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놈이 주범인지 구별부터 똑바로 해야......

홈 > 커뮤니티 > 정치/사회
정치/사회

- 정치, 사회, 경제, 종교 관련 글을 올리는 곳입니다.
- 게시물은 매주 2개까지 올리실 수 있습니다.


어떤 놈이 주범인지 구별부터 똑바로 해야......

sarnia 6 588
유튜브는 펌
-----------------
 
며칠 전 온라인에서 어떤 분이 “‘광주사건은 미국이 주도한 국제정세의 산물이었다는 흐리멍텅한 소리를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상중(喪中) 이므로 이런 소리에 핏대를 올리면서 반박할 사정은 아니지만 조금 정리할 필요는 있겠다 싶어서 글을 올립니다.
작년에 제가 서른 아홉살 아줌마 고마워요’ (김여진 님의 전두환 발언과 관련해서)라는 글을 올렸을 때 벼라별 댓글이 다 달렸었습니다. 그 중에는 광주학살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강조한 것도 있었는데, 일리있는 부분도 있으나 대부분 미국의 역할에 대한 나이브하고 터무니없는 확대해석으로 이 사건의 역사적의미의 본질을 흐려버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긴박하게 전개되는 어떤 사건이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같은 큰 틀을 짜는 상부조직의 사전플랜에 따라 아귀가 딱딱 맞게 진행되기 보다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하부집단간의 권력투쟁의 전개동향에 따라 사건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미국이나 주변강국의 이해에 따라 남한의 군부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는 해석은 내릴 수 없는 것 입니다. 미국은 미국이고 전두환 그룹은 전두환 그룹입니다. 복수의 비대칭 권력집단이 각각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한 이해부터 명확히 해야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와 연결부분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입니다.    <?xml
사건 전개의 구체적인 일정이나 디테일한 정보들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광주사건은 국제정세의 산물이라느니 전두환과 민주화 세력의 대립이 본질이 아니라 카터의 재선을 위한 목적이 지대했다느니 운운하는 것은 하나도 의미있는 발언이 아닙니다. “아고라방 가면 자료얻을 수 있다는 말도 황당한 소리입니다.
 
저는 아고라방이라는 곳을 최근 5 년 간은 들어가 본 적이 없으므로 그 곳이 뭐하는 방인지 긴가민가하지만 광주항쟁에 대한 자료란 그런데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보도기사부터 검색해서 현대사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어왔는지부터 파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짧게는 1979 5.30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타협파인 이철승 당권이 무너지고 김영삼 체제가 김대중계의 지지를 바탕으로 출범한 사건부터, 그 해 8 11 일 일어난 YH 사건-김영삼 제명-10.26- 12.12사태- 안개정국- 전두환 중정 접수- 5.14 서울역 회군- 5.17 비상계엄 확대- 광주항쟁- 국보위 출범- 최규하 하야- 전두환 정권 출범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그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가가 좀 더 분명해 집니다. 최근 공개된 미국 국무부와 CIA의 기밀전문들은 새삼스런 것들이 아니라 이미 이런 흐름 속에서 뻔히 파악되어져 온 것들을 문서상으로 확인한 것에 불과 합니다. 
판타지 소설을 의미있는 통찰로 바꾸려면 개별사건에 대한 면밀한 의미부여와 각 사건간의 연관성이 무엇을 뜻 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

미국이 광주학살을 승인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선 백악관국가안보회의가 광주 무력진압을 승인한 날짜는 1980 5 22 일 입니다. 이 날은 모두 아시다시피 초파일의 유혈극이라고 불리우는 도청 앞 집단발포사건이 일어난 5 21 일 다음 날이었습니다. 이미 전 날, 5 21 일 저녁부터 광주시 전역은 시민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크게 당황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이 때부터 광주항쟁 무력진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는데 최초의 개입행동이 바로 한국군 보병 제 20 사단을 한미연합사의 통제에서 풀어 준 것 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측은 보병 제 20 사단의 사용승인 신청을 광주항쟁이 시작되기도 전인 5 16 일에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을 통해 미국측에 해 두었는데 내내 승인을 해 주지 않다가 광주시가 시민군의 손에 떨어지자마자 그 승인을 해 주었다는 것 입니다. 이 말은 애당초 신군부가 20 사단을 서울에 투입하기 위해 사용승인신청을 했는데 승인을 미루고 있던 백악관이 광주시가 시민군에게 점령되자 승인을 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실 당시 미국이 당면한 가장 큰 해외문제는 한국시위사태가 아니라 주 테헤란 미국대사관 인질구출작전 실패였습니다. 이 사건이 제 기억으로는 바로 그 해 봄에 일어났고 카터임기 말에 미국의 제3세계 통제체계가 도미노처럼 붕괴되는 사상최악의 외교위기에 봉착한 시점이었습니다. 대외정책을 보수화하고 반공쿠데타를 재지원하기 시작한데는, 또 광주재탈취작전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로 한데는 그 해 한꺼번에 벌어졌던 제3세계 통제위기가 큰 역할을 했을 것 입니다.

어쨌든

백악관 국가안보회의는 1979 10 26 일 저녁 7 40 , 섹스파티를 앞두고 있던 박정희가 느닷없이 피격 사살되자  즉각 한반도 비상대책반 일명 Cherokee 를 구성해서 운영해 왔습니다. 이 비상대책반 멤버는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차관, 리챠드 훌부르크 국무부 동아시아 태평양담당 차관보,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등 모두 국무부 소속 관리들이었는데, 이 조직이 광주항쟁 내내 백악관의 의중을 주한미국대사관과 주한미군사령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미국이 이 조직을 통해 전두환 그룹의 계획을 가로막지는 않는다는 내용의 기밀문서들은 최근 뿐 아니라, 이미 지금으로부터 16 년 전인 1996 Journal of Commerce  지에 의해 최초로 폭로된 바 있습니다.   

어쨌든 이 조직을 통해 1980 5 7 일 전두환 군부의 군대사용 계획을 승인해 주는데 이 때의 승인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로서 전국적인 학생시위사태를 염두에 둔 것이었고, 위에 이야기한 5 22 일 승인이란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개입으로서 시민군으로 부터 광주시를 도로 탈취하기 위한 대국민 무력전투행위를 승인한다는 의미입니다.

광주학살의 핵심은 1980 5 18 일 오전 10 시부터 5 21 일 오후 한 시 경까지 벌어진 민간인 학살인데, 이 나흘 간 동원된 부대는 특전사 소속 제 3,7,11 공수특전여단 입니다. 미국은 5 7 일 포괄적의미의 군대사용을 승인하기는 했지만 이 나흘간 광주에서 벌어진 민간인 살육사건은 한미연합사 통제를 받지 않는 특전사 소속 부대를 미국측에 통보없이 파견한 것이므로 5 22 일 이후 벌어진 미국의 적극적 개입과는 다른 성격의 개입, 일종의 방조 또는 격려, 묵인 정도의 의미로 구분하여야 할 것 입니다.

미국의 사실상의 종용이나 다름없는 5.22 승인이 떨어진 바로 그 날,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 재탈환을 수립합니다. 광주재탈환 작전의 공식명칭은 상무충정작전입니다. 이 상무충정작전에 대해서는 제가 작년에 어떤 분에게 답변하기 위해 써 놓은 것이 있으므로 그대로 가져옵니다. 상무충정작전이란… 5 22 일 백악관국가안보회의의 보병사단 사용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 특전사령관 정호용을 통해 전남북지구 계엄분소장 소준열 (전투교육사령관) 에게 공수부대를 특공조로 하는 광주 탈환작전을 계획할 것을 부탁했고, 이에 따라 소준열이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에게 지시하여 수립한 작전입니다. 원래 계획단계에서는 상무충정계획이라고 부르다가, 5 25 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김재명에게 전교사에서 올라온 상무충정계획을 바탕으로 상무충정작전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고 같은 날 오후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국방장관 주영복, 육참총장 이희성, 육참차장 황영시, 수도경비사령관 노태우 등이 모여 작전명과 작전시각을 확정하게 됩니다.

이 상무충정작전에 동원된 병력 수는 총 47 개 대대 2 317 명이었고 5 개 방면에서 잔공작전을 전개했다고 백과사전에 기록되어 있군요. 공수부대로 편성된 특공조는 모두 3 개로, 동원병력은 3 공수 특공조가 13/66, 7 공수 특공조가 20/181, 11 공수 특공조가 4/33 인데 목표지점은 각각 전남도청, 광주공원. 전일빌딩 이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미국이 보병 제 20 사단에 대한 사용 승인을 하지 않았다면 상무충정작전은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다. 특전사는 지대와 팀으로 구성되어 여단이라고 해봐야 병력수가 얼마 안 되므로, 대규모 시위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중화기로 무장한 대규모 보병사단의 진주없이 광주재탈취란 애당초 불가능했다는 것 입니다.

만일 미국이 마음먹고 한미연합사 예하부대인 제 20 사단의 사용을 불허했다면 전두환은 굴복하고 말았을 거라는 거지요.

바로 이 대목에서 미국 책임론이 대두되는 것 입니다. 미국책임론이 대두된다고 해서 전두환이 씨X놈에서 개X끼로 감면되는 거 아니구요. 그 죄가 가벼워 지는 거 절대 아닙니다.

 

6 Comments
아프로벨 2012.05.26 20:26  
1980년 5월,
지금은 2012년 5월,  광주사태가 있은지 벌써 32년이 흘렀네요.

참,,,세월 빠르죠.

30여년 세월동안  아직  해명해야 하고 알아야 할 진실들이 아직도 많은데,
그당시 50대 였던 5적들이 나이가 들어 80을 넘어 망구를  바라봅니다.

5적들이  세상을 뜨기전에 과연 어떤 말로 진실을 고백하고 갈까요?
아마 다 들 무덤 속 까지 가지고 갈거라 생각합니다.

뭐,,,한마디 정도는 하고 가겠지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한세대가 흘렀네요.

아마,,,다음 또 한세대가 지나면 교과서에서 한 두줄 정도로  5.18이  기록 되겠지요.



그때까지 살아서  1980년 5월을 얘기 해 줘야 할텐데,,,,

쟈깅이나 열심히 해야겠읍니다.
나마스테지 2012.05.28 02:42  
S님.아직 심적 정리가 다 안됐나요.평소보다 과격하시네ㅎㅎ.
그 씨x놈은 역대 제일 증오하는 씨x놈임다.
엑소시즘을 거행하되 힘 센 신부님 최소 3명 필요함다.
타이락 2012.06.05 16:07  
광주사태라 불렀지만 지금은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고 합니다.
가봐야거기 2012.06.19 09:47  
현장에 있었던 저로서는~~~~~

지금 생각해도 눈물만
쇼닉 2012.06.22 15:08  
광주에서 학살이 있었나요? 학살이라면, 힘이 센 한쪽이 힘이 약한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무참히 죽이는 행위를 통상 말하지요. 나치에 의한 유태인학살, 일제에 의한 난징대학살 등. 광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때 1만2천명이다. 6천명이다. 2천명이다라는 낭설이 있었지만, 폭도와 무고한 시민의 희생은 130여명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일방적으로 학살당하게 아니라, 시가전 전투중에 사망한 경우니, 이는 학살이라 할 수 없지요. 그러니 학살 운운은 안하셨으면 합니다. 광주에서 시위대들이 먼저 전남도경소속 경찰을 4명이나 버스로 갈아 죽인 일이 있었고(이시점부터 시위대가 아니라 폭도) , 또한 폭도들이 화순, 장성등지에서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개인화기 및 중화기로 무장(이시점부터 폭도가 아닌 무장폭도), 광주의 치안을 담당하던 전남도경 소속 경찰을 무장 공격을 하여 이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는 긴급히 공수부대를 투입, 광주시민의 재산과 안녕을 지키기 위해  무장폭도들의 무장을 해제시키기 위해 진압을 시작했고, 이 과정에 무장폭도들의 저항 역시 거세, 시가전이 발생, 군경 및 무장폭도 심지어 무고한 시민까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 일련의 진실이지요.... 오죽했으면 광주폭동이 진압된 후 실시된 81년과 85년 두번의 총선에서,  광주시민들은 민정당에 두번이나 압승을 안겨줍니다. 광주시민들이 미치지 않고서 자신들을 학살한 정당을 지지하겠습니까?  87년 김대중이 귀국하여 정치적 목적으로 광주무장폭동과 영호남지역감정으로 절묘히 이용하기 전까지  전남, 전북, 광주에서 얼마나 많은 민정당출신 의원이 배출되었고, 그들이 호남지역 발전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십니까? 이것이 진실이며, 역사입니다.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셨으면 합니다. 학살이 있었다면, 광주시민들이 민정당을 지지했겠습니까? 말이 안돼죠.. 광주시민들이 그렇게 바보였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편리하게 재편하고 본질을 왜곡하는 일은 양심을 팔아 먹는 일이라 사료됩니다. 광주에서의 폭력사태는 민주주의는 무장투쟁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는 좋은 교훈이 되는 사례일뿐,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는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무장투쟁으로 쟁취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고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자꾸 부축이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자신들의 맘에 안든다고 총칼 들고 힘으로 이기려 든다면, 이세상의 질서는 유지 될 수 없고, 힘 있는 자들에게 항상 당하고 사는 세상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들이 원하는 민주주의입니까?
쇼닉 2012.06.25 17:58  
참 내가 대학다닐때, 주체사상파(주사파, 김일성주의자, NL) 운동권 선배들이 절묘하게 편집된 광주사태 영상(비디오)를 보여주면서, 광주사태를 교육시켜주시더군요. 아, 정말 저는 1만명정도 죽음을 당한줄 알았어요. 민중해방가요의 노래가사중에도 있잖아요 [ 왜 찔렀니 칼, 왜 쏘았니 총, 트럭에 싫고 어디갔니?] 김대중조차, 518진상규명하면서, 그 희생자가 폭도와 선량한 시민 다 합쳐, 136명 밖에 안돼는 것을 발표하면서 경악했잖습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개뻥이 있는데, 증거는 없고, 아무리 뒤져도 136명의 희생자 이상은 나오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발표하면서 정말 쥐귀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광주무장폭동을 너무 미화, 과장했으니까요. 그이후에도 6천명이다. 2천명이다. 근거도 없는 날조의 유언비어가 난무했습니다. 이젠, 폭도와 무고하시민 희생자가 136명이라는 것에 더이상 아무도 반박을 안하지만 말입니다.
제목