슴속에 묻어 둘랍니다.
sarnia 2011.05.25 00:45  
미국에게 대한민국이 껌값이라는 타오킴님의 말씀은, 표현에는 문제가 있지만 본질은 맞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미동맹은 미일동맹의 보조기구에 불과한 것이니만큼 미일관계는 국제관계상 심각한 전략의 변화가 없는 한 변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미국은 대한민국을 언제나 차 버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대한민국에게 독도문제가 불리한 이유는 미국이 일본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것도 다 불균형한 한미관계에서 파생하는 문제입니다.

보병사단 사용이 승인이 아닌 무시였다는 말씀은 잘못된 정보입니다. 이 말씀은 신군부가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20 사단을 사용했다는 이야기 같은데 사실과도 다를 뿐 아니라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신군부는 1980 년 5 월 16 일 이희성을 통해 주한미군사령관 위컴에게 직접 사용승인을 요청했고, 그로부터 6 일 후 지미 카터 행정부의 재가과정을 거쳐 국방장관 주영복에게 사용허가서를 보내주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영향력은 지금과는 또 다른 절대적인 것이었고 특히 명분 없는 신군부 에게는 마치 염라대왕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지요. 전두환은 자신을 개 취급하는 위컴을 비롯한 주한미군사령부의 고급장교들을 증오했지만 철저하게 이들에게 아부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위컴은 전두환에게 어떤 사건으로 인해 오해가 있었는데 1979 년 12 월 13 일 새벽 용산을 통과하다가 그 시간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무력 점령한 박희도 휘하의 제 1 공수특전여단 병력에 의해 피격 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전두환을 참 싫어했었지요. 그는 1982 년 어느 기자회견에서 한국 국민을 들쥐에 비교한 적이 있는데, 국내에는 그 사연이 좀 잘못 알려졌었습니다. 그의 발언은 한국 국민 일반을 모욕했다기 보다는 전두환의 집권과정에서 언론과 기업 등 당시 대한민국 여론 주도층이 전두환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재집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인 한탄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적절한 표현은 아니었고 모욕적인 언사인 것 만은 분명하지만 이런 사연도 있었다 하는 걸 말씀드리고 싶군요. 

암튼 역대 대통령 중 미국에게 가장 굴욕적인 대우를 당한 대통령이 바로 전두환인데 그는 그런 굴욕적인 대우를 당하면서도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정통성 없는 정권이니 기대고 의지할 데라곤 미국밖에는 없었으니까요.

전두환의 입장에서 굴욕의 대표적인 사건은 1987 년 6 월 19 일에 일어났습니다. 그 날 전두환은 레이건의 친서를 가지고 온 주한미국대사 릴리를 만났는데 릴리가 돌아가고 난 직후 곧바로 청와대 집무실로 약속도 없이 찾아 온 존 스타인 CIA 서울 지부장과 리차드 킴이라는 한국계 CIA 관리에 의해 거의 연금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가지고 온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당합니다.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집무실에서 말이지요.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은 안현태였는데 그가 몰라서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들이 가지고 온 문서의 내용은 직선제 개헌 등 당시 국민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시간 위수령 발동에 대비해 서울 시내를 향해 사전 출동하고 있던 충정부대 제 26 사단 선발대가 미 제 2 사단 소속 기갑부대에 의해 무력으로 진군이 차단당했습니다. 이날 충정부대가 사전 출동한 이유는 6 월 18 일 부산시위를 보고 겁에 질린 전두환이 즉시 육군참모총장 박희도와 부산 지역을 담당하는 제 2 군 사령관 이종구를 불러 위수령을 선포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CIA와 주한미군사령부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전두환은 서울 부산 등 일부 도시에 위수령을 선포하고 군부대를 출동시켰을 것이고 제 2 의 광주의 비극이 서울과 부산에서 재연됐을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6.29 선언이 전두환이 고심을 해서 노태우에게 권유한 것인 양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이는 나중에 전두환의 지첩� 받은 청와대 공보수석 이종률과 통치사료비서관인지 하는 직함을 가진 김성익이라는 두 작자가 그럴 듯하게 이것 저것 암시하며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제 생각에는 미국이 전두환을 설득하면서 3자 필승론을 (DJ 와 YS 를 분열시키면 노태우가 이긴다) 이야기했을 것 같은데 아직 그런 증언은 나오지 않았으니 모르는 일이겠지요.

암튼 전두환이 미국을 무사하고 무엇을 강행했다는 말씀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이기에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아마 노무현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타오킴 2011.05.27 17:47  
속 발혀지는 부끄러움이 생깁니다...
다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혼자의 개념은 죽고 싶다는 자괴감이 드는군요...

기실..
다 아는식의 이야기는....쫌 그랬습니다,,,,

저가 당사자이고,,,
저가
그런이야기 저건 이야기 썻으면 모르지만...
안타까워요,,,,

우리는 그냥 한 역사의 흐름에 겹쳐사는 평민입니다..
이것이 맞다,,,
저것이 맞다라고 이야기 하기에는...
단지 약한 사람일 뿐이지요

좋은글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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